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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 시민사회와 포스트콜로니얼 조건

파레시아 2024. 10. 22. 05:34

     https://www.amazon.com/Public-Theology-Ethics-Life-World-Biopolitical/dp/1524318434

 

 

공공신학: 시민사회와 포스트콜로니얼 교육

 

공공신학과 푸코의 에피스테메

 

시민사회와 계층론에 주목하면서 브라질의 해방신학이 장차 공론장에서 드러나는 폭넓은 문화적 정의와 인종차별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한 해방의 관심을 어떻게 해석학적으로 매개할 지 아무도 모른다. 더욱이 루이 알튀세의 제자인 미셀 푸코의 신체정치학에 일반적으로 해방신학자들은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왜 그럴까? 푸코의 계보학은 해방신학자라고 해서 국가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담론과 권력관계의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어제의 억압 받던 자가 권력을 쟁취해서 억압자로 둔갑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게다가 푸코는 마르크스처럼 경제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다. 오히려 마르크스 경제학은 19세기 에피스테메를 넘어서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죽고 만다고 혹평한다. 

 

그의 선생 알튀세처럼 푸코에게서 중심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아니라 이러한 생산양식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국가기제 즉 신체정치 권력에 있다. 그리고 에피스테이론이 마치 역사 사회화된 생활세계처럼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오히려 푸코는 알튀세와 더불어 베버나 그람시 또는 벤야민에게 보다 많은 친화력을 갖는다.  그람시는 문화 헤게모니를 매우 진지하게 숙고했다.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반하는 혁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전반적인 사회기관과 제도를 이끌어가는 것은 상부구조의 계기에서 나타나는 역사블록이고, 이러한 지배는 한편에서 카리스마가 넘치는 도덕적인 리더십으로 다른 한편에선 국민들의 승인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그람시의 정치이론이다. 푸코 역시 국가 지배 방식 (Governmentality)에서 마키아벨리의 정치론을 높게 평가한다. 오해는 하지 말자. 마키아벨리는 무슨 정치 모리배의 아버지가 아니라 공화적 민주주의를 매우 심도있게 반성했고, 이로인해 루소로부터 탁월한 민주주의자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람시나 푸코는 시민사회를 방어하는데 공동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해방신학이 여전히 종속이론을 패러다임으로 고집하는 한, 공공신학으로의 전환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앞서 두크로가 서평을 한 프란츠 힌겔라마르트는 결이 다 르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이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해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저서인 『죽음의 이데올로기 무기』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물신을 숭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죽음의 문화를 일으키는 이데올로기적 무기라고 비판한다. 

 

상품의 물신으로부터의 해방? 지난한 이야기지만 꿈까지 접 필요는 없다. 힌켈라마르트는 푸코의 지나친 권력관계를 후기 자본주의 경제분석을 통해  비판적으로 보충될 수 있다. 

 

여전히 종속이론인가?

            

사실 종속이론은 노동과 자본의 변증법이 아니라 해외 시장 매커니즘의 의존관계에 더 주목을 한다. 종속이론에서는 중심부나 주변부 안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연계 과정이나 공론장의 계층구조에 대해 거의 주목을 하지 않는다. 관료제나 사회구성에 대한 분석 특히 인종과 섹슈알리티 그리고 젠더의 문제를 찾아보기 어렵다. 주변부의 저발전만이 계속 심화될 것이다. 

 

종속이론의 교부격인 안더 프랭크는 이미 종속이론을 포기하고 세계체제론에서 유럽중심 주의를 벗어나 글로벌 비판적 관점을 취한다. 13세기 이슬람의 카이로의 경제는 이미 상업 자본주의 성격을 가지며 유럽을 앞서있다. 경제는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이루어지며 일방적으로 종속되거나 예속관계가 경제적인 삶에서 결정되기가 어렵다. 

 

앞서 언급한 힌켈라마르트는 신자유의 경제원리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종속이론의 한계를 후기 자본주의 상황에서 새롭게 갱신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글로벌 경제 시대에서 연방국가의 역할에 그는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그는 후기 자본주의에서 속류 마크스주의 자들처럼 국가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는다. 국가는 단지 지배계급의 이익과 헤게모니를 만족시키는 수단이 아니다. 국가와 의회 민주주의 제도안에는 다당제도가 있으며 소통의 자유와 담론의 민주주의가 다원화된 사회안에서 작동한다아무도 국가의 역할을 일방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시민사회와 포스트콜로니얼 교육

 

브라질 출신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은 해방신학에서 교육의 문제를 다루는데 고전에 속하고 현장운동에 기폭제를 마련했다. 프레이리는 어린 시절 굶주림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자신의 교육학에 투영한다. 가난과 궁핍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전문 교육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가난한 자들과 연대의 교육은 사회 체제에대한 문제제기 방식을 통해 수행된다. 프레이리는 그의 교육학에서 학제적 소통과 현장교육의 상호관계를 대화, 소통 그리고  참여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전개한 고전적인 실례에 속한다.

 

물론 브라질의 경우 프레이리의 빈곤에 대한 분석은 과거에 속하고 충분하지 못하다고 비판될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계급과 신분이 교차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항의 대립은 경제발전의 수준에서 점차 사라져 가지만, 오히려 구조적인 지배 체제와 상징적 폭력으로 각인되고 더욱 더 은폐 된 채로 사회와 문화의 계층안에 침전된다.

 

골비처가 <자본주의 혁명>에서 말한 것처럼 밑으로부터의 계급투쟁보다는 위로부터의 계급투쟁 즉 국가로 부터의 지배정치가 더욱 더 확고해지는 것이 후기 자본주의의 성격이며 신 식민주의의 조건을 형성한다. 중심부는 주변부로부터 매우 유리한 계약과 하청 그리고 무역협정을 맺을 것이고, 선진적인 테크닉과 자연과학의 진보를 통해 싼 값으로 수입한 원료로 제조하면서 여전히 높은 관세와 고가의 수익을 이끌어낼 것이다.

 

반면 주변부의 정치 엘리트와의 동맹을 통해 철저히 이중, 삼중의 모호한 문화 지배구조를 만들어 간다. 중심부의 교육을 상품화하고 미국이나 유럽의 유수한 대학의 졸업자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우대받는 교육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서구에서의 전문적인 교육이나 경력이 잘못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요점은 이것이 주변부의 문화지배로 정치화될 때 심각한 포스트콜로니얼 문제가 공론장에서 발생하는 것을 지적한다.

 

프레이리가 뉴욕을 방문하고 교육학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가 한 말은 여전히 인상 적이다. 모든 것이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억압의 다양한 차원과 필드에서 계급은 무시될 수 없다. 헤겔과 후설을 추종하는 프레이리의 현상학적 방법은 그의 교육학이 신분, 인종. 젠더, 그리고 섹슈알리티의 문제를 향해 열어놓을 수 있다. 사회적 담론이 주체를 형성해 나간다. 계급과 신분의 투쟁은 공론장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다.

 

미국의 대법원의 클레렌스 토마스는 흑인이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다. 미국에서 흑인계층의 분화와 격차는 상상 이상이다. 인종, 계급 그리고 신분은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계보학적으로 파악되지 않고는 어떤 신학이나 시민사회 운동은 공공선이나 정의를 위해 가동화되기 어려울 정도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제임스 콘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급 이전에, 시민 이전에 나는 흑인으로 태어났고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이다. 서구 신학에 흑인이 등장 하는가? 이러한 콘의 말은 평생 헬무트 골비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 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일으킨 혁명은 유럽 백인 기독교인들이 만든 문명의 대사건이고 인종주의로부터 돌아서지 않는 한, 서구신학에 희망은 없다. 

 

그래서 골비처가 그의 제자들에게 <자본 1>의 본원적 축적에서 마르크스가 중상 자본주의 시기에 빚어진 모든 식민주의 정책에 기독교적 성격이 있다는 비판의 소리를 경청하고 메타 노이아의 자세를 취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필자의 첫 번째 박사과정의 제자는 흑인 신학자 레이몬드 카 (Raimond Carr)교수이고, 그는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에서 “칼 바르트와 제임스 콘-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크바르트 관점에서”라는 논문을 마치기도 했다. 이후 제임스 콘은 감사의 표시로 필자에게 『린칭나무 』란 참으로 슬픈 책을 보내 주었다. 바르트 신학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전한다. 흑인신학과의 관련을 가지고 미국에서 살았지만 필자는 흑인이 아니다. 

 

공공 지성인과 공공선 거버넌스

 

시민사회에서 교육은 사회계층을 가르는 중차대한 역할을 한다. 프레이리와는 달리 필자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교육이 계급과 신분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해방신학과 방향을 달리한다. 

 

피라미드처럼 세워지는 사회계층의 위계질서에서 상위권은 단연 전문교육을 받거나 유수한 대학의 학위 증명서를 가진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과 교육은 관료제의 기초가 된다. 관료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공공신학의 주제로 등장한다. 공공 지성인은 관료제에 포섭 되기보다는 시민 사회 안에서 공공선 거버넌스를 향한 새로운 사회구성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일찍이 칸트는 정치사회를 물들이고 있는 권력에 대한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칸트가 꿈꾸던 정치와 사법개혁은 도덕과 책임성을 갖춘 도덕 정치가에게 가능한 소명이다. 개혁에 헌신하는 도덕 정치가는 신중한 정치적 식견과 판단으로 훈련되어야 하고 개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이것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마다 전략적으로 입장을 바꾸는 카멜레온적 정치 도덕의 기술과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중한 지혜(Phronesis)가 칸트의 사법 개혁 정치론에서 등장한다. 차이가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중한 지혜가 중용의 삶을 취하고 행복에 이르는 길 이라면, 칸트에게서 그것은 개혁과 혁명이라는 정언명법을 완수하기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바울의 “급진적인 악” 을 정치개혁과 혁명에서 발전시킨 바울의 후예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를 정치이론으로 접합시킨 한나 아렌트의 통찰은 탁월하다.

 

툭히 칸트의 코스모폴라탄 원리와 식민주의 비판 그리고 환대의 윤리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민주주의 교육을 위한 장을 열어놓는다. 이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제의 식민지를 칭송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극우파 학자들에게 근대성이란 일제가 선물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란 것을 경고한다. 어떻게 일제 파시즘이 근대성을 상품으로 선물할 수 있는가?

 

대안적 근대성 이론은 포스토콜로얼 교육론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더 이상 시민사회를 마르크스처럼 부르주아 사회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미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시작되고 또한 로마 공화제 민주주의에서 시민사회는 참여 민주주의와 공공선 거버넌스와 연결 되어 있었다.  마르크스 이론의 패착은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문제틀을 고고학적 해명을 하지 못한데 있다. 자본가는 시민이 될 수있지만 시민이 자본가는 아니다. 

 

고고학적 해명을 통해 공공신학은 서구 근대성의 다양한 철학과 정치이론을 검토하고 (로크, 스피노자, 루소,칸트) 서구의 근대성이 영국의 식민주의를 통해 존 슈트어트 밀의 자유방임주의 자본주의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미국을 지배하고 세계를 비극으로 몰아간 것을 분석한다.   

 

시민사회의 공론장은 특권층이나 정치적 사건을 논의할 때 교육, 신분적 특권, 문화 그리고 도덕이라는 틀에서 본다. 메스 미디어의 시뮬라시옹이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 하지만, 이항의 대립이라는 틀로 공론장은 콘트롤 되지 않는다. 후기 식민지 사회에서 이항의 대립정치는 사회 진화론과 생존투쟁에 기초된다.

 

사회학적으로 민중/민족/인종의 복합적인 구조가 사회 진화론과 관련하여 어떻게 한국문화와 사회에 어떻게 깔려 있는지 분석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민족은 인종이 아니라 시민사회를 기초로 공공선과 다문화 그리고 타자의 인정으로 가는 개념이다. 시민/민족주의와 신중한 연대 민주주의가 어떻게 일반화된 역사가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나간 자들의 유효한 역사에 주목하고, 담론과 권력관계를 통해 배제된 희생자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 까?  

 

이런 점에서 공공신학의 인식론은  포스트콜로니얼 사회에서 다차적인 공론장들에서 밀려나간 자들에게서 불연속성, 파열, 변형 이라는 이들의 유효한 역사에 주목한다. 그러나 쉽지가 않다 

 

존 롤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 서 있는 마이클 샌덜과는 격이 다르다. 롤스는 미국의 정치 사에서 루소와 칸트의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미국의 사회 민주주의를 여기서부터 시작 하길 원한다. 바이든 정부의 미래는 롤스의 정의론과 더불어 노암 촘스키, 코넬 웨스트에게 귀 기울려야한다. 그러나 바이든은 버니 샌더스와 협치를 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미국 시민사회의 결정적 약점과 패인은 어쩌면 공공교육에서 찾아질 수 있다. 미국의 교육 제도는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참 뒤떨어진다. 시민들의 성숙한 민주주의 교육과 비판 의식을 함양하기엔 너무할 정도로 가볍다. 원전 텍스트를 수업시간에 충분히 소화해내는 지적인 능력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앵무새처럼 말은 참 잘한다. 뭐 하나라도 잘하면 되겠지 하는 위안으로 삼아본다. 참을 수 없는 지식의 가벼움과 무지함은 시민사회와 연대 민주주의에 해로움을 준다.

 

미국의 제국을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한 노르웨이의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이 그래도 미국의 공화주의 민주주의와 루소의 사회 계약론의 전통은 아름답다고 한 말이 무색해진다. 미국의 정치와 문화가 살 길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동안 잘못 해석해온 로크를 다시 들여다  봐야 하고 존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이것은 공공신학이 시도하는 고고학적 담론해명에 속한다.

 

마이클 샌들은 너무 가볍다. 최상의 플루트는 최고의 연주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최선의 정의라고 하는 그의 목적론적 도덕론에서 필자는 참 씁쓸함을 느낀다. 아무도 훌륭한 연주자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음악 교육을 받을 만한 집안 환경과 받쳐주는 사회적 배경이 있다. 

 

훌륭한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음악적 재능이 있어 보이면 격려의 차원에서 플루트를 선물할 수 있지 않은 가? 이것은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의 입장을 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정의는 공정함이 된다. 나는 존 롤스에게 성서적이며 예언자적인 윤리의 맛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함의 정의는 자기를 실현해나가는 존재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긍정의 정책(affirmative action) 담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공선 경제이론 (오이코노미아)은 샌덜이 아니라 오히려 롤스에 근접한다.  

 

공공선 거버넌스는 미국의 정치가 돌아가야 하는 생활세계이고 제헌적 민주주의의 원류가 된다. 그러나 미국을 지배하는 정치사상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 그리고 여기에 결부된 식민주의의 첨병인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미국식 백인 인종주의가 출몰한다. 이것은 세계사적 비극을 가져온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사회 생물학과 통섭이라는 파시즘 생물학이 기승을 불인다.

 

더 큰 비극은 이러한 인종주의 진화론이 이전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이른 바 민족 엘리트들을 지배한다. 오늘날 인종 사회주의나 군주제를 환호하게 만드는 정치 낭만주의는 포스트 콜로니얼의 시민사회의 정치학에 커다란 장애로 등장한다. 진정한 민족이념은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공론장에서 시민들의 성숙한 정치의식에 기초가 되고, 하위 계급과의 연대로 특징된다. 정치 엘리트들의 특권에 의심의 해석학이 주어진다.

 

바르트와 루소 그리고 집단주의

 

헤겔과 마르크스는 시민사회를 부즈주아 사회로 파악했지만, 루소는 일반의지를 통해 정치사회로 파악했다. 부르주아가 시민이 되지만 시민을 부르주아와 동일시 할 수가 없다. 루소는 의회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 사이에 중요한 정치적 반성을 발전 시켰고, 신학에서 칼 바르트는 루소를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서 진일보 시켰다. 국가는 시민사회에 의해 비판적으로 견인 되어야하며 교회는 시민사회와 더불어 간다. 바르트의 관료제 비판는 베버의 한계를 넘어선다.

 

<로마서 1판>에서 나타나는 바르트와 레닌주의와의 논쟁에서 국가와 혁명은 프롤렐타이아트 독재로 가야하는지 아니면 파리꼬민을 루소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것인지가 논의의 주제로 등장할 수 있다오늘날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마르크스-레닌의 비신화론이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파리 꼬뮌에 대해 영국에서 집필하고 파리에서 일어나는 계층과 계급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알베르 소불(Albert Soubol)같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조차도 이 문제를 다룰 때 알렉시스 토크빌을 추종할 정도이다. 마르크스는 러시아의 미르 농촌 공동체 사회가 공산주의로 직접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고 지지했다. 그렇다면 프로렐타리아트 독재는 의미가 없다. 마르크스는 레닌과 다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 1>에서 이러한 차이를 직시하고 있었다. 바르트는 <국가와 혁명><무엇을 할 것인가??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혁명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프리델 마르크바르트가 인터뷰에서 밝히듯이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에서 사용되는 연대성이란 용어는 바르트가 처해있던 사회주의 운동의 상황에서 나온 것이며, 바르트는 최초로 교의학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혁명을 개념화한 신학자였다.  

 

바르트가 예견한 것처럼 소비에트는 처참한 관료들의 독재로 막을 내렸고 국가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섰으며 결국 러시아 인종 민족주의 지배체제로 막을 내렸다. 그런가하면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통제와 감시가 이루어지는 중국에서 시민사회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 이들은 그토록 시민의 자유와 창조성 그리고 도덕적 태도를 두려워할까? 권력에 대한 합리화가 기존의 권력지배 체제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트럼프 시절 무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10여년 간 중국 항주 절강 대학의 기독교와 중국문화 연구소와 교류했다. 동양의 캠브리지로 알려진 유서깊은 대학이다. 나름대로 중국의 인문, 사회 그리고 종교분야에 대한 전문가들을 이곳에서 만나고 강연도 하고 소통을 했다. 왕지성 교수는 절강대학 기독교 중국문화 연구소 소장인데 북미와 유럽의 학문을 소개하는 학자이며 신학과 비교 종교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

 

그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중국의 집단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앞선다. 우리는 중국의 집단주의 문화에서 자랐고 공자와 마르크스를 분리시키지 않고 이러한 문화적인 토양에서 기독교를 선별적으로 수용한다. 시민사회와 공론장은 지난한 문제이다.” 

 

그래도 여전히 물음이 남는다. 중국의 집단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에 참여할 때 일어나는 마찰은 어떻게 해결이 되나? 이것은 단순히 정치 이데올로기 충돌보다는 문화가치의 충돌로 드러나야 하나? 글로벌 관계에서 공정함으로서의 정의는 무엇이며 글로벌 시민 사회론은 어떻 게 추구될 수 있을까? 공공선 거버넌스가 중국의 집단주의 문화 이데올로기로 대처될 수 있을까?

 

공공신학과 포스트콜로니얼 제국

 

해방신학과는 달리 푸코의 담론이론과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론 그리고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포스트콜로니얼 이론가들에게 매력적이다. 포스트콜로니얼 이론가들이 일제히 해방신학을 공격하는 것은 글로벌 제국 (Empire)의 상황에서 중심부/주변부라는 이항의 대립으로 단순하게 나눌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국내의 모든 문제를 외부의 제국주의 문제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제 1세계 안에 제 3세계의 현실이 존재한다. 제 3세계 안에 여전히 중심부의 권력 엘리트 층과 결탁된 자들의 특권 지배가 존재한다. 중국, 대만, 싱가포르, 브라질이나 대한민국 경우의 경제적 발전은 종속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세계체제 시스템은 중심부-세미 (semi)주변부-주변부 등으로 마치 열도처럼 배열되어있다. 종속 이론적 이항의 대립으로는 세계체제의 역동성을 파악하기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마이클 하트와 이탈리아 사회주의 이론가인 안토니오 네그리가 공저한 『제국』 (Empire)은 푸코가 말한 국가 지배방식이 어떻게 세계화가 되는지, 그리고 그람시의 헤게모니가 연방 국가를 넘어서 제국의 지배 방식에서 드러나는 것에 관심한다. 유엔은 코스모폴리탄의 정의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제국의 지배를 위해 존재 하는가? 

 

답변하기에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제국의 이론가들은 유엔의 정책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글로벌 제국의 지배 아래서 연방국가들의 시민들의 신체를 규율하고 조절하는 ‘비오폴리틱’(biopolitics)이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공중 보건이나 특히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콜로니얼 제국은 우쿠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패권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제국의 동맹으로 현상하며 나토(NATO)와 브릭스 (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로 이분화된다. 정치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동맹블록에서 제국의 형성은 시민 사회의 공론장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공공신학은 공론장과 시민사회에서 공공선과 정의 그리고 타자와의 연대를 추구하는 인정정치와 윤리적인 기획에 주목한다그리고 이것은 제국의 동맹에서 나타나는 포스트콜로니얼의 조건을 사회과학적으로 그리고 국제 정치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러나 공공신학의 윤리는 전통적인 윤리와는 많이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주어진 삶과 신체에 주목한다. 인간의 삶은 특수한 상황과 장소에 주어진 것이다. 공공 교육론 역시  사회계층의 다양한 영역들의 분화와 전문화 그리고 위계질서에 주목하고 무엇 보다도 관료제 비판과 국가의 신체 정치학을 주요 ㅋ테마로 삼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진 삶에 연관되어 해석되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assumptio carnis)— 복음의 신체적 차원을 말한다. 복음의 의미는 하늘에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 말씀의 육체성에서부터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숭배적 구조나 신자유주의의 시장 절대주의는 노동자의 의식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물화의 현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물화의 현상에서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사회 문화적 습속(habitus)이 형성된다. 이것을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 디외는 습속의 현상학으로 부른다. 

 

의식과 신체의 상관관계는 비오폴리틱에 주목한다. 인간의 신체는 정치 지배의 통제수단으로 전락한다. 섹슈알리티, 인종 카테고리, 젠더의 이분화, 더 나아가 공공보건에서 인간의 신체는 엄청난 윤리적 함의를 갖는다. 그리고 국가의 관료주의 정책이 개입한다. 루카치적인 계급의식으로는 해결되기가 어렵다

 

이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포스트콜로니얼 문제틀을 공유한다.  포스트콜로니얼의 조건은 외부에서 찾아지기 보다는 시민사회안에서 어떻게 각인되고 계층화되며, 누구의 담론이며 누구의 헤게모니인지에 비판적인 주목을 한다. 왜나하면 더 이상 시민사회와 글로벌 정치 경제의 질서와 동맹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중요한 공론장에 속한다. 공공신학은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까? 시민사회의 성격과 생활세계 (문화와 생태학을 포함한)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주어진 삶의 의미가 반성 되고 사회의 안전망으로 부터 밀려나간 하위 계급들과의 윤리적 연대가 모색될 것이다자연의 생은 오늘날 가장 빈곤한 존재로 전락한다. 생태학적 위기와 기후변화로 인한 시스템의 파괴는 자연과학과 기술 합리성의 문제를 부각 시킨다. 사회의 이행은 기술진보로 나타나지만, 기후 변화와 생태적인 삶의 시스템의 파괴로 인해 생의 보존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기술 파라다임이 새로운 차원에서 요구된다.

 

하나님의 지배방식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지배방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 (Oikonomia)는 특히 경제의 분배적 정의와 더불어 희생자에게 회복과 배상을 해주는 차원을 담는다. 그리고 가해자를 메타노이아로 인도하고 용서의 은혜를 통해 새로운 인간의 주체로 거듭나게 돕는다. 이것은 화해의 복음의 정수이기도 하다.  분배와 회복의 정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프로렙시스적인 기대에서 생생한 현재로 들어온다.  

 

공공 지성인으로서 신학자나 목회자는 하나님의 도시가 시민사회로 스며 들기를 바랄 것이다. 그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예수의 기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기도의 실현을 위해 교회는 시민/하위계급과 연대 하면서 공공 지성의 요람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것이 단순한 꿈일까? 이러한 유토피아적 갈망은 어렵 더라도 꾸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믿음, 소망, 사랑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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