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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사회학과 생태학

파레시아 2024. 11. 28. 08:54

생태학을 사회학적으로 다루기

 

생태학은 그리스어의 오이코스 (가계경제)에서 유래하며 지구의 모든 구성원들에 대한 오이코스 연구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환경세계의 상호 관계와 의존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에른스트 헤켈).  생태학은 과도 인간주의(over humanism)나 남성줌심주의 문화와 다르다. 이것은 생에 대한  유기체적 중심의 견해를 말하며 에코 시스템을 통해 지구의 온전성을 존중하는 가치를 부각시킨다.  에코 시스템은 유기체의 공동체가 외부의 환경세계가 어떻게 생태학적 단위에서 상호작용을 하는지를 분석한다 (Lincoln, et al,, A Dictionary of Ecology, 1982).  생태학은 상호 의존성의 네트워크에 주목하며, 시민사회와 생활세계 (생명계)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1970년 지구의 날의 설정은 사회학자들에게 사회적 요인과 환경문제의 연관성에 주목하게 했다. 고전적으로 뒤르캠이나 베버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들의 사회이론에 환경과 자연의 문제를 담고있다.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허버트 스펜서는 생물학적인 진화의 영역을 여과없이 사회와 문화의 영역으로 도입하고, 그의 악명높은 사회 진화론을 대변했다. 스펜서에게서 사회진화는 점진적이며, 교육이나 사회 개혁을 통해 변형되지 않는다. 삶의 경쟁과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사회의 발전에 적용 되었다. 사회 진보를 향한 길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귀결이다. 

 

다윈주의적 생물학의 결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개인과 사회발전의 영역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힌디. 이것은 인류학의 영역에서 특히 프란츠 보아스를 통해 시작되었다. 문화 다원주의를 통해 생물학적 결정주의는 과학적 인종주의로 거절 당했다. 

 

그러나 환경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1970년대 들어오면서 새로운 에코 파라다임과 더불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환경 사회학은 사회와 자연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환경자원에 미치는 사회적 요소들을 분석하고, 환경위기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검토된다. 이것은  국가와 정치 그리고 환경정책 그리고 환경애 대한 태도와 신념과 가치 등에 주목한다, 소비와 생산의 상호관계나 자연과 사회의 영향에서 사회와 환경의 변화에서 드러나는 기술의 역할은 글로벌 차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환경규모와 사회 제도들의 관계는 사회학의 중심요소로 들어온다 (John Hannigan, Environmental Sociology, 2nd ed. 12)

 

환경 사회학은 인구 구성과 제도와 조직 그리고 과학과 기술 또한 위생과 사회 불평등과 환경 정의와 삶의 지속 가능성 등을 연구한다. 이것은 인간중심적 사회학의 한계를 비판하고 사회와 자연환경에 대한 시스템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인간은 에코 시스템의 일부이며, 다른 종들과 더불어 공동으로 진화한다. 삶은 생명망안에서 (web of life) 심비오시스 즉 상호 의존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과 지성 그리고 기술혁신에 주목함으로써 환경 사회학은 에코 페미니즘이나 자연 중심적인 낭만주의 세계관과는 거리를 둔다.

 

1970년대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네스 (Arne Naess)는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피상적 생태학과 자연중심적인 심층 생태학을 구분했다. 여기서 자연중심적이란 말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간을 생명의 웹에서 하나의 특별한 지위를 본다. 심층 생태학은 종교적이며 다양한 영성으로 발전된다. 심층 생태학은 보다 깊은 문제를 직시하며 파라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Capra, The Web of Life, 7).

 

흥미롭게도 아르내 네스와 같은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스피노자에게 주목을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으로 구별되지만 신/자연은 사고와 연장이라는 양테와 더불어 코나투스 (삶의 보전을 향한 열망과 힘)으로 특징된다. 스피노자는 시간의 관점과 영원성의 관점을 구분하고, 전자의 관점에서 모든 살아있는 생의 동등성을 보았고,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다. 영원성의 관점에서 코나투스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자연을 직관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지적 사랑은 무우주적인 사랑으로 표현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의 연대와 돌봄으로 나타난다. 심증 생태주의 자들은 스피노자의 콘나투스 이론을 자신들의 모든 존재들의 자기실현으로 전개하고 생태학적 자아와 생중심적인 평등주의를 부각 시켰다.         

 

여기서부터 사회 생태학과 애코 페미니즘이 연관된다. 에코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가부장적 지배를 모든 지배와 착취의 원형으로 본다. 자연의 착취는 여성의 착취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여성은 자연과 동일시된다. 여기서 페미니즘과 생태학의 연관성이 등장히며, 여성의 경험적 지식을 실재에 대한 생태학적 비전의 근원으로 본다 (Spretnak, "An Introduction to Ecofeminim," Bucknell Review, 1993).

 

그러나 사회 생태학은 자연의 지배방식과 착취를 사회 경제적 구조와 기술에서 사회 조직의 지배 시스템을 본다. 가부장제도나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는 지배방식의 시스템에 들어간다 (Eisler, The Chalice and the Blade). 나는 스피노자를 사회 생태학의 관점에서 그의 관계론적 철학을 재해석한다. 심층 생태주의자들이 모든 존재들의 자기실현과 생태학학적 자아를 힌두교의 아트만과 브라만의 연합에서 종교영성적으로 파악한다면, 나는 스피노자의 무우즈적 사랑을 자연에 대한 환경 심정윤리와 돌봄으로 전개한다.   

 

프리조프 카프라는 생태학을 네트워크로 파악하고, 에코 시스탬을 이해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는 생명의 망을 살아있는 시스탬에 대한 연구로 발전시켰다.

 

카프라는 자연 과학자이며 그의 시스템 생물학의 접근애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져있다. 그러나 나는 공공 신학자이며 환경사회학을 생의 출현이론 (프리고진, 스태판 굴드, 리차드 르온틴)과 세포의 오토포이에시스를 사회학의 관점에서 발전시킨다. 카프라의 난점은 마투라나와 발래라로 대변되는 산티아고 학파가 후설과 머릴로 퐁티로 연결되는 현상학적 생물학을 다루지 못한다. 더우기 진화를 다룰 때 가이아이론에 만족하고, 다윈의 진화론과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 생물학을 둘러싼 굴드와 르온틴의 가열찬 논쟁을 전혀 언급하지 못한다.      

 

르온틴의 변증법적 생물학에 의하면 인간과 환경은 상호작용을 통해 공동으로 생태학적 구성을 만들어간다. 인간의 혁신적 능력은 여전히 생태학적인 시스템에 의존하며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사회와 환경의 변증법적 관계애서 유기채의 활동과 실천은 매우 중요하다. 경제 성장은 환경과의 조화로운 관계 안에서 고려된다. 환경 사회학은 일차적으로 생물학적인 네트워크와 촉매의 활동에 주목하며, 생의 자기 생산성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생: 오토포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autopoiesis)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의 자기 (auto)와 만듬 (poiesis)의 합성어이며, 자기조직의 시스템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생물학과 사회 그리고 종교의 영역에서 교차되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칠레의 훔베르토 마투라나는 이 용어를 만들어 내고 어떻게 세포들이 순환구조의 산물이 되는 지를 설명한다. 이것은 세포의 순환적인 재생산의 개념을 말한다 (Maturana, “Autopoiesis.” In Autopoiesis: A Theory of Living Organizations, 21-3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실천은 도시국가의 삶에서 자기를 실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entelechy) 목적을 포함하는 행동을 말한다. 포이에시스 (Poiesis)는 만들어내는 산물을 의미한다. 마투라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autopoiesis란 합성어를 통해 가교를 놓는다.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서 이 개념을 유기체의 폭넓은 개념으로 확대시컀다. 그는 머릴로 퐁티의 지각과 몸의 현상학을 수용하고, 사회 시스템의 다양한 실제들을 포괄했다 (Varela, “Describing the Logic of the Living,” in Zeleny (ed.), AutopoiesiS, 36-48).   

 

이러한 생물학의 리서치는 루만의 시스템 사회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데, 더 나아가 루만은 훗설의 현상학을 여기에 접합했다. 훗설의 의식의 의도성 (noesis)과 의미 영역(noema)의 상관관계는 이제 사회 시스템이론으로 통합된다. 루만에 의하면, 후설은 사이버네틱 이론을 철학적으로 유용화하고, 자기생산적인 시스템의 작동을 인식론적으로 파악한 급진적인 철학을 보여준다 (Luhmann, Die neuzeitlichee Wissenschaften und die Phänomenologie, 47).

 

그러나 루만은 생활세계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명을 생테적인 환경과 더불어 충분히 검토 하지 못했다. 나는 생활세계를 현상학적으로 해명하고 환경 사회학의 기본틀로 전개한다

 

생활세계: 현상학적 해명

 

후설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당대 자연과학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와 학문의 위기를 진단했다. 이러한 위기는 17세기 갈릴레오와 뉴톤의 근대 과학혁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자연과 세계에대한 수학화로 표현된다. 근대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1564-1642)는 역사, 사회 그리고 자연 (세계의 복합성)의 전체관계를 기술지배와 수학공식으로 환원 해버렸다.

 

자연의 책은 수학의 언어로 씌여졌다이것은 경험과 관찰에 기초한 갈릴레오의 자연철학 (물리학)의 새로운 방법론이였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수학의 인덱스로 환원된다. 예를들어 모양이나 크기나 위치나 숫자 등과 같은 일차적인 특질들은 수학적으로 표현되지만, 이차적인 특질들 (색깔, , 따뜻함, 냄새)은 수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가 없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수학으로 표현될 수 없는 이차적인 자료들을 감각적인 신체에 만 있는 텅빈이름으로, 즉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 , 혀와 코를 제거해버리면 이차적인 특질들은 사라진다. 색깔의 성질은 간접적으로 파장의 길이로 환원함으로써, 그리고 따뜻한 성질은 간접적으로 전자나 원자나 분자의 움직임으로 환원함으로써,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수학의 형식주의를 통해 세계는 객관적인 실재로 완벽하게 설명되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과학이전의 세계의 경험  즉 생활세계는 과학적 세계에 의해 단순한 환상으로 폭로된다. 수학적인 모델만이 전적으로 객관적인 실재인 자연 세계를 대변하는 기획으로 드러나며, 이것은 자연과 세계에 대해 수학공식으로 파악한 근대의 건설 프로젝트에 속한다. 자연의 수학화는 자연에 대한 경험과 관찰을 수학적인 용어로 번역하기보다는, 수학모델을 통해 살아있는 자연의 생을 대변하고 지배하며, 생활세계의 풍부한 의미(전통, 문화, 역사, 사회 등)는 사라진다. 더욱이 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풍부한 생활 세계에 대한 경험은 이제 수학공식의 인덱스로 포함된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데카르트(1596-1650)에게서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은 철학적으로 마음과 물질의 이분화된다. 세계에 대한 기계론적인 견해가 태동하고, 이후 아이작 뉴턴(1642-1727)의 물리학에서 자연은 법칙에 따라 작동되는 기계개념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정점에 달한다. 수학은 이러한 자연기계를 예측하는 법칙을 표현한다.  

 

그러나 후설은 세계의 수학화라는 근대자연과학의 환원주의에 저항한다. 그의 생활세계 개념은 기술지배에 종속되지않고, 세계와 환경의 지평을 제공하는 선험적인 아프리오리로 나타난다.  오히려 이것은 역사적 과정와 사회구성안에서 드러나는 부식과 변질에 대한 책임적인 비판의 근원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변질과 부식은 전통의 침전에 붙잡혀있는 편견과 불명료함으로 인해 발생하며, 인간을 관계의 총체성을 향한 해방의 기획으로 안내한다. 생활세계가 선택적 친화력과 내재적 비판의 근거가 되며, 해방의 책임적인 기획은 인정, 공공선에 기초한 거버넌스, 민주주의 지배와 다원주의적 가치체계를 지향한다.

 

생활세계이론은 지식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지적하며, 인식론적 문화는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콘텍스트에서 서로 다르게 구성된다. 생활세계는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에서 다르게 나타나지만 각각의  문화에서 이해와 존재의 일반구조로 작동된다.

 

더 나아가 루설은 생활세계구조를 생물학의 지평으로 확대시키고, 생물학을 생의 원초적인 학문으로 수용했다. 생활세계 구조는 인간존재에 대한 일차원적인 이해를 거절하며, 이러한 편협한 이해를 공동진화의 복잡성의 모델에 재설정할 수가 있다. 생활세계와 생명망은 통합된다. 

 

자연의 수학화를 넘어서서 생활세계는 기술에 통제된 자연이 아니라 생명계의 네트워크과 복잡성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출현에 대한 함의를 내포한다. 역사와 사회가 생활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고 해석학적인 대화와 소통을 통해 문화세계를 풍부하게 한다.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한 접근에서 생태계는 생명계 (나는 자연에 대한 생활세계를 생명계로 표현한다)의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협력과 매개 그리고 창발성의 근거로 나타난다. 생명계는 열린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소산구조와 더불어 들뢰즈와는 달리리좀의 뿌리적 연결망을 토양 속의 균사와의 공생관계나 나무의 성장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생활 세계는 리좀과 상호관련되는 급진성과 열린 이해의 지평 그리고 다른 전통과 문화들에서 나타나는 기능적인 차이와 분화들을 인정하는 현상학의 생의 원리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생활세계를 환경 사회학의 토대로 파악한다. 자연과 의식은 생활세계안에서 갈릴레오 처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피노자처럼 연결된다. 살아있는 몸과 환경의 지평은 복합적인 삶의 연결망을 의미하며 다양한 경험의 양식들이 나타난다. 살아있는 몸은 환경지평과의 연관에서 습관과 적응을 통해 구조화가 된다. 이런 점에서 후설은 스피노자를 자신의 현상학안으로 수용했다. 후설은 인간의 의식과 자연의 생을 묶어주는 생활세계를 전적타자인 하나님과 동일시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활 세계안에 들어와있다. 생활세계로의 복귀는 기술적 합리성과 정보 존재양식에 대해 내재적 비판의 차원을 갖는다.  

 

후설의 현상학과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철학

 

후설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자신의 현상학에서 충분히 해명하지 않았다. 나는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구분에서 코나투스 이론에 주목하고 모든 생의 자기보전과 지속의 열망과 능력을 생의 현상학으로 발전시킨다. 심층 생태주의자들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범신론적으로 사유한 것이 아니라 유대적 유일신론의 틀에서 소산적 자연안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절대 의존성을 고려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은  하나님의 두가지 성품, 즉 사고와 연장 안에서 살아가며 의존된다. 그리고  이들의 생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코나투스가 추동력으로 나타나며, 인간의 감정과 지성은 하나님을 직관하고 합일하는 지적 사랑의 단계로 잔행된다.  이것은 중세 유대철학의 거장 모제스 마이오니데스의 신을 지성으로 파지하는 신비주의의 영향으로 볼 수가 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1) 일시적인 자연적인 대상들은--인간이든지 사물이든지 간에-- 시간과 지속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2) 일반적인 양태들은 소산적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들이지만 영원성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3) 유한하고 일시적인 존재들에 대한 사랑은 비적합한 지식 즉 경험에만 기초된다. 일반양태들에 대한 사랑은 이성에 기초한다. 그러나 하나님/자연 (눙산적 자연)에 대한 사랑은 직관에 기초한다. 직관은 하나님/자연에 대한 매개되지 않은 직접적인 파지를 의미하며, 이러한 직관적 파지에서 인간은 진리를 확신하고 느낀다 (Spinoza and Deep Ecology, 97). 

 

이러한 직관적 사랑을 통해 인간은 소산적 자연안에서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상화 의존성을 느끼고 인식하며, 존재자들의 평등성과 무우주적 사랑인 심정윤리를 실천한다. 후설은 <이념 2>에서 의식의 현상을 넘어서 신체를 현상학으적으로  반성하고 신체상호성에서 공감의 윤리과 생활 세계이론을 발전 시켰다.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철학에서 코나투스와 존제자들의 동등성 그리고 무우주적인 심정윤리는 문화적인 의미에서 생홯세계를 생태계로 확장시켜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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