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의 야누스 얼굴
제국의 브로커
우치다 준의 <제국의 브로커>는 식민지 근대성을 정착민 일본의 활동에서 본다. 그리고 심지어 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의 삶에 비교하려고 한다. 자신의 접근방식을 포스트콜로니얼로 부르고 싶어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우치다 준의 접근을 문제틀 한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포스트콜로이얼 접근은 정착민에 대한 노스텔지아에 기초하지 않는다. 프랑스 사회에서 알제리 프랑스 정착인들은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대변해 준 정당 세력도 없었다. 문화적으로도 혹독한 취급을 당했다. 알베르 까뮈, 루이 알뛰세, 자크 데리다 등이 알제리 정착민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일본 제국의 브로커들이 과연 포스트콜로니얼 연구에서 정당한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가? 이들은 일제식민통치 기간동안 본토로부터의 혜택과 자신들의 이익추구를 위해 조선민중을 착취한 기생충같은 자들이었다. 이들이 식민지 근대성을 열어 주었다고 보기 어렵다. 일제시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대안 근대성을 열어간 자들은 제국의 브로커들과 일제 식민정책에 저항했던 조선 지식인들이었고 여기에 가담한 민중들이었다.
만주국과 조선의 경제발전
우치다 준의 식민지 근대성은 만주국을 통해 조선의 경제발전과 문화적 근대성에 토대가 되어 주었다는 데 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은 세계로 파급되었고, 일제는 1931년 만주 사변을 통해 관동군이 중국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대공황의 여파를 피하기위해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잇는 경제 블록을 형성하려고 했다. 조선의 공업화는 일본시장이 수요시장을 창출해나가는 데 이용되었다. 1930년대에 대공황과 한반도의 산업화가 결합되면서 대규모 인구가 만주로 이동했다.
1932년 관동군이 설립한 만주국은 국가 주도에 의한 공업경제를 계획하고 자본주의와는 달리 근대성과는 상관이 없었다. 만주국의 경제발전 모델은 스탈린의 경제개발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1937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조선의 인구 이동은 심하게 변했다. 조선인들은 북한 지역과 만주에 있는 새로운 공장, 일본의 광산 및 기타 기업, 그리고 이남의 도시 공장에서 이동 가능한 노동 인적 자본이 되었다.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국을 통해 한국은 산업의 붐을 누렸다. 만주국은 오족 협화정책을 통해 조선인은 다른 민족들 (중국, 만주, 몽골)에 비해 일본인 다음으로 이등신분을 차지했다. 최남선, 최규하, 박정희, 강영훈 (국무총리를 지낸) 등과 같은 인사들이 만주국에서 교수나 고급 관리생활을 했거나 대학을 다녔다.
일본 통치 마지막 10년 동안 이것은 한국에서 발생한 엄청난 인구 이동과 재배치로 힌해 다른 농업 사회들이 거의 겪지 못한 것이었다. 이는 지방 인구 분포에 파괴적이었다. 1944년까지 전체 한국인의 11.6%가 한국 외부에 거주했으며, 이러한 비율은 다른 극동 인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드믄 경우였다. 약 20퍼센트의 한국인들이 해외에 있거나 태어난 지역이 아닌 다른 지방에 거주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15세에서 40세 사이의 연령대에 속했으며, 성인 인구의 40퍼센트가 뿌리뽑힌 삶을 영위했다.
1942년까지 노동자는 단순히 징집되거나 징병되었다.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의 산업 및 군사 확장의 지시에 따라 여기저기로 이동하는 인적 자본이었다. 한국인들은 일본 본토 인구와 마찬가지로 국가 총동원법, 다양한 형태의 징병, 강제 노동, "애국" 단체 등에 강제로 참여해야 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이제 내선일체 정책을 통해 강제 동화되어 두 민족을 "일체"로 만들었다.
이런 역사적인 노동배치와 인구변동 그리고 전쟁노력을 우치다 준은 만주국을 조선이 근대화를 놓은 토댜로 부각시키면서 고려하지 않는다. 만일 우치다가 만주국이 조선경제를 부흥시켜주고 이후 근대화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면, 그녀가 정의하는 근대화는 국가 주도형의 공업국가와 독재를 의미한다. 오히려 패전후 일제가 남겨놓고 간 군수공장이나 철도와 전력발전소 등은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에게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