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 횡단하기: 스피노자와 수운
스피노자와 수운
시천주에 대한 인간중심적 해석이 아니라 생태철학적 접근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중요하다. 신은 무한한 힘을 자연에서 속성들을 통해 표현하며, 우주적인 생에 관여한다. 모든 인간 존재안에 하나님에 대한 적합한 이념 즉 성령이 내재하며 모든 인격의 이념은 하나님안에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이론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의 활동성을 지적한다. 개인은 적합하지않은 이념이나 감정의 영향, 본능과 탐욕을 제어하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열망하고 실현해나간다. 외부의 영향에서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감정의 수동성(분노, 슬픔, 시기. 좌절 등)에서 코나투스는 욕망(cupiditas)으로 드러난다.
인간의 능동성을 살리는 코나투스는 신의 본질에 대한 적합한 (적확한) 관념에 영향을 받을수록 작용되고 증대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영원의 관점 즉 신에 대한 직관적 통찰과 무우주적 사랑에서 새로운 변화의 존재로 거듭난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은 평등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 사회적 열망으로 전개된다. 지성적 사랑은 코나투스와 분리되지 않으며 정념의 부정성을 제어한다.
스피노자는 <신학과 정치 논집>에서 예언자의 종교체험을 경시하지 않았다. 예언자적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이성의 지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해석을 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의 본성은 신적인 계시의 첫 번째 원인이 된다.
히브리 성서의 종교적 체험 (모세, 사무엘 여호수아, 예언자 등)에서 하나님은 말씀이나 꿈이나 비전이나 상징에서 계시하고 이들은 상상력을 통해 이해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이성에 계시의 의미를 해석하고 소통시킨다. 하나님의 자기소통은 예언자들의 지각과 마음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일치한다. 이런 소통체험에서 하나님 자체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예언자의 종교체험이 인격적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제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계시한다.
스피노자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운의 시천주 체험은 단순한 신비체험이 아니라 새로운 소명울 향한 존재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것은 히브리 성서에서 예언자적 종교체험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은 예언자들의 마음에 주입되고 이들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말을 한다. 하나님의 영은 히브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숨결, 마음 또는 권능 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이성적인 정신으로서 모두에게 접근될 수 있으며 인간과 자연의 네트워크 안에서 활동하며 양태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삶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영은 선한 행동에서 출현하는 마음의 평화이며, 하나님에 대한 존재의 적합한 이념은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인 사랑안에서 영원한 진리를 본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의 활동 안에 포함되며, 이러한 지적인 통찰과 심정윤리는 자연의 세계에서 수운과는 달리 인간의 존재론적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비교종교의 접근에서 보면, 수운의 시천주는 개인의 카리스마적 경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영의 보편적 활동을 시천주를 통해 소통시킨다. 수운의 예언자적 태도는 조선을 넘어서서 동아시아의 근대성의 개벽을 알리며 서구의 철학과 신학의 전통에서 근대성을 넘어서는 (transmodernity) 사상가들과 개벽의 삶을 나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수운의 예언자적 종교체험을 정감록이나 또는 <천주실의>의 토미즘과는 달리 다시 태어남의 생명종교로 자리매김한다. 비록 도참사상을 설명하는 <정감록>에 포함된 도선비결에 "산 있는 곳도, 물이 있는 것도 아닌 바로 궁궁 (또는 궁궁을을)이 이로운 땅"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구체적인 땅 십승지를 의미하지만, 수운에게서 궁궁은 풍수지리나 도참을 의미하기 어렵다. 오히려 수운의 무극대도는 새로오는 개벽의 시대에 관련되고, '궁'자를 살라 먹으면 병이 났는다고 했다. 수운의 궁궁은 그 모양이 태극이며 영부이며 선약이다. 한울의 영부를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구하는 것은 시천주를 통해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한울님의 성품에 이르는 변화의 가르침의 종교를 보여준다. 해월의 "영부주문"에 의하면, 궁울의 형상은 인간의 마음이다.
물론 수운은 "몽중노소문답가"에서 풍수 도참사상의 영향을 말한다. 임진왜란 때 살아남는 비결은 이재송송이며 (임란이 여름에 일어나서 산에 들어가서 숨어야산다. 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의미할 수도 있다), 관서 농민전쟁에서는 인재가가 였다 (난이 겨울에 일어나서 집에서 나오지 말아야 얼어죽지 않는다). 지금의 혼란의 시기에는 이재궁궁 뿐이다. 물론 이재궁궁이 후천개벽을 의미하는 정감록과 같은 예언일 수가 있다.
개벽의 호 시절이 도래할테니 그때까지 수심정기하고 지상신선이 되면 부귀를 누릴 것이다. 수심정기와 지상신선이 되는 것이 후천개벽을 이루는 조건이 된다고해도, 수운에게 폭력을 동반한 필연적 혁명론을 근거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다시개벽은 모든 사람들이 지상신선이 된다는 이념을 기초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유토피아적 갈망에 불을 부친다. 이런 점에서 수운은 정신적 물질적 개벽과 혁명의 보편적인 원류로 남아있다. 시천주의 종교이념에서 지상신선은 실천적 담지자로 등장하며, 새로운 사회의 개벽은 시천주와 정신개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운의 종교 체험의 특수성
수운의 종교 현상학은 사태자체 다시말해 생의 근원으로 돌아가며 다양한 종교의 특수한 진리를 인정하면서 보편적 종교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현상학적 태도는 천도의 빛에서 유불선의 종합하면서 서학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도 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종교 보편성은<도원기서>에서 수운과 상제와의 대화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호칭이 되는 것을 보면 이것은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에 근접한다. 이러한 종교 특수성에는 비오는 날 성묘와 태양이 머리 위를 도는 한울님의 조화로 언급되기도 한다.
수운의 특수성은 <용담유사>의 교훈가에서 상제나 천주는 한울님으로 번역되고, 한울님이 사람을 낼 때 아이들의 존재는 오행으로 생겨나며 상감을 법으로 삼고 오륜에 참여한다. 수신제가와 안빈낙도그리고 여필종부등과 같은 조선의 성리학의 가치가 여과없이 언급된다. 그리고 용담가 3절에서 수운은 무극대도를 한울님이 하신 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 자신이 처음으로 받았다고 말한다. 수운과 상제와의 문답과 가르침은 1863년 늦 가을 대략 3년 간 지속된 것으로 말해지는데, 이것은 무극대도이다.
이러한 무극대도는 <용담유사>의 교훈가에서 유교의 군자와 도교의 무위이화 그리고 지상의 신선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도덕가에서 <주역>과 <대학> 그리고 <중용>이 언급되고, 천지가 귀신이 되고 귀신이 음양이며, 이것을 도와 덕으로 말한다. 여기서 수운은 <동경대전>의 논학문에서 오심즉여심야 (내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다)를 천주가 바로 귀신으로 말한다 (귀신자오야).
이런 점에서 보면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로 등치하기는 어렵다. 마테오 리치는 귀신과 조상제의의 중요성을 알았고 카톨릭 신앙안에 수용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주문모 신부 (1752-1801)가 1795년 조선에 잡입해 포교를 하던 중 신유박해 (1801)때 검거되어 순교당했다. 북경교구장 구베야는 주문모 신부를 파송할 것을 약속하면서 이미 1790년 조선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
<용담유사>의 용담가에서 한울님은 개벽 후 오만년에 수운이 무극대도를 처음으로 받은 것으로 말하지만, 흥미롭게도 한울님 역시 신선으로 소개된다. 검결에서 칼의 노래가 소개되고 세계의 변혁을 위해 용천검의 날랜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나 하고 노래한다.
이 지점에서 수운이 혁명과 폭력을 왜 노래했는 지 문제틀로 들어온다. 성과 경과 신을 통해 시천주를 하는 지상신선들이 용천겸의 날랜 칼을 쓰면서 혁명을 통해 개벽을 하는가? 칼을 들어야만 후천개벽이 된다면, 십이제국의 괴질 운수가 다시개벽이란 의미는 칼의 혁명을 위한 필연적인 역사의 혼란기가 되는가? 이것은 유대 기독교적 전통에서 보면, 독일의 농민전쟁처럼 후천년 혁명사상에 공명한다.
그러나 수운에게 유대-기독교적 묵시문학적 메시야 사상의 개벽을 착상하기가 어렵다. 수운은 <용담유사> 의교훈가에서 유교의 도덕적 전통과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다 (삼강, 오륜, 음양오행, 안빈낙도, 수신제가 등), 오히려 수운은 무극대도를 받고 정심수신 하면서 신선의 경지에서 검의 노래를 불렀다.
태평성세 다시 정해서 국태민안을 한다면, 이것은 도와 덕으로 이루어지는 정신 개벽의 사회가 아닌가? 아니면 시천주의 포덕은 칼의 혁명을 반드시 거쳐야하는 전쟁을 지지하나? 그러나 수운은 <용담가> 4.4에서 나 또한 신선이며 비상천해도 이내선경 구미용담 다시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존재론적인 지상신선과 사회변혁에는 시천주와 무위이화 그리가 동귀일체가 작용한다 (<용담유사> 교훈가). 수운은 목검을 들고 칼의 노래를 불렀고 다시 개벽을 위한 포덕천하를 다짐할 수 있다.
<동경대전>의 논학문에서 수운은 한울님의 마움이 사람의 마음이라면, 왜 선악이 존재하는지 코나투스적으로 설명한다. 군자의 덕은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있어, 천지와 더불어 그 덕에 합한다. 소인의 덕은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므로 천지와 더불어 명에 어긴다. 수운에게는 칸트적인 의미에서 급진적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에게 가깝다.
수운의 종교 특수성은 한울님에 대한 종교체험을 근거로 신유교의 가치와 귀신론을 수용하고, 이것을 무극대도로 보편화한다. 이것은 무극대도가 열리는 일대전환 즉 새로운 개벽의 시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벽사상은 중국의 순환적 역사관이나 우주론적 운세 사상을 말하는 상수철학의 영향권에 서 있지만, <용담유사>에서 현재의 십이제국이 괴질운수에 빠졌으나 다시 개벽을 맞이하여, 국태민안이 되어 다시 개벽을 노래한다.
시호 시호 이내 시호!--드디어 나의 때가 왔다.
오만년지 시호로다--오만년 만의 새로운 개벽의 때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검결의 노래는 선천 오만년이 지나고 후천 오만년이 시작되는 개벽이며, 도와 덕을 따르면서 무위이화로 오며, 지상신선이 되어 새로운 사회와 역사를 창조한다. 이것은 수운의 종교체험의 특수성안에 담겨져있는 민족의 개벽사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폭력적 혁명인가 정신개벽을 통한 지상신선의 다시개벽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학적으로 논의의 여지가 있다. 종교의 이념의 담지자들 또는 대행인들이 역사적인 전개과정에서 상징적이며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의 구속성은 혁명의 역사에서 대부분 폭력이나 독재로 막을 내린다.
수운의 종교체험에서 상제가 준 영부가 있고 그 형상은 태극이며 궁궁이다. 영부를 받아 사람의 질병을 고치고,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 상제를 위하게 하면 수운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펼치게 된다. 영부와 주문은 칼과는 상관이 없다.
이 점에서 수운의 종교체험에는 대평천국의 난(1850-1864)을 일으킨 홍수전의 꿈과는 다르다. 홍수전 (1814-1864)은 객가 출신으로서 상제 여호와가 준 파사의 검 (사악함을 물리치는 검)은 없다. 홍수전은 개신교 교리를 유교사상으로 번역하고 소개한 <권세양언>에 매료되었고, 개신교의 묵시록적인 메시아주의 영향을 받아 종교 국가인 태평천국을 세우려고했다. 그는 예수의 동생으로 자처하고 그의 도움으로 악령 (유불선과 민간신앙)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수운은 홍수전과는 달리 과격하게 상제를 우상파괴적 유일신주의에 매료되지 않았다. 거꾸로 서학의 우상파괴적 유일신과 조상제의에 반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수운은 자신을 후천개벽을 여는 메시아로 이해하지 않았다. 물론 수운은 중국이 아편전쟁 (1840)과 태평천국의 난 이후 1860년 북경이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한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까닭에 포덕문에서 수운은 악질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시사철 편할 때가 없으니 상해를 입을 운수라고 말한다. 보국안민의 계책을 어디서 생각해낼까 하고 고민한다.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수운의 본래적 이념은 물질적 이해관계와 역사적인 조건 그리고 권력관계의 틀에서 언제든지 이념의 담지자들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수운의 종교이념이 어떤 계급이나 신분에게서 선택적 친화력을 발견하고, 그 이념의 담지자들이 어떤 사회의 비전으로 나가는데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운은 필연적으로 동학 농민혁명의 원조로 설정되고 그안으로 포섭되고 환원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실패한 혁명을 넘어서 인류에게 보편적인 종교의 의미 즉 다시 개벽을 위한 시천주의 통찰을 부여하는 사상가로 존중되어야 하는가? 오만년 전에 개벽된 세상을 다시 개벽 해야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의 대혁명을 의미한다. 수운에게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 없는 점에서, 그의 시천주 사상은 언제든지 여기에 거역하는 타락과 부패의 문명과 사회적 삶에 내재적 비판과 해방의 기획으로 남겨진다.
근대성의 비판의 문제
동학이 서구의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려면 스피노자에게서 몸과 유기체적 사고 그리고 코나투스의 차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불가의 불이불에 기초한 불연기연은 관계론적-과정론적 사유를 포함하며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나타나는 코나투스의 차원과 유기체의 중요성 그리고 네트워크 사고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오늘날 시스템 생물학과의 대화를 열어갈 필요가 있다.
흔히 중세기가 신중심의 세계로 카톨릭의 위계질서가 인간의 평등과 자연의 세계를 억압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사회는 인간을 중심으로 신을 조롱하고 자연을 인간위주로 파괴했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동학의 정신은 이러한 서구의 지배담론을 넘어서서 성과 속,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데 있다고 강조된다 (윤석산, <동학 오래된 미래>: 나를 향해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역사 사회학적으로 볼 때, 서구의 근대성의 문제는 단지 이항의 대립으로 일반화 되기 어렵다. 데카르트는 <성찰>III에서 무한자로서의 신의 주권성을 언급하고 신비체험을 언급한다. 신의 얼굴은 타자를 통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서구의 근대성 안에 공리주의적 이성과 사회 진화론(스펜서) 그리고 자본주의와 식민지배가 엮어져있다. 더우기 중세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며 데카르트적인 주체와 객체의 이분화가 아니라 형상과 질료의 연관성에서 인간의 덕목의 실천과 공동체적인 삶의 차원이 있다. 이것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배경이 된다.
서구 근대성의 패착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아니라 생존투쟁과 만인 대 만인의 투쟁(토마스 홉즈)앞에 과잉욕망을 거리낌없이 죽음의 문화를 향해 방출해버린데 있다. 타자를 지배하는 권력의 의지가 기술발전과 군사력 그리고 민족의 쇼비니즘을 통해 제국주의 이름으로 세계체제화되고, 문명선교는 피식민지배에서 인종차별와 학살정치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질서는 여전히 오늘날 패권전쟁으로 지속된다. 시천주와 향아설위의 접합이 불연기연을 기초로 보편적 사랑과 평등으로 나타난다면, 어떤 사회구성과 국가의 지배방식이 요구 되는가? 일제는 영국의 식민지 이론(스펜서의 사회 진화론과 존 슈트어트 밀의 인도지배의 정당성과 자유론)과 비스마크 군주제 헌법을 발 빠르게 벤치마킹하고 자신들의 신화론적 세계관과 무사도를 결합했다. 일제의 "식민지 근대성"의 허구는 스피노자의 정치이론에서 근원적으로 해체된다. 이것은 시천주와 해월의 3경 사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서구의 근대성의 데카르트 주의를 넘어선 스피노자는 수운의 종교철학과의 만남에서 그 지평이 넓혀질 수 있다. 이러한 사회학적 소통은 생활세계의 병리현상과 파시즘화를 거절하고 숲처럼 공생과 매개를 기초로하는 시민 사회국가를 세워나가는 정치적 코나투스에 공명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생 안에서 불연기연의 사이클에 놓여있고 이글보고 저글보고 무긍한 그 이치를 불연기연으로 살핀다. 하늘과 땅 그리고 만리만사를 포함하는 한울, 즉 "무긍한 이 울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용담유사> 흥비가). 이것은 영원성의 관점에 도달한 고결한 정신의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