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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문제와 환경윤리: 과학 사회학적 반성

파레시아 2024. 12. 2. 11:08

하이데거와 근대과학기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현존재와 자연의 생을 급진적으로 분리시켰다. 자연의 생에는 선함 자체가 없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이 존재의 무 앞에서 진정성을 의미한다. 히틀러의 부름 앞에서 독일 현존재의 양심은 거절을 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인종 존재의 목소리에 복종했다. 주객도식의 극복은 파시즘으로 막을 내렸다.

 

하이데거에게서 윤리와 책임성은 다양한 존재들의 충만함에서 탈각된다. 인간은 존재의 목자로 고양되지만, 형제를 지키는 자는 아니다.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동생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변명했다. 하이데거를 향한 성서의 고발이다.

 

후기에 들어서, 하이데거는 과학을 기술 정도로 폄하했다. 1976년 하이데거가 죽기 2주 전 시카고에 소재한 DePaul 대학에서 "하이데거 컨퍼런스"가 열렸다. 하이데거가 보낸 축하 편지에서 그는 근대 자연과학은 근대기술의 토대이며 기술적 사고의 기본형식으로 말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완성이다. 형이상학은 허무주의로 귀결이 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 특유의 존재 물음에서 수행된다.

 

하아데거에게서 기술의 의미는 고대 그리스적인 예술에서만 정당성을 가지며, 이것은 자연적인 스스로 드러냄이며 포이에시스이다. 알레테이아는 근대 과학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영지주의적 근대성 거절을 통해 전 근대의 과학과 기술로 부터 근대과학을 이분화하는 시도는 축의 시대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로 부터 상당한 비판을 당한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들을 통해 많은 건축과 기계들이 만들어졌고, 상품과 해외교역은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대 과학기술과 다를 바가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술은 인간의 삶을 위한 도구적 유용성과 더불어 한계설정 그리고 사회를 생의 원리로 채워주는 순기능을 갖는다. 이것은 이카루스 신화에서 새의 깃털과 밀납으로 만든 날개를 타고 밀궁을 빠져나간 신화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기술과 도구는 태양에 가까이 가지도 않고 바다에도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되는 자기 한계설정을 갖는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일방적으로 과학이나 기술이 존재망각으로 가져간다는 기술도피주의와는 다르다.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과 알레테이아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을 탈취하고 페르메니데스의 이방여신의 계시와 모자이크해서, 하이데거가 자의적으로 변종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영지주의적 근대성 비판에서 중요한 툭징은 신들의 사라짐에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푸스 신들과의 소통 가운데 살았지만 이런 신들은 그리스인들이 만든 것이다. 이들은 하이데거 처럼 존재진리를 알레테이아를 통해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사건 형이상학"이며, 그리스의 사회경제적 현실과 맞지 않는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기술을 통해 생태학의 파괴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다.

 

하이데거가 던지는 과학과 기술의 공속성에 관한 비판적 뮬음은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세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아데거의 영지주의 존재론과 반 과학적 태도나 반 근대성도 또한 비판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 슈피겔 인터뷰

 

1966년 하이데거는 슈피겔 인터뷰에서 자신의 나치전력을 왜곡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 민주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극한의 혐오감을 표시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멸절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홀로코스트 (쇼야)에서 자행된 살해정치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삶을 황폐 시킨다고 비판하지만, 인간성에 재난을 가져온 집단적 폭력과 살해정치에는 침묵했다. 그에게 인간주의에 대한 헌신은 형이상학으로 가차없이 비난 되었다. 윤리적 책임은 그의 존재론에 없다. 존재의 진리가 열리는 세계의 “신성화”를 위해 하이데거는 기술의 수단과 목적 그리고 기술적인 존재방식을 제거했다. 이러한 원초적인 세계에서만 오직 존재/하나님이 진리로 드러난다 (Heidegger’s interview in Spiegel, 1966, 9-23, “Only a God Can Save Us”; 인터뷰는 1976년 슈피겔에서 개재되었다).

 

하이데거는 기술문제를 다루면서 근대과학과 기술을 몰아세우는 틀(Geselle)로 비판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모든 것들을 유용성과 조작을 위해 사용하며, 재고품이나 부픔으로 비축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테크노롤지와는 다르다. 근대 물리학과 수학은 자연으로 부터 기계와 전력 에네지를 뽑아내며 몰아세기 틀의 선구자가 된다 (ibid., 327).

 

하이데거는 근대 과학의 극단적인 위험으부터 벗어나기위해 테크놀로지 자체가 악마적인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역운일 수 있다, 오히려 그 본질은 신비한 것이며 얘술작품 특히 시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의 힘이 있다" (횔더린).

 

하이데거는 횔더린의 구원의 힘에 주목하고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테크네의 본질에서 찾는다. 비록 테크놀로지의 본질이 상당한 정도로 애매하지만, 진리는 별자리와 같다. 우리는 근대과학의 위험을 보지만, 구원의 힘의 성장을 같이 본다.

 

그리스인들은 알레테이아의 역운에서 진리와 구원의 힘을 경험했다. 이들은 예술의 테크네에서 알레테이아의 지고한 빛을 경혐했다. 예술은 신들의 임재를 조명했고, 신적인 역운과 인간의 역운의 대화를 드러냈다. 포에시스/테크네 안에서 구원의 힘은 성장하며, "시적으로 인간은 대지에 거주한다" (횔더린) (ibid., 340).

 

히이데거는 플라톤의 <파에드로스>에서 순수하게 빛나면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시적인 것이 진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시적인 것이 모든 예술의 아름다움에 스며들며, 모든 본질적인 드러냄을 아름다움으로 채운다. 테크놀로지의 본질은 기술적이 아니라 시적이며, 신들의 세계가 출현하며 인간의 역운은 여기에 엮어진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평가가 고대 그리스의 문명을 경험적인 자료에 기초에 분석하는 사회학적인 해명과 맞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알레테이아는 자연과 형이상학에 걸쳐 나타나며 예술이나 시에 국한되지 않는다. 

 

<형이상학> IX 8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태가 잠재태에 앞서 부각되며, 영원한 부동의 동자는 질료가 없는 본질적인 활동성이며 현실태이다. 그러나 부동의 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살아있는 존재이며 인간의 관조 안에서 알레테아로 들어온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영지주의 신에서 알레테이아/진리를 찾은 것과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영원한 것들은 감각적안 것들에 비해 본질상 앞서있다. 영원한 것들은 예를들어 땅과 불처럼 변화에 관여되는 것 들에 의해 모방된다. 이러한 모방은 참여를 의미하며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모방 보다는 ㅡ이데아는 질료와 더불어있다ㅡ영원한 것들의 임재 즉 알레테이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알레테아는 진리사건로서 현실태의 선함으로서 모든 영역들에서 출현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화적 조건과 투쟁과 고난 안에서 진리로 드러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하나님은 세계의 고난에 무관심하다. 오직 존재의 진리를 신비하게 열었다가 닫는 무한한 반복의 전기 콘센트에 불과하다. 그는 그레코-영지주의 신의 사제가 되었다. 그의 존재론은 미지의 신의 도래를 위한 이방종교의 교리서이다. 이러한 교리서에는 최소한의 선함 즉 윤리는 존재의 진리와 무관하다. 결국, 글로벌 기술의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근대의 농업과 식량산업을 홀로코스트의 가스방이나 집단살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Young, Heidegger, Philosphy, Nazism).

 

과연 하이데거 처럼 근대과학은 몰아세우는 틀로서 착취적이며, 근대의 농업과 식량산업과 집단 살해의 가스방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일까? 하루 삼십만명의 유대인을 테크놀로지 조작으로 죽인 나치의 범죄와 근대의 농업과 삭량산업이 같은 것인가? 하이데거의 존재 일반화는 살해정치의 정당화로 이어진다.

 

하이데거의 기술관의 문제는 지배계급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를 지배할 때, 이것이 사회학적으로 정치권력에 연결되며 문화 전반에 걸쳐 하위계층의 예속화로 이어지는데 관삼이 없다. 기술 합리성의 도구적 성격은 규제가 되지 않을 경우, 후기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파시즘의 광기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의 반 과학적 태도는 칸트의 인식론의 중요성이 양자역학에서 나타나는데서 뒤집어 진다, 칸트의 인과율은 하이데거 생각한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지성의 표상을 자신의 알레테아아의 진리사건으로 대신 했지만,  양자역학은 칸트의 순수이성의 한계를을 지지한다. 칸트의 물 자체는 하이데거처럼 존재론화 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탈취와 모자이크 방식의 해석학은 자신의 존재론적 사유에 속하지 않으면 무차별하게 일반화 시킨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와 인식론은 윤리에 기초하며 신중한 지혜와 실천을 부각시킨다. 기술과 기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의 공공선과 행복을 위해 고려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과 기술의 문제를 하이데거처럼 존재자체의 빛에서 묻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 윤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고려했다.

 

 

https://www.thriftbooks.com/w/memoirs-tauber-institute-for-the-study-of-european-jewry_hans-jonas/8929873/i

 

 

한스 요나스의 비판

 

한스 요나스는 <생의 현상>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드러나는 영지주의 세계관과 허무주의 그리고 창조의 선함에 대한 거절을 문제 삼는다. 현존재의 결단주의는 무엇을 찬성하거나 거절하는 윤리적 결단이 아니라 자기해소를 하는 것이다. 허무주의 뿌리는 자연에 대한 하이데거의 무비판적인 수용에 있으며, 인간은 더 이상 창조의 거룩한 질서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창조의 선함은 실종되며, 현존재는 여기에 무관심하며 인간성 전반에 대한 신뢰나 지속가능한 지구의 운명에도 관심이 없다. 윤리적 공허함이 출현하며, 창조의 선함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발견이 없다. 존재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존재론적 경험에 무관심하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영지주의와 파시즘과는 달리, 진정한 개인실존은 도덕성의 우위에 있지 않다. 물론 생물학적 사실들에 대한 실존적 해석은 자연의 생안에 도덕이 있다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적론적 존재의 생의 지향성은 자연의 세계안에서 현재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탈각해버린 생물학적 사실들과 유기체의 삶에 대한 현상학적 복권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뿐 만 아니라 모든 유기체는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차이애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염려한다. 가치는 생 자체에 본질적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생애 필요한 자유의 몫을 나눈다. 자신의 생안에서 초월의 내적지평을 열망하고 개별적인 유기체는 살아있기 위해 환경의 서식처를 만든다.

 

자연의 생에서 인간의 마음과 이성의 출현은 다른 유기체들의 생으로부터 엄청난 분열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세계를 통해 미리 특징되어인 것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식을 통해 존재를 반성하는 능력애서 인간은 자신이 자연에 의해 불려진 것을 이해하고 자연을 지키는 자가 된다. 자기초월의 폭넓은 지평은 인간존재에 독특한 불안이나 죄책이나 좌절의 느낌을 가져온다.

 

요나스가 모든 유기체들에게 존재의 범주로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사유를 뒤집는다. 윤리의 원리는 자아의 자율성이나 공동체의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자연에 의해 객관적으로 할당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윤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접합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환경사회학에서 논의되는 사회자연성(Socionature)에 근접하며 윤리적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사회자연성 개념은 인간의 사회는 환경과 더불어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사회는 자연적이며. 환경 또한 부분적으로 사회적이다. 이러한 변종의 접합개념은 문화로서의 생활세계와 자연의 생의 세계를 이분화하지 않는다. 모든 유기체들은 주관적으로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을 피하고 자연안에 내재하는 선함과 생을 추구하는 가치를 말한다. 선함자체가 가치의 객관적 실재로 설정되며 여기서부터 존재를 방어하는 책임적 구속성이 돌출된다. 생의 선함은 이미 존재하는 목적에 상대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을 갖는 그 능력은 선 자체을 말한다. 생을 통해 존재는 자신에게 긍정을 표현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격률이며, 인간만이 존재론적 진리를 인식한다. 존재안에 있는 생의 현전은 그 부재보다 절대적이며 무한한다. 존재는 삶을 통해 자신에게 긍정을 한다--이러한 존재론적인 공리를 통해 우리는 생활세계의 온전성 (생명세계를 포함한)을 방어하는 의무를 갖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선함자체안에서 책임성의 일차적 목적 즉 정언병법은 인간에게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도덕적인 책임의 존재로 고양되었고 자연적인 환경을 보호한다. 우리가 자연을 가치의 근원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의 이해관계를 위해 기술조작을 위해 투사하는 단순한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기술 지배화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가치의 근원이며, 생활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요나스는 후설의 세계의 수학화 테제를 세계의 기술화로 변형시킨다.

 

요냐스는 <책임의 원리>에서 기술시대의 윤리를 추구하며, 자연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존재론적인 해명을 한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독특한 자리를 갖는다. 개인의 진정한 실존은 열린 미래를 향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이 있다

 

요나스에게 창조는 선한 것이며 자연의 유기체의 존재들은 죽음을 회파하고 생명을 취하는 가치가 내재한다. 유기체의 존재들의 삶에서 요나스는 자율성과 원초적인 자유의 형식을 본다. 이러한 삶을 파괴하는 기술남용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기술지배의 시대에 윤리는 인간과 더불어 환경의 차원으로 전개된다.

 

더 나아가 요나스의 신학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창조로 본다. 물론 초월적인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애 호소하지 않고도 자연안에서 윤리적인 차원을 돌출할 수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요나스는 자연의 의미를 하나님의 창조로 심화 시킨다. 신앙와 이성은 양립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창조로부터 스스로 물러났고, 세계는 위기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통해 인간은 자유의 능력을 행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손상된 세계를 고친다.

 

인간은 지식과 자유를 통해 유례없는 기술의 시대에 힘을 가지며 지구의 생과 종들을 멸절시키벼리는 악을 행할 수도 있다. 도덕적 책임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피조된 존재임을 각인한다.

 

요나스의 유대신학적 접근은 하나님의 자기제한성을 아유슈비츠의 악에 직면해서 반성한다. 그리고 근대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한다. 우주과학은 빅뱅을 말하며 인간의 삶은 진화의 끝자락의 과정에서 출현했다. 유대교의 삶의 선함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특별한 존엄성은 요나스의 환경윤리에 토대가 된다, 여기애는 무신론자들까지도 자연의 생을 창조의 의미로 파악하고 공동으로 환경과 자연의 생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헌신할 수가 있다

 

요나스의 철학적 생물학은 생물학적 존재들에 대한 실존적인 해석을 시도하며, 자연의 생을 위한 윤리적 책임에 대한 존재론적인 토대를 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 홀로코스트 상황애서 유대신학을 반영한다. 그의 촐학적 생물학은 환경 사회학을 위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Jonas, The Phenomenon of Life, Fore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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