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귀신해석과 성서적 사유
다산의 귀신해석
주자에게서 상제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귀신 또는 영과 다르다. 하늘은 리의 영역에 속하며 귀신이나 영은 기의 신장과 수축의 작용이다. 기가 사라질 때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제는 우주의 창조적 힘을 지도하는 권능이며 의도를 갖는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에 몰두하고 친화력을 보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의 말은 여기서 의미가 있다. "귀신이란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이니, 내 마음에 귀신이 없으면 어찌 스스로 올 것인가?" (금장태, <다산 정약용>, 45).
다산은 <논어>의 귀절 중 귀신을 인귀에 한정 짓는 것을 비판했다. <논어>의 선진편에서 게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관하여 묻자 공자는 사람을 섬길 줄 모르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줄 알겠느냐로 반문한다. 용야편에서 번지가 지혜로움에 관하여 물었을 때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이다 (경이원지). <논어> 3:12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이 살아계신듯 하고,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신이 와 계신 듯하고 한다. 공자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지각작용이 있는 지 대해서 죽은 뒤에 서서히 알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다산에 의하면, 신령의 부류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예에 합당한 제사를 지내고 신령은 여기에 감응한다. "옷을 사치스럽게 입는 것은 귀신이 미워하는 일"이다. "수령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비난할 일일 뿐더러 귀신이 책망하는 일이다." (정약용 다산연구회 역 <목민심서> KRPIA, 2014. 9.18).
다산에 의하면 신적 존재들이 자연 또는 인간과 역동적으로 도덕적인 차원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고 귀신개념에 실천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이것은 다산이 <주례>에서 천신으로 분류된 황천, 상제 즉 천에 기인하며, 천에 대한 인격적 해석에 연관된다.
다산의 중용해석에서 '고명배천'에서 천은 가시적인 현상적인 하늘과 부수적인 천체들을 의미한다. '유천어목'에서 천은 인격적이고 지성적인 속성을 내포하는 무형의 하늘이다. 황천과 상제는 도덕 법의 자율적 수립자로서 인격적인 지성적인 속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는 섬김의 대상이 되는 가시적인 현상적인 하늘의 우위에 있다 (정약용, 이지형 역주, <역주 논어고금주> 1권, 148-9).
인격적인 의미의 천은 만물의 주재자로서 현상적인 유형의 하늘과 귀신의 존재와 등치되지 않으며, 이들은 인격적인 천의 속성을 전혀 갖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천으로부터 영명함을 천명으로 받는다. 여기서 현상의 하늘과 귀신존재에 대한 다산의 탁월한 합리주의적 해석이 있고, 주자의 입장을 넘어선다.
인격적인 천은 영명한 존재이기 때문에 천지의 운행을 그저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능동적으로 자연에 개입하고 주재한다. 주재자로서의 천의 역할은 만물을 화생하고 생육하며 행동의 경향을 결정짓는다 (정약용, 박석무, 정해렴 편역, <다산논설선집>, 245).
이것은 <천주실의>의 입장에 근접한다. 다산은 노자의 무위의 다스림이나 성리학의 음향오행설 또는 수운의 상제귀신이나 주문과 부적을 일체 거절한다. 귀신은 운행의 원리로부터 동식물처럼 자유롭지 못하며, 사람과 같이 영명한 본성을 담지하지 않는다.
귀신은 오직 인간의 도덕성에 따라 합당한 복록을 내려주는 존재이며, 귀신은 결코 인간의 행악에 기뻐하여 상을 주거나 인간의 행선을 꺼려서 해를 끼치지 못한다. 결국 귀신은 오로지 영명한 천의 선행의지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존재이다. <목민심서> 4. 계행에서 다산은 말한다. "청사에 귀신과 요괴가 있다고 해서 아전이 기피할 것을 말하여도, 조금도 구애받지 말고 선동하는 습속을 진정 시키도록 해야한다."
결국 다산은 귀신존재와 적용에 대해 유대-기독교의 유신론적이며 유교의 인간 중심적인 비신화론을 드러낸다!
기독교의 창조와 신에 대한 반성
창세기에서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실 즈음에(베레쉬트; NRSV), 땅은 혼돈하고(토우) 공허하며(보후)... 빛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토우와 보우로부터 빛의 창조는 바빌론 신화로부터의 역사적 해방을 담고 있다. 기독교와 유교 또는 동학과의 대화는 인격적인 신에 대한 체험이나. 개념적 명료함이 없는 만유재신론(panentheisim)이나 수운의 상제귀신론이나 도덕적 신신론에 대한 해명이 없이 진전시키기 어렵다.
유대 기독교는 인격적인 종교인가? 그렇치 않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의 관련에서 인격적인 분으로 고백된다. 리치의 <천주실의>는 중세 토미즘의 전통에 서 있고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나 성서해석은 오늘날 성서 비평학에서 볼 때 지나친 한계가 있다.
바벨론의 유폐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고난의 삶에 같이 동행하고 고난을 받는 쉐키나 (하나님의 영광의 빛 또는 영) 개념이 발전되었다. 쉐키나는 야훼와 다시 결합하는 갈망을 갖는다. 임마누엘 레비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분 (illeity)으로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적으로 고백되지만, 마틴 부버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온다. 예수가 아바 아버지를 가르치지만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에서 "주는 우리의 아버지" 나타나며 (사 63:16), 여전히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계신 분이다 (사 45: 15).
드러냄과 숨어계심의 틀에서 성서는 미혹하고 거짓말을 하는 영이 하나님의 허락에서 사용된다고 말한다 (왕상 22: 19-23). 심지어 이방의 왕 고레스는 기름부음을 입는다. 이방의 선지자는 발람에 의해 이스라엘의 측복의 도구로 사용된다 (민 24:17). 그럼 귀신은 어디에 있나? 여기서 귀신이 주자학의 차원에서 음양의 작용으로 파악된다면, 그것은 성령의 우주적 사역 안으로 흡수될 수 있다. 이미 초대 가독교 신학에서 스토아철학을 이러한 틀에서 수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드러냄과 숨어계심의 틀과 히브리 성서의 비정규적 사유 (니느웨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야훼의 신비와 생명사랑)은 유교나 동학과 대화의 챕터를 열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귀신이 인간의 삶에 악한 세력으로 등장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권력의 실체로 이해된다. 그것은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영향력있는 영적 존재들 (푸네우마티사, 엡 6:12) 또는 지배의 중심들과 영역들 (크리오테테스, 엡 1:21, 골 1:16) 그런가하면 세계의 지배자 (코스모크라토레스, 엡 6:12)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영적 세력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상대적인 자율성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을 부패시키고 하나님의 생명에 적대한다.
이것은 정치적 절대주의, 경제 맘몬주의, 사회 불평등, 문화 이데올로기 등에서 폭력과 지배질서로 현상한다. 이러한 접근은 유교나 동학에서 찾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성서는 귀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의 해방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향한 해방을 말한다. 신약성서는 히브리 성서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성서는 동학이 주장하는 천지귀신이나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쓰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거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