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독일의 공공신학과 생태학

파레시아 2024. 12. 6. 09:01

 

나는 독일에서 공공신학과 환경문제에서 책임적인 인긴주의를 검토한다. 독일의 공공신학의 선두에 서 있는 세계 교회협의회 의장 하인리히 베드포드-스트롬에 의하면, 1989 바젤에서 열린 유럽 에큐메니컬 총회 성명서는 중요하다.  총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교회 대표들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핵심은 창조에 대한 청지기적 책임을 강조하고 이것을 안식일의 근본적인 의미로 파악한다. 또한 1990년데 독일에서 전례없는 논의를 불러일으킨 1997년 개신교회의 공공신학과 사회 윤리 성명이 있다:  "연대와 정의에 기초한 미래를 위하여: 독일 복음교회와 독일 주교회의의 경제  사회 상황에 대한 성명서"

 

성명서의 핵심은 책임의 인간주의에 토대를 제공하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창조 전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이것은 자연을 낭만화하거나 신격화하는 것을 거절한. 비인간 피조물에 대한 경외심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자연을 파괴하는 대신 양육하고 기르는 인간 활동에 대한 부름이 강조된다. 창조물 전체에서 인간은 특별한 위치를지만, 지구를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독일의 상황에서 공공 환경신학을 의미한다. 땅의 지배는 착취가 아니라 청지기적인 책임 즉 돌보는 책임성으로 이해된다. 청지기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관련되며, 지속가능성은 인간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키는 자원을 장기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선한 청기기를 의미한다. 노아의 계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생물 다양종에 관심하며 모든 종들을 보존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9:16).

 

토라에서도 이스라엘의 삶에서 안식일이 준수되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갈지말고 묵혀두어서 가난한 자들이 먹게하고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한다.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땅의 쉼과 들짐승에 대한 배려가 나타난다  (출 23:11). 여기서 나는 성서적 애코 인간성과 청지기적 책임 그리고 사회 자연성을 만난다,

 

광야에서 만나의 경제학은 충족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청지기직을 강화하며 바울에게 이어진다 (고후 8:15)--많은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다스림 (샬롬)은 평화를 의미하며 만나의 경제학과 연결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돌봄은 생활세계의 틀에서 심비오시스-생의 출현이론에 접근한다. 이것은 노아의 방주애서 모든 종들의 보존에 연결된다 (Bauckham, Living with Other Creatures, 228). 

 

안식은 창조의 정점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내재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창조의 세계에 동행(concursus)하고 살아있는 피조물들의 생의 자유와 창조성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락하신다. 생의 오토포이에시스는 여기에 근거하며, 소산구조에서 생의 출현은 다윈의 진화론을 넘어선다. 이것은 청지기의 에코 인간성과 더불어 하나님믜 안식과 피조물의 삶에 대한 동행의 차원을 열어준다. 

 

청지기로서의 인간 책임성은 자연과의 새로운 대화로 불림을 받는다. 인간 만이 생태계를 청지기로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가 인간의 삶을 유지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어간다. 인간은 이러한 상호의존성과 네트워크를 통해 문화와 사회의 삶의 터전을 변형시켜나간다. 이러한 심비오시스는 지속적 창조를 생의 출현성에 연관 지으며, 하나님이 안식과 동행은 공공신학으로 하여금 환경 사회학과 시스템 생물학의 통찰들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게 한다.   

 

생태적 계몽 사회

 

환경에 대한 공공 신학적 구성에서 생활세계론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은 생태학적으로 계몽된 사회를 지향한다. 생태학적 합리성은 기술혁신을 통해 녹색성장을 말하지만, 이것은 생명권에서 오토포이에스와 생의 복잡성 그리고 소산구조의 출현과 더불어 에피제네텍스의 사회문화의 환경요소를 고려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생태학적으로 계몽된 사회는 신중한 반성 (프로네시스)를 요구하며, 사회개혁과 변형을 염두에 둔다. 

 

이러한 측면은 공공신학의 인식론에서 결정적이며, 반성적이며 성찰적인 후기 근대성을 요구한다. 이것은 성찰적 사실주의를 의미한다. 인식론적 상호작용, 구조결합, 작동의 닫힘과 파열 등과 같은 시스템의 성격은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생활세계의 환경적인 실제와 대립하지 않는다. 심비오시스와 성찰적 사실주의는 에코 담론을 둘러싼 과학의 경쟁 리서치 프로그램 (이마 라카토스)들을 검토하고, 과학을 더 이상 전문가 집단의 특권에 내맡기지 않는다.  유전자 결정주의와 유기체 중심의 생의 이론은 이러한 논쟁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특히, 나는 공공신학의 인식론에 후기 근대성을 특징짓는 위기사회테제를 수용한다. 공론장은 기후 온난화, 기후 변화, 태러주의, 판데믹 그리고  우쿠라이나에서 벌어지는 핵전쟁의 위협  더 나아가 세계 파시즘 현상 등으로 인해 시민사화와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된다. 신체를 규율하는 정치학과 지배 담론은 국가의 권력과 관료제에 묶여진다. 사회 제도들 안에서 언제든지 갈등과 위기는 모두의 일상의 삶에 침투해있다. 근대성은 위기를 항상 그 안에 동반하고 부매랑의 효과를 글로벌 차원에서 확대 시킨다. 다시 말해 로컬 지역의 사회자연성은 글로벌 네트워크에 엮어지고, 엄청난 파급효과는 과학 기술진보를 통해 시민사회와 공론장을 덮어버린다. 우리는 파라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시대에 서 있다. 

   

아니미즘과 자연 중심주의는 허구이다!

 

우리는 라스무센처럼 데카르트와 칸트의 계몽의 전통을 거칠게 거절하고 중세의 우주론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생명과학애 대한 성취와 자연의 생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이해는 공공신학의 생태학에 매우 중요하다.

공공신학의 관점에서 생태학은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하며, 기독교적 아니미즘이나 해방신학의 영성 신비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기독교 애니미즘에 의하면 모든 것은 거룩하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인격이며, 모든 것은 양육되어야하며, 모든 것은 존중되어야한다. 

 

자연 아니미즘은 부족문화나 원주민들의 영성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나타난다. 아니미스트들은 세계능 인격들들로 충만하며, 일부가 인간이다. 생은 항상 다른 존재들과 관계안에서 살아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있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 새계는 신성한 장소이며, 신성한 과정이며, 인간은 여기의 일부이다 (Graham Harvey, Animism: Respecting the Living World, 3-9).

 

이러한 아니미즘은  해방신학에서 추구하는 우주적 신비주의에 친화력을 갖는다. 우주적 신비주의는 인간의 내적인 생태학을 전체 생태학에 연결하며, 인간의 마술적이며 샤만주의적인 마음의 발전을 촉진한다. 모든 것은 공존하며, 공동창조적이며, 영성과 과학은 상보적이다. 우주의 성례전적 본성이 강조되고, 창조의 신비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을 형제와 자매로 만든다 (Boff, Ecology and Liberation, 35, 42-3).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창조에서 하나님의 대변자로 파악하며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자로 만들었다. 여전히 해방신학은 기독교 자연주의(프란시스 아씨시)를 표방하지만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모든 것안에 임재하는 기독교 만유재신론을 말한다 (ibid., 43, 50).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며 대단히 부정적이다.

 

공공신학과 에코/에피 돌봄 

2010년 타임즈 커버는 에피제네틱 혁명으로 장식했다. "당신의 유전자가 당신의 운명이 아니다." 지구 전체의 에코 시스템은 기후변화에 반응하면서 상당한 속도로 변형된다. 이러한 변형은 유기체의 변형된 에피게놈에서 탐지된다.

 

이것은 에코 시스템을 에피제네틱의 문제틀로 파악한다. 온도는 땅과 해양 시스템에서 중요한 애피제네틱 요인에 속한다. 물의 온도가 높아가면서 물고기에 필요한 산소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 물고기 종들의 에피게놈이 변화한다. 해양의 염분과 산성의 변화는 물의 온도에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것은 많은 해양종들의 중요한 서식지인 산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수질 온도와 서식처의 변화는 생선에 의존하는 음식 시스템에 심각한 차질을 가져온다. 기후변화에 따른 해양의 수질과 온도의 상승은 유기체들의 변형된 에피게놈에서 탐지된다.

최근 괄목한 연구에서 식물과 동물의 에피게놈의 변화와 유연성은 환경의 스트레스와 기후변화에 대한 반응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에코 요인은 다윈의 자연선택이나 생존투쟁과 다르다. 인류세의 멸절의 위기는 에코 시스템의 변형에서 올 수 있다. 동식물의 에피게놈의 변화와 유연성은 식량 공급망의 변형으로 인해 세대에 걸쳐 일어난다. 농작물과 가축 그리고 물고기 집단에서 에피게놈의 변형으로 인해 게놈지도에서 탐색 조차 할 수 없는 예기치 못한 질병들이 속출할 수 있다.

 

여기서 사회 생태학은 자연 낭만주의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변화와 수질온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환경의 생을 보호하는 치유기술을 에피제테넥스 차원에서 고려할 수가 있다.   

생의 보호하고 치유하는 기술의 역할에서 공공신학은 사회 생태학과 에피제네틱스 치유 기술을 신중하게 고려한다.  

 

더 나아가 공공신학은 과학 기술의 헤택을 공공선 거버넌스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공평성의 정의로 파악한다. 이러한 과학적 인식론의 틀에서 욕망과 충족의 체계 변화 (헤겔/스피노자)는 생활세계의 구조론적인 측면에서 비판과 해방을 위해 여전히 중요하다.

 

인간은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인간은 코나투스를 통해 영원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적 사랑을 자연의 생에 대한 돌봄으로 드러난다. 영원성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활동적인 직관적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우주적 사랑 또는 자연의 생을 향한 심정 윤리는 영원한 자연을 향한 사랑을 낳으며 강함에서 강함으로 성장한다.

 

자기사랑은 하나님/자연의 일부가 되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심비오시스로 그리고 영원한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증대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믿음은 영원성의 관점을 취하며 사회 안에서 밀려나간 자들과의 연대외 인정과 공공선을 지향하는 의미론적 정치로 출현한다.

 

생의 의미론적 정치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책임에서, 에피제네틱 치유기술에서,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한다.  시민 국가는 숲의 생태학처럼 심비오시스 민주주의를 기초로 재구성될 수 없는 가? 이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사실주의적으로 현실의 문제와 도전을 평가하고 다학제적 소통을 기초로 창조의 온전함을 위해 교회의 공공성 실천을 자극한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