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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혁명과 실천적 근대성

파레시아 2025. 1. 31. 06:33

수운과 동학의 영향사


수운의 시천주와 무위이화에는 성리학과 노자의 사상이 녹아있지만, 주역의 팔괘가 음양오행설과 더불어 한울님을 아버지처럼 모시는 종교체험과 실천이 있다. 이것은 수운이 정강록의 도참사상으로 부터 받은 영향이다.

 

수운의 시천주 사상은 토마스 뮌처가 주도한 독일의 농민전쟁이나 유대 기독교의 후천년 개벽사상처럼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세우기위해 필연적인 전쟁이나 혁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메시야는 인간이 세운 천년왕국에 기초해 다시온다 (후천년개벽왕국).

 

오히려 수운은 오만년의 후천개벽의 시대가 무위이화처럼 도래하기까지 수심정기와 지상신선의 삶을 사는 정신적 개벽을 말한다. 이것은 후천개벽이 이루어진 지상에 비로소 메시아가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메시아가 지상에 와서 천년왕국을 세운 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기독교적 입장과도 다르다 (전천년개벽왕국).

 

수운에게 다시 개벽은 정감록의 도참설처럼 예언적인 성격을 갖지만, 현재의 삶에서 정신을 개벽하는 삶을 부각 시킨다. 이것은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현재화된 종말론적 개벽으로 볼 수 있다. 정신개벽은 사회와 역사로 스며든다.  <을묘 천서>는 지극한 정성을 들여 천주께 49일을 기도드리는 것을 말한다. 수운에게 지극한 성심으로 드리는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수운이 상제를 나의 마음과 귀신으로 등치하는 것은 주역과 유교 그리고 노자와 비판적인 대화를 요구한다. 노자에게서 중요한 것은 자연의 도에 따라 인간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며, 공자에게 도는 가족의 효와 수신을 근거로 사회질서를 세운다. 

 

동학 정치혁명

 

<시천교 역사>를 보면 수운의 사상의 정치 사회하는 1890년대 초 호남의 변혁적인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가속화된다. 해월은 이런 정치주의화에 크게 우려했다, 이러한 변화는 1893년 교단 안에서 갈등으로 표면화 되기도 했다. 1891년 5월에 해월이 전주 서영도의 집에 있을 때 호남의 인사들이 날로 문전에 이르렀지만 진리를 문답하는 자가 없어 해월은 "도를 아는 자가 드믈구나 " 탄식했다고 한다 (<시천교역사>, 동학사상자료집 3, 아세아문화사, 1979, 588).   

 

수운에 대한 신원운동을 전개하려고 했을 때, 전봉준을 비롯한 호남의 인사들은 척왜척양을 지향하는 정치운동으로 선회했다. 이러한 노선은 1894년 1월 군수 조병갑을 타도하는 고부봉기를 거쳐 갑오 농민전쟁으로 일어났다. 2월에 대원군은 밀사를 파견하고 농민군 지도자와 접촉했다. 그러나 김개남은 전봉준에게 호응했지만 대원군과 연계된 근왕주의 입장과 충돌했다. 김개남은 스스로 개남국왕으로 칭했다.

 

이후 3차 9월 기병은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 계기가 되었다. 해월은 전봉준 일파가 대원군과 결탁한 것을 몹시 못 마땅하게 여겼다. 해월은 9월 임실군 관아에 공문을 보내 도를 어지럽히는 신도들을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요쳥했다. 충주에 주둔하는 일본군 병참소에 글을 보내 "서장옥, 전봉준 무리가 거짓 사문을 핑계대고 망령되이 척화를 일컬어 무지한 교도들을 선동" 했다고 말한다. 북접은 수운 선생의 훈계를 따라 따르지 않았다. 남접이 무리를 맺고 세력을 믿어 창생을 죽였다고 비난한다. 북접은 수심정기하며 솔성수교하는 참된 동학이고 남접은 겉으로만 동학이고 제멋대로 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시천교 역사>, 625-7).      

 

그러나 항일구국이라는 명분을 통해 남과 북접은 화해하고 북접의 손병희는 해월의 승인하에 10월에 1만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합류했다. 1894년 12월 5일 (음력 11월 9일) 동학 농민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일본과 관군의 우세한 화력에 의해 결정적으로 대패했다. 전봉준은 자신의 부하의 밀고로 12월 28일 (음력 12월 2일)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수운이나 해월에게서 농민전쟁이나 필연적인 폭력 혁명론은 이들의 종교사상과 윤리적 실천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수운의 보국안민은 해월과 전봉준에게도 이어진다. 그러나 전봉준을 심문한 공초 ( <전봉준 공초> 1895년 2월 초9일, 초초문목)와 재판과정을 보면, 전봉준은 동학이 "수심하여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 한다고 밝힌다. 봉기 당시 억울한 백성과 동학교도가 합했지만, 동학은 적고 억울한 백성이 많았다고 진술된다. 그는 대원군과의 모의 또는 연계설을 일체 부정했다. 전봉준의 "보국안민"은 대원군의 위정척화와 쇄국에 공유하는 바가 있지만, 억울한 농민들과 더불어 조직적으로 준비한 기포한 정치 혁명적 성격을 띈다.   

 

계보학적 문제틀

 

동학 농민전쟁이 근대를 열어놓은 민주주의 혁명인지 평가하는 데 논란이 있다. 동학 농민군은 제 1차 봉기과정에서 12개조 폐정개혁안을 지방과 중앙 정부에 제출했다. 폐정 개혁안은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 19 40>에 의하면 전주화약 (1894년 5월)이후 실시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노비제와 천민제 철폐, 청춘과부의 개가 허용, 지역과 문벌을 타파한 인재등용, 토지의 평균 분작 등 근대의 물꼬를 트는 혁명적 사상을 담고있다. 그러나 12개조 폐정 개혁안은 농민전쟁 당시 제출된 다른 폐정안들과 비교 해보면 성격이 다르다. 후자인 경우 대원군의 정계 복귀, 민씨 친적 부패관리들에 대한 징계와 파면, 삼정 (전정, 군정, 환곡)문란에 대한 시정, 개화시설의 운용반대 등을 담고 있다. 

 

오지영은 농민전쟁에 참여한 비중있는 인사이고 1926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38년에 초고본을 마쳤다. 그리고 1940년 간행본이 나왔다. 오지영은 농민군 지도자 출신이며 그의 체험은 회고록의 형식으로 기술되었다. 초고본이나 간행본에서 중요한 것은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하게 할 것을 공동으로 담고있다.

 

그렇다면 맹자의 '사회주의적 분배정의'는 동학의 새로운 정치혁명에서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실천적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17세기 중반 실학의 균전론 보다 더 진보적이며 '밑으로부터의 민중 민주주'의 성격을 갖는다. 16세기에 실패한 독일 농민전쟁에 비견 될 수도 있다.

 

조선 후기 토지 개혁론은 중국 고대의 정전법 (맹자)과 수나라와 당나라의 균전법에 의거했고, 1인 장정에게 경작가능한 면적 1경을 허락하고 조세를 내고 셍계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유형원 (1622-1673)의 균전론은 토지의 국유화, 경자유전 (농사를 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한다), 그리고 균등분배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맹자의 정전제에 가까웠다. 

 

동학혁명은 시천주를 너머 맹자의 정치사상을 조선의 상황에서 구현한다. 그러나 동학 농민전쟁을 다루는 다른 사료, 특히 <전봉준 판결선고서>에 나오는 폐정 개혁안과 맞지 않는 것은 여전히 문제틀로 남는다. 오지영의 <동학사>에서 언급하는 12 개혁의 토지균분 조항은 애초 농학군의 27개조항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15조항은 왕의 명령으로 양전사무를 총괄하고, 진황지의 개간을 독려하는 군전어사를 파견할 것을 요구한다. 18 조항은 대원군의 정계복귀를 말한다. 그리고 25 조항은 동학과 관련되어 갇힌 자들을 모두 신원하여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보면 동학농민 전쟁은 종교로서의 동학과는 구분이 된다. 수운의 시천주 사상을 단선적으로 전봉준의 동학전쟁의 사상적 토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동학농민전쟁은 대원군 정계 복귀와 연관된 쳑왜양과 농민의 정치투쟁인가, 아니면 오지영이 주장하는 것 처럼, 토지의 균분을 통해 근대의 평등주의와 사회주의를 여는 조선말기 새로운 근대성의 원류로 여겨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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