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신학의 지평

마태와 바울: 해석학적 접합(17)

파레시아 2023. 2. 6. 08:52

바울의 새로운 해석

바울의 메시야 이념은 유대 랍비적 신비주의와 묵시문학적 파국을 기독론적으로 접합시킨다. 재림의 묵시적 재난 (메시야 해산 진통)과 이스라엘의 구원 그리고 유토피아적 내주 (최종의 안식 ㅡ메누자; 고전 15)가 마가의 비부활적 체험을 보충한다.

랍비 유대교 (탈무드 Avodah Zarah 9a) 에서 메시야 주의는 신비주의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6000년 시대에서 2000년은 혼란의 시대, 2000년은 토라의 시대, 2000년은 메시야 시대로 분류한다. 2000년이 종결되는 마지막 시대에 메시야는 파국과 대재난으로 온다.

메시야 시대에 멍에를 매개하는 토라(미츠보)가 아니라, 쉐키나의 기쁨이 지배하며 메시야의 토라(용서와 은혜 그리고 정의)는 차별없이 보편적으로 실현된다. 미츠보의 주요계명(할레와 코셔규정)은 메시야의 기쁨의 날에 사라진다.
숄렘에 의하면 2000년 동안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야 시대에서 토라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타당성을 가지며 잘 이해가 될 것이다 (Scholem, The Messianic Idea in Judaism, 53).

이러한 메시아 시대는 벤야민의 메시야 시간에 관련되며, 진보사상에 기초된 야만의 문서의 지배를 멈추어 세우고, 메시야의 인정 정치에 참여하는 티쿤 올람(세계치유)의 차원을 갖는다.


바울: 메시야 정치와 민중

바울에게서 2000년 메시야 시대는 예수의 묵시적 인격과 부활에서 도래했고 그의 파루시아는 현재화된다 (제 2 파루시아ㅡ시간의 중심: 콘첼만). 바울은 차별없는 복음을 유대인과 이방인, 남성 자유 시민과 억압된 여성, 주인과 종을 위해 선포된다.

그러나 메시야 예수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희망으로 남아있다. 여기서 묵시적 예수와 민중(암 하 아레츠와 오클로스)은 특히 누가 복음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정의로 구체화된다.


바울ㅡ누가 학파에서 민중은 메시아 이념에 의해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고, 이들의 현재적 삶의 자리에서 메시아 백성으로서 새로운 출생 (새로운 피조물)을 경험하면서 메시아 공동체의 주체로 나타난다.
메시아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주체는 벤야민의 계보학에서 볼 때, 예례미아의 새언약(예레미아 31:31ff)의 쉐키나가 부어진 지금 시간의 카이로스이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혁명에서 새로운 생명(조에)을 이어가는 남은 자들이다.


예레미아의 새언약은 시내산 계약과 대립이 아니라 메시아 시대에 모든 인류의 마음에 부어지는 쉐키나의 사건이며, 이것이 일차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오며, 바울의 새언약의 복음과 새로운 피조물의 중심으로 등장한다ㅡ인자 예수와 그의 백성의 상관관계는 새언약으로 출현하며, 그의 백성 암 하 아레츠와 오클로스는 메시야의 백성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ㅡ이것이 메시아의 토라를 말한다. 로고스는 도시국가의 정치적 삶(비오)이 아니라 가장 비천한 세계(조에ㅡ호모 사케르)로 이어지고 자기를 비우셨다 (케노시스-아감벤).

마태의 묵시문학적 삶의 자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경계에 있던 마태 공동체에서 “토라”의 예수 (마태 5: 17-20; 23:1. 8-10)의 죽음과 부활은 구약의 묵시론적인 지평에서 해석된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묵시적인 현상, 특히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의 되살아나는 것이 증언된다 (마태 27: 51
-53). 미래에 일어날 이스라엘의 일반부활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현재화(프로렙시스)가 되며, 부활은 종말론의 묵시적 전망을 열어 놓는다 (마태 28:20).


마태복음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용서의 복음이며 (18: 21-35), 특히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예수를 이방인의 희망으로 말하고, 마가의 메시야 비밀을 보충한다 (마태 12:18-21). 흔히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직접적인 제자인 마태가 마가복음을 인용하고 영향을 받았다고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마태의 삶의 자리는 마가와는 많이 다르며 자신의 히브리적 전통과 묵시문학적 뱡향에 충실했다. 예루살렘 파괴 이후 시리아 지역에 넘쳐나는 백만여명의 유대인들의 고통스런 민중들이 있었다. 묵시론적인 파루시아 종말론은 공관복음과 바울에게 공통으로 작용한다.

이 지점에서 마태의 최후심판에서 너의 형제들 (아델포폰)가운데 지극히 적은 자 (엘라키스톤)는 유대인 형제를 가르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상에 대한 히브리적 언어형식인데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10:42) 냉수 한그릇 주는 사람은 자기 받을 상을 잃지않을 것이다.

이것은 오클로스와 예수를 범신론적으로 동일시하는 실존주의 시도와는 상관없다. 오히려 인자의 묵시적 재림은 다니엘 7장 22, 27절과 연관되며 거룩한 백성들의 권리를 회복하며, 영원한 나라가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Theissen, Sociology of Early Palestinian Christianity, 29).

마가복음 13장에서 묵시문학적 프레임은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하기 전 대재난(메시야를 탄생하는 해산진통ㅡ13:4-13) 이후 새로운 에온을 여는 우주적 대파국 (13:24)과 더불어 쉐키나의 영광에 쌓인 인자 메시야가 온다.

그러나 마태는 재림을 구체적으로 다니엘과 연관 지으며 오히려 오클로스에게 랍비의 토라를 배우라고 말한다. 메시야의 도래에서 토라는 여전히 중요하다 (마태 23 :1ㅡ3). 더 나아가 누가는 인자 메시야의 날에서 구원의 가까움을 말한다ㅡ이것은 바울적이며 랍비 유대교적이다. 구원은 심판과 파국으로 온다.

유대적 종말론의 이중구조

게하르트 숄렘에 의하면 할라카에서 메시야 이념은 에스겔의 메르카바 비전과 묵시문학에 짜여지고, 구원은 현재의 에온을 파괴하고 메시아 시대로 이행한다. 미가 7장 6절에서 예언되는 타락과 부패가 일어나며 개같은 세대로 변질된다. 예수가 말한 것처럼 마지막 때 믿음을 찾아 볼 수 없고 극심한 타락이 일어난다. 전쟁과 혁명과 거짓 예언자들의 출몰과 재난으로 인해 메시아를 해산하는 진통이 일어난다.

이후 우주적 대재난이 일어나는 묵시록적 구원이 나타난다. 메시아 지배는 역사에 속하며, 그러나 마지막 심판 이후 나타나는 유토피아는 처음의 묵시적 차원과 다르다. 구원의 대재난의 성격과 이후에 완성된 구원의 유토피아에 의해 보충되고 완성ㅡ이러한 이중구조가 메시야 이념에 결정적이다 (Scholem, The Messianic Idea in Judaism, 8-10).

이것은 진보사상에 기초된 서구 합리주의 전통이나 또는 지상에 천년왕국을 위한 기독교 종말론주의 (chilliasm)나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없는 사회와는 다르다.


마태와 바울은 묵시적 종말론으로 접합된다

에른스트 케제만에 의하면, 묵시적 종말론은 예루살렘 공동체와 더불어 이방인 교회의 모든 신학의 모태가 된다. 복음서에서 새로운 에온은 예루살렘에서 메시야가 출현하면서 시작된다 (마태 8:11, 누가 13: 8, 스가랴 2:11, 타굼 이사야 2:2).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은 묵시적 종말론을 실존주의적으로 환원시켜버리고 복음서에서 갖는 정당한 자리를 제고해버렸다.

마가는 처음부터 복음의 정치비판적 의미를 부여했다. 로마제국의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아버지 쥴리우스 시저가 살해당한 후 신격화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신성한 쥴리우스의 아들 또는 신의 아들로 불렸다. 그는 화육한 신이며, 세상의 구원자로 추앙되고, 새로운 세계와 평화와 복음을 가져온 자로 칭송되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제국의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직시했다 (마가 15:12-15) (Vermes, The Authentic Gospel of Jesus, 292).

Q자료에는 예수가 바알세불을 축출하는 어록이 비유가 아니라 제자들과 대화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QS 28). 마가의 복음은 미래의 묵시적 차원을 제거해버리는 실현된 종말론 (다드)이나 실존주의 개인 종말론으로 파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유형의 종말론은 묵시적 틀에서 실현되어가는 정치 사회 문화적 스펙트럼을 검토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인자의 파루시아에 관련되어있다 (마태 25:31- 46; 마가 13: 24-27).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심판의 자리에 앉지만 (19: 28), 누가는 유대 기독교적 공동체의 특권에 의심한다 (22: 30).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인류를 위한 주님이 되신다. 이것이 바울의 묵시적 입장이다. 묵시적 종말론은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울에게 공통적이다.

케제만은 마태복음을 근거로 묵시론적 전환을 하고 이전의 역사적 연구와는 달리 유대인 랍비 예수의 정치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케제만이 묵시적 종말론이 모든 기독교 신학의 모체가 된다고 본 것은 정당하다 (Kaesemann, The Beginnings of Christian Theology, 180).
케제만은 이전 귄터 본캄의 마태복음에 대한 양식사 비평연구의 한계를 넘어서서 마태기자를 최초의 크리스천 랍비로 파악했다.

예수는 랍비로 불린다 (23: 8ㅡ10). 토라는 일점일획도 보존되며 (5: 17-20), 마태는 율법주의적 유대 기독교인들을 대표한다. 이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의 리더쉽에 관련이 있다.
마태는 바울보다는 예루살렘의 헬레니스트 그룹과 스데반에 대립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린 양에 대한 예수의 제한적인 관심과 이방인과 사마리안에 대한 거부감은 마태의 신학적 한계로 드러난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파루시아는 랍비 유대교적으로 신학화된다. 하나님 없는 비인격적 실제에 대한 영적 투쟁 (엡 6: 10)은 묵시론적이며 사회비판적이며 세계를 치유하는 윤리적 헌신(티쿤 올람)이다. 예수의 마지막 파루시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과 더불어 살아있는 자들이 영광의 쉐키나에 의해 이끌려 부활하고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더우기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메시아의 시간의 관점에서 개인의 죽음과 부활을 마지막 때 묵시록적 재림에서의 부활과 동시대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의 변화교리 (칼 바르트)이다 (51ㅡ52). 이후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부활할 것이다. 그때가 마지막 (또는 안식)인데 메시야 예수는 역사 안에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과 사망을 폐할 때까지 다스리고, 메시아의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넘겨드리고,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 되신다 (15: 28)--최종의 안식(메누자).

이런 측면에서 마태의 묵시적 종말론은 바울과 접합되며, 바울은 그의 특이한 메시아 종말론과 남겨진 자들의 공동체에서 다니엘의 묵시와 지극히 적은 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차별없는 복음에서 스펙트럼을 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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