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신학과 사회철학

벤야민과 기술 합리성

파레시아 2023. 2. 4. 09:33

벤야민의 언어이론은 기술적 합리성과 변증법적 경험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그는 마르크스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 역시 은유로 파악하며, 이것을 상응으로 말한다. 상부구조는 은유적 사고의 최종교리이며, 이것은 언어적으로 하부구조와 관련된다. 그러나 상부구조의 변형은 하부구조에 비해 매우 늦게 발생하며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생산조건에 따라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것은 그의 예술 작품의 복제에 대한 분석에서 잘 볼 수 있다 (“The Work of Art in an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217-8).

근대사회의 기술복제의 시대에서 본래작품의 진정성과 아우라는 사라진다.  이것은 막스 베버의 합리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세계의 비주술화 현상과도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벤야민은 근대와 파시즘의 관계를 메시야적 카리스마 선동 (막스 베버) 과는 달리, 전쟁을 미학적으로 선동하는 데서 아우라의 붕괴를 본다.

“기술 복제의 시대의 예술작품” (1935)에서 벤야민은 파시즘의 예술적 선동과 기만에 주목한다. 파시즘은 프로렐타리아트 대중을 조직하고 이들에게 표현을 할 기회를 주지만, 소유관계를 변화 시키지 않는다. 예술이나 필름에서 제의적인 가치를 정치적으로 산출하면서, 파시즘은 대중을 침해하고, 정치를 미학화면서 대중운동을 위해 전쟁행위를 신성시한다.


제국주의 전쟁은 기술의 반란이며, 자본주의 과잉생산에서 실업과 시장의 결여로 인해 일어난다. 전쟁에서 예술적 만족은 기술의 변화를 통해 극대화 되지만, 아우라는 파괴된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파시즘의 전쟁미학에 대해 예술을 정치화하면서 도전한다 (“The Work of Art in an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242).

파시즘의 정치미학과 공산주의 예술의 정치화는 벤야민의 기술적 합리성과 변증법 아우라에 접근하는  이론과 거리가 멀다.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의 발전과 이에 결부된 근대적인 삶의 형식들에서 신화적인 반복 강요가 나타나는 것에 주목 한다.

벤야민의 계보학적 비판은 하버마스의 소통합리성을 기초로 하는 이데올로기 비판과는 결이 다르다. 유대적 메시야주의를 기초로 벤야민은 과거에 묻혀버린 지금시간의 새로움과 중요성을 위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것의 반복강요에 저항하며, 유토피아적인 내용을 채운다.


이것은 거대한 진보의 역사에 대항하는 희생자들의 유효한 역사를 복권시키며, 해방을 시도한다.

메시야적인 구조는 근대의 지속적인 동일성의 삶과 시간을 정지시키며 역사를 새롭게 열어놓는다. 이것은 역사를 멈춰 세우는 정지의 변증법이며, 당연히 여겨지는 것에 대해 문제틀 하는 사고이며, 현재를 과거와 교차배열 시키는 계보학을 말한다.

벤야민은 희생자들의 과거에 급진적 반성 (아남네시스)을 통해 개입하며, 구원의 새로움으로 충만한 메시야적 정치로 채우려고 한다.

이것은 역사 철학이 실종되어버린 니체의 권력의지나 진화론에 기초된 형이상학 비판, 그리고 심리학과는 다르다. 니체는 귀족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이며, 계몽주의 정치나 예속된 자들의 윤리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벤야민은 유대적 역사철학의 틀안에서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을 접합했다. 그의 계보학은 진보의 역사를 비주술화하는 특징을 가지며, 원역사가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등장하며, 사적 유물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벤야민의 미메시스 언어이론은 사적유물론을 경제주의로 환원 시키지 않는다.

단어는 이름으로 파악된다. 아담의 후예인 인간은 사물에 이름을 부여했다. 이름의 부여는 무명의 존재를 이름의 존재로 번역하는 것인데,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들어온다. 언어는 동물적인 본능의 형식이며, 표현의 방식에서 드러난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의 각인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경험과 지각은 언어의 모방적 능력을 통해 유사한 것을 지각하고 표현하면서 창조적이된다.


인류의 역사는 단순히 노동이 아니라 언어의 모방활동과 상응의 그믈망에서 사회 문화가 형성 된다. 이러한 언어의 활동은 자연과 생산과정에 유리되기 보다는, 이와 관련하여 새롭게 의미론적인 가능성을 드러낸다.  

본래적으로 자연에 의존된 미메시스 능력안에서 사회문화적 삶의 형식들은 인간의 세계가 되며, 의미의 풍부함과 근원이 담겨있다. 또한 그것은 유사한 것을 지각하고 재생산한다 (“Walter Benjamin,” 362).


사물에 대한 아담의 이름부여는 의미론적 작용의 원역사이며 하나님의 요청으로 오며, 후설의 지각작용(노에시스)과 의미대상(노에마)의 상관관계 와는 다르다.

이념과 사물의 관계는 하늘의 별자리 처럼 다양하게 드러나는 데, 이것은 후설의 생활세계 이론에 비교될 수도 있다. 역사는 일직선상의 균질적이며 텅빈 시간의 진보의 역사에 저항하는 다양한 하늘의 별자리로 이해될 수 있다.


벤야민에게 변증법 상상력은 헤겔-마르크스와는 거리가 있다. 다양한 이념과 내용들이 몽타주 처럼 엮어지기도 하고, 그의 내재적 비판은 예술작품을 모나드로 파악하고 예술의 전체이념에 관련 짓는다.

예술작품의 복제에서 기술합리성에 대한 변증법적 경험이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철학에서 벤야민은 정지의 변증법을 통해 사적 유물론을 계보학으로 변형시킨다. 하늘의 별자리 구조처럼 유대 메시야 주의와 역사의 천사에 대한 변증법적 이미지가 마르크스와 접합된다.


벤야민에게 더 이상 언어는 존재의 집 (하이데거)이 아니라, 상응과 미메시스에서 세속화된 메시야적인 약속의 내용을 담는다. 진보로 위장된 지배와 폭력의 집에 대한 비판에서 벤야민은 메시야의 도래를 지적한다.

언어는 메시야의 시간의 집이다. 흘러가버린 “지금시간”을 진보의 현재에 대립 시키는 것이 메시아적 정치라면, 그것은 역사적인 야만의 문서에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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