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성 원리와 아리스토텔레스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양자역학도 고전 물리학과 다를 바가 없다. 고전 물리학의 주객도식과 양자역학의 관계적 사유로 바뀐 것 밖에 없으며 보다 극심하게 몰아세우는 착취의 틀(Gestell)과 지배방식에 불과하다.
1945년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를 처음 만났다. 1953년 <기술문제>를 다루면서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을 언급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철학적 의미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1930년대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을 보면서 양자세계의 입자와 파동의 불확실한 관계 또는 상보성 원리를 오류로 비판했다. 닐스 보어가 주객도식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닐스 보어는 칸트의 인식론에서 물자체를 알 수 없다는데 동감했고 하이데거와는 정반대에 서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뷸확정성의 원리도 인과율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이데거는 비난했다. 하이데거는 자연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1924년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원자의 구조를 연구했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던 해 양자역학에 대해 발표했다. 원자의 세계에서 전자의 위치/운동량은 정확하게 측정할 수가 없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운동량의 퍼짐은 커지게 된다.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거시세계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량은 속도와 이동거리를 가지고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대포를 이용해 10 kg 포탄을 초속 300미터의 속도로 발사하면 몇분 후 어디에 떨어지는 알 수 있다,
고전 물리학에서 이것은 미래 예측의 결정론을 말한다. 하지만 미시세계에서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예측 결정론을 빗나간다. 전자의 운동량을 측정하는 순간 위치가 변하기 때문에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다. 또한 양자 역학에서 광자 (파동의 입자)나 또는 전자 (입자)는 파동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고 입자의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입자와 파동을 동시에 볼 수 없고, 이것은 상보성의 원리로 나타난다.
여기서 수학적 모델의 한계가 드러난다. 사실 하이젠베르크는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고전 물리학을 넘어서 자연의 세계에서 인과율의 불가능성을 말했다. 자연의 관찰을 기초로 과학이 미래를 산출하고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이젠베르크는 잠재성의 개념을 돌출하고, 근대 물리학의 개연성은 자연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범위를 포함하는 경향성으로 말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에 가까울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뉴톤의 결정론을 넘어서는 철학적 통찰을 배웠다.
파라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파라메네니데스는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시 알레테이아는 확고한 진리를 피력하고 이것을 이방의 여신 알레테이아에게 계시된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와 생성의 변증법을 말한다. 새로윰이 존재한다. 영원한 진리는 없으며 존재도 변하지 않은채 거기에 있지 않다.
뉴톤의 물리학은 파르메니데스가 옳다고 본다. 뉴톤의 이론은 결정론적이며 시간은 가역적이다. 새로운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세계는 기계처럼 운동법칙과 인과율에 따라 작동되고 미래는 예측가능하다.
철학의 영역에서 파르메네니데스는 하이데거에게 부동의 자리를 갖는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 진리 개념을 위해 탈취된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헤겔의 역사 변증법과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새로운 파라다임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주는 진화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팽창해지면서 어디론가 진행된다. 열역학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얄의 엔트로피의 증가로 인해 죽음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유기체의 자기조직화에서 자연의 창조성이 나타난다. 비평형의 무질서의 상태에서 자기를 조작하면서 새로운 존재가 충현한다. 이것은 소산구조를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 그리고 환경문화의 작용인을 거처 나타나는 현실태를 말한다. 존재의 선함은 여기서 목적론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현실태는 변화된 고차원적 존재이며 자연의 요동과 갈라치는 바평형의 상태에서 열린환경과 더불어 창조적으로 발생된 새로운 구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파르메네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논쟁을 넘어서서 유기체의 자기조직화와 자연의 창조성에서 비평형상태의 에네르기아를 드러난다. 이것은 근대 물리학 이후에 새롭게 만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일 수가 있다.
분자 생물학에서 세포의 삶은 네트워크로 서로 매개와 촉매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생산한다 (오토포이에시스). 여기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출현하는 알레테이아는 세포 유기체의 전체나 시스템에서 오토 포이에시스에서 대해 재해석될 수 있다.
유기체의 존재들애는 삶을 향한 열망이 있으며, 내트워크 안에서 심비오시스적인 가치를 드러내며 죽음을 피해가려고 한다. 이것을 나는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어 유기체의 생의 코나투스로 부른다. 저연안에는 생을 향한 가치와 창조성이 있다.
그런가하면 질서와 무질서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생의 형식이 창조적으로 출현한다. 우주의 생자체는 창조성이며 무질서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생의 창조적 발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 그리고 엔텔레키아를 생의 가치와 장 그리고 코나투스를 통해 새롭게 고려할 수 있다.
잠재태가 기능과 목적/완성을 향한 과정에서 생의 새로운 원리는 창발성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즉 잠재태와 현실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시아(본질)은 우발적으로 파악된다. 본질은 우발적 질료와 같이 진화하며 현실태는 네트워크와 패턴안에서 앙상블로 나타난다. 상호 연관성과 매개작용이 유기체의 발전에서 자연의 생의 세계를 공생과 합력으로 이끌어간다.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미래는 알려지거나 결정되지 않으며,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에 열려있다. 시간은 반복되지 않는 역사성으로 파악되며, 세계 또한 설령 이전상태로 복귀된다 해도 반복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니체의 영원회귀와 윤회의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 잠재적인 가능성 안에서 개별적인 다른 사건들이 현실화될 수 있다.
우연성과 잠재성이 자연세계의 객관성을 지적하며, 이것을 하이데거처럼 주객도식의 잔재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라는 사건을 지적한다. 더 이상 파르메니데스의 신화론에서 차용한 진리와 존재사건은 불확정의 원리와 비평형성의 소산구조그리고 자기 조직화에서 픽션임이 드러난다. 존재사건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자연환경이나 문화적 또는 사회적 에피스테메 또는 생활세계와의 부단한 엮여짐에 있다 진리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자연의 생의 특징으로 나터나는 창발성, 세포의 오토포이에시스 그리고 네트워크의 사고는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의 형이상학이나 사방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세계의 삶은 비결정적이며 신들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존재의 열어밝힘의 환상은 어렵다.
뉴톤 물리학의 결정성은 거시세계에서만 국한된다. 그렇다면 몰아세우는 틀로서 기술지배와 착취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기술을 하이데거처럼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시와 예술작품에서 찾지 않는다.
수학의 한계
수학의 구조에서 자연의 실재는 내재적인 목적에서 분리되며 진리는 선함에서 그리고 과학은 윤리로부터 분리된다. 자연과학은 목적론적 원인을 설명할 수 가 없다. 과학적 주체는 관찰과 측량과 산출을 하지만 윤리적이거나 미학 또는 정치적 영약에서 과학적 지배에 대한 비판적 대행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과학적 방법과는 다른 가치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과학적 이성은 물자체를 남김없이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마르쿠제는 하이젠베르크에 동의한다. 수학적으로 정초되는 것은 적은 부분에서 만 객관적 사실일 수 있다. 대부분은 가능성에 대한 조망이다 (Marcuse, One dimensional Man, 88).
수학화된 자연이 이데아적 실재 (형상)로 현상한다는 태도(피타고라스- 플라톤)는 문제로 남는다.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수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조그만 부분에 불과하다. 가능태에 대한 숙고는 보다 더 큰 부분에 속한다.
원자의 세계에서 사건, 관계, 투사 그리고 가능태는 주체의 관찰과 측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입자와 파장의 사건이나 관계자체의 구조에 의해서 과학적 주체에게 객관적으로 의미가 있다. 물질자체는 관찰하는 이성과는 독립적으로 즉 수학의 모델로 남김없이 사유되지 않는다. 과학적 이성이 객관적인 자연을 수학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공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수의 이데아론을 비판하고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으로 부터 온다고 보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과 변화의 세계관에서 감각대상들은 어떤 지속성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이 참이고 오류일 수 있다.
양자역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양자역학에서 두 입자의 측정문제는먼 곳에 떼어놓고 실험할 때 서로 얽히며 영향을 준다. 아인슈타인의 EPR 실험과는 달리 양자의 상태에서 서로 분리된 먼 거리의 두 입자는 서로 얽어져 있다. 더 이상 뉴톤의 운동법칙은 양자 즉 질료의 세계에서 타당하지가 않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국소성 (locality) 원리를 부정한다. 여기에는 두 입자를 매개하는 숨은 변수(데이비드 봄)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표현하면 질료는 형상과 얽어져 실체를 구성한다. 양자가 서로 분리되어 측정이 된다고 해도 형상은 떨어져있는 질료의 본질이된다. 질료는 본성적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존재하며 결함이 없는 형상을 질료는 열망한다 (< 자연학>1. 9).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이것은 양자의 얽힘과 측정문제에서 입증되고 벨의 부등식에서 숨은 변수이론은ㅡ분리된 두 입자를 매개하는 ㅡ거절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주의와 달리 보편자들을 개별자들과 분리 시키지 않았다. 개별자들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 귀납적 논변과 더불어 보편적 정의가 소크라테스에게 결정적이다. 질료안에 형상이 있다. 수학과 기술은 세계를 보편화하거나 환원시킬 수가 없다. 질료과 형상의 실체에서 형상은 자연이며 주어에 속하며 우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질료는 우발적으로 형상의 자연을 열망하며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를 통해실체를 완성 시켜나간다.
뉴톤의 f=ma는 양자의 측정에서 형상의 자연을 향한 질료의 활동과 힘을 표현하지 못한다. 실체(종합적 총체)가 분리된 개별 질료에 상호관련왼다. 입자와 파동의 상호 보충성은 형상에 연관되며 실체를 구성한다.
양자역학에서 과학적 주체를 위해 의미있는 객관성은 물질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관계나 투사 또는 사건이지 주체의 관찰과 측정에 있지 않다. 현대 물리학의 명제는 주체의 관찰 없이도 수학적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주체는 자연의 세계에 일부로서 관여하지, 더 이상 수학의 방정식을 통해 양자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
물자체는 인간의 마음과 독립해 존재하며 수학의 공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을 선결정하며 자연의 변형과 방향을 투사하며 전체를 조작한다. 인간존재는 자연의 도구성으로 이행한다. 데카르트의 인식(res cogtans)과 연장된 사물(res extensa)의 이분화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현대 물리학에서 연장사물이 인간의 인식주체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방향을 부여한다. 이것은 문화적인 생활세계와 자연의 생명권 즉 에코 시스템을 이분화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수학은 수학적 대상들을 사유안에서 인식한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보이는 감각적 사각형이지 무한퇴행을 통해 그 너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각형의 이데아가 아니다. 플라톤주의에 의하면 "수들은 분리되어있는 실체들이며 사물들의 원인들이다" (<형이상학> 1080a 13-14).
이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은 감각적 대상들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아데아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관찰하는 대상들을 다룬다고 본다. 이러한 대상들을 수와 양의 관점에서 수학은 고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이 실체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중요하게 고려했다. 수학과 관련된 기술 합리성 역시 목적의 선함의 빛에서 고려된다.
선한 삶의 목적을 위한 봉사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과학기술은 선한 삶의 목적의 빛에서 고려되어야한다. 그것은 경제 행위애서도 타당하다. 경제와 과학기술은 시민사회의 공공선의 지평에서 정의롭게 분배가 되어야한다, 이러한 입장은 하이데거의 과학과 기술 도피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의 가치와 생물학적인 생의 가치를 구분했지만, 상호 연관성을 인정했다. 문제는 자연적인 생에서 알레테이아의 출현과 인간의 사회적 삶애서 드러나는 알레테이아는 구분되어야한다. 생명의 웹에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상호 의존적이고 잠재태에서 현실태를 향한 목적론적인 열망을 갖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존엄성을 일반적인 자연의 생에 에속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술의 차원은 사회적인 삶에 들어와있고 노동을 해방시키며, 인간의 도덕은 기술에 의존되는 것을 간파했다. 과학을 통해 기술은 인간적인 것이돠며 오늘날 모든 일상의 삶에 들어왔으며 사회를 지배하지만 동시에 의료기술을 통해 생의 원리를 충만하게 한다. 기술과 도덕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추구하는 공공선에서 서로 엮어져있다. 기술은 단순히 수단이 아니라 삶의 선한 목적에 설정될 수가 있다.
과학과 기술은 '마음의 습관' (토크빌)에 들어와있으며, 이것은 사회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도덕과
지적인 경향성의 총체를 의미한다. 개인의 자유와 과학기술은 사회전체의 선함을 위해 기여할 수가 있다. 과학과 기술혁신에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은 공공선 정의과 더불어 자연의 생의 가치실현을 포함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접근은 심층 생태주의나 해방주의에서 처럼 안간의 가치를 일반적인 생의 가치나 생물학적인 생의 가치로 상대화하지 않는다. 생태학적 홀리즘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연의 생을 보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심비오시스에서 과학과 기술은 의미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결핍은 잠재태에서 현실태의 과정에서 폭력애 의해 사라져버린 희생자의 삶을 포함한다. 기술은 희생자의 삶을 회복하는 정의를 위해 사용되고 분배될 수 있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