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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이념형: 사회학적 분석

파레시아 2025. 2. 1. 08:03

 

사무라이 이념형과 민법

 

에도막부에서 사무라이들은 유교에 접했고, 난학의 영향울 통해 당대 유럽의 국제 정세 를 파악했다. 메이지 정부의 강령초안을 만든 샤카모토 료마 (1836-1967)는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배웠다. 당대 2000여명의 일본학자들은 의학, 해부학을 필두로 천문학과 물리학, 기계 문명 그리고 군사학에 관여했다. 이미 사쓰마 번은 난학의 연구로 서구문물에 개방적이었고 1855년 증기선을 만들어냈다. 같은 해 나가사키 해군 훈련 센터가 데지마 입구에 세워졌다. 에도막부는 1860년에 미국파견 사절단, 1862년 1차 유럽파견, 1863년에2차 파견 사절단을 보냈다. 서구문물과 부국강병은 메이지 유신의 토대가 된다.

 

조슈 번 출신인 요시다 쇼인 (1830-1859)은 사무라이의 이념형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유교와 난학의 영향을 통해 일군만민론—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 하다— 정한론, 대동아 공영론은 제국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서구문물을 배우기위해 해외로 나가야하고 서구열강의 희생자가 되기보기보다는 일본은 군사로 무장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풀뿌리 계층에서 영웅들이 막부나 영주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배출한 제자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과 산업화의 주역들이었다. 피살당한 아베 신조 전 수상 역시 죠수번 출신이며,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했다.

 

1876년 정부는 사무라이가 검을 차는 것을 폐지하고, 이들은 서구식의 복장을 하고 머리를 짧게 짜르고 사업에 관여했다. 1880년부터 정부는 국가 관영공장과 금융제도를 민간 자본가들에게 매각하고 정부의 비호 아래 산업과 금융분야를 지배하는 자이바쓰 재벌 (미쓰이, 스미토모, 마쓰비시)이 등장했다. 재벌은 유럽과는 달리 사무라이와 상인계층에서 국가비호로 나타나는 일본의 독점경제에 속한다.

 

로버트 벨라는 그의 “도쿠가와 종교”에서 일본의 근대성에서 중요한 동력은 경제 라기 보다는 국가에 있었고, 정토진종과 유교의 역할을 강조했다. 도쿠가와 시대의 종교 문화적 가치 체계가 무사도의 충성윤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서구의 민주주의와 시민개념은 찾아 보기어렵다.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 과정은 일차적으로 상부구조에 속하는 정치영역에서 일어났고, 경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새로운 산업영역에서 국가보조를 통해 주도권을 잡은 사람 들은 사무라이들이었다.

 

정치와 상인자본의 결합은 이미 도쿠가와 시대에서부터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상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무라이 정신”이 합리화과정을 거치면서 메이지 산업화와 자본 주의 발전의 중심에선다. 1867년 대정봉환으로 통치권이 바뀌었을 때 마쓰이 가문은 유신 정권에 줄을대고 있었고, 납품과 운송에 독점권을 따냈다. 사무라이 출신인 미쓰비시의 창업 자에게 무사도의 충성윤리과 국가이익을 위한 봉사는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니토베 이나자오(1862-1933)는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했고, 그의 책 『무사도: 일본의 영혼』은 영어로 출간된 매우 영향력 있는 책이다. 사무라이는 민족의 꽃이며 또한 뿌리이다. 사무라이에게 유교의 충성윤리는 천황숭배로 변형된다. 니토베에게 식민주의는 문명선교를 통한 식민지의 근대적 진보를 의미하며, 문명국이 낙후된 나라에 주는 문화적인 선한행동이다. 일본의 파시즘과 제국주의를 근대성의 토대로 보는 사람들에겐 관동군이 세운 만주국 (1932) 에서도 일본 정착민들과 한국인들과의 새로운 합력의 차원을 부각시킨다. 상호이익과 혜택을 주었고 조선의 근대성을 마련 해주었다고 말한다. 박정희의 조국의 근대화와 10월 유신의 계보학이 여기에 서있다.

 

그러나 근대성이란 제국주의자들이 호혜를 베풀어주는 무슨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근대성이란 봉건적인 제도와 삶이 해체되고 이성의 공적인 사용과 함께 잘못 된 권위와 전제 지배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성숙성과 관련된다. 국가와 종교는 서로 분리되며 개인의 삶에서 후견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사법체계는 삼권이 분리되며 시민이 정치적 주체와 경제활동을 주도한다.

 

전통이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새롭 게 민주적으로 반성하고 창조적으로 해석한다.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서 드러나는 가치들 즉 인권, 자유, 공공선, 분배정의, 밀려나간 자들과의 연대등이 근대성을 특징짖고, 이러한 가치 합리성이 근대를 가능하게하는 사회적 조건이며 바로미터들이다. 근대성의 성숙한 태도에서 식민주의나 파시즘은 날카로운 비판을 당하며, 새로운 근대성은 코스모폴리탄적인 환대와 국제 간의 합력의 틀에서 세워진다.

 

민족국가는 메이지 유신자체는 민주주의와 근대성과 아무런 상관없다. 서구에서 근대성은 산업화가 아니라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계몽주의 그리고 새로운 정치이념 등에 의해 결정한다. 산업화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근대화는 친왕신수설, 국가주도경제, 재벌형성, 그리고 사무라이 정신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결합하는 파시즘의 형태로 드러난다. 봉건제의 카스트 가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귀족제와 신분의 위계질서로 세워진다.

 

이것은 중국의 가치체계가 덕과 조화를 근거로 대동사회를 지향하는 것과도 다르다. 효가 황제에 대한 충성과 부딪치는 지점에서 가족시스템이 중국사회의 주요이념이 된다. 효는 도덕원리의 기초가 된다. “대학”의 첫장은 격물치지를 근거로 수신, 가정, 정치 그리고 평화가 사회의 전 영역에서 관련된다. 유교의 원리는 개인과 공동체안에서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시민사회적 특징과 민본 그리고 사회 경제적 정의를 담고있다. 개인의 자유는 사회의 자발적 결사체와 자율적 조직에서 합의를 통해 공공선에서 확립되며, 개인은 공민 또는 시민으로 살아간다. 중국의 도덕정치와 관료제에서 사무라이처럼 개혁과 근대화 과정을 파시즘이나 천황주의로 둔갑하는 실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일본은1890년 제국의 헌법과 1896년 시민법전 (민법, Civil Code)을 통해 서구의 열강들로부터 근대국가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19세 기 말부터 이전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들을 갱신해나갔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사무라이 출신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제국의 헌법을 손질했다. 천왕신수설을 기초로 천황은 국가종교인 신도의 수장이 된다. 국민은 시민이 아니라, 신의 자녀들이된다.

 

이런 점에서 일본에서 근대의 역사적 시기는 존재하지만, 근대성의 토대가 되는 사회 문화적인 조건은 없다. 근대적인 가치 합리성과 성숙한 비판태도 그리고 국가의 종교로부터 분리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불멸의 리비아단이 천황과 신토의 옷을 입고 신의 자녀인 국민들에게 절대복종을 강요한 국가주의가 일본의 근대시기를 말한다.

 

메이지 헌법은 프로이센 제국의 영향을 받은 잘못된 기형적 산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봉건적인 신분제는 여전히 유지된다. 천황이 임명하는 제국의 귀족제는 1869년부터 1947년 까지 유지되었고, 봉건영주인 다이묘는 화족신분으로 통합되고 5작위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으로 분류되었다. 겉으로는 사민평등이지만 기존지배층은 화족으로 유지된다. 귀족원은 황족, 화족, 국가에 공을 세우거나 학식이 높은 사람을 칙선의원으로 구성했다. 물론 중의원에는 평민들이 내각 의원으로 선출 되었다. 그러나 입법권은 천황의 권한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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