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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 해석: 헤겔과 이후

파레시아 2023. 6. 18. 00:43

 

 

필자가 유럽에서 공부할 때 참 난해한 두 사상가를 붙들고 박사논문을 썼다. 신학에서 칼 바르트 그리고 철학에서 헤겔이다. 비교연구 논문이라기보다는 접근에 불과했다. 헤겔해석 이나 입문에 관한 2차자료를 가지고 접근하기 위해서 허버트 마르쿠제, 쟝 이폴리트, 게오르그 루카치를 열심히 읽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남긴 사상가들 역시 대가들 이어서 누가 헤겔이고 누가 마르쿠제인지 또는 이폴리트인지 아니면 루카치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당시 바젤대학 철학과 헤니히 오트만 교수는 헤겔과 니체 전문가셨는데 이분의 헤겔 세미나를 열심히 쫒아 다녔던 기억도 있다. 헤겔을 니체와 연결지는 전망은 여전히 나에게 헤겔을 푸코와 들뢰즈와 더불어 사고하게 한다. 

 

바르트를 공부하면서 절대로 이차자료를 보지 말아야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나하면 바르트 해석의 대가인 헬무트 골비처나 프리델 마르크바르트 또는 에버하르트 융엘 역시 한 몫을 하는 신학자들이고 이들의 해석에서 바르트의 입장을 분리해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위대한 사상가들은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더 이상 빈곤한 후학들의 자리에 안주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도 공산주의를 유령으로 표현했나? 자리를 잡기보다는 붕괴 되었다고 말해 진다. 

 

버클리에서 나는 막스 베버와 미셀 푸코에 몰두했다. 헤겔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사상 가들이다. 헤겔은 가까이에서 읽으면 혼란스럽고 종잡기가 어렵다는 것을 유럽에서 깨달았다. 그래서 그와 멀리 서 있거나 반대편의 학자들을 공부하고 이들의 시선에서 다시 헤겔을 드려다 보려고 시도했다. 멀리서 보는 헤겔은 때론 가까이에서 보는 헤겔과 다른 매력을 줄 수 도 있다. 이것이 헤겔과 더불어 시작한 사회학의 여정이다.

 

논리와 개념원리

 

필자는 사회철학을 헤겔의 <대논리학>에서부터 배운다. 물론 새로운 사실도 아니고 마르쿠제가 그의 저명한 해설인 <이성과 혁명>에서 이러한 중요성을 언급했다. 많은 헤겔 학자 들은 <정신 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을 통해 사회학을 변증법적으로 전개했고, 파농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식민지투쟁에서 헤겔을 모방욕구와 인종차별을 넘어서게하는 칼리 반으로 읽기도 했다. 그러나 폴 틸리히는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을 서평하면서 헤겔철학에 담겨져있는 종교차원이 실종되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 적도 있다.

 

어째튼 헤겔의 <대논리학>에는 개념원리가 있다. 이것은 헤겔의 인정투쟁과 더불어 사회학적으로 독해될 수가 있다. 이러한 독해를 위해 장 이폴리뜨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이폴리트는 헤겔과 푸코를 이어주는그것이 반역이든지 아니면 새로운 접합이든지 간에매개 역할을 한다.

 

헤겔의 논리학은 이념의 학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유안에서 살며, 계시된다. 아리스 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의 결론에서 정치와 도덕의 영역을 넘어서는 신적인 삶에 대한 관조의 차원을 말하는 데, 헤겔에게도 나타난다. 신은 인간의 지성에 계시된다. 칸트가 실천 도덕 이성안에 하나님의 내재성을 언급한다면, 헤겔은 논리의 존재론에서 신성이 내재한다고 본다.

 

논리는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관여한다. 하나님의 내적인 삶 자체는 자체 안에 그리고 위하여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데 여기에 진리가 감추어져있다. 헤겔은 영원한 본질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감추어짐 내지 신비를 의미있는 언어를 통해 해명 하려고 한다. 이것은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말한다. 이것이 인간의 지성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신학에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계시해주는데서 그 신비와 감추임을 찾을 것이다 (Hegel, The Science of Logic, 29).

 

그러나 헤겔의 <대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 서 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지 성의 총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내적의 삶이 지성의 근원으로 파악된다면, 그리고 인간이 지 성을 통해 하나님의 내적존재에 참여한다면, 인간의 지성은 신성하다. 헤겔은 이것을 진리, 선함 그리고 자유의 이념을 통해 파악했다. 헤겔이 기독교 신학에 주는 통찰은 아리스토텔레스-토마 스 아퀴나스 전통을 루터의 신학과 철학적으로 매개해주는 데 있다.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카톨 릭과 루터란의 에큐메니컬 대화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해 아래 접합 되거나 매개되지 않은 거라곤 없다. 

 

헤겔의 개념원리는 이념에 일치하며, 헤겔은 이념안에서 인식 (진리의 지식)과 도덕적 행동 (선함의 실현)의 일치를 추구한다. 완전한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 도덕은 지식보다 우위에 있다. “선함의 이념은 진리의 이념에서만 완성을 갖는다” (Ibid., 731). 이것은 플라톤이 선함의 이념을 잠재적인 상태에서 파악한 것과는 다르다. 플라톤에게서 선함의 세계는 경험의 세계와 매개되지 않고 원형으로 남는다. 그러나 헤겔은 앎의 의지를 표현하고 자유를 향한 도덕의 원리 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에 선행한다. 물론 헤겔의 앏의 의지와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타협할 수 없다고 푸코나 들뢰즈는 주장한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정신의 운동은 이미 변증법적인 생성 (werden) 절차를 통해 힘의 차원을 포함한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절대지로 종결된다. 그러나 그의 <대논리학>은 존재로부터 시작하고, 존재에서 무로, 무에서 되어가는 존재로 나간다. ‘존재--되어감의 운동에서 카테 고리는 관계의 총체로 나타난다. 절대성은 존재-본질-개념의 총체적 관계에서 파악되는 데, 본질은 부정과 매개의 과정에서 현상의 실재에서 나타난다. 본질이란 인과율처럼 그냥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기들의 부정과 매개를 통해 대립들의 일치로 주어진다. 이러한 생성의 과정은 리좀(뿌리)적인 사유를 담는다. 우리가 흔히 현상적인 것보다 본질적인 것을 파악 한다고 말할 때, 본질은 이미 다양한 계기들의 대립과 매개과정을 통해 일치된 것이다. 다양한 계기들의 대립과 차이를 매개한다는 것은 절대적 동일성이 아니라 인정을 통한 일치를 향한 운동을 말한다.

 

변증법은 본질을 원인으로, 현상을 결과로 보기 보다는, 본질과 현상 간의 많은 다양한 계기들과 대립과 모순 그리고 부정과 지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총체성 즉 순환적인 시스템 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매개와 다름의 인정을 통해 대립과 모순을 넘어서는 이해능력과 개념적 통찰이 헤겔의 논리학에 결정적이다.  

 

예를들어 자본주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다양한 계기들 (노동, 자본, 임금, 자유계약 등)에서 나타나는 긴장과 갈등과 대립이 어떻게 매개되고 (정치적으로 든지, 경제적으로 든지) 사회적인 일치로 나타나는 것을 파악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본질과 현상사이에는 다양한 계기들과 인식론적인 환경과 문화가 존재하고 이것을 매개하고 개념적인 명료함으로 표현하고 자본주의 시스템과 구조를  파악한다.

 

예를들어, 이성애를 성의 본질로 이해한다면 여기에는 동성애라는 대립이 있고, 이러한 대립의 일치가 본질이 되는 데, 역사적 과정에서 어떻게 이성애가 동성애를 매개하면서 대립의 일치로 나타나는 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사회학적인 반성이 담겨져있다. 그러나 동성애가 매개하고 인정된다고 해서 동성애가 이성애자와 동일화가 되지는 않는다. 차이와 반복 (들뢰즈) 은 여전히 변증법적 절차에 인정과 매개를 통해 담겨져 있지만 헤겔은 이 부분을 충분히 사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에게 문제틀적인 영역에 속한다. 

 

존재의 변증법과 개념원리

 

존재는 의미의 세계에서 변증법적인 담론에서 부정의 긍정으로 표현되고 종합된다. 예를들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계기는 내가 여기에 없다는 무의 계기에 관련 된다. 그렇다 고해서 나란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존재 (이성애)와 무(동성애)는 되어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대립의 일치가 본질로 나타난다. 섹슈알리티의 존재가 이성애로 나타나든지 동성애로 나타 나든지 섹슈알리티의 본질은 이러한 대립의 일치로 파악된다. 이것을 매개하는 것은 인정개념 이다. 그러나 이것이 동일성의 원리를 말하지 않는다. 굳히 표현한다면 이성애와 동성애의 차이 는 인간성이라는 인정의 측면에서 권리의 민주주의적인 동일성을 지적할 수가 있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생각하는 나 (자의식)는 오성의 차원에서 개념의 본질로 구성되고, 외부적으로 주어진 대상들에 대해선험적인 감성(시간과 공간에 의해 설정되고 질서 잡혀 짐)과 카테고리를 통해표상을 대변한다. 여기서 경험이 인식론적으로 가능해지며 의식은 경험대상과 일치된다. 세계의 객관성 (만유의 법칙과 같은 물리적 질서와 인과율)은 인식의 카테고리를 통해 지각되고 이해 되는데, 이것은 선험적인 종합적 일치를 말한다. 칸트에게서 세계의 객관적 질서와 주관적인 선험적인 오성의 일치를 통해 경험이 인식하게 되는 데, 이것을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이며, 헤겔의 개념적 이해의 일차적 단계를 지적한다. 헤겔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전개되는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합을 가장 심오하고 진정한 통찰로 평가했다 (Hegel, Science of Logic, 515).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헤겔은 외부의 대상에 대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이해또는 성찰은 실재의 뿌리에 놓여 있다고 본다. 개념적 이해는 관계의 총체성이며, 이것은 대립과 귀납적 추론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변증법적 담론에 의해 작동된다. 이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들의 진리를 개념적 이해를 통해 보편성으로 변형시키고, 개념의 보편성은 절대적인 자기 동일성에서 나타난다. 자기 동일성은 스스로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는 자기전거인데내면적 이며 외면적인 것을 포함하는총체적인 반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며, 이런 점 에서 개념적 이해는 두터운 이해이며 해석학적인 차원을 갖는다. 이러한 자기 동일성이 부정의 부정은 타자에 대해 무해의 원리를 담고있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적 통각은 주관의 선험성과 세계의 (선험적) 객관성이 일치되는 상응 구조 또는 인식원리로 표현되지만, 이것은 헤겔의 물자체를 파악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물자체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오성의 범주안에 들어오지 않는 데 이것이 칸트의 인식원리이다.  

  

개념적 성찰의 사회학

 

헤겔에게서 개념은 객관적인 실제의 영혼 즉 보편성을 드러낸다. 개념은 진리에 대한 인식과 자의식의 자유안에서 특수한 것을 재생산하면서 발전시킨다. 그것은 자기변형과 자유 로운 주체의 현실화를 이룬다. 보편적인 것은 자유로운 능력이며, 타자에 도달하며 이 안에서 쉼을 쉰다. 그러나 개념적 이해와 성찰에 근거된 보편성은 타자에게 해로움을 끼치지 않는다. 개념적 이해와 보편성은 자유로운 사랑이며, 끝없는 지복의 상태로 불린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며 자유는 사랑 안에서 서로의 인정을 통해 지복의 상태로 나타난다. 자기 동일성은 타자에 대한 무해의 원리를 담는 민주주의적인 동등성을 담는다.   

 

개념은 사회을 파악하고, 외부의 세계를 자기실현으로 통섭하는 데, 이것은 창조적인 능력과 자유, 비폭력 그리고 인정원리에 기초한다. 이러한 창조적인 힘은 개념적 파악안에 있으며 비폭력과 자유 그리고 타자에 대한 무해를 강조한다. 힘에의 의지란 헤겔적인 의미에서 이성과 자유 그리고 창조성과 관련된다. <정신 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투쟁에서 인정은 투쟁에서 승리한 노예로부터 주어진다는 점에서, 이것은 <도덕의 계보학>에서 드러나는 니체의 주인과 노예의 도덕 투쟁과는 다른 방향을 지적한다. 니체가 억압의 노예가 귀족에 대한 원한을 통해 역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에 혐오를 표현하고, 유대 개독교 전통을 도매금으로 허무주의의 원류로 비판할 때, 그것은 지극히 나이브한 것이다. 헤겔은 정반대로 역사의 투쟁엫서 승리한 노얘로부터 이전의 적수인 주인에 대한 인정을 통해 너와 나는 우리라는 동일화로 간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화는 자기부정을 통한 인정을 지적하지 모든 다름과 차이를 평준화해버리는 집단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헤겔은 자기실현의 최고형식을 이념으로 부르며, 이 단계에서 개념은 실재와 일치가 된다. 자유와 진리 그리고 선에 기초된 이념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체안에서 대립을 포함하고, 영원히 대립을 산출하고 극복하고 절대 이념으로 재결합한다. 이러한 생성의 과정에서 타자의 다름에 대한 인정과 무해는 여전히 중요하다. 개념적 성찰은 인정원리와 더불어 헤겔의 변증법적 사회학을 현상학적 으로 전개한다. 이것은 헤겔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거절하는 들뢰즈의 구상력에 기초한 이미지 철학과는 다르다.

 

이미지가 아니라 개념이 사물들의 다양한 계기들에 조응하며, 존재의 이성적 구조 즉 로고스와 이성의 세계를 지적한다. 개념원리는 창조적 능력을 가지며, 창조성은 개념의 가장 심오한 핵심에 속한다. 개념적 이해의 총체성에서, 다양한 계기들의 내적인 연관이 드러난다. 이것은 본질원리 이며,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자유로운 능력과 상호간의 사랑과 지복으로 특징 짓는다. 여기서 타자에대한 무해의 원리가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성애 (정체성)가 대립인 이성애(타자)를 변증법적 일치를 통해 섹슈알리티의 본질을 구성하지만, 헤겔에서 본질은 개념적 이해의 단계에서 타자인 동성애를 배제하거나 폭력적으로 제거하지 않는다. 상호주관적 관계에서 다름의 인정은 자유와 창조 그리고 사랑 즉 무해의 원리로 나타난다. “상대방을 해롭게 하지마라”—개념의 비판이론은 세계를 자유와 사랑, 창조성 그리고 이성으로 침투한다.

 

주인과 인정투쟁에서 사회학적으로 전개된 모델은 이제 개념원리에 일치하여 이성적인 세계구성으로 나타난다. 인정원리와 더불어 사회구성은 개념원리에 의해 스며들며, 시민사회는 경제적 위기와 빈곤과 투쟁이 아니라, 인륜적 국가와의 관계에서 자유, 사랑, 창조성, 그리고 지복으로 변형 되어야 한다.

 

헤겔에게서 모든 것은 목적론적으로 이성이나 이념에 의존되며, 이것은 사회문화적 세계의 근거가 된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이성적인 것 (이념인정과 개념원리)이 현실에서 구체화될 때, 현실성은 이성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되어감과 실현의 차원을 지적한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이성적인 것은 아직 현실적이 아니며, 현실적인 것은 아직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개념적 이해에서 이러한 일치가 가능하며 여기서 세상을 변혁하는 실천이 나타난다.

 

이성과 현실의 변증법적으로 매개되는 과정에서 대립, 갈등, 파열 그리고 혁명이 존재 한다. 그러나 혁명은 폭력이나 절대자유에 기초한 공포정치로 변질되기도 한다. 힘에의 의지에서 다시말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혁명의 진보에는 여전히 야만과 폭력이 존재한다. 이것은 사이비 진보를 말한다. 적어도 헤겔에서 혁명이 가능한 것은 인정과 개념원리에 의해 자유와 도덕(타자에 대한 무해)과 창조성의 진보란 차원에서 중요하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대논리학>에서 사회학적으로 접합되는 내용은 인정투쟁과 개념원리를 통해 나타나는 새계변혁의 실천성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생사를 건 인정투쟁은 죽음을 향한 불안으로 끝나지 않고, 노동에 의해 매개되지만, 또한 해방의 담론과 아첨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디드로의 풍자국 <라모의 조카>에 대한 헤겔의 보헤미안적 이성은 매우 중요 하다. 라모의 조카는 형식화된 공리주의와 절대자유의 공포정치로 인해 사라지지만, 이러한 사라짐은 다시 역사에서 회귀하고 차이와 다름과 부정의 매개로 나타난다. 개념적 성찰을 통해 인정개념과 보헤미안 이성은 사회와 세계를 재구성하는데 창조성과 남을 해롭게 하지않는 태도 와 더불어 통전적인 부분이 된다. 변증법적 사유는 다름의 인정의 차원에서 자체상 문제틀하는 사고이며, 세계와 사회를 개념적 성찰에 의해 이성원리에 일치하여 실현하려는 변혁의 실천성을 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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