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가 읽은 성서와 정치(23)
스피노자가 새롭게 발견된다
바룩 스피노자 (1632-1677)는 17세기 화란의 유대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1656년에 파문당했다. 스피노자는 당대 데카르트와 더불어 근대성의 철학을 열어놓은 사람이었고, 헤겔과 쉴라이에르마허에게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스피노자를 다시 복원시킨 사람은 프랑스 철학가 루이 알뛰세와 에티엔느 발리바 그리고 질 들뢰즈이다.
신학의 영역에서 쉴라이에르마허는 그의 초기 저작 <종교에 관한 담화>에서 스피노자를 성령으로 넘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또한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피노자는 아코스미즘 (acosmism)의 사랑으로 우주를 덮었다.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해서 스피노자에게서 우주와 자연의 차별이 사라지고 우주와 자연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리와 사랑으로 채워진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 (하나님)를 정신으로 표현하고, 역사와 사회적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의식적인 삶을 변증법적 현상학으로 발전시켰다. 한편 들뢰즈는 스피노자에게서 몸의 철학을 발견하고 힘의 중요성을 보았다. 스피노자의 삶과 힘의 의지(코나투스)가 니체에게 반향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는 헤겔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스피노자를 반복과 차이의 철학자로 자리매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스피노자를 탁월한 성서해석 방법을 가르치고 여기에 기초한 시민국가 이론가로 이해한다. 종교와 정치의 조화를 위해 <신학 정치선집>에서 스피노자는 모세의 토라계약을 근거로 사회계약을 다루고 민주주의 시민국가를 제시한다. 권리와 능력을 고려할 때 남녀간의 차별이나 지성의 차이는 상관없다. 심지어 바보나 미친사람들을 포함시킨다 (16장).
이것은 자연의 체계안에서 부분의 상호관계을 통합하는 평등한 사회구조를 말한다 (Balibar, Spinoza, The Transindividual, 8). 모든 개인들은 시민국가의 일원들로서 이들의 자유와 자율성 그리고 안전과 평화가 보호되어야하며, 이것을 위해 국가에 복종한다. 국가는 이들의 코나투스와 삶의 의지와 힘의 증강을 위해 유용한 역할을 해야한다. 이러한 유용성이 상실되는 곳에서 국민 주도권에 의해 개혁과 혁명을 위한 가능성이 주어진다.
스피노자는 중세기 최고의 유대 사상가 모세스 마이모니데스 (1138 -1204)의 영향 아래 있었고, 데카르트의 의심의 철학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한계를 그의 "본체(신)-속성-양태"의 틀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상호연관적으로 개념화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생각하는 인간을 아르키메데스 점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인간을 몸이 없는 유령처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피노자와 성서 해석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는 탁월한 성서 해석가였지만 지금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는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나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절 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유명한 그러나 종종 오해된 표현 "하나님 또는 자연" (Deus sive natura)은 하나님과 자연의 동일성을 말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자연 안에 부패와 타락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서신교환에서 자신의 입장을 하나님과 자연의 동일성이나 범신론으로 비판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오해라고 해명했다.
놀랍게도 스피노자는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사도 바울에게 공감을 표시했다. 스피노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을 통해 오늘 믿음의 공동체에 이어지며 구원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다. 스피노자는 이런 그리스도를 믿는 당대 가톨릭이나 정통파 칼빈주의자들이 왜 그토록 권력을 탐하고 악행을 저질렀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는 포르투갈에서 박해 때문에 피신한 사람들이었고 겉으로는 기독교인 행세를 했던 (마라노스)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종교의 권력을 가진 칼빈 정통주의들을 지지하면서 동인도 회사에서 수익을 벌어 드렸다.
스피노자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와 정권의 추악한 연계를 비판하고, 성서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이성적인 이해없이 맹신을 비판한 것은 사실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위험한 것이었다. 이런 위험을 감지한 유대인들이 스피노자에게 뇌물을 건네주고 회유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절당하자 그를 범신론자나 무신론자로 중상비방하고 살해하려고 한 것도 이런 정치적인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더우기 당시에 샤베테이 즈비(16 26- 1676)의 집단적인 메시야 광신운동이 맹위를 떨쳤지만, 즈비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는 즈비나 그의 추종자들이 아니라 스피노자를 파문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사상을 검토해 보면, 그는 오늘날 여전히 정통파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는 모제스 마이모니데스 사상의 전통에 서 있고 그의 한계를 넘어서는 통찰을 담고 있다.
스피노자가 쓴 사뱌테이 즈비의 메시아 운동에 대한 서신은 실종되었지만, 그의 메시아에 대한 개념은 오히려 메시야 예수에게 더 많은 친화력을 보인다.
스피노자는 예수를 유대의 생활세계, 즉 쉐마 이스라엘에서 파악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과 사랑의 계시를 보았다. 모세의 율법과 다른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스피노자는 하나님 나라와 정의가 가장 위대한 선을 보았다 (마태 6:33). 그는 랍비 예수가 메시아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마음으로 소통했고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들에게 계시되었다고 말한다 ( <신학정치론> [24]).
스피노자의 지성과 코나투스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만물의 척도나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인간은 데카르트처럼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생각과 몸은 이분화가 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신(무한성), 인간의 정신 (res cogitans) 그리고 연장된 사물(res extensa)에서 각각 보았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서 하나의 실체는 부동의 동자(아리스토텔레스)처럼, 능산적 자연(신)이지만 여기서 부터 생산된 소산적 자연이 나온다.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세 가지로 분류 되지만(신, 인간정신 그리고 몸), 몸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기 어렵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이러한 분리를 거절하고, 능산적 자연 (실체)에서 파생되는 소산적 자연안에 모든 생명과 다양한 존재들와 사물이 통합된다. 이것이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양태들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신의 속성은 사유와 연장이며, 하나님의 영원성이나 완전함 또는 지혜나 자유와 사랑 등은 그분의 속성(사유와 연장)을 고려하면서 양태들로 정의될 수 있다.
실체-속성-양태는 능산적인 신의 특질을 드러내는 데, 인간의 양태는 생각하는 사물(정신)과 몸 (연장된 사물)의 유기적인 결합이다. 코나투스는 모든 개체에 존재하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자기보존의 힘이며, 외부의 사물을 향해 충동을 일으키는 욕망의 확장개념이다. 인간에게 코나투스는 삶을 향한 힘이며, 창조력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인 결핍이나 부재와는 달리 힘의 충만함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신의 창조는 원초적 코나투스에 기인하며 오히려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한 것처럼 성령의 권능을 표현할 수가 있다. 코나투스는 삶의 의지이며 인간의 양태와 속성에서 작용 되지만 여전히 신의 실체로부터 파생한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세계의 양태들에 성령의 권능으로 임재하지만, 여기에 제한되지 않는다.
모든 양태들은 쉴라에르마허의 표현처럼 절대적으로 이러한 신에게 의존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조야한 범신론이나 무신론과는 다르다. 오히려 히브리적 유일신론을 실체 철학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세계를 창조하는 인격적인 신개념은 없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신은 성령을 통해 자연을 창조하고 내재한다.
인간은 이러한 신의 코나투스와 삶의 의지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몸의 영향을 받으며, 인간의 몸은 다른 인간의 몸들과의 상호 연관성안에 있다. 마음과 몸이 신의 속성으로서 하나이며 다른방식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여전히 스피노자는 영혼불멸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적인 코나투스나 삶에 위배되는 외부적 욕망을 통해 이성을 거스를 경우 불행한 삶과 악이 나타난다. 이성은 창조적인 코나투스와 삶의 의지를 쫒아가며 확장시키는 능력이다. 신의 본질에 접근하는 인식은 직관적 지성에 기초에 근거되며 감각이나 억측 또는 상상력과는 다르다. 물론 인간에 공통된 관념은 객관적 사물에 대한 것이며 서로 일치한다 (정신과 사물의 일치)ㅡ이것은 학문을 가능하게 하지만 신의 본질에 접근하는 단계의 인식에 미치지 못한다.
신의 본질직관은 관조적인 차원에서 적확한 관념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신의 영원성의 관점에서" 세계의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유기체를 파악하는 신의 본질직관은 무우주적 직관을 말하며, 진정한 자유는 여기서부터 온다.
"아름다운 영혼"과 사회계약
헤겔은 스피노자나 쉴라이에르마허를 "아름다운 영혼"으로 파악하고 감각과 지각의 상상과 억측을 넘어서지만, 여전히 사회안에서 상호주관적으로 매개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러한 이성능력과 코나투스를 통해 윤리의 중요성을 발전시키며 시민국가의 필요성을 말한다. 시민국가는 남에게 해로움을 방지하고 잘못된 욕망을 억압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홉즈의 <리비이어던>을 평등 민주주의와 사회계약을 통해 발전시켰다. 스피노자의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바울의 자연법에 기초한다 (롬 4: 15; 5:13). 그는 바울의 국가론을 존중했다. 아름다운 영혼과 사회계약은 헤겔의 스피노자 비판을 무색하게 한다. 삶과 힘에의 의지와 욕망이 스피노자의 아코스미즘과 정치철학의 토대임을 헤겔은 간과했다.
그러나 자연의 상태에서 고양이는 사자의 법에 따라 살아야한다ㅡ스피노자는 자연 낭만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다 ! 모두가 이성의 안내가 아니라 쾌락과 탐심과 분노등에 의해 지배된다. 힘과 권력에대한 스피노자의 반성은 마키아벨리의 영향에서 온다. 이러한 정치현실주의는 홉즈의 <리비이어던>에 절대적 주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자연정치철학에서 자연의 권리와 힘은 서로 비례하며 나타난다. 엄연한 약육강식의 현실이 지배하며 이것은 자연법에 기초한 규범적인 정의(존 로크)와는 다르다. 개인의 자연적 권리가 힘에의해서 결정된다면 계약은 쉽게 파기된다. 사회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개인은 모든 힘을 사회로 이전시키고, 사회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고의 자연법을 가져야 한다.
모든 개인은 이런 주권지배에 복종해야하지만 모두가 평등하다. 이러한 주권은 민주주의에 기초되어야하며, 사법적으로 보호되고, 인간의 일반의회가된다. 이러한 정치기구에 모든 개인이 계약을 하며, 주권정부는 개인의 모든 권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평화를 유지한다. 이것은 국민의 권리와 삶을 위한 국가의 유용성을 말한다. 국가는 집단개인으로서 시민 개인과 유기적 관계에 있다. 국가의 법은 지배자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행복을 위해존재한다.
스피노자의 자연정치철학은 코나투스와 힘의 증강에 있으며 이것이 인간의 본질을 규정한다. 이러한 규범적 정의를 위해 국가는 민주주의적 틀에서 개인의 삶과 힘을 증강해야한다. 스피노자는 홉즈가 예견하는 인간의 자연의 상태의 무질서와 폭력에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 입장에서 동의하지만, 스피노자의 사회계약론은 루소처럼 국민주권에 기초한 공공선과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신 인식론과 성서의 신성함
스피노자의 인식론--신은 신으로부터 이해된다--은 데카르트의 인식론 "신은 생각하는 나로부터 이해된다"는 인간 중심론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사고와 물체의 연장을 통해 자신의 속성을 자연의 세계에 임재한다. 성서는 이성과 합리적인 이해에 따라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와 진리를 드러낸다.
성서는 성서의 세계로부터 이해된다. 인간의 추악한 물질적인 이해관계나 정치권력 또는 마술적인 생각들을 외삽법적으로 갖다 붙여서는 안된다. 성서는 신의 영원한 진리를 통해 내재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연해석을 통해 성서와 계시의 언어를 파악하려고 한다. 신의 실체가 자연에 내재하지만 다양한 양태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자연의 세계와 삶의 의지(코나투스)는 성령의 무우주론적 성격에 기초된다.
스피노자는 성서학자로서 히브리어 문법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를 통해 유클리드처럼 명료하게 성서를 이해하려고 했다. 성경에서 구원과 지복은 마음의 진정한 평화에 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성서의 주제로 설정하고 초첨을 맞춘다.
스피노자의 정치이론은 1670년도에 일어난 화란의 정치적 혼란에 관련된다. 그가 지지했던 리버럴 정치지도자 얀 데 비트와 그의 형은 집단적인 광기와 폭행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스피노자는 이런 집단적 야만에 분노를 했고, 미완으로 남겨진 말년의 <정치선집>의 배경이 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사법의 정의와 선거에 의해 다루어지지만 여성에 대한 제한적인 권리는 문제로 남는다. 삶의 의지와 욕망에서 부터 나오는 선한감정에서 기쁨은 사랑에 근거한다ㅡ사랑이 기쁨의 근거이며 나의 지성을 돕는다.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인 지적 사랑에는 이러한 선한 감정이 담겨져있다. 이것은 무우주적 사랑의 차원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자연의 세계, 다시 말해서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지 않은가? 성서가 도덕적 가르침을 말할 때 우리는 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ㅡ이것은 성서의 신성함이다."성서에 대한 모든 지식은 오직 성서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신의 속성은 지성과 자연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신에 절대적으로 의존되며 영원하신 그분으로 부터 생명과 사랑의 의지를 위해 끊임없이 성령을 받는다. 이러한 성서접근을 통해 스피노자는 성서전체가 히브리적인 의미로 표현 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예수의 언어와 행동을 히브리적 세계 안에서 파악했다.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스피노자가 예수를 모세보다 더 높게 평가한 것은 놀랍다.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예수는 누구였나?
칸트와 코나투스
칸트는 "코스모폴리탄 의도성과 보편사 이념"(1784)과"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기고문을 같은 해에 발표했다. 이 두개의 논문들은 <실천이성비판 , 1788>보다 앞서있고 칸트의 도덕철학의 역사 사회학적 변증법을 보게 해준다. 계몽은 권위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하며, 사회문제들에 대한 비판과 이성의 공적사용에 관련된다. 이것은 외부의 후견이나 감독으로 부터 탈출하는 인간의 성숙성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성서해석은 칸트의 계몽을 지지하며 종교와 국가의 연계즉 종교가 국가권력에 관여하는 것을 비판한다.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며, 오히려 국가종교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스피노자는 종교적 관용과 시민사회의 덕목을 위해 보편적 시민종교를 고려한다. 이것은 루소의 시민종교나 칸트의 도덕종교에서 발견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1781>에서 현상계의 인간은 본체계(물자체)의 영역(신의 존재, 영혼불멸, 자유의 이념)을 인식할수 없다고 보지만, 실천이성에서 인간은 의지의 자유와 자율성을 통해 본체계의 인간이 된다. 이것은 인간이 선험적 -경험적 영역에 관련된 이중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칸트는그의 보편사 이념에서 인간의 자유는 자연의 세계에서 결정 된다고 말한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 전개와 진보를 의미하며, 이것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코나투스를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서 드러나는 자기보존과 확장하는 내적인 노력 내지 욕망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경향이 마음에 연관될 때 그것은 의지가 되며 몸과 마음에 관련될 때 욕망이 된다(The Ethics, III. 6). 선한 것은 우리가 욕구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선한 것으로 판단한다. 삶과 창조의 의지를 확장시키는 인간의 이성과 여기에 규정된 행위는 항상 도덕적이며 선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욕구들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있다. 그러나 신에대한 지적 사랑은 이성의 명령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선이다. 이것은 신을 향한 무우적 사랑이다.
스피노자의 윤리는 칸트에게서 역사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심화된다. 모든 개인들은 자연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내적인 노력과 욕구를 통해 추구하지만 결국 자연에 의해 인도된다. 칸트에게서 선한욕망과 도덕감정은 제거되지 않고 실천이성을 보조한다.
칸트의 자연이론에는 인간들 안에서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지만 이성은 자연적 본능을 넘어서서 여러가지 시도들과 경험과 정보를 통해 실패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진보한다. 인간의 모든 탁월한 능력들은 호전성, 경쟁, 소유와 지배를 향한 지칠줄 모르는 욕망을 통해 발전한다.
칸트에게서 욕망구조는 사회안에서 빚어지는 그룹간의 적대감에 기초되며, 이러한 적대감이 사회의 법적질서의 원인이 된다. 칸트는 이러한 적대감을 "비사회적 사회성"으로 표현하며 루소의 불평등기원과 사회계약론에 기초해 시민사회를 기획한다. 인간의 선험적 자유 (본체계의 인간)는 경험적 영역에서 사법과 정의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시민국가에서 현실화된다.
칸트의 인간에 대한 선험적-경험적 이중구조는 적대감과 전쟁상태를 역사 사회학적으로 반성하면서 (스피노자의 자연적 현실주의) 코나투스를 이성과 연민 그리고 도덕감정을 통해 시민사회 안에서 영구평화와 환대의 윤리를 위해 코스모폴리탄 사회로 확장 시킨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제 1공화정부를 지지한 칸트의 면모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