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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칸트와 쇼펜하우어 사이에서

파레시아 2025. 1. 23. 03:56

칸트와 코나투스

 

칸트는 "코스모폴리탄 의도성과 보편사 이념"(1784)과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기고문을 같은 해에 발표했다. 이 두개의 논문들은 <실천이성비판 , 1788>보다 앞서있고 칸트의 도덕철학의 역사 사회학적 변증법을 보여준다. 계몽은 권위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하며, 사회문제들에 대한 비판과 이성의 공적사용에 관련된다. 이것은 외부의 후견이나 감독으로 부터 탈출하는 인간의 성숙성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성서해석은 칸트의 계몽을 지지하며 종교와 국가의 연계 즉 종교가 국가권력에 관여하는 것을 비판한다.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며, 오히려 국가종교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스피노자는 종교적 관용과 시민사회의 덕목을 위해 보편적 시민종교를 고려한다. 이것은 루소의 시민종교나 칸트의 도덕종교에서 발견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1781>에서 현상계의 인간은 본체계(물자체)의 영역(신의 존재, 영혼불멸, 자유의 이념)을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천이성에서 인간은 의지의 자유와 자율성을 통해 본체계의 인간이 된다. 이것은 인간이 선험적-경험적 영역에 관련된 이중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칸트는그의 보편사 이념에서 인간의 자유는 자연의 세계에서 결정 된다고 말한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 전개와 진보를 의미하며, 이것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코나투스를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서 드러나는 자기보존과 확장하는 내적인 노력 내지 욕망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경향이 마음에 연관될 때 그것은 의지가 되며 몸과 마음에 관련될 때 욕망이 된다(The Ethics, III. 6).

 

선한 것은 우리가 욕구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선한 것으로 판단한다. 삶과 창조의 의지를 확장시키는 인간의 이성과 여기에 규정된 행위는 항상 도덕적이며 선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욕구들은 선할 수 도 있고 악할 수 도있다. 그러나 신에대한 지적 사랑은 이성의 명령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선이다. 이것은 신을 향한 무우적 사랑이다.

 

스피노자의 윤리는 칸트에게서 역사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심화된다. 모든 개인들은 자연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내적인 노력과 욕구를 통해 추구하지만 결국 자연에 의해 인도된다. 칸트에게서 선한욕망과 도덕감정은 제거 되지 않고 실천이성을 보조한다.

 

칸트의 자연이론에는 인간들 안에서 대립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성은 자연적 본능을 넘어서서 여러가지 시도들과 경험과 정보를 통해 실패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진보한다. 인간의 모든 탁월한 능력들은 호전성, 경쟁, 소유와 지배를 향한 지칠줄 모르는 욕망을 통해 발전한다.

 

칸트에게서 욕망구조는 사회안에서 빚어지는 그룹간의 적대감에 기초되며, 이러한 적대감이 사회의 법적질서의 원인이 된다. 칸트는 이러한 적대감을 "비사회적 사회성"으로 표현하며 루소의 불평등 기원과 사회 계약론에 기초해 시민사회를 기획한다. 인간의 선험적 자유 (본체계의 인간)는 경험적 영역에서 사법과 정의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시민국가에서 현실화된다.

 

칸트의 인간에 대한 선험적-경험적 이중구조는 적대감과 전쟁상태를 역사적으로 반성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오성의 순수개념들의 도식절차" ( A137-147/B 176-187)를 다룬다. 구상력의 재생산(이미지)와 도식작은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시간의 계열과 내용, 질서 그리고 시간의 전체에 따라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범주에 매개한다.개념을 시간화되고 살아있는 인식이 되며 인간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된다. 선험적인 도식은 이미지를 시간에 의해 결정하고 형태화 하는데, 도식의 절차적인 규칙은 경험적이며 동시에 선험적인 기능을 갖는다. 칸트의 구상력은 칸트의 유명한 테제를 시간하하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A 51/B75).

 

이런 인식의 차원에서 칸트는 스피노자의 자연적 현실주의와 코나투스를 이성과 연민 그리고 도덕감정을 통해 역사 사회화한다. 이것은 시민사회 안에서 영구평화와 환대의 윤리를 위해 코스모폴리탄 사회로 확장된다. 칸트는 프랑스 혁명의 제 1공화정부를 지지했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1813년 학위논문 <충분한 이성원리의 네 가지 뿌리>에서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라는 테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충분한 이성이나 이유가 없는 진리나 사실은 없다.

 

만일 세계가 한 시점에서 창조 되었다면, 모든 것들은 동일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충분한 이유가 없다. 설명 되어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성에 따라 규명 되어야한다. 이것은 인과율이며, 쇼펜하우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 Physics,III.3 >에서 해명한 네가지 원인론 (질료/형상/행위자/목적)을 자신의 충분한 이성원리에 접합시킨다.

 

쇼펜하우어는 존재하는 것들의 표상을 설명하기위해 충분한 이성원리를 다음과 같은 영역에 연결한다. 1) 경험적 표상 (장미는 느껴진다). 모든 변화는 인과율에 있으며 물자체와 같은 제일 원인자 (causa sui)는 없다. 2) 추상적 표상 (논리/지식ㅡ이것은 장미다), 3) 수학적 구성 (논리ㅡ수와 공간), 선험적 진리(기하학ㅡ경험을 기초로 수행되는 칸트의 시, 공간에 대한 순수직관): 이것은 쇼펜하우에게 존재의 근거이다. 4) 심리학적인 힘 (의도성 또는 도덕적 이성)등 으로 분류했다. 각각의 영역은 혼동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해명 되어야한다. 충분한 이성원리의 뿌리는 주객 관계의 구분에 있지만, 인과율과 필연성에 연관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인식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댭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물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다. 물자체는 인간의 감성의 원인이며, 이러한 원인개념만이 경험의 영역에서 지식을 제공한다. 칸트의 물자체는 인간의 마음과는 독립적인 객관적인 대상이지만 여기서 부터 쇼펜하우어는 칸트로부터 돌아선다.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의지로서의 세계>에 의하면, 시, 공간안에서 모든 것은 인과율에 엮어져있고 상대적 진리를 가진다. 이것은 개별화의 원리 또는 충분한 이성원리를 말하며 칸트의 표상의 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개별화의 이성원리는 의지(물자체)와 더불어 동전의 양면처럼 세계를 구성한다. 의지가 일자나 삶에의 의지처럼 이성의 토대가 되지않고 두 세계는 서로 병립하며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런 점에서 이성의 세계는 표상으로서 의지와는 달리 상대적 진리와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이론이나 스피노자에게 양태들의 우발성이며, 인도사상에서 기만의 베일을 쓴 마야와도 같다. 모든 대상은 상대적이며 서로 연관되어있고 충분한 이성원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물자체를 의지로 파악하지만 여전히 칸트적인 의미에서 경험(리얼리스트)-선험(관념적)의 이중 인식론을 취한다. 쇼펜하우어는 표상의 세계가 주체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해체주의 주장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여길 것이다. 충분한 이성원리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상호 의존성을 파악하지만, 이미 욕망과 충동의 세계 의지는 물자체로서 표상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 표상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개별화의 원리의 한계나 존재의 탐욕과 투쟁과 분열을 넘어서는 것은 의지자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미학적 태도(음악)와 자기절제의 도덕적 연민과 종교 신비적 체험의 삶에 근거한다.

 

<의지와 표상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이중적 측면 즉 의지와 표상을 가지고 있으며, 의지가 표상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지와 표상은 동전의 앞 뒷면처럼 동일하며 병립된다. 의지와 표상은 상호관계안에 있고, 칸트의 오성과 12범주는 한 가지 원인(의지)으로 환원된다.

 

이것을 통해 시간과 공간과 더불어 모든 인간경험의 기본적인 형식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아무도 경험의 세계를 지배하는 칸트의 인과율 벗어날 수가 없다. 모든 개인의 행동은 이전의 원인이나 동기에 의해 결정되며 아무도 이러한 결정론적인 법칙을 변경할 수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투쟁은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ibid., sec. 56).

 

쇼펜하우어의 인식론에서 충분한 이성원리는 개별화의 원리 (principium individuationis)로 개념화된다. 개별화의 이념은 공간과 시간에 펼쳐지며, 이것은 관계성, 필연성, 체제성 (systematicity), 그리고 결정론과 연결된다. 간략히 말하면, 쇼펜하우어의 충분한 이성원리와 개별화의 원리는 칸트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오성의 12범주 (일치성, 복수성, 총제성, 실제성, 부정, 제한, 본체, 원인, 상호성, 가능성, 현실성 , 필연성)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이 다른 것들처럼 우주의 부분이라면, 우주의 기본적인 에너지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통해 흐른다.

 

인간이 궁극적인 자기내면에 본질적으로 접촉할 때, 우주의 본성에 도달한다. 비록 쇼펜하우어가 헤겔의 자기의식의 철학을 비판했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독일 낭만주의 전통에 서 있다. 우주의 지고의 원리는 심리적인 내면화 내지 직관을 통해 파악할 수 있고, 세계는 우주의 일반원리의 다양한 표상으로 나타난다.

 

몸과 의지의 욕구

 

쇼펜하우어가 독일 낭만주의와 차이가 있다면, 그의 일반원리는 자의식이나 이성과 융합된 의지가 아니라 비이성적 충동이며, 목적이 없는 의지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충동과 존재의 토대이며, 쇼펜하우어의 새로움은 그의 의지개념이 이성이나 지성을 결여한 욕구적인 본능 충동에 있다.

 

여기서 개인의 몸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며, 몸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졌다. 나는 나의 몸을 다른 신체적인 대상들처럼 지각한다. 나의 몸은 모든 신체적인 대상들을 지배하는 자연법에 복종한다. 나는 나의 몸을 의도적으로 움직이면서 즉각적인 의식을 통해 감각이나 아픔이나 그리고 감정적인 상태을 느낀다.

 

몸은 나에게 객관적인 것으로 표상되며, 동시에 주관적인 욕구의 의지로 주어진다. 나의 손을 움직일 때 나는 의지의 주관적인 느낌을 가지며 또한 손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의식한다. 몸은 객관화된 의지의 행동이며 나의 지각으로 이행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감성과 오성의 구분을 거절한다. 지성(오성)은 몸을 통한 현상계의 지각에서 드러난다. 인과율에 기초한 지각 (나는 태양을 보고 태양은 나의 눈에 영향을 준다)은 지성적이다 (ibid., sec. 23).

 

쇼펜하우어의 지각과 몸의 현상학은 데카르트의 이분법적인 인과율을 거절한다. 생각하는 '나'가 독립적인 물질적인 대상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나는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지각하고 존재한다. 의지로서 세계는 우리를 위한 것이며 또한 물자체의 세계이다. 표상으로서 세계는 현상계이며 인간의 이념의 세계이다.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 존재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의 오성은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대상들에 대한 지각적 의식과 다르지가 않다. 이것은 칸트의 인식론과 다르다. 칸트에게 외부 대상들에 대한 감각은 감각내용을 내적 시간에 따라 배열하며, 도식론과 구상력의 종합작용은 감각표상을 오성에 매개하며, 오성은 모든 범주와 개념를 제공한다. 이것을 기초로 직관은 대상에 대한 경험을 산출한다. 개념과 판단이 없이 직관은 충분한 의미에서 경험을 가질 수 없다. 직관의 내용이 없는 개념은 추상적이며, 개념적 명료함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에게 개념이 없이도 인간은 대상을 직관하고 지각으로 들어온 내용을 사고한다. 오성을 규제하는 본체계의 영역(신의 존재, 영혼불멸, 자유의 이념)을 추구하는 이성은 지각에 주어진 감각적 내용들에 대한 이차적인 표상이며 도구적 가치를 가질 뿐이다. 이성은 인식의 토대론적 가치를 갖지 않으며, 물자체는 인간의 욕구하는 의지와 다르지 않다.

 

세계의 표상 즉 현상계는 물자체인 의지와 이분화 되지않는다. 모든 많은 경험적 현상들은 동일한 본질 즉 의지의 간접적 표명이나 객관화 일 수가있다. 이성과 의지는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욕구하는 의지로 의식하며, 목적을 향한 노력과 열망을 갖는다. 의지의 현상학은 욕망과 더불어 행위와 감정과 적극적이며 부정적인 영향을 포함한다. 삶을 향한 의지의 심충에는 다른 동물들처럼 맹목성이 있으며 고통을 치루어야하는 어둠의 측면이있다. 끊없는 욕구와 필요 그리고 충족의 삶에서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지배되며, 의지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각과 오성을 구성한다. 고통은 영원하다.

 

이 지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우주와 세계에 대한 이중적 관점은 스피노자에게 근접한다. 쇼펜하우어는 박사논문을 쓰기 전 스피노자에 몰두했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은 우파니샤드의 브라만과 아트만의 관계에 친화력을 갖는다. 그리고 생의 의지와 우주의 이념 (플라톤의 이데아)과 시, 공간에서 개별화의 다양성은 대승 불교의 삼신불 사상 (트리카야)에 접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개별화의 이성원리는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세계와 더불어있다.

 

삶의 의지와 사회비판 차원

 

쇼펜하우어의 의지개념에서 특이한 것은 세계는 끊임없는 투쟁에 있다. 의지의 파편으로서 인간의 삶은 고통스럽고 끔찍하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영원한 좌절과 허무한 것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채 무의미하다. 의지가 인간의 본질이라면 세상의 모든 삶은 고통이다 (불교의 사성계의 제일 원리). 채울 수 없는 욕구와 열망에서 구원되기 위해 삶의 의지에 대한 집착으로 부터 부정이 필요하다.

 

<파레르가>에서 쇼펜하우어는 삶의 철학을 전개하며, 부에 대한 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경제에 접근한다. 부는 필요하지만 인간의 행복과는 상관이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화나 지식보다는 부를 축적하려고 하지만, 사치와 방종에 빠지고 만다. 인간의 존재가 소유보다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 협소한 의미에서 부의 축적은 목적을 향한 수단에 의해 특징되지만, 인간의 마음은 공허해지며, 지성의 만족을 얻지 못한다 (Schopenhauer, Essays from The Parega and Paralipomena, 18).

 

호르크하이머는 쇼펜하우어의 삶의 철학을 현실화하면서 <파레르가>에서 나타나는 당대 자본주의 문화비판에 주목한다. 쇼펜하우어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보다 더 명확하게 노동의 문제와 귀결을 보았고,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개선이 맹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진보의 변증법의 명암을 꿰뚫어 보았다 (Horkheimer, Zur Kritik der instrumentalen Vernunft, 250).

 

신 죽음의 자리에 등장하는 쇼펜하우어의 날카로운 페시미즘은 삶의 지혜를 가르치며 새로운 문명의 의미를 지적한다. 세계는 선악을 넘어서 있다. 충분한 이성원리를 통해 파악하는 현상의 세계는 꿈과 같으며, 힌두 베단타 철학의 마야 (허상)와도 같다. 이러한 허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폭력적인 세계의 상태에서 투쟁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운명되었다. 일상의 삶은 고통으로 각인된다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sec. 56).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국가개념의 신적인 차원을 거부하고, 선한 국가란 기껏해야 개인과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기위해 의도된 이기주의의 총괄개념에 불과 하다고 말한다. 국가는 도덕적 제도가 아니라 폭력에 기초한다. 쇼펜하우어는 국가나 기술을 신격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욕구에 기초하며, 학문과 과학기술의 촉진제는 굶주림과 권력이며 전쟁이다. 사회의 진보와 승리에는 피와 비참이 달라 붙어있다. 나머지는 이데올로기다. 최고의 단계에서 인간은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호르크하이머는 여기서 쇼펜하우아가 마르크스 입장에 동감한다고 본다 (ibid.).

 

한편에서 쇼펜하우어의 삶의 철학은 고통의 세계를 말하고, 이러한 세계는 그리스 신화에서 탄탈루스나 다나이드, 또는 탐욕으로 인해 익시온 왕이 화염에 휩싸여 돌아가는 수레바퀴에서 받는 형벌에 바교한다. 그것은 시지프스 신화와도 같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은 인간의 의식이 보다 개별화가 되어갈 수록 타자와의 투쟁에 돌입하며 심화된다.

 

쇼펜하우어의 독일 민족에 대한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민족은 언어의 파롤이며 이전 정치적 절대주의에 적대적인 대중의 힘을 부여한다. 민족의 위신과 선동의 배후에 어리석고 변질된 독선과 편협함이 있다. 광신주의로 왜곡된 종교가 권력의지와 민족주의에서 출현한다.

 

생의 의지를 조절하고 투쟁을 위한 개별화와 합리화 그리고 객관화를 절제할 때 고통이 줄어들고 평화가 찾아온다. 이것은 미학적 무사심에 기초하며 예술작품과 음악에서 욕망을 누그러뜨리며 고통으로부터 풀려난다. 미학적 지각은 이러한 평화의 삶에 도움을 준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를 만난다.

 

쇼펜하우어는 베버의 합리화과정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공명한다. 개별화 이성의 원리인 칼빈주의는 세계내 금욕주의와 경제윤리에서 자본주의 정신과 경제 합리성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구원의 이중예정으로 인해 영적 귀족주의 윤리가 된다. 합리화 과정을 통해 관료제가 발전하며 사회는 쇠창살에 갇히고 만다. 베버의 탈출구는 의회민주주의 카리스마와 책임 정치와 세계종교의 예언자적 심정윤리에서 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게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는 같이있고, 표상의 세계는 의지의 세계의 영향을 받지만 여전히 상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이성과 합리적인 절제의 삶이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세계에서 탈출구는 없는가? 지나친 삶의 의지와 욕구를 줄이고 의지자체의 다른 차원 즉 미학과 도덕적 연민과 종교체험의 삶으로 돌아가라ㅡ이것은 쇼펜하우어의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의 재해석이고, 삶의 충동과 욕망을 줄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현상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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