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회학적 접합: 헤겔과 푸코
헤겔과 푸코
푸코는 반-헤겔철학의 전통에 서 있다. 푸코에 의하면 헤겔을 피해가는 시도는 프랑스의 위대한 헤겔 주석가 장 이폴리트로부터 지대한 빚을 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논리든지 인식 론이든지 아니면 마르크스든지 니체든지 그렇다. 헤겔에 대한 반역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헤겔 을 피해가지 않는다.
푸코의 반-헤겔적인 입장은 니체와 더불어 반-형이상학적인 길을 가게한다. 그러나 헤겔 의 부정의 변증법에는 다양성이 파괴되지 않는다. 타자와 다름에 대한 무해의 태도는 여전히 개별적이고 주변적인 것 그리고 예속된 것들의 유효한 역사를 위해 인식론적인 자리를 예비 한다. 이러한 유효한 역사는—타자와 다름의 자리를 파괴해버리는—가상적인 진보와 이념 또는 절대자유의 거대담론에 저항한다.
푸코에 의하면, 인간은 노동, 삶 그리고 언어에 의해 지배된다. 이러한 계기들에서 인간 의 존재가 결정된다. 인간의 지식은 유한한 것이며, 언어와 노동과 삶의 한계에 붙들려있다. 푸코는 이러한 세 가지 구조가 지식체계에 일반적이며 역사적인 아프리오리를 형성한다고 본다. 사회적으로 설정된 지식의 일반성 내지 인식체계 (에피스테메)는 인간을 대상으로 구성한다. 유럽의 근대성의 진입에서 인간존재는 초월적 능력과 이성 그리고 경험으로 부여된 ‘인간’으로 구성된다. 경험과 초월의 능력인 인간은 칸트에게서 기묘한 경험-초월적 이중결합으로 드러난다 (Foucault, The Order of Things, 318).
이러한 인식론적 사물의 질서에서 ‘인간’은 노동, 삶 그리고 언어를 통해 역사성을 획득 한다. 모든 다름과 확산, 그리고 불연속성은 동일성의 한 지점인 인간주체로 모여진다. 푸코 에게서 현상학은 삶과 노동과 언어를 발견하지만, 사유되지 않은 것의 영역들은 코키토의 우위 성 즉 선험적인 ‘나’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 모든 지식은 역사적으로 삶, 사회 그리고 언어에 뿌리를 둔다. 생활세계의 요소에서 나타나는 방법론은 상호주관적 소통과 해석학을 열어놓는다.
푸코의 담론의 고고학과 권력관계를 분석하는 계보학은 이미 칸트의 코스모폴리탄 원리 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에서 사회분석의 틀로 포함될 수 있다. 만일 노동과 삶과 언어가 초월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면, 인간의 객관적 지식과 경험은 가능해진다. 이것은 헤겔의 객관적 정신과 외재의 사회학에 속한다. 경험적 영역의 총체성은 의식의 내면성으로 되돌아 가고, 정신으로 스스로 언어를 통해 계시한다. 변증법적 경험과 정신의 초월성의 영역은 동시 적으로 묶여진다.
사실, 헤겔은 칸트의 경험-초월적인 ‘인간’을 정신의 외면화와 사회 문화적 산물을 통해 변증법의 드라마로 파악했다. 삶, 노동 그리고 언어는 정치권력, 경제적인 부 그리고 담론형성을 통해 인정투쟁의 차원에서 개념화했다. 헤겔에 의하면, 칸트는 물자체의 영역을 타자 즉 생각 되지 않는 영역에 관련지어 해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개념적 문제틀은 헤겔의 <정신 현상학>과 <대논리학>에서 해명될 수 있다.
사회학적 접합: 헤겔과 푸코
헤겔은 푸코와 갈라설 필요가 없다. 푸코가 담론분석을 통해 밀려나간 것, 사유되지 않은 것을 권력의 관계에서 계보학적으로 해명한다면, 이것은 니체적인 의미에서 이성의 동질 성과 진보 그리고 권력을 거절하는 유효한 역사를 의미한다. 푸코의 터자의 담론은 아도르노에게 근접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하면서 개념의 일치를 비동일성과 다름으로 전환 하면서 변형시킨다. 이것은 부정의 변증법이며 개념의 주술화를 말하는 데, 헤겔의 총체성의 체계에게서 남겨져있는 비개념과 타자의 흔적을 재구성하려고한다. 이러한 영역들에 대한 반성은 의미의 완결상태로부터 탈출이다.
철학적 개념은 예술에서 나타나는 비개념적인 차원에 대한 열망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그것은 이러한 열망을 부정하지만 또한 개념을 통해 초월해야한다. 아도르노의 개념초월의 철학은 예술과 더불어 이성의 총체성안으로 포섭되지 않은 타자와 다름의 삶에서 역사와 사회 그리고 문화에 대한 부정의 변증법으로 나타난다.
헤겔에 저항하여 아도르노는 니체의 체계비판을 수용한다. 니체에 의하면, 체계는 학자 들의 지나친 편협함을 담을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개념적인 구성을 통해 학자들의 정치적 무능함을 보상할 뿐이다. 이러한 정치적 무능함은 사물들에 대한 관리적인 권위를 지적하며 체계의 요구는 단편들을 그대로 놓아두기보다는 비자발적으로 절대지로 성취한다. 그러나 이것은 때론 정신의 사이비조직체계를 넘어선다 (Adorno, Negative Dialectis,12, 15, 21).
그러나 아도르노와 니체의 비판과는 달리, 헤겔의 인정은 타자의 삶과의 화해를 통해 상호주관적인 관계의 총체로 나타난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신의 운동 또는 존재의 운동에서 여전히 다름으로 분화되고, 대립과 부정, 매개 그리고 변증법적 일치를 통해 진행되지만, 그의 순환론적 시스템에서 타자와 ‘사유 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그 자리를 열어 놓는다.
어째튼 헤겔의 절대지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헤겔철학이 개념의 운동에서 다양한 계기들을 확산 시키고 재그룹화하는 정체성임을 인정한다. 푸코의 스승인 이폴리트는 절대지의 의미를 논의하면서 그것은 상호인정에 기초된 보편적 자의식이며, 이러한 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통과 담론에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타자와 교류 하면서 보편적인 자의식이 된다. 변증법은 담론의 운동이며 보편적 인정을 거절하는 의식의 단계들은 무로 전환한다 (Hyppolite, Logic and Existence, 11-2).
상호인정 (절대정신의 내용)안에 있는 절대지는 타자와의 매개와 소통에 열린 보편적인 자의식이다. 언어의 소통을 통한 상호인정에 기초한 구체와 보편의 일치가 개념적 의미 즉 진리 로 드러난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 아니라 역사안에서 매개와 인정을 향한 정신의 현존재이다. 언어안에서 의미가 나타나고, 담론에서 의미는 개념적인 센스가 된다 (ibid., 19, 24).
그러나 푸코는 아도르노와 같이 절대지가 화해와 인정에 있음을 보지 못했다. 헤겔의 관계적 총체성은 푸코가 예견하는 것 처럼, 대립과 부정을 통해 타자를 전제적인 자아로 예속 하지 않는다. 오히려 헤겔철학은 타자의 인정을 위해 움직이며, 사회, 문화 그리고 역사에서 생사를 건 노예의 투쟁을 통해 지배사회는 전복되며 상호간의 동등한 인정의 사회로 이행한다. 이러한 상호인정은 예속된 자들의 윤리로부터 온다. 이런 시민사회를 푸코가 거절 하는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니체의 계보학과 반인간주의에 기초한 푸코가 시민사회를 방어하고 밀려나간 자들을 위한 파레시아를 하는데서, 푸코는 여전히 윤리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역사나 사회적 담론을 문제틀하고 분석하는 고고학자이며, 사회전반에서 드러나는 권력분석에 탁월한 계보학자이다. 여전히 그는 철학적으로 현상학에 손짓한다.
특히 푸코는 <라모의 조카>를 헤겔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광기와 비이성 에서 근대성과의 단절과 파열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파열이 라모의 조카라는 인물 에서 파악된다면, <라모의 조카>는 여전히 합리성과 대화의 선상에 서 있다. 이러한 인식론적 파열은 니체의 형이상학과 근대성 비판에서 정점에 달한다.
푸코와는 달리 아감벤은 <라모의 조카>에서 칸트의 미학을 고려하면서, 취향의 문제를 보았다. 칸트에게서 예술작품은 보는 사람에게 사심없는 만족을 준다. 설령 관찰자가 예술작품 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소유한다고 해도, 작품을 창조할 수가 없다. 취향은 칸트의 미학적 판단 원리에 속하며, 사심없는 보편적인 만족을 통해 자연미 (숭고미)나 예술작품을 대변한다. 이런 만족의 대상은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은—인식론적인 개념이 없는—보편적 만족의 대상을 의미한다.
관찰자의 취향은 예술 작품의 창조의 원리와는 다르며 거꾸로 변태나 부패의 원리에 속한다. 프랑스 혁명의 전야에 디드로는 이러한 변태의 취향원리를 그의 풍자국인 <라모의 조카>에서 발전시키고, 라모의 조카에게서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 그리고 귀족과 평민의식을 넘어서는 취향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라모의 조카에게서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함이 있지만, 도덕성의 고결함에 대한 몽매함이 공존한다, 취향은 다른 영적인 특질들을 삼켜버리는 자기확실성의 의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실성은 순수한 무이며, 라모의 조카의 존재는 역설이며 스캔달이며, 절대적인 비인격 성이다. 취향의 사람으로서 그의 운명은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자가 된다.
아감벤은 <라모의 조카>를 칸트의 취향의 미학에서 파악하고, 헤겔의 <정신 현상학>의 “자기 외화의 정신: 문화”가 <라모의 조카>에 대한 주석으로 말한다. 헤겔은 라모의 조카가 혁명의 시작과 공포정치에서 정점에 달하는 인물로 파악한다. 자기 외화적인 문화의 정신에서 모든 개념과 실재는 절대적 변태와 분열로 이행한다. 이것은 순수문화이며, 모든 정체성은 해소 된다. 이러한 순수문화에서 현실적인 세계는 보편적으로 소외되며 변태가 된다. 권력과 경제적 부의 현실화은 도치되며, 귀족과 노예된 의식은 진리를 소유하지 않으며 오히려 뒤집어진다. 귀족의식은 비천함으로 비난되며, 비천한 의식은 보다 풍부하게 발전된 자유를 갖춘 의식으로 전환한다.
문화를 변태로 특징 지우면서, 헤겔은 프랑스 혁명이전의 상황을 기술하며 혁명이후 공포정치와 관련 짓는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러한 분석은 헤겔의 주인과 노에의 인정투쟁에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나 아감벤의 관심은 헤겔이 어떻게 라모의 조카를 변태의 절대적인 힘으로 인격화하고, 취향의 인물로 파악하는 가 하는 데 있다 (Agamben, The Man without Content, 18). 아감벤은 헤겔의 미학보다는 예술과 철학을 밀접하게 결합시키는 하이데거에 주목한다
아감벤은 푸코를 넘어서서 <라모의 조카>를 광기와 이성의 대화의 차원이 아니라 칸트미학의 취향이라는 관점에서 헤겔과 관련짓는다. 물론 아감벤은 <라모의 조카>에 대한 헤겔의 분석이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에 관련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더 이상 혁명의 상황을 분석하지 않고 그의 취향의 미학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아감벤은 칸트의 미학에서 숭고미와 도덕적 감정을 검토하지 않는다. 이것은 실천이성과 관련되며 창조주를 체험하는 감정의 영역과 더불어 칸트의 종교적, 신학적 차원을 예비한다. 신은 자연의 숭고미를 느끼는 인간의 감정과 경건안에 내재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인륜성의 상징”이 되며 (Kant, Critique of Judgement, 351), 칸트는 목적의 왕국을 인륜성을 기초로 한 공화 민주주의 (루소)에서 실현 하려고 한다.
사실, 헤겔에서 <라모의 조카>는 가장 도야된 자유의 주체가 낮은 의식에서 해방과 진리로 드러나는 것을 형상화한다. 근대의 계몽과 프랑스 혁명은 이들의 통렬하게 찢겨나간 언어와 절규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들은 공포정치와 이후 나폴레옹 지배시대에 실종된다. 이들은 유효한 역사를 구성하며 개념적 성찰과 인정원리를 통해 회복되어야하는 비판과 활동 적인 자유의 정신에 속한다. 헤겔은 니체의 경구 “신은 죽었다”에서 불행의식을 보지만, 오히려 십자가 신학에서 화해와 인정의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여기서 예술과 종교는 신과 더불어 죽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화해와 함께 살아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예술과 종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여전히 철학적으로 예술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술과 종교는 철학(절대지)에 의해 영원히 인정되지 절대적인 정신의 영역에서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잘 웃는 자이다”—헤겔의 앎의 지에서 드러나는 절대지는 프랑 스의 공포 정치에서 출현하는 절대자유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라모의 조카>에서 드러나는 보헤미안적 이성을 개념적으로 성찰하고 무해의 원리와 연관된 매개된 절대지를 말한다. 절대 지는 순환론적 시스템 안에서 다른 의식과 지식들을 회상하고 인정하는 상대적 총체성을 말 한다. 이것은 푸코의 권력의지나 아감벤의 취향의 미학과 그리 먼거리에 서 있지가 않다. 푸코는 이성과 합리성을 <라모의 조카>의 인물에서 드러나는 광기와 바보스러움을 통해 문제틀을 하지, 해체하지 않았다. 아감벤은 푸코를 취향의 미학을 통해 헤겔과 매개해준다. 그러나 헤겔은 보헤미안적 이성에서 투쟁과 보편적인 인정을 위한 희망을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