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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윌슨의 <창조>: 개신교 목사에게 보낸 편지

파레시아 2024. 6. 29. 12:59

 

에드워드 윌슨의 <창조>

 

에드워드 윌슨은 <창조>의 서두를 남 침례교의 목사에게 쓴 편지로 시작한다. 물론 목회자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는다. 여기서 윌슨은 자신이 남침례교에서 성장했고 침례를 받았으며 본 어게인 체험을 말한다.

 

윌슨의 편지에 기독교에 대한 그의 이해가 잘 나타난다. 물론 나는 남침례교의 신학이나 교리를 폄하할 마음이 없다.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장로회 출신이고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칼 바르트를 전공했다. 그리고 버클리 연합신학 대학원과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에서 막스 베버의 사회학과 칼빈주의 그리고 불교를 공부했다

 

기본적으로 윌슨의 기독교 이해에 대한 나의 평가는 바르트의 성서 해석학에 부분적으로 근거되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성서 내러티브에 대한 주석에 의존한다. 이러한 성서 내러티브에 대한 주석은 오늘날 남침례교와 같은 복음주의자들의 성서주석에서도 볼 수 있다.

 

윌슨의 성서해석의 문제

 

윌슨의 편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이다. 그는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휴거주의를 언급하고 구원과 지옥을 부각시킨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근본주의자들의 입장이다. 바울에게서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에서 언급되는 마지막 종말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휴거주의자들이 즐겨 써 먹는 본문인데 남겨진 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성령의 구름(쉐키나)에 휩싸여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한다는 정도로 바울은 말한다. 그리고 이 본문은 고린도 전서 15장의 죽은 자들의 부활과 중요하게 연결된다.

 

물론 윌슨은 성서학자가 아니다. 왜 데살로니가 전서의 본문을 고린도 전서 15장과 연결하여 개인의 종말과 우주의 종말의 연관성을 말하지 않는지 탓할 이유가 없다. 윌슨의 편지에서 흥미로운 것은 기독교의 종말론은 인간중심적 구원교리로 인해 자연환경은 파괴되어도 좋다는 데 있다.

 

예를둘면 윌슨은 <창조> 9장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한 정신나간 목사의 강연인지 설교인지를 인용한다.

 

세계가 인간의 이익을 증진하면서 생물학적으로 반곤해져도 인류는 위험하지 않다. 때론 지구의 멸절은 좋은 것이며, 인간은 삶의 새로운 질서로 변화되고 약탈당한 지구는 새로운 생명권으로 변할 것이다. 자원이 고갈 되어도 인간의 과학 기술의 탁월함이 다른 자원을 개발할 것이다.

 

윌슨은 이런 태도를 종교-세속적 면제주의로 비판한다. 이런 태도가 남침례교 공식 입장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와트버그 신학 대학원 교수 시절 로널드 레이건의 종교 자문 위원으로 관여한 캘리포니아의 한 변호사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교수와 학생들과의 토론회에서 대략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 것으로 기억한다. "왜 당신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말하면서 자연환경의 파괴가 당연 하다고 말하는가? "레이건 행정부가 환경보존에 특별한 예산을 책정하지 않은 것이 과연 옳은 일인 가?"

 

"오히려 요한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지상에 임재 한다고 말하지 않나?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피조물을 돌보는 위임을 주지 않았나? "과연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으로 인해 자연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환경 파괴의 주범인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종교 자문이었던 그 변호사는 오순절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휴거주의 입장을 대변했다. 나는 남침례교의 종말론과 오순절 성령교회의 종말론을 휴거주의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남침례교의 목사에게 보낸 윌슨의 편지에서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환경파괴 그리고 휴거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윌슨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러티브가 편집되어 들어온 것을 이해 못한다. 윌슨은 고고학적 발굴에 기초해, 인간은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원죄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 백만년 동안 생물학적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 창공으로 날아 다니라는 명령을 망각 했다고 한다 (창 1: 20).

 

성서: 창조와 생태학

 

성서의 창조와 생태학은 윌슨이 생각하는 것 보다 심오하고 복잡하다. 윌슨은 첫째 날 빛의 창조에서 시간이 창조되고 빛의 날이 이후 하늘의 발광체들과 다르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늘의 발광체들 즉 해와 달과 별이 계절과 날과 해를 표시한다 (1: 14).

 

이런 내용은 이미 4세기 어거스틴에 의해 가르쳐져왔다. 그리고 태초의 빛 우주배경복사의 발견으로 뉴 저지의 벨 연구소의 두 사람의 물리학자들은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상식에도 못 미치는 진부한 이야기를 윌슨은 언급하지 않은 체, 종교 지도자들이 창세기의 의미를 무시 했다고 말한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더우기 인간의 땅과 피조물의 지배 (1:28)는 윌슨이 생각하는 것 처럼 기술과학의 지배를 통한 생태학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착취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피조물들에 대한 돌봄과 봉사에 관련된다 (2:15). 인간의 땅과 피조물의 지배는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문화적 프로그램을 말한다.

 

인간은 흙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흙으로 돌아간다. 히브리어의 아다마는 땅의 지면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생태학적인 네트워크 안에 묶여있고 자연과의 연대를 말한다. 그리고 노아의 계약에서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들어온다. 하나님은 다시는 이들의 삶을 심판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 (9:8-17).

 

더우기 욥기 38-39장은 창조의 우주론적이며 생태학적 차원을 부각 시킨다. 야생의 자연의 삶에 대한 긍정이 나타난다. 여기서 인간은 동물과 자연의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 존재다. 창조의 복잡성과 다양성이 언급되며, 인간은 창조의 신비와 생의 복잡성에 대해 무지하다.

 

성서는 생태학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기독교는 처음부터 환경 보존을 말한다. 더욱이 로마서에서 로마 제국의 대규모의 벌목과 자연파괴에 대해 바울은 말한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껵고있다 (롬 8:22). 심지어 마가는 모든 창조를 향해 복음을 선포하라고 말한다(막 16: 15). 하나님이 창조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창조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화해는 상관관계에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윌슨은 기독교를 면제주의로 비판하지만, 면제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없는 폭력의 편에 서있다. 성서의 창조론은 생태학적 배경과 통전되며, 창조의 보존과 돌봄의 위임은 신앙의 중심에 있다.

 

윌슨의 커밍 아웃

 

윌슨은 생태학의 보존을 위해 남침례교와 연맹을 한다. 그리고 종교의 의미를 이전 <사회 생물학>과는 달리 인정한다. 윌슨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의 영적 뿌리는 숨겨진 지성의 채널과 발전을 통해 자연의 세계에 깊숙히 뻗어 들어갔다. 인간의 충분한 잠재성에 도달하려면 우리를 형언할 수 없게 인간으로 만든 미학적이며 종교적 특질의 기원과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뷸가능하다 (Creation, 20).

 

윌슨도 도킨스처럼 종교를 향해 문화 기독교인으로 커밍 아웃 하는가? 그러나 여전히 윌슨의 생물종의 다양성 보존은 유전자/문화의 공진화에 입각하며 사회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종교를 사회 생물학 안으로 집어 심킨다.

 

윌슨은 목회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1판을 인용한다. 1판에서 다윈은 창조자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2판 이후부터 창조자란 단어가 삽입된다. 물론 다윈의 <종의 기원> 1판에서도 도처에서 창조자란 단어가 사용된다.

 

왜 윌슨은 남침례교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종의 기원> 1판을 사용 하면서 환경보존을 위해 연맹을 제의 하는가? 2판에 삽입된 창조자란 말을 언급하는 것이 더 친근한 제스처일 수 있지 않은가?

 

<종의 기원>의 결론 문장

 

종교와 진화의 문제를 창조적으로 전개하는 생물학자들은 <종의 기원>의 결론에서 다윈의 창조자에 주목한다. 창조자는 생명체에 숨을 불어넣고 능력으로 채워 주었다. 진화는 창조의 틀에서 전개된다. 이런 점에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가 요구되며 개별영역의 전문성과 다름이 존중된다.

 

<종의 기원> 1판 한국어 번역 (장대익 번역, 최재천 감수)의 마지막 결론에서 창조자란 단어는 없다.

 

번역은 다음처럼 표현된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진 생명이...여러가지 힘을 통해 ..지금도 전개되고있다 .."

 

그러나 <종의 기원> 2판에서 직역은 다음과 같다. "생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는 장엄함이 존재한다. 생의 여러가지 힘들은 본래 창조자의 숨결에 의해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에 불어 넣어졌다."

 

다윈의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번역자와 감수자가 <종의 기원>초판 번역을 잘못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윈이 <종의 기원> 2판에서 창조자란 단어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더우기 다윈은 5판에서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결론에서 창조자란 말을 삭제하지 않았다.

 

다윈을 지지하건 비판하든 텍스트 번역에서 창조자의 단어가 다윈 자신에 의해 삽입된 것은 종교와 진화를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을 다윈 자신이 <종의 기원> 5판에서 수용한 것도 다윈의 진화론의 역사적 범죄행위를 논의하는 데 중요하다.

 

다윈의 신정론

 

다윈은 딸의 죽음이후 신정론의 문제로 고민하다 신에 대해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지성적 마음을 가진 첫 번째 원인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윈은 죽기 3년 전 쓴 편지에서 자신을 불가지론자로 표현했다. 자신의 극심한 종교적 동요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이 무신론을 표방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윈은 하버드 대학의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하고 전지 전능한 하나님이 애벌레안에 기생충의 알을 설계했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쥐와 고양이가 같이 놀 수 있도록 설계하지 않은 것과 같다. 창조자가 이렇게 설계할 리 없다. 이것은 생의 우연성에 맡겨져야한다.

 

1879년 <자서전>에서 다윈은 경이로운 우주를 보면서 제일 원인자가 지성적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은 유신론자로 불리기에 적합하다고 쓴다. 이전에 음악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영혼이 메말라서 이전처럼 음악을 음미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과학을 제외하고 다윈은 시들어버린 나뭇잎처럼 되었고 이 일로 자신은 과학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다윈은 <종의 기원> 2판에서 창조자란 단어를 사용한 후 6판까지 그대로 유지했다. 아사 그레이는 다윈과 절친이었고 다윈의 진화론을 미학계에 소개한 식물학자였다. 그는 독실한 장로교의 집사로 봉사했다. 다윈의 종교적 유산은 다윈 열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한다.

 

간략히 말하면 <종의 기원>의 2판의 결론의 문장은 사회 생물학을 추종하는 자들처럼 다윈을 단순히 무신론자로 찍어내기가 어렵다. 다윈 열풍은 통섭의 열풍이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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