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변증법의 무대인가?
역사의 블랙 코미디
헤겔은 역사적인 개별사건들을 경험적으로 분석하고 사회과학적으로 평가하는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과는 다르다. 헤겔의 철학은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종교를 철학적으로 반성적이지만, 마르크스는 기존 사회와 국가를 부정하고 사유재산에 기초된 계급사회를 전복하려고 한다.
헤겔로부터 갈라서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석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치적으로 억압적인 봉건 군주제가 지배하는 독일에서 나폴레옹은 세계정신일런지 모르지만, 마르크스는 방동광장 꼭대기에 세워놓은 나폴레옹의 동상이 산산조각이 나서 나뒹굴 것으로 예견했다. 그의 조카 루이 보나빠르트가 쿠데타를 통해 어깨에 걸친 황제의 망토가 결국 내려올 때, 그의 삼촌 나폴레옹 황제의 동상 또한 방동 광장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예견은 정확했다.
1871년 3월 파리꼬뮌이 세워지고, 과거의 제국의 전쟁과 정복을 상징하는 나폴레옹의 동상은 부숴지고 철거되었다. 방동광장은 더 이상 제국의 쇼비니즘과 전쟁미화가 아니라 인터네셔널 형제애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나폴레옹 황제에게서 프랑스 혁명의 진보적 이념을 본 헤겔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그의 조카의 블랙 코미디를 통해 그의 삼촌의 영예가 무너질 것을 보았다.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단절과 파열 그리고 부메랑이 일어난다.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피해갈 수 없는 변증법적 논리이고 문제틀이 되는 영역이다. 세계영혼(나폴레옹)이 역사의 과정에서 민중에게 짓밟힌다.
파리코뮌의 공화주의자들은 방동광장이 더 이상 제국의 쇼비니즘과 정복을 상징하는 곳이 아니라 인터내셔날 형제애와 평화를 상징해야한다고 나폴레옹 동상을 제거했다. 역사가 현재주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실례에 속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사가 과거 쇼비니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터내셔날 형제와 평화의 정신으로 다시 씌여져야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현재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역사의 계보학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기준에서 재단질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된 자들의 유효한 역사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막을 내린 시대에 살고있다. 구체-보편 변증법이론은 헤겔이나 마르크스를 넘어서서 새로운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이후 국가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리바이어던과 같은 전제국가가 들어섰다. 그리고 공포정치와 중앙 관료제 그리고 인권탄압으로 인해 와해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민주화는 지난하고 결국 붕괴되었다 (Lukacs, die Oktober Revolution und Perestroika. Ed. Claussen).
헤겔로부터 배우는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적절한 관계설정에 있으며, 전체주의 국가나 사이비 파시즘 국가는 역사의 경험에서 비극으로 남는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헤겔을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여전히 오늘날 의미있는 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사회주의가 실패하지만 민주주의는 남는다
프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가보자. 러시아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패배로 인해 프러시아는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풀려나고 1815년 워터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비엔나 회의에서 독일은 이전의 영토를 회복했는데, 베스트팔리아의 루르 지역이 포함되었다. 이 지역은 프러시아의 산업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군수산업의 중심지가 같이 포함되었다. 1815년 프러시아는 독일연맹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이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독일을 독립적인 군주제로 발전하길 원했지만, 리버럴들, 특히 학생연맹 (Burschenschaft)로 불리는 운동세력들은 독일연방을 민주적인 사법 체계 안에서 통일하길 원했다.
당대 자유주의자들은 대부분 사법적 군주제를 옹호했지만 보통선거를 통한 의회 민주주의에는 거리를 두었다. 투표권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고, 산업 증산층의 정치권리에 관련되지 노동자 계급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보다 더 강했다. 개별 민족은 자신의 정부를 가져야한다. 특히 많은 공국으로 분열된 독일인 경우 많은 사람들이 연방 국가로서의 통일을 열망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예속민족에서 독립하려고 했다. 민족주의는 기존 정치질서에 커다란 위협이었다.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이 되고 당대 사람들은 자유만이 독립국가의 조건이 된다고 보았다.
1848년 3월 총독일의회로 불리는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모이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것은 새로운 통일독일 위해 의회 민주주의를 기초로 헌법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사법적 군주제안에서 통치한다. 대표위원들은 직접 보통선거를 통해 의회로 파견된다. 1848년 혁명의 시기에 프리드히 빌헬름 4세는 국민의회를 소집하고 사법지배를 잠정적으로 허락했지만,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그에게 통일독일의 왕관을 수여 했을 때 그는 거절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혁명의회가 해체되면서 빌헬름 4세는 그의 권위 아래 첫 번째 프러시아의 사법체계를 통제하고 (1850), 완벽한 행정권위를 누렸다. 이 여파로 동부지역의 융커들은 대토지를 소유한 계급으로 남을 수가 있었다.1861년 빌헬름 4세 사후 그의 조카 빌헬름 1세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15-1898)를 프러시아의 총리로 임명하고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다음 해 통일독일이 베르사이유에서 선포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나폴레옹의 세계정신과 독일통일의 비스마르크 사이에 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헤겔과 관계가 없다. 헤겔의 자유를 향한 변증법은 역사의 한 지점에 묶어 놓을 수 없다. 조카 나폴레옹이 블랙 코미디로 남지만 헤겔의 비판적 자유주의는 비스마르크의 역사의 경계를 넘어서간다. 헤겔 철학은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종교와 시민사회와 민족주의를 반성하기 위한 새로운 반성을 제공한다.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
비스마르크는 마르크스 (1818-1883)와 동시대인이었다. 그는 1847년 정치에 입문했지만, 제국의회의 총리로서 정치적 활동은 1862년부터 시작되었다. 총리취임 첫 연설에서 군비 증강을 위한 철과 피의 연설로인해 ‘철혈 재상’으로 불려지지만, 사실 그는 탁월한 외교가이며 유럽 열강들의 세력에 균형을 맞추는 현실 정치가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알사스 로렌 지역을 통합하고 그는 1871년 통일 독일의 첫 번째 총리로 1890년까지 재임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의회의 열망과는 달리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아니라, 독일은 막강한 군사력과 카이저의 제국으로 통일된다.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 왕이자 독일제국의 황제였던 빌헬름 1세 (1861-1888)의 충실한 공복이었고, 대지주 융커계급을 대변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 정책을 견지했다. 그의 이름은 정치 현실주의에 결부된다. 그는 최대한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자신의 지지기반인 융커를 위해 대변했다. 비스마르크에의하면, 귀족의 특권과 애국주의가 국가에 지속적인 번영과 영광을 가져다준다.
비스마르크는 1848년 3월 혁명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17 95-1861)가 자유 민주주의 세력과 타협하려고 했을 때, 심지어 반혁명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는 농민계층과 장인과 소상인들을 융커의 이익에 예속시키는 선동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독일의 민족주의자 이전에 프러시아 중심의 애국주의자였다. 유럽의 외교관계에서 힘의 조화를 기술적으로 구사하고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그는 현실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비스마르크는 국내정치에서 1872-1878년 동안 카톨릭의 권위에 저항하는 문화투쟁을 전개했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유럽의 민족국가들은 카톨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에서 교육은 종교가 아니라 세속적인 국가가 관장한다. 교황 피우 11세는 지유주의, 언론의 자유, 계몽주의, 세속주의를 공격하고, 1차 바티칸 공의회 (1870)에서 교황무오설이 발표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프러시아 주도아래 행해진 독일통일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문화투쟁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개신교회는 카톨릭 교회와 정치의 영향을 제거하려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한 자유주의자들과 제휴였다. 다른 한편, 비스마르크는 사회 민주당을 불법화했다. 일체의 사회주의적 활동과 언론, 집회 및 선동은 금지되고, 사회주의자들은 탄압을 받고 900명 정도가 독일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1869년에 창립된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지지를 받았다. 1875년 고타강령을 통해 페르디난드 라살레와 더불어 사회주의 노동당으로 병합되지만 합법적인 투쟁과 계급의 해방과 민족국가의 역할을 통해 부상하기 시작했다. 1877년 선거에서 약 50만표를 얻어 1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1890년 사민당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1878년 비스마르크는 보수적인 카톨릭 중앙당과 재휴하여 사회주의 탄압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위해 비스마르크는 사회복지정책을 실시하고 심지어 1866년 의회선거를 위해 보통 선거를 통과시켰다. 1883년 법은 노동자들의 의료 보험을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보통 선거권의 획득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에 속했다.
1867년 아우구스트 베벨이 제1차 제헌의회에 참여하기도했다. 1871년 제국의회에서 독일의 알사스-로렝지역 병합과 파리꼬뮌에 대한 그의 지지 연설은 비스마르크로 하여금 사회주의는 제거해야할 악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1890년 사회주의 탄압법이 철폐되면서 독일 사민당은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의 입장으로 결합되고, 1912년 원내 제 1당으로 부상하고 의회 민 주의를 향한 개혁의 길을 마련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의 공격적인 외교정책에 대립하면서 1890년 사임을 했다. 영국과 프랑스와 경쟁하면서 빌헬름 2세의 해외 식민지 팽창정책은 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현실정치가로서 국익을 극대화려고 한 타협의 명수였고 자신의 절대 지지기반인 융커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는 헤겔처럼 종교와 국가의 화해를 통해 인륜적 정치를 실현하려고 한 비판적 자유주의자는 아니었다. 역사의 과정에는 이전의 이념이나 운동과는 유리된 채 다른 진행이 나타나고, 물질적 이익과 권력관계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한다.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헤겔이 종교개혁을 언급한다면, 그는 여기에 기계적인 순응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시대에서 창조적 해석을 한다.
마르크스주의: 이행, 파열, 그리고 다름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도 이행과 파열 그리고 다른 발전의 경로를 볼 수가 있다. 독일 사민당은 1914년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전쟁은 러시아의 전제주의에 맞서는 방어전으로 옹호했다. 마르크스의 이념은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의 그믈망에 엮이면서, 의회 민주주의안에서 정치투쟁으로 자리잡았다. 여전히 독일 사민당의 역사적 오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전쟁지지와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정권장악 그리고 독일 나치당의 압승—의회 민주주의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에게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소비에트 마르스주의는 격렬하게 독일 사민당을 바난하고 스탈린은 <레닌주의 기초>에서 당관료 집중이론을 부각시켰다. 당은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의 스텝진에 비견되고, 프로렐타리아트 독재는 당의 규율과 독재로 전이된다. 관료제가 강조되고, 당의회에서 대다수가 기계적으로 결정한다. 이른바 시민사회적인 조직들이나 결사들 ㅡ노조, 협동조합, 공장조직, 의회 그룹, 여성조직, 언론, 문화교육조직, 청년연합 등ㅡ은 당의 지도와 규율 그리고 독재에의해 통제되어야한다. 소비에트는 프로렐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할 때, 국가조직의 형식으로 전화하며, 당국가관료체제로 등장했다.
국가독재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철의 규율이며 군사적 규율과 흡사하다. 사회주의 국가는 파놉티콘처럼 전체사회를 감시하고 훈육하고 일체의 당내의 분파나 기회주의적 경향을 일소한다. 프로렐타리아트의 전위의 일치된 의지가 독재의 성공을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 된다. 그리고 프로렐타이트는 자본주의 발전을 통해 산출되는 농민, 쁘띠 브루즈와, 무산자 지식인을 통합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러시아 혁명적 세력을 미국적 경제적 효율성과 관련짓는 것이다. 이제 러시아 혁명과 당과 국가의 일을 이끌어가는 것은 미국의 자본주의적인 효율성이 혁명의 변질과 볼세비키의 질병을 고친다. 근시안적인 경험주의와 무원칙적이며 두뇌가 없는 실천주의가 볼세비키의 질병으로 진단되고, 이것을 치유하는 것이 미국의 자본주의와 효율적인 일의 방식이다. “러시아 혁명세력과 미국의 효율성의 결합이 당과 국가사업에서 레닌주의의 본질이다” (Stalin, The Foundations of Leninism, 125). 이러한 레닌주의는 1848년 혁명에서 나타나는 마르크스의 정치적 유연함이나 그의 역사적인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통해 사회주의 해방보다는 산업화를 우위에 두고 그는 자신의 사회주의를 간략하게 표현혔다—소비에트 권력 플러스 전력화. 여기서 소비에트 국가는 노동자 계급우위에 설정된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소련사회의 산업혁명을 위해 집단화를 수행하지만 그의 테러정치는 히틀러 체제와 다르지가 않다. 스탈린의 정책은 위로부터 혁명으로 특징된다.
당국가와 개인 숭배는 테러정치로 물들어지고, 러시아 인종과 언어를 우대하는 정책 에서, 민족개념은 민주주의와 결부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는 당국가 관료체제로 흡수된다. 인종정책과 사회 다윈주의와 집단폭력은 히틀러와 스탈린 파시즘에서 공동으로 드러난다.
레닌주의와 결합된 미국의 자본주의와 효율적인 삶의 방식은 이후 1934년 시도된 인민전선 정책의 골자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의 파시즘에 저항하기위해 이전 적으로 규정한 사회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심지어 보수적인 당들과 연계한다. 이것은 레닌의 노동귀족에 대한 수용이며, 동시에 대중을 사회투쟁에서 얻어내는 전략인데 결국 서구의 사회 민주주의 정책에 대한 정당화로 볼 수가 있다.
후르시초프에 의해 주도된 20차 정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화운동과 더불어 사회주의를 향한 의회주의가 표방되는데, 그의 평화공존은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진입을 의미했다. 의회의 다수를 장악하면서 새로운 프로렐타이트 국가설립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의 서문에서 밝힌 입장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적 의회주의는 19세기 독일 사민당의 강령이며 주도원리에 속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