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운명의 사람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68년 만에 오펜하이머는 구 소련의 스파이란 혐의를 벗게 되었다. 한 과학자의 운명이 국가권력과 안보의 이름으로 쓰레기통에 쳐박힌 사건을 말한다. 미국은 시민국가가 아니라 소련과 군비경쟁을 벌이고 반공주의로 물들여진 파시스트 국가였다. 그나마 2022년 오펜하미어의 누명을 벗기고 그에 대한 국가의 공식사과는 늦은 감이 있지만 의미가 있다.
1992년부터 1999년 버클리 대학 사회학과와 연합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종교와 과학의 문제는 토론의 중심에 속했다. 저자 자신이 자연과학의 분야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전문적인 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 종교와 과학의 비판적인 관계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오펜하이머는 저명한 버클리 사회학과 교수인 로버트 벨라와 함께 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 선풍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정도로 나의 기억에 있었다. 그런가하면 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한방에 날려버린 핵 사이다 같은 과학자로서, 특히 일제의 식민지를 경험한 대한민국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자신의 무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테드 피터즈 선생의 도움으로 종교와 과학에 몰두할 때 나는 하버드 대학 물리학 웍삽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유산이 여전히 살아있고 그는 양자역학을 미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아인슈타인이 양자 물리학을 주장한 닐스 보어와의 논쟁에서 패배(?)당한 것을 감안하면, 오펜하이머의 이론 물리학이 갖는 비중을 무시할 수가 없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매우 가까운 사이로 그려진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에게 현자의 사람처럼 조언하는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한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알려진 뉴 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에서 행해진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에서,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을 은밀히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에서 나타나는 연쇄반응의 계산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멘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에드워드 텔러는 원자폭탄이 터질 때 전체 지구의 대기권에 초래할 엄청난 연쇄 반응을 산출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할 연쇄반응으로 지구의 모든 삶을 끝장낼 수 있다는 염려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이인슈타인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영화와는 달리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서로 알고 있었지만 절친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 물리학을 의심하는 구닥다리 같은 이전 자연과학을 방어하는 사람이였다. 전쟁 이후 노년의 아인슈타인과 상대적으로 젊은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톤 대학에서 같이 가르쳤고, 이 시기에 이들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스승급 정도의 인물이었고,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의 통찰을 자신의 이론 물리학에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과는 좀 다르게 영화에서 그려지는 데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남 다른 생각이 있어 보인다.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독일의 히틀러의 핵무기 개발과 반유대주의에 있었다. 어쩌면 같은 유대인 출신으로서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 사이에 원자폭탄 개발에 나름의 공명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영화 예술이 갖는 미학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아도르노와는 달리 영화가 갖는 교육과 해방의 기능을 본 비판 이론가였다.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벤야민의 미학적 통찰은 역사적 반성으로 전개된다. 3시간 정도의 대화와 논쟁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는 관람자에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역사의 텍스트로 나타난다. 나는 더 이상 2023년이 아니라 1950년대 냉전과 핵의 죽음의 문명을 열어놓은 시대에 살고 생각하고 분노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을 떨어뜨려야했나? 정치적 정당성이 존재하는가? 그 귀결로 대한민국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깡패동원 정부에서 통틀어 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 사냥질을 당했다. 일본이 원자폭탄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배했더라면,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동족끼리의 전쟁과 살상은 피해갈 수 있지 않았나?ㅡ물론 역사에 대한 가정은 금물이다. 역사는 오늘 나에게 비판적 반성으로 들어오고, 책임과 해방을 위한 문제틀의 영역을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오펜하이머 영화는 미학의 텍스트의 차원을 열어준 대화의 영화이며, 관람자를 생각하고 문제제기하게 하는 보기드믄 수작임에 틀림없다.
영화에서 감독은 히틀러가 양자 물리학을 유대적인 것으로 혐오했다고 암시한다. 유명한 베르너 아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과 불확정성의 원리 (1927) 역시 히틀러에 의해 "유대적인 것으로" 폄하된 것으로 말한다. 물론 아이젠베르크는 유대인 출신이 아니다. 그는 1932년 유럽에서 양자역학을 창조한 사람으로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저명한 과학자였다. 2차세계 대전 중 그는 나치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관여한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영화에서 주목을 끄는 문구는 영화 첫 장면에 삽입된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이다. 제우스를 속여 불을 훔쳐 인류에게 준 댓가로 그리고 제우스의 미래에 대한 예언하기를 거절해서 그는 코카서스 바위에 쇠사슬에 결박당해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표현이다. "나는 죽음의 운명이며 세계의 파괴자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기술을 상징한다. 그러나 기술지배는 인간의 탐욕과 경쟁 그리고 패권다툼으로 인해 이제 죽음의 운명으로 등장하고 세계를 파괴하는 자가 된다.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죽음은 운명이 됨으로써 세계를 파괴하는 세력이 된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쟁의 역사이다. 국가권력과 지배방식은 경제적인 조건이나 발전과는 전혀 조응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나 로마 공화제의 역사적 발전에서 보면 국가지배의 방식은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특히 전쟁과 관련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경제가 결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면 여전히 고대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와 인도의 <바가바드 기타>의 신화가 우리의 문명 안에 깊숙히 들어와있다. 신화의 내러티브는 역사화가 되고 문명안에 침잠하지, 실존주의자들의 억지처럼 비신화적으로 벗겨지지 않는다 (루돌프 불트만). 벗겨지는 건 오히려 역사와 사회 문화를 호도한 잘못된 실존이다. 신화의 스토리는 여전히 비인격적인 실재로서 신들의 투쟁으로, 다시말해 다원적인 가치들의 투쟁으로 등장한다. 불을 상징하는 과학기술은 세계파괴와 멸절이라는 운명을 빗겨갈 수는 없을 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한 이유로 영웅 취급받던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로 그리고 공산주의자로 닉인찍혀 밀려나간 자의 삶을 살았다. 1949년 소련은 원자폭탄을, 1953년에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이 사건은 오펜하이머의 삶에 불행으로 다가왔다.
아이젠하워 정부(1953-1960)는 냉전시대를 열고 소련과 본격적으로 군비경쟁과 핵무기 전력강화를 했다. 핵 전쟁의 위협의 징후가 세계도처에서 나타나고 대한민국도 동란을 거친 후 1958년 처음으로 핵무기가 배치되었다. 역설적으로 핵 전쟁의 위협을 조장한 아이젠하워는 퇴임사에서 미국의 군사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정부에 의해 "수소폭탄 개발의 반대자"로 낙인찍힌 오펜하이머와는 달리,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전의 동료 에드워드 텔러는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둘은 라이벌이었다. 오펜하이머는 핵의 판도라 상자를 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나타난 끔직한 살상행위에 경악하고 수소폭탄 개발을 방해했다. 어제는 일본, 오늘은 미국에 여전히 나타날 수 있는 묵시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묵시적 환상을 모두가 오펜하이머를 영웅처럼 떠 받드는 연설회의 현장에서 담는다.
그러나 그의 부하 직원이였던 텔러는 국가안보청문회에서 매우 불리한 증언으로 오펜하이머를 위험인물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1954년 미국은 매카시즘 광풍이 불 때였고 텔러는 핵무기가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것으로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의 군사화를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물리학자였다. 그에게 핵무기는 인류의 구세주이며 모든 일의 해결사였다. 그는 학계에서 전쟁에 신들린 블랙 코메디언으로 배척을 당했다.
메카시즘이 사라지고 오펜하이머의 노년에 핵 연구에 기여한 공적으로 그에게 저명한 상을 수여한 것은 상처받은 오펜하이머의 생에 마지막 위로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수상식에서 그의 아내는 손을 내미는 텔러를 용서하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가져온 오펜하이머는 62세로 후두암으로 그의 생을 처랑하게 마감했다. 그러나 여전히 핵폭탄은 오늘의 문명에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있다. 여전히 텔러의 핵무기 메시야주의를 추총하는 자들이 많다. 프로메테우스와 <바가바드 기타> 사이에서 생명을 추구하는 과학문화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다. 핵무기앞에서 모두가 멸절한다는 엄연한 사실에 직면해 과학과 종교는 생명(생활)세계를 위해 더 많은 협력을 요구한다. 만일 핵 폭탄에 의해 3차세계전이 일어난다면, 지구는 핵도미노 현상으로 인해 멸절당하고, 돌과 막대기를 가지고 싸우는 석기시대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인슈타인).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의 소명과 생명에 헌신한 과학자였고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이 아니라 생명세계를 선택하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