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의 개미연구와 바르톨레모 라카자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언 6:7-8)
바르톨로메 라카자스와 개미군단
윌슨은 <창조>에서 흥미롭게도 해방신학의 원조로 존경받는 바르톨로메 라카자스를 언급한다. 라카자스는 카리브 지역의 인디언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는 1518년 스페인의 식민지역인 히스파니올라 (오늘날 도미니크 공화국)에 개미로 인한 역병을 기록하고 있다.
무수한 개미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물고 상처를 입히며 엄청난 고통을 야기했다. 사람들은 침대에서 잠을 잘 때 개미들을 방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개미군단들은 도처에 정원들과 과수원을 파괴하고 마침내 대농장의 오렌지와 석류 그리고 계피나무들을 완전히 근절시켰다.
라카자스는 마치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태워버린 것 같았다고 기록한다. 식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금과 은 그리고 미네랄을 캐내는 광산에서 걷어들였다. 노예노동에 시달린 타이노(Taino) 인디언들은 착취와 질병으로 인해 거의 멸절 직전에 있었다.
라카자스는 개미의 습격과 역병을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의 학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한다. 역병이 히스파니올라에서 수그러들자 서인도에서 다시 나타났다.
1534년대 곤충의 습격으로 인해 자마이카의 한 마을이 황폐하게 되었다. 거의 동시에 개미군단은 오늘날 푸에르토 리코의 카사바 (고구마처럼 생긴 같은 뿌리 식물) 대농장을 위협했다. 비슷한 역병이 쿠바의 한 지역에도 나타나서 주민들은 강을 넘어 이주할 정도였다.
이러한 개미군단의 습격과 역병을 기술하면서 윌슨은 곤충들의 공격이 타이노 인디언들의 대량학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니라고 말한다. 원인은 식민주의자들의 환경파괴에 있다고 말한다 (Creation, 41-4).
비판적 해명
나는 윌슨이 개미군단 습격과 라카자스를 언급하는 기술방식이 곤혹 스럽다. 왜냐하면 윌슨은 자신을 세속적 휴머니스트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세속적 휴머니스트는 무엇인가?
라카자스의 스패인을 향한 예언자적 비판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에 속한다. 스페인 카톨릭은 히스파니올라 지역에서 첫 번째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
스페인의 문명선교란 이름으로 천만명 이상의 원주민들이 경제 착취 시스템인 에코미엔다로 인해 질병과 혹사로 죽어 나갔다. 스페인은 광산과 노예노동에서 착취한 막대한 부로 본원적 축적을 이루었다. 이러한 자본축적은 이후 영국의 산업 혁명의 배경이 되었다.
만일 윌슨이 세속적 휴머니스트라면, 라카자스를 개미군단 습격의 보도자 정도로 언급해선 안된다. 윌슨의 사회 생물학이나 생태학적 전환이 얼마나 저급한 지를 보여준다.
윌슨이 세속적 휴머니스트라면 통렬하게 스페인 카톨릭의 착취와 만행을 비판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식민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환경을 파괴했는 지 사례를 열거할 필요가 있다. 윌슨에게 휴머니즘은 무엇인가?
윌슨의 생태학적 전환은 백인 중심주의 틀에서 생물종의 다양성 보존이다. 이미 생물종의 다양성 보존은 기후변화에 노출 되어있다. 에코 시스템의 문제는 다양종의 보존을 넘어서서 에피게놈의 차원에서 종들의 변이와 다각화를 위해 오이코스를 구성해 주어야 한다.
에피/에코의 접근은 윌슨의 자연적 낭만주의로 해결되지 않는다. 탐욕과 경쟁 그리고 과도생산으로 인해 지구세를 오염시키는 후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글로벌 경제를 공공선과 에코 거버넌스로 전환시켜야 한다. 적어도 세속적 유머니스트라면 이러한 비판적 문제틀은 하나의 상식에 속한다. 윌슨에게 자본주의 비판이 존재하는가? 그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네오콘 신자유주의 경제를 옹호하고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가까운 사람이다. 세속적 휴머니스트란 담론이 무색할 정도이다
그토록 종교의 무용화를 부르짖던 윌슨이 유럽 기독교의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세속적 휴머니즘과 생태학적 전환은 전혀 조합이 맞지 않는다.
개미연구: 파라다임 논쟁
윌슨은 스탠포드 대학의 시스템 생물학자이자 새로운 개미연구로 알려진 드보라 고르동을 호되게 비판했다. 드보라는 개미들의 집단행동에 대한 에코-관계적 틀에서 주요한 저술 <Ants at Work>을 출간했다.
그녀의 과학적 연구방법과 내용은 윌슨의 개미 접근방식에 정면으로 충돌한다. 윌슨의 방법론은 위계질서에 기초한 카스트 제도이며, 개미의 사회적 행동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램화 되어있다.
그러나 드보라의 개미연구는 유전자에 의해 프그로램이 되거나 위계 질서적으로 설정되지 않는다. 개미집단은 생태학적 환경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 그녀는 개미 식민지를 세포의 네트워크와 집단행동을 규제하는 메카니즘에 비교 하면서 파악한다.
이것은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메디컬 센터 막 커슈너의 시스템 생물학 즉 세포의 코어 보존 과정에 연결될 수 있다.
세포 시스템에 대한 연구나 개미 식민지에 대한 접근에서 유전자 결정론은 거절된다. 그리고 카스트의 위계질서에서 독불장군하는 여왕개미와 같은 존재는 없다. 오늘날 개미연구에서 드보라는 시스템 접근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윌슨의 유전자 중심의 접근에서 논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 개미 카스트가 있다. 이것은 자연선택이 만든 것이다!ㅡ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야.
<개미언덕> 22장에서 윌슨은 개미집단 간의 전쟁을 묘사하면서 생존투쟁의 잔인함을 강조한다. 여왕개미가 없는 개미군단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존재할 수 없다. 패배한 자들은 잡아먹히거나 노예가 된다. 만일 여왕 개미가 전쟁 중 살아남더라도 습격자 개미군단에 붙잡히면 즉석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패배한 개미 식민지의 여왕은 한 순간도 살려둘 수 없다. 개미의 마음은 절대적 주권을 유지하는 데서 가혹하다. 패배한 식민지의 낯설은 여왕은 정복자 개미의 주권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 개미 식민지들간의 연맹은 불가능하다.
윌순에 의하면 이것이 개미 카스트와 수퍼 유기체의 삶에 중심이며, 절대적인 정언명법이다. 이런 점에서 윌슨은 원주민을 향한 라카자스의 예언자적인 연대를 자연선택에 위배된 것으로 볼 것이다. 약한 놈이 강자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 자연의 질서인데 왠 라카자스와 같은 스페인 신부가 끼어드나?
그러나 드보라는 윌슨의 개미해석에 반기를 든다. 개미 식민지의 기능은 여왕개미의 지배방식이나 중앙의 통제권 또는 카스트와 같은 위계질서와는 상관 없다. 개미 식민지에는 전쟁이나 음식 비축과 같은 과제를 위해 헌신된 개미라곤 없다. 개미의 일에는 윌슨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된 분업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일과 과제가 그때 그때 있을 뿐이다.
개미 식민지는 상호작용의 네트워크 안에서 이들의 집단적 행동이 규제된다. 드보라는 <개미언덕> 22장에서 윌슨이 묘사하는 세 가지의 개미 군단들 간의 전쟁을 문제 삼는다. 실제로 개미 식민지에는 군사적으로 훈련된 전투 개미나 또는 전쟁에서 마지막까지 투쟁하며 희생을 하는 그런 애국주의 개미는 없다.
윌슨이 그토록 장엄하게 묘사하는 여왕 개미의 죽음를 염려하는 개미들도 없다. 개미는 지성적인 곤충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어떤 점에서 개미와 같은 접촉과 시그널 소통이 있지만, 개미는 인간의 삶과 가치 그리고 의미에 접근하지 못한다.
개미에게는 네트워크의 구조가 중요 하지만, 인간에게는 소통의 내용과 의미가 결정적이다. 뮬론 우리는 개미의 생에서 중앙 통제부가 없는 동등한 관계성과 상호작용 그리고 리듬과 행동의 패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미에개 유전자적으로 프로그램화된 도덕성은 없다. 개미에게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고 배우라는 윌슨의 묘사는 잘못된 것이다. (D. Gordon, "What humans can learn from the non-hierachical organization of ant," 2010, Sep. 13. Boston Review).
윌슨이 개미연구를 제대로 했더라면 라카자스를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개미의 삶에서 식민지 카스트 제도를 반박하는 "해방 신학"의 공정성과 민주주의 소통이 담겨 있지는 않나? 그런데 해방 신학자들에게서 윌슨의 사회 생물학에 대한 설득력있는 비판을 아직 보지 못했다. 공공 신학자로서 그리고 사회학자로서 필자는 이런 해방신학에 아쉬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