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망각인가 선함의 망각인가?
진리가 존재로 환원되는가?
하데거는 <존재와 시간> 시작에서 존재의 의미물음을 통해 서구의 형이상학 전통에서 존재망각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존재와 시간> 44절에서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가 진리를 존재와 동일시 했다고 본다. 이것은 후설의 사태자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본격적 대결을 했고, 그의 진리와 존재의 반성을 넘어서려고했다. 하이대거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초월적이며 보편자를 유비의 일치로 이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존재론적 입장에 의존했지만 그는 존재의 문제를 유비의 일치를 통해 존재문제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토대위에 위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유비는 일치의 형식이며, 사물들간의 유사성과 관계들을 폭넓은 스펙트럼에서 전개했다. 유비론적 일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로 파악하려고 했다. 존재의 일치는 우배에 의해 통합된다. 예를들어 보고 듣는 감각적인 것들은 비슷한 관계안에 있으며 지각에 관여한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비는 단어나 개념의 다양한 의미들을 표현하는 방식인데, 유비론적 의미론 (analogical semantics)으로 부를 수 있다. 단어나 개념의 다양한 의미들은 언어가 사용되는 콘텍스트에 의존하며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 유비론적 의미론은 신약성서의 예수의 비유에서 친화력을 갖는다.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유비론적 일치와 의미론은 네러티브안에 담겨지고 역사와 사회 그리고 문화적인 삶을 구성하고 이해하는 해석학적인 성격을 갖는다. 존재의 정체성과 방향은 내러티브에 의해 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진리에 관한 철학으로 개념화하고 <해석에 관해서>에서 아포판시스(소통/진술)의 차원을 규명했다. 모든 아포판시스는 주어와 술어를 가져야하고 주어의 술어를 긍정하거나 (카타파시스) 거절해야한다 (아포파시스). 여기서 진위가 결정된다. 이것은 삼단논법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빌딩 블록이다. 철학은 진리에 대한 에피스테메 (인식과 지식)가 되며, 존재자들에 대한 탐구를 말한다. 실체는 아홉가지 범주와 관련되어 파악되지만 범주는 여전히 우연성에 속하며, 실체를 이해하고 기술하기위한 카테고리이다.
진리는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스스로를 실현화는 현존재의 완성과 목적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존재의 실현이며 현존재는 선함과 좋은 삶을 지향하는 윤리적 존재이며 실천적 지혜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부동의 동자로서 제일 원인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통한 하이데거의 모자이크와 습합되기 어렵다.
존재론과 아포판시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7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언술의 기능을 아포판시스로 파악하고, 로고스의 의미는 언술에서 말해진 것을 명백히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소통에서 로고스는 아포판시스의 구조를 갖는다. 더 나아가 로고스는 무엇인가를 보여지게 하기 때문에 이것은 진위판단에 관련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의 아포판시스와는 달리 상응과 일치에서 해석되는 진리로부터 거리를 취한다. 상응과 일치는 일차적으로 알레테이아의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이데거에게서 로고스의 진리개념은 은폐로부터 출현하고 탈은폐로 드러내는 것이다. 아포판시스를 통해 진위판단은 실종되고, 진리의 탈은폐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로고스가 진리의 일차적 자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은폐와 탈은폐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로고스는 무엇인가를 보여지게 하는 특수 양식이다. 그리스인들의 진리 개념은 로고스나 아포판시스의 진위판단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형상이론과 같은 가능성만이 철학적 지식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현상과 로고스의 결합을 현상학으로 파악하고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말한다. 자기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을 후설의 사태자체라는 모토와 동일시한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 비판을 비켜나가고, 플라톤의 형상이 자체로부터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현상학으로 정의하고 후설과도 다른 방향을 취한다.
후설에게서 사태자체는 진리자체의 드러남과 존재론이 아니라, 노에시스/노애마의 상관구조를 통해 외부 대상이 의식에 지각된 것을 의식의 지향성에서 현상하는 의미내용을 포악하는 것을 말한다. 사태자체는 의식내부의 의미현상에 관여하지, 하이데거와 같은 존재론과 현상학의 결합을 말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만 가능하다. 현상학은 존재들의 존재의 학문이며 다시말해 존재론이다.
현상학을 통해 하이데거는 기초존재론을 확립하고 서구의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존재자체를 망각했다고 도매금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그는 현존재 분석에서 시작하고, 현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적인 의미를 해석으로 부른다. 따라서 현존재의 현상학의 로고스는 해석학의 성격을 가지며, 해석학을 통해 하이데거는 존재의 적합한 의미와 현존재의 기본구조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현존재의 현상학은 해석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사회적 존재론
하이데거의 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당성을 갖는가? 아리스토에게서 현존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이며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그리스 신화론의 신들을 거절했고, 도시국가의 삶에서 종교의 사회적 도덕적 기능을 위해 정치적으로 허용했다. 제일 원인으로서 부동의 동자는 형이상학이며 신성한 학문에 속하지만, <자연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를 기초로 한 원인론의 틀에서 지각과 귀납적 방식을 사용한다. 심지어 <니코마코스 윤리> 9권 9장에서 아리스토텔레르는 자기애와 필리아를 접합시키며 자기 (선함과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자기에게 친구가 되며 이차적으로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관조의 행복한 사람 (마카리오스)은 개인주의나 사회를 도피해서 머무는 은자가 아니라 친구와 더불어 있으며 그의 존재를 기뻐하며 관조한다. 이것은 함께 사는 삶을 완성시키는 줄거움으로서 자기 사랑과 필리아가 신적인 행복의 관조에 연결된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완성시키는 줄거움을 갖는다. 사랑하는 타자는 말과 생각을 나누는 또 다른 자기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정치적 동물 또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예견하고 세계의 무 앞에 처해있는 섬뚯함 가운데 있는 염려하는 존재이다. 물론 그는 존재 가능적 존재이며 자신의 현실태를 실존적 결단을 통해 실현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리가 본질적인 의미에서 존재와 일치한다면, 진리현상은 기초 존재론의 문제틀과 현존재의 분석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하이데거를 지배하는 존재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현실태가 아니라 현존재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이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헤라클레이토스 (535-475)의 로고스론과 진리문제를 생성과 변화의 변증법에서 수용하는지를 규명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질서와 지식의 원리를 표현하고, 그것은 신적인 합리적 지성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았다. 모든 것이 무한한 흐름에 있고 음양의 관계처럼 변화와 대립의 역동성을 갖는다.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로고스는 숨겨진 조화원리로서 대립의 일치를 의미한다. 로고스의 빛에서 보면 모든 것은 하나다 (플라톤, Cratylus 402a=A6).
헤라클레이토스의 흐름과 변화의 세계관은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세계와도 대립한다. 후자에게서 움직임과 변화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자체는 고정되고 불변한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대립(전쟁/평화)의 역동적인 관계는 우주의 본성에 속한다. 전쟁에서 평화가 나오며, 평화에서 전쟁이 나온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위해 파르메니데스를, 그리고 물질계를 위해 헤라이클레이토스를 수용했다. 근대철학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특히 헤겔의 논리학에서 결정적인 자리를 갖는다 (Hegel's 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ophy, 1830, 278).
그리스 철학에서 파라다임 변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에서 플라톤의 형상은 본체안에 들어와 있는데서 시작한다. 본체의 잠재태안에 형상은 가능성으로 디나미스와 변화의 원인으로서 작용인의 실천을 통해 현실태로 나간다.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안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래이토스의 변화와 흐름의 변증법을 수용했다. 진리의 알레티이아는 은폐에서 탈은폐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의 복잡성과 작용인의 부단한 실천 그리고 본체의 형상이 현실태의 완성에서 나타나는 목적의 선함에 일치하여 파악된다.
선함의 망각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현상학적으로 해석했다. 피지스는 알레테이아로 접합된다. 이것은 사물의 실체들은 잠재태의 숨겨짐에서 디나미스의 가능성을 통해 에너르기아의 활동을 통해 현실태로 현존하며 스스로를 드러낸다. 현상학적으로 이러한 출현은 우리에게 의미있게 접근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사물의 모든 규정은 영원한 실체로 되돌아가며 이러한 토대위애서 이해될 수 있다. 불변의 실재로서 신은 최종인으로서 세계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며, 이러한 움직임은 모든 본성에 의해 욕구된다. 욕구된 대상은 주도권을 가지며 자신을 위해 타자를 위한 욕구를 움직인다. 이러한 운동과 안정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사물에 대한 이해에 담겨져 있으며, 이것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형상(εἶδος)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살제적인 것에 대한 "보톰 업" 비전을 보는데 자연의 세계에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보톰 업 비전은 또한 신의 운동과 목적을 위한 탑 다운 비전으로 진행된다 (Making Sense of Heidegger, 50).
<존재와 시간> 7장에서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운동 또한 아포판시스적 진술에서 작동되는 것으로 말한다. 진술(아포판시스)로서 로고스는 무엇인가를 보이게 하는 것인데, 다시 말해 진술되는 것을 진술자를 위해 소통과정에서 드러나게 한다. 이것은 아포판시스로서 로고스의 구조이다. 아포판시스의 기능은 종합의 구조 형식을 가지며, 제시된 표상을 연결하고 결합한다. 여기서 진위는 일치에 기초해 판단되는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판단에 기초한 진위는 알레테이아 개념에서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알레테이로서 로고스의 진리는 은폐된 것에서부터 출현하며 탈은폐를 보게하고 발견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포판시스가 범주와 유비에 관련되며, 진위판단은 진술이 실제적인 것과 어떻게 상응하고 일치하는 가에 따라 규정된다. "밖에 비가 온다"는 진술은 밖에서 비가오면 진실이 된다. 그런가하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진리는 잠재태에서 현실테로 출현하고 완성과 관련하여 파악된다. 다시말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진위 판단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알레테이아가 자기실현 내지 완성이라는 목적론에서 파악되는 것과는 구분된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론적 일치와 의미론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는 유비론적이며 이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을 포함한다.
진리는 잠재태가 아니라 현실태에 있으며, 현실태는 잠재태애 앞서 존재한다 (De Interpretatione chs.13. 14). 현상학적으로 표현하면 진리는 현실태로 주어진 생활세계 (문화, 사회, 전통)를 통해 잠재태나 가능성에 앞서 존재하며, 진리의 알레테이아나 존재의 완성은 생활세계에 연결되며 더 나아가 순수 현실테인 살아있는 영원한 신과 관련된다. 인간 존재는 역사나 전통의 영향에서부터 비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문화나 사회적 조건 안에서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며 존재를 실현하고 완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론적인 영역에서 진리의 알레테이아에서 작용인의 실천이 어떻게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전개되는 변증법의 복잡성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 (헤라클레이토스)은 목적 즉 선함의 빛에서 피지스와 알레테이아의 관계를 조명한다. 목적론에서 엔텔레키아는 완전히 실현된 것을 의미하며, 애네르기아는 완결되고 작동적인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명제나 진술 (아포판시스)를 통한 진위판단의 인식론과는 달리 존재론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와 진리의 일치를 목적의 선함에서 파악하고 선함의 중요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선의 결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거절된다.
<존재와 시간>이후 하이데거는 비로서 1944년 강연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이론을 자신의 은폐와 탈은폐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우주적이며 신성하며 말씀과 음성이다. 원초적 로고스는 말하며 인간은 경청해야한다. 인간은 말과 예술에서 로고스에 응답한다. 신적 로고스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상응이 존재한다. 로고스가 갖는 인간에 대한 우위성에서 진리의 상응이 나타나며, 하이데거적인 신화론적 형이상학을 드러낸다 (Heidegger, Heraclitus: The Inception of Occidental Thinking).
이제 알레테이아와 인간편에서 상응이 결합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포판시스의 로고스와 유비론적 (상응) 진리 접근 그리고 제일원인의 탑다운 방식으로 존재자들과 관여하는 것과 구조적인 면에서 무엇이 다른가? 알레테이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잠재태와 현실테에서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를 통해 스스로 드러난다. 그런가하면 존재는 영원한 동자를 흉내내며 참여하며, 신은 살아계신 분으로 인간의 삶에 임재하고 배려한다.
인간의 현실태 또는 현존재는 거기에 있지만 운동하는 존재이며 신으로 되돌아간다. 존재 가능성은 현존재의 활동과 신의 임재와 배려의 틀에서 지성의 관조의 형식에서 추구되지만, 이것은 이미 사회 정치적 존재로서 공공선을 추구했던 이후의 삶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신은 지극히 선한 분이며 영원하다. 생은 하나님께 속해있다(Metaphysics, Bk. XII. ch. 7).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핫은 과연 존재를 망각했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영웡성과 진리 그리고 선함에 대한 물음에서 진리와 선함을 이분화하 하지 않았고 물질의 세계를 영지주의처럼 무로 거절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의 현상학은 하이데거의 존재론과는 다르다.
하이데거에게서 미지의 여신의 계시에 복종하는 것은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존재 망각을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선함의 망각으로 되돌아갔고 영지주의 파시즘에 현존재의 운명을 에속시컀다. 하이데거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에 앞서 현실태를 존재론적 우위에 놓고 주어진 생활세계를 사실주의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접근한다. 진리는 인식의 영역과 존재의 영역에서 구분되며, 진리는 선함과 분리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살아있고 선하며 영원하다. 신은 삶의 현실태이며, 삶은 신에게 속한다. 여기에는 영지주의 파시즘이 설 자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