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용: 비교적 관점
<중용>1장에서 희로애락이 발현되지 않은 것이 상태가 중이며, 발현한 뒤에 모든 절도에 맞는 상태가 화다. 중은 천하의 큰 뿌리이고, 화는 천하에 통하는 도이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길러진다. 중화는 <중용>의 핵심사상이다. 희로애락은 자연스럽게 발현되지만 교육으로 닦아 과불급이 되지 않아야한다. 중용은 감정적인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며 도심으로 파악된다.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이라면 (천명지위성), 주자는 중과 조화를 태극/무극의 우주론적을 기초로 발전시캬 개인의 정신수양을 강조했다. 주자는 리에서 만물이 유포되며, 우주를 뒤덮는 하나의 리가 존재 한다고 보았다. 고요한 자세에서 감정이 발화하기 전에 중의 상태를 관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Ching, The Religious Thought of Chu Hsi, 117).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우주론적이라기 보다는 좋은 삶의 실현의 목적 (행복: eudaimonia)을 위한 윤리적 차원을 갖는다. 도덕적 미덕은 크지도 적지도 않은, 즉 지나침이 없는 중간상태를 유지하고, 바른 것을 선택한다. 지성적인 덕 즉 신중한 실천의 지혜 (phronesis)는 올바른 이성에 따라 (kata ton orthon logon) 중용을 탁월함으로 형성하고, 도덕적 삶에 본질적이다. 중간상태는 지성적 덕과 도덕적 미덕이 접합되며, 중용은 마음의 습관으로 자리잡는다. 이것은 선한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며, 사회 문화적 관계에 기초한 윤리적 의미를 갖지 (ethos), 개인주의적 마음수양이나 자유와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에서 지성의 덕 (지혜, 지식,이해, 신중함)을 도덕적 미덕 (정의와 관대함, 절제, 용기 등)과 구분 지었다. 도덕적 미덕은 사람을 향해 바른 시간에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성향으로서 실천과 습관을 통해 얻어지며, 상호 주관성에서 이것은 선한 행동으로 인도하는 중용을 통해 얻어지는 품성의 결과이다.
영혼의 상태는 감정과 능력과 성향으로 이해되며, 성향은 성품의 상태를 형성한다. 미덕은 인간을 지나치거나 모자림이 없이 중용을 지키게하고 삶의 실현을 향해 선한 사람으로 만든다. 신중한 실천지혜(phronesis)는 인간의 삶에 선한 것을 취하게 하는 경험에 기초한 행동의 지혜이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기초해 도덕적으로 바른 상태, 즉 중용을 판단하고 취하게한다. 실천지혜는 목적을 향한 올바른 중용을 지키게하며, 해석학적인 차원을 갖는다. 신중한 반성의 덕 즉 프로네시스 곁에 공감의 이해와 해석이 있다 (Gadaner, Truth and Method, 322).
이러한 윤리와 해석은 언어와 표현을 통해 진리의 드러남(알레테이아)이 현상하며, 신성의 삶에 관조적으로 참여한다.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의 관조에 연관되며 자족의 삶과 행복의 가장 위대한 근원이다. 인간의 지성적 관조는 신적인 능력으로 인간에게 가능태로 주어진 것이다. 신들은 인간의 지성의 관조를 기뻐하고 이것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이러한 신적 성품들은 알레테리아로서 인간의 지성의 관조에 진리로 드러난다 (Nicomachean Ethics, Bk X. ch.8).
이러한 알레테이아는 자연의 세계나 인간의 삶을 분석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에 종속되지 않는다.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는 시민사회나 정치 경제를 파악할 때 목적론의 관점에서 구성되지만, 인간의 지성의 관조와 신의 연관성은 영원성의 관점에서 참여로 나타난다.
인격적인 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은 순수형상 (또는 아퀴나스에게 actus purus)이며, 영혼은 히브리적 개념인 nesama (spirit 또는 숨결)를 의미한다. 성서의 nefesh (창 2: 7)는 영혼 (푸쉬케: 살아있는 영)으로 번역되었지만, 그러나 nefesh는 몸과 더불어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성은 신적이며 영원하며, 이미 지성의 관조에서 자족과 행복의 삶이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살아있는 것보다 더 복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종교의 신들을 거절하고 플라톤의 윤회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의 신 (unmoved mover)은 actus purus로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 있는 영원한 존재이다. 신과 세상의 공동 영원성과 지성의 신의 삶에 참여하는 불멸성은 <중용> 16장에서 귀신의 성덕이나 조상제의와 전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의 관조에서 신성의 참여와 죽음 이후 지성의 영원성을 말한다면, 신은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신은 이미 인격성을 포함한다. 이러한 인격성은 무로부터 창조란 유대 기독교 개념과 상충되지만, 영원한 삶에 대한 지성 또는 영혼의 참여는 기독교와 새로운 대화를 열어놓는다.
<중용>에서 다산 정약용은 상제의 존재와 인간의 심성의 관계를 해석하면서 상제를 인격적인 존재로 부각시켰다. 다산의 경학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섬기고, 진실한 마음으로 신을 섬기는 시천학으로 신앙의 세계를 강조한다 (금장태, <다산 정약용>, 115).
성의 해석학: 알레테이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이론의 기초는 가족이 아니라 도시 국가이다. 그러나 유교의 <중용>에서 국가수립은 수신과 가족관계에 기초한다. 성실함(말씀을 이루는 것)은 하늘의 도이고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도 얻게되며 저절로 도에 적중하니 성인이다. 성해지려는 사람은 선함을 선택하고 굳게 붙잡는 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한다 (<중용> 20장).
성의 해석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중한 지혜실천 (프로네시스)에 근접한다. 성은 <중용> 21장에서 자성명 위지성이다 (정성스러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은 성의 작용이다). 자명성은 위지교다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이 교의 효과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스러워진다.
이 지점에서 다산은 <대학>의 기본원리인 삼강령과 팔조목의 구조를 거부하고 일강 (명명덕)과 삼목 (효제자: 부모와 자식과 형제 사이에 적용되는 인륜의 조목)의 구조로 새롭게 해석했다. 6조목(성의, 정심,수신, 제가, 치국 , 평천하)은 격물 치지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격치 6조설인데, 나는 이것을 격물치지의 해석학으로서 아리스토톨레스의 프로네시스에 공명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중용강의보>에서 다산은 <중용>전체가 천명에 근거하지만, 그 도는 모두 인도로서 인간의 문제에서 파악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시천학과 더불어 땅을 이용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과학 기술적인 태도를 확인한다. 다산의 시천학에서 격물 치지는 자연과학적 태도를 담고있다.
<중용> 22장에서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자기 본성을 다할 수 있다. 남의 성을 다할 수 있고, 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본성의 작용 (형상)은 완성 (현실태)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완성에 도달하는 실천을 통해 본성의 작용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천지와 하나가 된다. 정성스러우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인다.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화할 수 있다 (23장). 여기서 진리는 알레티이아로 드러난다. <중용>과 어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상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