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시민사회와 ‘0 유로 (1)
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독일에서 ‘0 유로’ 짜리 지폐를 발행한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판매액은 3유로다. 초도물량 5000장은 전부 판매되었고 2만장을 추가 판매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0유로’ 기념화폐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을 상징한다. 마르크스는 돈의 사용가치를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으로 상품을 만들고 시장에서 파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의를 비판했다. 상품의 물신숭배를 비난했던 그가 이제는 ‘0유로’ 화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3유로를 기꺼이주고 구입하는 사람들이 사회안에 존재한다.
마르크스에게 돈은 개인과 공공을 위해 중요하다. 그가 사유재산의 철폐를 주장했다고 해도, 그것은 산업혁명에서 노동자를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부르주아와 시스템을 지적한다. 사람들이 정직하게 노력해서 돈을 버는 행위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마르크스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부의 축적이 높은 단계에서 사회주의가 시작이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돈이나 부의 축적도 과정상 여전히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마르크스의 경제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온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계를 관리하는 경제행위 (오이코노미아; oikonomia)와 가급적 돈을 많이 취득하는 축재(蓄財) 행위 (크레마티스케;chrematistike)를 구분했다.
사람들이 '축재’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건전하게 가정을 관리하는 ‘경제’는 설 자리가 줄어든다. 그런 축재 행위는 목적에 이르는 중용과는 거리가 멀다. 목적 자체가 되는 것도 모자라, 돈벌이를 통한 취득과 축적행위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건전한 경제는 도덕적으로 적합한 개인의 가정관리와 공공의 관리를 위한 것이고, 경제행위는 시민사회의 윤리와 관련된다. 경제행위를 자기이익으로 부각시켜, 시장에서 임금을 결정하는 근대 경제이론이나 자유 방임주의와는 결을 달리한다. 도덕적 중용과 가계경영이 접합되면, 돈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공공선이 시민사회에서 중요해진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행동은 선함을 목적으로 해야하며, 선함이 모두의 목적이라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합리성이 도덕적 가치와 중용과 결합이 되면, 끝없이 되풀이 되는 돈벌이는 규제된다. 적절한 사용가치에 근거한 교역이나 거래가 유지 되지만, 탐욕에 기초된 경제행위는 경쟁과 생존투쟁을 위해 돈의 축적과 수익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 반해, 도시 국가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윤리를 통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경제적 약자를 보호해야한다. 도시국가는 시민사회 또는 정치적 공동체란 의미를 갖는데, 자유시민은 법앞에서 평등하며 시민사회는 개인의 번영과 공공의 복지를 추구하는 도덕사회다.
마르크스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론을 높게 평가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굳이 ‘0유로’ 를 통해 마르크스의 사유재산의 철폐를 과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고전적인 분배의 원리 (suum cuique)—“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몫을 주는 것”—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 윤리를 관통하며, 사익이 공적인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 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이것은 루소의 시민사회론과도 공명한다. 부의 결과로 인한 사치는 부자나 가난한 자들 을 부패시킨다. 소유하는 자가 있는 가하면, 다른 한편 돈을 열망하는 자들이 생겨난다. 부의 불평등은 정치적 주체인 시민의 삶을 폐허로 만들고, 이들 중 일부는 타인의 노예로 전락한다. 마르크스는 돈을 무용하게 본 사람이 아니라, 당대 영국의 신업혁명과 “어두운 사탄과 같은 공장”에서 착취 당하는 노동자들, 특히 여성과 아동의 삶에 주목했다. 사회의 물화와 병리현상은 심지어 자본가의 착취를 넘어서 상품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고 욕망을 지배하는 데로 발전한다. 상품을 신처럼 숭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사회라면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거짓 신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 가.
더욱이 이런 물신숭배의 사회가 생산관계 즉 사회적 인프라 구조를 관료제를 통해 지배 하게되면,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쇠우리(iron cage) 창살에 갇히는 참담한 현실이 되고만다. 마르크스는 이런 위험을 산업혁명과 기술지배에 기초한 자본가의 탐욕과 착취구조에서 보았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일으킨 근대성 1에 속한다.
기술지배가 사회구성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근대성 1을 극복하기위해 사회를 총체적 관계 즉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 보는 구성적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실천철학이나 계급투쟁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과학의 분석이 이곳에서 적절히 자리매김을 한다. 마르크스의 생산양식론에서 생산력이 생산관계 (넓은 의미 에서 사회적 관계의 총체 또는 시민사회)를 결정한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생산력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산업혁명에서 증기엔진이 생산력을 급증하고 가내 수공업에서 공장제로 생산관계의 패러다임이 변화한다면, 증기엔진은 기술 합리성에 속한다. 기술 개선이 생산양식을 이끌어 가는 추동력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기술합리성은 상부구조 특히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제 생산관계는 공장에서 합리적인 조직과 기술관리및 경영을 통해 나타난다. 상품은 정보망을 통해 경쟁과 광고가 되면서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분배된다.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어 나타난다.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이론은 사회학적으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한편에서 경제사회 안에서 상품물신의 형태로 사물화의 현상이 나타난다. 다른 한편,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 하는 과정에 기술개발과 상부구조의 영역들이 깊게 관여된다. 나의 삶은 물건처럼 취급되고 그렇게 평가된다. 나의 인격은 사라진다.
이러한 입장은 한나 아렌트가 마르크스를 인간의 삶의 조건에서 노동과 일의 구분을 폐지하고 노동하는 동물과 공작인의 차이를 보지못했다는 과도한 비판을 수정한다. 마르크스에게서 노동과 사회적 일에 비해 정치실천과 소통 민주주의가, 아렌트가 예견하는 것 처럼 하락되지않는다. (The Human Condition, 89, 95)
오히려 마르크스는 상부구조의 핵심인 자연과학의 발전과 기술진보가 생산력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주목하고, 역사적 단계에서 계급투쟁의 적합한 실천을 위해 사회구성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제공한다. 공작인이 생산력에서 나타나는 노동소외를 착취하거나 변형시키며, 국가의 역할은 계급관계를 넘어서서 사회문화의 다차적인 분화와 계층에 주목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정치실천은 소외된 노동과 물신숭배사회로부터 엑소도스를 의미하며, 변화되는 공론장에서 아렌트의 자유의 실천과 먼거리에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가 니체의 생철학을 비판한 것은 정당하다. 생철학은 영원회귀를 모든 존재들의 최상의 원리로 긍정하는 것으로 도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은 인간의 사회와 정당적 조건에서 다양한 의미와 차이와 새로움을 갖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치행위와 언어활동은 개인과 사회의 삶의 전기를 구성하며 자유의 실천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산출한다. (ibid., 97)
어째튼 마르크스에게서 교육의 영역에서 국가는 자연과학을 장려하고, 최고의 기술과 기계를 산출하는 데 지원을 한다. 생산력에서 노동착취를 가능하게 하고 재생산하는 구조는 사회전반을 상품(돈과 자본)가치로 판단하거나, 아니면 생산(또는 사회 문화의 전반적 관계)는 이데올로기적인 통합 기제에 의해 조직된다. 노동력과 잉여가치를 사회하는 것은 기술합리성이며, 이것은 아렌트의 물화분석에 공명할 수 있다.
시민은 모방욕구에 지배당한다
나는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사슬에 묶여있는 존재가 된다—루소의 이런 표현은 시민사회의 재편을 요구한다. 마르크스에게서 시민사회는 여전히 상부구조 (국가, 문화, 교육, 종교, 이데올로기)와 경제구조 사이에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이 두 개의 구조들을 매개하는 층이 약화되고 직접 부딪치기 시작할 때, 시민과 하위계급의 저항이 나타나고 사회는 위기로 내몰린다.
정치적으로 일자리와 임금결정 그리고 노동계약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된다해도, 시민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승인 되어야한다. 마르크스의 사회구성 이론에 깔려있는 기술합리성과 전문화 그리고 사회의 분화에서 정치, 문화 그리고 교육의 주체로서 시민은 단순히 프롤레타리아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전 영역에 매스 미디어를 통해 침투한다. 특히 후기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물신숭배를 매스 미디어는 하이퍼(초) 현실로 이미지화한다. 프랑스 미디어 비판이론가 쟝 보들리야르가 말하는 것 처럼, 시뮬라시옹(가상현실)이 문화적으로 신분/계급을 통합하는 정보와 사인(기호)가치를 만들어낸다. 사실 만원짜리 점심식사나 근사한 레스토랑의 비싼 음식은 먹어서 다 배부르다.
그러나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고 이러한 차이가 기호로 등장하고 문화적 신분을 규정한다. 소통과 정보에 기초된 미디어 가치가 정치와 경제 그리고 다른 문화와 종교적 영역들에 침투한다. 미디어를 통한 가상현실이 사회전체를 계층화하는 새로운 지배양식으로 나타난다. 특권과 갑질, 지배욕구와 이를 모방하려는 욕구가 사회의식 전반에 깔려있다.
모방욕구가 기호가치로 나타나는 사회는 하이퍼 현실을 생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태도를 무색하게 한다. 모두를 모방욕구의 매카니즘에 묶여있다. 마르크스의 사회구성 이론은 상품숭배와 모방욕구에서 나타나는 공론장과 위계질서화에 주목하게 한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의심과 문제제기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소유를 폐지하지 않는다
상품을 물신으로 숭배하는 사회는 모방욕구로 넘쳐나는 사회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추종하면서 국가의 윤리적 차원에 관심했다. 이해타산과 탐욕, 그리고 계산이라는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환가치는 사용가치를 밀어낸다. 이런 사회에서 부와 생산수단은 소수의 자본가의 손에 집중되고 정치가 중앙 집권화가 된다. 정부가 사법체계 를 통해 국민을 하나로 결합한다.
직업을 가진 모두가 다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혁명을 하지 않는다. 교통수단의 발전을 통해 해외시장과 식민지가 정복이 되고 자유무역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로 묶여진다. 자본주의는 식민지에서 문명선교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세계를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만든다.
자연정복, 기계생산, 항해의 발전, 철도와 통신수단의 진보 등을 통해 세계는—독일의 공공신학자 헬무트 골비처가 언급하는 것처럼—부르주아가 일으킨 유례없는 혁명이된다. 자본은 세계를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만든다. 자본의 형상이 인간의 삶에 각인된다. 마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이마에 인맞은 자들처럼 세계를 지배한다.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에 의하면, 자본주의란 단순히 생산활동이나 시장 경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혁명이고 13세기 상업혁명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랜 자본축척을 구조로 갖는다.
마르크스 역시 상업자본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그러나 당대 넘치는 사회문제와 혁명이 휩쓸던 시대에 그는 산업 자본주의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자유경쟁과 생산과잉으로 인해 공항과 식민지배 그리고 전쟁이라는 전염병이 동반된다. 자본주의 무덤을 파는 프롤레타리아가 만들어지고, 노동자 대중은 공장에 집결하여 완전한 위계질서의 관리와 감시아래 공장주의 노예로 전락한다.
계급은 여기서 발생한다.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신속한 교통수단과 소통을 통해 투쟁이 전국적으로 묶여질 때 계급투쟁이 나타난다. 경제투쟁은 또한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투쟁으로 전환되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 지배계급의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한다. 한 가지 물음이 생긴다. 산업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노동귀족이 되기도 한다. 계급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다. 영국이 해외시장에서 자유무역을 통해 벋어들이는 수익과 제국주의는 엄청난 자본축적과 잉여율의 상승을 가져왔다.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법칙은 이제 잉여자본의 축적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중간계층으로 통합된다. 금융자본의 단계에서 루돌프 힐퍼딩이 분석한 것 처럼 계급의 분화와 다양성이 사회계층에 각인된다.
이제 계급은 민족적으로 고양되기도하고, 민족이나 국가는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여전히 필연의 왕국에 속한다. 필연성이 지배하는 왕국은 자본주의 숙취현상과 섞여있다. 여기서 국가는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의 기능을 말하지만, 국가기능은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켜야한다. 이전의 특권지배 사회와 숙취현상을 제거해나가는 과제를 갖는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와 문화적인 삶의 전반에서 행해지고 개인의 도덕성을 고양한다. 이렇게 되려면 사회적 소유와 부의 축적은 고도의 상태로 발전되고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신장시켜야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생각을 순진한 것으로 치부할 이유는 없다. 생산력이 증대하려면 한 사회의 기술지배와 자연과학의 발전 그리고 상부구조의 성숙함은 결정적이다. 당연히 그런 사회는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회인데, 더 이상 특권계급이나 소수의 자본가의 손에서 놀아나지 않는다.
필연의 왕국에 속하는 사회주의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이행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프로렐타리트 독재를 통해서도 지난하다ㅡ이것은 생산관계의 변화와 이전 강압국가의 관료제지배에 대한 해체없이 불가능하다ㅡ오죽하면 노년에 마르크스는 <자본 3>자유의 왕국을 지상에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거기를 향해 접근할 뿐이라고 말한다. 개혁과 혁명은 같이간다.
인권과 민주주의, 사회의 합리화가 진행되고 공공선을 향한 ‘마음의 습관’이 건전하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당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차티스트 운동에서 이러한 비전을 보았고, 투표권 확대와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개혁과 혁명의 길이 접합되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