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와 근대성
푸코의 계몽과 근대성
푸코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니체와는 달리 칸트의 계몽철학과 비판이성을 미성숙 함으로부터 탈출이란 관점에서 높게 평가했다.
감히 알려고 하는 의지 (Aude sapere)는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담대성과 용기를 표현한다. 그리고 푸코는 19세기 시인 보들레르를 소환하고 근대성의 태도로 부각시킨다. 그것은 시대의 불연속성 즉 전통과의 단절과 새로움을 현재의 흘러가는 시간에서 영원한 것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What Is Enlightenment?” The Essential Foucault, 49-50).
현재의 시간안에서 영원한 것을 찾는 시도에서 근대적 태도는 유행이 아니라 지금까지 전통으로 침전되어 온 것들을 문제화한다. 이것은 흘러가는 현재시간에 대한 유행적인 민감성이 아니라, 현재의 계기에서 영웅적인 차원을 파악하려고 한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을 경멸할 수가 없다. 스스로 시대의 댄디이기를 바랬던 보들레르는 기존의 규범과 속물 예술인들에게 맞서는 댄디즘에서 근대성의 독립성과 자유 그리고 영웅적인 차원을 파악하기도 했다.
<악의 꽃>에서 다루어지는 인물들은 <라모의 조카>처럼 저속하고 세속적이며 비열한 성격을 갖는다. 근대의 인간은 자신의 비밀과 숨겨진 진리를 발견하고 해방하기 위해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화와 모든 것을 유행으로 동질회해버리는 문화에 저항하여 보들레르의 근대인간은 자신을 만들고 생산하려는 과제를 가진 사람이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근대적 태도와 인간을 예술에서 찾으려고 했다.
만일 푸코가 칸트와 더불어 근대성을 역사적 시기가 아니라 동시대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파악하고 이것을 위해 보들레르를 소환한다면, 이것은 반근대적이거나 포스트 모던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현재를 영웅시하는 근대성의 의지는 계몽의 의미에 대해 양자택일 적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반성의 태도를 취한다. 마르크스적인 인간주의는 자본주의에 결부된 계몽의 사기행각에 대립한다.
그러나 나에게 칸트와 보들레르의 푸코의 접합시도는 여전히 문제거리에 속한다. 푸코가 계몽의 비판적 전통과 근대성을 푸코가 담론분석의 고고학과 권력관계를 검토하는 니체의 계보학으로 가져가길 원한다면, 푸코는 일차적으로 칸트의 계몽과 정치개혁 그리고 판단력 비판에서 나타나는 미학이론에 주목해야한다. 칸트는 푸코에 앞서 자연사를 분석하는 고고학을 예술의 고고학을 위해 검토하고, 자연은 인간을 초감각적 실제 (무제약자)로 불러낸다. 이러한 실천이성과 관련된 미학은 칸트의 역사철학에 기초되며, 자연적 본능과 인간의 비사회성의 적대감정을 넘어서서 이성의 안내를 통해 전개된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계몽철학은 역사와 경험을 단순히 이분화하지 않고 자연사와 역사적 경험을 관통하면서 코스모폴리탄적인 윤곽을 가지며 드러나며 시민사회 안에서 정의와 법과 도덕을 기초로한 비판적 민주주의를 부각시킨다 (Critique of Judgment, in Basic Writings of Kant, 354; “Idea for a Universal History with Cosmopolitian Intent,” ibid., 124).
<계몽의 변증법>과 칸트
칸트의 도덕철학에 대한 고고학적 해명을 통해 나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칸트를 사드의 성 방종에 연결짓는 시도를 문제 삼는다. 18세기 프랑스 귀족 작가 마르퀴 드 사드는 <쥴리엣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에서 쥴리엣은 이익 앞에서 철저히 계산적인 생각으로 채워진 여성이다. 그녀에 의하면, 약자나 실패한 자들은 멸망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니체의 힘에의 의지나 더 나아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을 말한다. 그녀는 종교를 제거하며, 악함에 대해 선에 우위를 두지 않으며, 죄에 대한 구원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전제주의와 제국주의를 공포에서 찾으며, 인간은 선동되는 존재로 봄으로써 더 이상 목적 자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쥴리엣은 모든 가치의 전도와 금지된 것을 행하라는 니체의 선구자로 볼 수가 있다 (Horkheimer and Adorno, Dialectics of Enlightenment, 76).
사드와 니체에게서 연민과 동정은 죄악이며, 노예도덕에 속한다. 여기서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칸트 역시 덕의 위험성을 보지 못한다고 본다. 칸트는 인류에 대한 일반적 선의나 동정을 도덕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결국 칸트의 정언명법은 니체의 초인의 비밀이다. 초인의 의지는 정언명법처럼 독재적이다. 이 두 가지 원리들은 후견과 감독으로부터 무제한적인 자유 즉 계몽의 본질을 목표로 한다.
그런가하면 사드에게서 계몽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다. 사드는 보다 고귀한 자아인 초인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유대와 가족과 제도를 무정부적으로 해체하려고 한다. 사드의 극닥적 개인주의와 무정부는 프랑스 혁명에서 일반의지의 절대적 지배 (공포정치)에서 정점에 달한다 (ibid., 92).
사드와 니체는 칸트와 더불어 가차없는 계몽의 완성자들로 파악된다. 칸트의 도덕적 엄격함이 사드의 <쥴리엣>의 비도덕성에서 전제적 이성의 파괴성과 연계된다. 계몽의 이성은 결국 자연의 지배를 통해 자기보존과 도구적 합리성으로 파국을 맞는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칸트의 도덕체계를 사드의 <쥴리엣>의 상상적인 게임과 비교한다. 쾌락의 욕망은 성적 놀이의 규칙에 순응해야한다. 칸트의 도덕성은—사드의 감성 처럼 외부의 구조에 의해 지배되며—내용이 비어있다. 그것은 감성의 내용을 억압하면서 도덕적인 삶을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합리화의 과정에 묶여지며 물화가 되고 만다. 도덕은 이성의 규칙을 적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감정과 연민을 덕목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드에게 칸트는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드가 도덕적 연민을 성의 방종의 계산과 냉정한 계획을 위해 파괴하는 곳에서, 칸트는 사드처럼 전통적인 덕목의 가치를—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것처럼—파괴하지 않았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을 의무아래 위치시켰다. 도덕적인 의무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 더우기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적 감정과 숭고미의 경험이 도덕 이성에 관련되는 것을 보았다. 사드와 나체는 칸트의 이성개념에 은밀히 내포되어있는 유토피아의 표피 다시말해 타자의 억압을 벗겨내어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 자로 보기가 어렵다.
사실, 칸트의 정언명법은 초인의 의지처럼 독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제주의와 야만으로 가는 길로 비난 받을 수가 없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본체계와 관련되며(신의 존재, 영혼불멸, 자유), 선험적 자아는 자유이념과 자율성에 기초하지, 새디즘과 같은 성의 욕망과 쾌락과는 상관이 없다. 칸트는 인간을—사드처럼 성의 쾌락의 수단이 아니라(인과법에 기초한 타율성)—목적자체로 간주하는 정언명법을 말하며, 이것은 객관적 영역에서 보편적 타당성을 갖는다. 이러한 선험적 자아의 도덕의 보편성은 동기가 선해야하며, 그의 “감히 알려고 하라”는 비판적 계몽과 용기는 정치개혁과 목적의 왕국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윤리적 사회주의), 그리고 당대 식민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코스모폴리탄적인 환대의 윤리로 나타난다. 사드의 성의 방종에서 이러한 사회롸 식민지비판이 한 줄이라도 언급되는가?
칸트의 계몽은 이성의 공적사용에 근거해서 정치적 권위와 억압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며, 이러한 비판을 통해 인간을 후견이나 미성숙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성숙함은 순수 이성의 도식(shematism)에기초한 자연지배가 아니라, 역사의 전개에서 도덕의 진보를 지적한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 즉 합리적인 본성을 창조의 공백에 매꾸지 않는다. 인간의 지칠줄 모르는 경쟁과 지배와 소유욕 없이는 인류의 탁월한 자연적 기능들은 발전될 수가 없다.
자연의 충동이나 비사회성의 근원, 또는 끊임없는 저항으로부터 많은 악들이 출현한다. 이러한 악들의 한가운데서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능력을 발전시켜나간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계몽은 인간의 이기주의적인 동물적인 충동과 무의미와 적대감 그리고 예기치않은 낯설은 것들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발전하지만, 결국 인간은 결국 정의와 사법에 기초한 시민 사회 (루소)로 진입한다 (Kant, “Idea for a Universal History with Cosmopolitian Intent,” Basic Writings of Kant, 125).
칸트의 도덕과 자유의 진보에 대한 역사적 반성에서 (네번째 테제) 적대감 (비사회적 사회성)과 불평등과의 투쟁이 칸트의 역사 사회학적 변증법을 특징짖는다. 자유는 사드처럼 극단적인 개인주의적이거나 무정부적이 아니라, 대립과 불평등을 넘어서서 공공선을 지향하며 시민국가의 법에 기초한다.
이것은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칸트의 도덕이성이 도구적 합리성이나 범주의 강요를 통해 자연의 지배로 나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자연이 인간의 삶을 대립과 투쟁의 변증법을 통해 합리적인 시민사회와 정의로운 법을 통해 공공선으로 인도한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선험적 통각은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부르주와의 경제 자율성과 생산소유권 다시말해 산업사회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 아니다 (ibid.,69-70).
선험적 자아의 실천이성은 역사적 과정과 악들에 대한 경험과 투쟁을 통해 인간의 성숙함을 형성해간다. 칸트는 뒤르캠의 도덕 사회학과 만날 수 있으며, 선 악을 넘어서는 니 체의 <도덕 계보학>이나 사드의 극단적인 성의 방종과는 거리가 멀다.
칸트의 이성은 오성과 개념 그리고 범주를 넘어서 있는 이념원리인데, 순수이성을 통해 신존재 증명에 대해 인식론적인 구성 (우주론적, 존재론적, 자연신학적)은 오류와 환상에 빠지고 만다. 오히려 이성은 신존재에대한 경험의 토대를 위해 자연사에서 나타나는 우연과 맹목적 필연성에 규제적으로 저항한다. 자연의 목적론에서 칸트는 실천이성과 경험의 문제 그리고 도덕감정의 차원을 접근한다. 여기에 자연과 예술의 고고학의 사회비판적인 차원이 담겨져있다.
이념 (신의 존재, 자유, 영혼불멸)의 형이상학은 이분법적이 아니라 상상력과 선험적 합목적성을 기초로한 미학의 경험이나 종교적 내면감정(숭고함)의 세계에서 현상학적으로 체험될 수 있다 (예를들어 루돌프 오토의 거룩의 이념).
칸트의 자연과 예술의 고고학은 분석적이지만, 또한 내면의 숭고한 종교적 감정 즉 도덕적 감정과 더불어 사회학적으로 코스모폴리탄 환대윤리와 시민사회를 구성한다. 이것은 미학적-종교적 합리성을 삶의 철학이나 물질적인 이익 (마르크스)또는 권력관계 (니체)로 해체되지 않는다.
칸트는 인간중심적인 신학 (포이에르바하)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거스틴처럼 신인식은 선험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내주하는 신에 대한 회상 (숭고함에 기초한 거룩한 도덕 감정)에 가깝다. 그러나 칸트의 고고학은 도덕신앙에서 은총의 길을 향하지 바울처럼 은총에서 도덕의 길(성화)을 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칸트의 안셀름 비판의 한계를 지적하고 전적타자의 하나님의 길을 가지만 칸트의 성서해석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그에게서 철학적 신학의 형식을 본다 (Barth, Protestant The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252-298).
칸트의 고고학
숭고미에서 드러나는 이율배반 (이성과 상상력)의 해결 즉 변증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되며 자연 안에서 신의 계획을 인식한다. 이러한 목적론적 입장은 칸트의 미학을 도덕 감정과 신앙으로 나가게하며, 이것은 정치개혁과 혁명을 위한 실천 도덕성이나 목적의 왕국의 수립에 이어진다.
칸트의 이념의 형이상학은 오히려 지상에서의 실현 되어야하는 유토피아적인 실재론이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차원을 담는다. 칸트의 미학은 자연의 숭고미에 관련되며 고고학적으로 접합되며 사회학적 구성의 차원을 갖는다.
칸트의 미학과 보들레르의 (하위계층을 지향하는)근대성의 미학은 푸코의 지름길과는 달리 칸트의 고고학적 미학을 사회학적으로 코스모폴리탄 윤리와 식민지 비판을 통해 재구성 되어야한다. 이것은 포스트콜로니얼 근대성의 과제에 속한다. 칸트에 대한 푸코의 접근에서 서구 제국주의나 식민지나 노예제 비판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어째튼 푸코는 계몽을 위하든지 아니면 반대하는 진영논리의 사기행각을 거절한다. 오히려 계몽은 비판적으로 경계를 설정하는 태도이며, 푸코의 역사 비판적 태도는 인간의 역사적 경계를 구성하는 완전하고 결정적인 지식의 관점을 거절한다. 이것이 헤겔의 절대지를 거부하고 푸코가 칸트와 보들레르로 전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시작의 입장에 다시 서 있다.” (ibid., 54) ㅡ왜냐하면 비판은 칸트처럼 한계설정이며 이성의 공적사용을 통해 성숙함으로 나가는 태도를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에 시작과 더불어 서 있는 입장은 비판적으로 경계설정의 작업 즉 문제틀(problematique)의 태도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