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과학 기술: 비판적 대화
하이데거와 근대과학기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현존재와 자연의 생을 급진적으로 분리시켰다. 자연의 생에는 선 자체가 없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이 존재의 무 앞에서 진정성을 의미한다 히틀러의 부름 앞에서 독일 현존재의 양심은 거절을 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소리에 복종했다.주객도식의 극복은 파시즘으로 막을 내렸다.
하이데거에게서 윤리와 책임성은 존재들의 충만함에서 탈각된다. 인간은 존재의 목자로 고양되지만, 형제를 지키는 자는 아니다.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고 하나님앞에서 자기가 동생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변명했다. 하이데거를 향환한성서의 고발이다
후기에 들어서 하이대거는 과학을 기술정도로 폄하한다. 1976년 하이데거가 죽기 2주 전 시카고에 소재한 DePaul 대학에서 하이데거 컨퍼런스가 열렸다. 하이데거가 보낸 축하 편지에서 그는 근대 자연과학은 근대기술의 토대이며 기술적 사고의 기본형식으로 말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완성이다. 형이상학은 허무주의로 귀결이 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 특유의 존재물음에서 수행된다.
하아데거에게서 기술의 의미는 고대 그리스적인 예술에서만 정당성을 가지며, 이것은 자연적인 스스로 드러냄이며 포이에시스이다. 알레테이아는 근대 과학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영지주의적 근대성 거절을 통해 전근대의 과학과 기술로 부터 근대과학을 이분화하는 시도는 상당한 비판을 당한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들을 통해 많은 건축과 기계들이 만들어졌고 상품과 해외교역은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대 과학기술과 다를 바가 없다.
하이데거의 존재물음과 알레테이아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을 탈취하고 페르메니데스의 이방여신의 계시와 모자이크해서 하이데거가 자의적으로 변종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영지주의적 근대비판에서 중요한 툭징은 신들의 사라짐에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푸스 신들과의 소통 가운데 살았지만 이런 신들은 그리스인들이 만든 것이다. 이들은 하이데거처럼 존재진리를 알레테이아를 통해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사건 형이상학"이며, 그리스의 사회경제적 현실과 맞지 않는다. 고대로마에서 기술을 통해 생태학의 파괴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다.
하이데거가 던지는 과학과 기술의 공속성에 관한 비판적 뮬음은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계보학적으로 세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아데거의 영지주의 존재론과 반 과학적 태도나 반 근대성도 또한 비판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한스 요나스의 비판
이런 점에서 한스 요나스는 <생의 현상>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드러나는 영지주의 세계관과 허무주의 그리고 창조의 선함에 대한 거절을 문제 삼는다. 현존재의 결단주의는 무엇을 찬성하거나 거절하는 윤리적 결단이 아니라 자기해소를 하는 것이다. 허무주의 뿌리는 자연에 대한 하이데거의 무비판적인 수용에 있으며, 인간은 더 이상 창조의 거룩한 질서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서 창조의 선함은 실종되며, 현존재는 여기에 무관심하며 인간성 전반에 대한 신뢰나 지속가능한 지구의 운명에도 관심이 없다. 윤리적 공허함이 출현하며, 창조의 선함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발견이 없다. 존재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존재론적 경험에 무관심하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영지주의와 파시즘과는 달리, 진정한 개인실존은 도덕성의 우위에 있지 않다. 물론 생물학적 사실들에 대한 실존적 해석은 자연의 생안에 도덕이 있다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적론적 존재의 생의 지향성은 자연의 세계안에서 현재한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탈각해버린 생물학적 사실들과 유기체의 삶에 대한 현상학적 복권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뿐 만 아니라 모든 유기체는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차이애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염려한다. 가치는 생 자체에 본질적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생애 필요한 자유의 몫을 나눈다. 자신의 생안에서 초월의 내적지평을 열망하고 개별적인 유기체는 살아있기 위해 환경의 서식처를 만든다.
자연의 생에서 인간의 마음과 이성의 출현은 다른 우기체들의 생으로부터 엄청난 분열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세계를 통해 미리 특징되어인 것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식을 통해 존재를 반성하는 능력애서 인간은 자신이 자연에 의해 불려진 것을 이해하고 자연을 지키는 자가 된다. 자기초월의 폭넓은 지평은 인간존재에 독특한 불안이나 죄책이나 좌절의 느낌을 가져온다.
요나스가 모든 유기체들에게 존재의 범주로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사유를 뒤집는다. 윤리의 원리는 자아의 자율성이나 공동체의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자연에 의해 객관적으로 할당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윤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접합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환경사회학에서 논의되는 사회자연성(Socionature)에 근접하며 윤리적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사회자연성 개념은 인간의 사회는 환경과 더불어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사회는 자연적이며. 환경 또한 부분적으로 사회적이다. 이러한 변종의 접합개념은 문화로서의 생활세계와 자연의 생의 세계를 이분화하지 않는다. 모든 유기체들은 주관적으로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을 피하고 자연안에 내재하는 선함과 생을 추구하는 가치를 말한다. 선함자체가 가치의 객관적 실재로 설정되며 여기서부터 존재를 방어하는 책임적 구속성이 돌출된다. 생의 선함은 이미 존재하는 목적에 상대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을 갖는 그 능력은 선 자체을 말한다. 생을 통해 존재는 자신에게 긍정을 표현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격률이며, 인간만이 존재론적 진리를 인식한다. 존재안에 있는 생의 현전은 그 부재보다 절대적이며 무한한다. 존재는 삶을 통해 자신에게 긍정을 한다--이러한 존재론적인 공리를 통해 우리는 생활세계의 온전성 (생명세계를 포함한)을 방어하는 의무를 갖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선함자체안에서 책임성의 일차적 목적 즉 정언병법은 인간에게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도덕적인 책임의 존재로 고양되었고 자연적인 환경을 보호한다. 우리가 자연을 가치의 근원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의 이해관계를 위해 기술조작을 위해 투사하는 단순한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기술 지배화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가치의 근원이며, 생활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요나스는 후설의 세계의 수학화 테제를 세계의 기술화로 변형시킨다.
요냐스는 <책임의 정언명법>에서 기술시대의 윤리를 추구하며, 자연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존재론적인 해명을 한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독특한 자리를 갖는다. 개인의 진정한 실존은 열린 미래를 향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이 있다
요나스에게 창조는 선한 것이며 자연의 유기체의 존재들은 죽음을 회파하고 생명을 취하는 가치가 내재한다. 유기체의 존재들의 삶에서 요나스는 자율성과 원초적인 자유의 형식을 본다. 이러한 삶을 파괴하는 기술남용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의 중심으로 들어오며, 기술지배의 시대에 윤리는 인간과 더불어 환경의 차원으로 전개된다.
더 나아가 요나스의 신학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창조로 본다. 물론 초월적인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애 호소하지 않고도 자연안에서 윤리적인 차원을 돌출할 수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요나스는 자연의 의미를 하나님의 창조로 심화 시킨다. 신앙와 이성은 양립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창조로부터 스스로 물러났고, 세계는 위기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의 자기제한을 통해 인간은 자유의 능력을 행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손상된 세계를 고친다.
인간은 지식과 자유를 통해 유례없는 기술의 시대에 힘을 가지며 지구의 생과 종들을 멸절시키벼리는 악을 행할 수도 있다. 도덕적 책임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피조된 존재임을 각인한다.
요나스의 유대신학적 접근은 하나님의 자기제한성을 아유슈비츠의 악에 직면해서 반성한다. 그리고 근대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한다. 우주과학은 빅뱅을 말하며 인간의 삶은 진화의 끝자락의 과정에서 출현했다. 유대교의 삶의 선함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특별한 존엄성은 요나스의 환경윤리에 토대가 된다, 여기애는 무신론자들까지도 자연의 생을 창조의 의미로 파악하고 공동으로 환경과 자연의 생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헌신할 수가 있다
요나스의 철학적 생물학은 생물학적 존재들에 대한 실존적인 해석을 시도하며, 자연의 생을 위한 윤리적 책임에 대한 존재론적인 토대를 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 홀로코스트 상황애서 유대신학을 반영한다. 그의 촐학적 생물학은 환경 사회학을 위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Jonas, The Phenomenon of Life, Foreword).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양자역학도 고전 물리학과 다를 바가 없다. 고전 물리학의 주객도식과 양자역학의 관계적 사유로 바뀐 것 밖에 없으며 보다 극심하게 몰아세우는 착취의 틀(Gestell)과 지배방식에 불과하다.
1945년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를 처음 만났다. 1953년 <기술문제>를 다루면서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을 언급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철학적 의미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1930년대 아인슈타인-보어 논쟁을 보면서 양자세계의 입자와 파동의 불확실한 관계 또는 상보성 원리를 오류로 비판했다. 닐스 보어가 주객도식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닐스 보어는 칸트의 인식론에서 물자체를 알 수 없다는데 동감했고 하 이데거와는 정반대에 서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뷸확정성의 원리도 인과율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이데거는 비난했다.
1924년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원자의 구조를 연구했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던 해 양자역학에 대해 발표했다. 원자의 세계에서 전자의 위치/운동량은 정확하게 측정할 수가 없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운동량의 퍼짐은 커지게 된다.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거시세계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량은 속도와 이동거리를 가지고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대포를 이용해 10 kg 포탄을 초속 300미터의 속도로 발사하면 몇분 후 어디에 떨어지는 알 수 있다,
고전 물리학에서 이것은 미래 예측의 결정론을 말한다. 하지만 미시세계에서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예측 결정론을 빗나간다. 전자의 운동량을 측정하는 순간 위치가 변하기 때문에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다. 또한 양자 역학에서 광자 (파동의 입자)나 또는 전자 (입자)는 파동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고 입자의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입자와 파동을 동시에 볼 수 없고, 이것은 상보성의 원리로 나타난다.
여기서 수학적 모델의 한계가 드러난다. 사실 하이젠베르크는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고전 물리학을 넘어서 자연의 세계에서 인과율의 불가능성을 말했다. 자연의 관찰을 기초로 과학이 미래를 산출하고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이젠베르크는 잠재성의 개념을 돌출하고, 근대 물리학의 개연성은 자연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범위를 포함하는 경향성으로 말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에 가까울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뉴톤의 결정론을 넘어서는 철학적 통찰을 배웠다.
파라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파라메네니데스는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시 알레테이아는 확고한 진리를 피력하고 이것을 이방의 여신 알레테이아에게 계시된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와 생성의 변증법을 말한다. 새로윰이 존재한다. 영원한 진리는 없으며 존재도 변하지 않은채 거기에 있지 않다.
뉴톤의 물리학은 파르메니데스가 옳다고 본다. 뉴톤의 이론은 결정론적이며 시간은 가역적이다. 새로운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세계는 기계처럼 운동법칙과 인과율에 따라 작동되고 미래는 예측가능하다.
철학의 영역에서 파르메네니데스는 하이데거에게 부동의 자리를 갖는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 진리 개념을 위해 탈취된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헤겔의 역사 변증법과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새로운 파라다임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주는 진화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팽창해지면서 어디론가 진행된다. 열역학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얄의 엔트로피의 증가로 인해 죽음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유기체의 자기조직화에서 자연의 창조성이 나타난다. 비평형의 무질서의 상태에서 자기를 조작하면서 새로운 존재가 충현한다. 이것은 소산구조를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 그리고 환경문화의 작용인을 거처 나타나는 현실태를 말한다.
그러나 현실태는 변화된 고차원적 존재이며 자연의 요동과 갈라치는 바평형의 상태에서 열린환경과 더불어 창조적으로 발생된 새로운 구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파르메네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논쟁을 넘어서서 유기체의 자기조직화와 자연의 창조성에서 비평형상태의 에네르기아를 드러난다. 이것은 근대물리학 이후에 새롭게 만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다.
분자 생물학에서 세포의 삶은 네트워크로 서로 매개와 촉매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생산한다 (오토포이에시스). 여기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출현하는 알레테이아는 세포 유기체의 전체나 시스템에서 오토 포이에시스에서 대해재해석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질서와 무질서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생의 형식이 창조적으로 출현한다. 우주의 생자체는 창조성이며 무질서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생의 창조적 발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 그리고 엔텔레키아를 새롭게 고려할 수 있다.
잠재태가 기능과 목적/완성을 향한 과정에서 생의 새로운 원리는 창발성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즉 잠재태와 현실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시아(본질)은 우발적으로 파악된다. 본질은 우발적 질료와 같이 진화하며 현실태는 네트워크와 패턴안에서 앙상블로 나타난다. 상호 연관성과 매개작용이 유기체의 발전에서 자연의 생의 세계를 공생과 합력으로 이끌어간다.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미래는 알려지거나 결정되지 않으며, 예측할 수 없는 새로움에 열려있다. 시간은 반복되지 않는 역사성으로 파악되며, 세계 또한 설령 이전상태로 복귀된다 해도 반복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니체의 영원회귀와 윤회의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 잠재적인 가능성 안에서 개별적인 다른 사건들이 현실화될 수 있다.
우연성과 잠재성이 자연세계의 객관성을 지적하며, 이것을 하이데거처럼 주객도식의 잔재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라는 사건을 지적한다. 더 이상 파르메니데스의 신화론에서 차용한 진리와 존재사건은 불확정의 원리와 비평형성의 소산구조그리고 자기 조직화에서 픽션임이 드러난다. 존재사건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자연환경이나 문화적 또는 사회적 에피스테메 또는 생활세계와의 부단한 엮여짐에 있다 진리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자연의 생의 특징으로 나터나는 창발성, 세포의 오토포이에시스 그리고 네트워크의 사고는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의 형이상학이나 사방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세계의 삶은 비결정적이며 신들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존재의 열어밝힘의 환상은 어렵다.
뉴톤 물리학의 결정성은 거시세계에서만 국한된다. 그렇다면 몰아세우는 틀로서 기술지배와 착취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수정되어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기술을 하이데거처럼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시와 예술작품에서 찾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