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생명으로 부터 온다. 진화는 새로운 생명의 창조로 나가는 생의 지향성이다. 세포의 시스템에서 오토포이에시스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단백질의 집단적 자가촉매작용에 연결된다. 확산구조(dissipative structure)는 세포의 자기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며 효소는 생명을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세포는 자유 생명 시스템이며 비평형 확산구조를 의미한다 (일리야 프리고진). 여기서 자연선택이나 유전자 결정론은 중립적이고, 오히려 네트워크 안에서 세포의 부분들은 세포 유기체의 삶을 위해 그리고 유기체에 의해 작동하며 살아간다. 세포의 오토포에이시스와 비평형상태에서 확산구조의 창발성은 진화를 지속적이며 새로운 생의 출현으로 파악하게 한다.
이러한 접근은 대진화의 영역에서 중지와 평형에서도 볼 수 있다.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은 더 이상 계통발생을 따라 점진적인 누적에 의해 또한 환경적응에 의한 선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화석기록을 보면 수 천만년의 시기 동안 중지된 평형상태로 있다가 갑작스런 새로운 종의 출현과 다양성의 증가가 마치 확산구조처럼 새로운 존재의 영역으로 비약한다 (스테판 굴드 <경이로운 삶>).
비평형적 열역학 법칙은 열린 환경의 중요성과 유기체의 활동에 연관된다. 이것은 세포의 시스템에서 특히 분자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집단적인 자가 촉매작용이며, 생의 새로운 창조성을 보게된다. 진화는 열린 환경에서 에너지 확산을 통해 생명에서 부터 새로운 생명으로 도약하는 창조를 의미한다. 진화는 점진적인 진보가 아니라 가지가 갈라지면서 생의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생명으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시스템과 복잡성
슈트워트 카우프만은 생명은 물질로부터 자발적으로 생겨나고 생의 다양성의 폭발은 분자의 영역에서 집단적 자가촉매 집합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집합은 유기체의 성격을 말하며 구성분들은 상호작용함으로써 일관된 움직임과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집합은 유기적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며 복잡한 시스템 (복잡계)으로 볼 수 있다.
복잡계는 부분들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총체적으로 돌연히 나타나는데 이것은 창발성이며, 구성분이 전체를 만들지만 전체성이 부분을 결정한다. 카우프만에 의하면 창발성은 전체가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기체 중심이며, 탑다운 방식으로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사스템적 사고 또는 총제성(holism)을 말한다.
카우프만은 이러한 홀리즘을 세포 분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집단적인 자기 촉매집합으로 말한다. 이것은 자기를 유지하고 복제하며 자기조직화를 한다 (<혼돈의 가장자리>, 49).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에서 시스템은 다윈의 자연선택 보다는 생명의 창발성과 인접 가능성을 통해 진화를 이해한다. 이것은 관계론적 사고를 말하는데, 예를들면 심장은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 다윈에게서 심장은 생명체의 생존에 유리하게 적응이 되어서 자연적으로 선택되고 존재한다. 심장은 자연 선택으로 인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생명체도 없는데 심장이 환경에 적응을 잘해서 자연적으로 선택 되는가? 심장은 생명체와 관련하여 그 기능과 의미를 언급할 수 있지 않은가? 다윈의 결정론적 선택이론은 인간의 인위적인 품종개량을 자연으로 확대시킨 방식을 취하지만, 자연의 생은 다윈과는 달리 복잡성의 네트워크에 연결되고 생태적 지위를 다양한 종들에게 가능하게하는 먹이사슬의 사이클로 나타난다.
사회학적 반성: 종교와 진화
자연의 생에서 나타나는 잔인함과 공격성의 차원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모델은 자연의 생의 전체를 보지 못했고 뉴톤의 결정론적 입장과 빅토리아 문화의 정치 경제학에 의해 채색되었다.
투쟁 가운데서도 협력이 나타나며. 진화의 과정에서 어린생명에 대한 부모의 돌봄 특히 모성의 돌봄은 공감과 윤리 그리고 종교의 발전에 결정적이다. 공감이 인간적인 사랑에 도달할 때 신체접촉이 일차적이며 이해는 그 다음에 온다 (Bellah, Religion in Human Evolution, 72).
이러한 돌봄과 공간의 측면에서 로버트 벨라는 진화론을 사회학적으로 평가하고 접근한다. 벨라는 종교와 과학에 대한 하버드 대학의 고생물학자 스테판 굴드의 입장 즉 서로 다른 겹치지않는 영역에 주목한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는 언어의 발전에서 갈라지는 영역이다.
또한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종교적 자연주의를 검토한다. <Reinventing the Sared>에서 카우프만은 자연의 신성함과 더불어 신을 말한다. 온전히 자연적인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성 자체이다. 카우프만은 갈릴레이와 추종자들이 환원될 수 없는 생의 복잡성을 단순한 물질로 환원 시킨 것을 비판한다. 조직의 새로운 형식들은 환원될 수 없는 유기체의 복잡성을 발생시킨다.
로버트 벨라: 종교는 문화적 시스템
벨라는 에밀 뒤르켐의 종교 사회학과 클리포드 거츠의 문화 인류학에 공명한다. 종교는 믿음과 제의적 실천의 시스템이며 신성함에 관련된다. 이러한 신성함은 추종자들을 도덕적 공동체 안으로 연합시킨다. 막스 베버의 의미 사회학과 합리성과 종교 분석은 종교의 인격성과 윤리를 다룰 때 벨라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벨라는 카우프만의 자연주의적 창조성을 종교의 신성함에 연결하지 않는다. 세포의 세계는 종교적 신성함이나 도덕적 세계와 일치할 수 없다. 벨라는 카우프만의 완전히 자연적인 하나님 곧 우주의 창조성에서 지나친 종교적 자연주의 낙관론을 본다. 새로운 조직의 형식에서 환원될 수 없는 복잡성이 출현하지만 이러한 창조성을 하나님으로 부를 수가 있을까?
그러나 벨라에게 종교는 삶의 형식이며 실천은 믿음 앞에 위치하며 믿음은 실천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과학주의를 통해 발견된 우주의 창조성 앞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있을까? 오히려 종교적 비유신론이 벨라에게 더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창발성을 말하지만 지나친 과학주의 낙관론(카우프만)이나 다윈주의 비관론 (자크 모노) 사이에 위치한다 (Religion in Human Evolution, 100).
뒤르캠의 신성함은 벨라에 의하면 신비적 영역으로 몰입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일상의 세계에서 다차적 실재 (알프레드 슈츠)에서 경험의 도약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다차적 실재는 일상의 세계에서 뒤뤼캠이 말한 집단적 열망에서 출현하는 카리스마적 세계일 수가 있다.
사회적 개혁과 혁명에서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는 소산적 구조는 카리스적 열망으로 채워진 도약적인 열망에서 보여지거나 다차적인 실재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벨라에게 종교는 네러티브로 특징되며 신화와 음악과 연결된다. 인간은 네러티브의 존재이며 네러티브는 인간의 정체성의 중심에 있다(ib id. 34). 네러티브의 문화적 형식은 이론적 개념 이전에 있으며, 종교적 내러티브는 존재의 일반구조로서 기능하며 문화적 진화는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과는 다르다. 역사와 문화는 경쟁과 생존투쟁에 의한 외부환경의 적응을 통해 자연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진화는 적자 생존을 기초로한 진보신념과도 상관이 없다.
역사는 깊은 구조와 다양한 사회조직들과 문화들을 포함하며 적응과 변이와 혁신과 다양성의 확장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문화적 진화는 모방적-신화적-이론적 문화로 진행된다 (멀린 도날드). 이러한 개별적 단계의 문화는 적응과 변이와 혁신을 통해 보존되며 문화적 통전에 본질적이다.
이런 점에서 벨라는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과 클리포트 거츠의 인류학을 문화적 진화의 틀에서 접합시킨다. 인간의 진화의 측면에서 종교는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 (Religion in Human Evolution, 2).
구성적 반성
종교는 생태학적 실재에 대해 어떤 문화 사회적 구성에 기여하는가? 뒤르캠의 사회학에서 사회적 사실들은 오로지 다른 사회적 사실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방법론은 사회학을 학문으로 설정하는대 역할을 한다. 자연적인 자원은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노동분업을 통해 시민 사회안에서 도덕적으로 설정된다. 노동분업은 유기체의 발전을 통해 나타나며, 사회는 복잡한 자연의 부분이다. 그의 사회학은 생물학과 생태학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종교는 자연의 생에 대한 문화적 구성에 관여한다. 사회와 환경의 관계와 상호작용은 뒤르캠의 사회학에 중요한 보충이 될 수가있다.
뒤르캠의 노동분업과 유기적 연대는 시스템의 생물학의 영역에서 집단행동의 생태학에서 유비를 갖는다. 생의 상호의존성과 네트워크는 세포의 삶에서 오토포이에시스와 심비오시스로 나타난다. 이것은 환경사회학을 향한 새로운 챕터를 의미한다
그런가하면 막스 베버에게서 사회와 환경은 이념과 물질적 이해관계애서 드러나는 선택적 친화력에서 볼 수가 있다. 행위자는 물질적이며 자연적인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며 상호작용을 하는가? 목적 합리성을 통해 인간은 합리화 과정으로 나가지만 반면에 가치합리성을 통해 인간은 자연과의 교감과 심정윤리를 발전 시킨다. 농부들은 일상의 삶에서 자연과 밀접하개 연결된다.
베버는 1910년 10월 독일사회학회에서 알프레드 플뢰츠 (Alfred Ploetz)가 발표한 "인종개념과 사회"에 토론을 했다. 1904년 베버는 미국 새인트 루이스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초대를 받았고 예술과 과학의 모임에서 말표를 했다. 그곳에서 베버는 흑인 사회학자 듀 보이스 (W.E.B. Du Bois)와 아침식사를 했다. 듀 보이스는 1890년대 독일에서 공부하던 당시 베버의 강연을 들었다고 말한다 (The Autobiography of W.E.B. Du Bois, N.Y.: International Publishers, 1968, 162). 그는 이후 베버와 정규적인 서신교환을 했다. 배버는 듀 보이스의 <흑인의 영혼>을 높게 평가했고 독일어로 번역 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저술은 당대 흑인 지식인으로서 인종차별을 해결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베버는 플뢰츠 (Ploetz)가 사회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파악하고 이러한 유비론을 세포 조직과 사회를 비교한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곤충의 공동체와 인간의 정치 공동체사이에서 유비를 이끌어내는 시도가 사회학에 일반적인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모든 사회적 과정들은 지구에서 일어나며, 생물학에서 자연선택의 과정은 사회제도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많은 경우에 사회제도들은 생물학적인 유전의 인종특질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베버는 플뢰츠와 그의 동료들의 생물학적인 작업을 거절하지 않았다. 유전적인 특질은 구체적인 사회현상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배버는 사회현상에 대한 일방적인 생물학적 접근에 거리를 두었다 (Sociology and Biolology, in Weber Selections in Translation, 389-90).
베버의 논문 "인종관계"는 신체의 유전 특질이 인종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베버는 사회계층론에서 인종문제를 문화적인 측면과 더불어 사회신분과 정치적 힘의 경쟁 관점에서 어떻게 독점되는 지에 주목을 했다. 생물학적인 인종문제는 사회적으로 즉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Race Relations, ibid., 359-369).
이것은 환경과 사회적 관계를 다룰 때 사회 계층론에서 환경문제를 다룰 것을 보게한다. 환경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며 형성된다. 베버는 그의 사회계층론과 신분의 지위와 경제적 독점을 통해 환경 사회학을 향한 통찰을 열어줄 수 있다.
사회학의 영역에서 벨라의 공헌은 인간의 진화를 통해 종교를 파악하고 내러티브의 성격을 부각시켰다. 벨라의 종교 내러티브는 그가 중요하게 수용한 막 커슈너의 세포의 보존과정을 기초로 환경 사회학을 열어주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커슈너는 스테판 굴드의 단속평형이론을 세포의 진화과정에 적용하고 장구한 세월 중지-평행-혁신이라는 틀에서 사회학과 대화를 열어 놓았다. 생의 출현이론과 세포의 오토이에시스에서 나타나는 심비오시스의 생의 차원은 환경 사회학에서 전개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