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N._Bellah
로버트 벨라는 미국의 종교 사회학에서 문화 진화론을 통해 축의 시대의 종교를 개념화한 주도적인 학자이다. 벨라는 생물학적 진화를 문화의 차원에서 개방하고 자연선택이 아니라 다양한 변이의 발전에 주목했다. 벨라에게 사회학을 지배해 온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나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 생물학은 거절된다. 벨라는 유전자의 선택과 결정론이 아니라 유기체가 문화와 더불어 공동으로 진화하는 입장을 전개한다.
나는 1992년부터 1999년 버클리에서 공부하던 당시 로버트 벨라 교수로 받은 영향이 크다. 지금까지 현상학적 사회학을 분자 생물학과 양자장 이론과 더불어 발전시키는 데 그로부터 입은 배움이 크다. 나는 생물학의 차원에서 새로운 생의 출현을 일리야 프리고진의 비평형 열역학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이론에 착상시킨다. 더 나아가 스테판 굴드의 단속 평형론과 카우프만의 복잡성 시스템에서 다윈의 진화론의 형이상학적 허구를 비판한다.
다윈의 전통에서 진화는 계통분화에 따라 경쟁과 생존투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연에 의해 선택된다. 그러나 새로운 생의 출현이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열린 환경에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상호작용에 있다. 에너지의 소산과 엔트로피의 증가에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종이 복잡한 형태로 고차적으로 출현한다. 이것은 중지-평형-혁신이라는 변증법적 구조이론으로 특징된다.
하이젠베르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을 잠재태와 가능성의 실현에서 복권시켰다 .다윈적인 의미에서 결정론적인 진화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해석과 더불어 나는 로버트 벨라의 축의 시대에서 나타나는 종교와 문화의 문제를 검토한다.
종교: 네러티브와 진화
로버트 벨라는 사망하기 전 <인간의 진화에서 종교>라는 대작을 출간했다. 그의 문화 진화론은 인간의 진화에서 발생하는 종교에 주목하고 리차드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에 반론을 제기한다. 진화를 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유기체다. 유기체는 유전자에 의해 선택되는 생존기계와는 상관이 없다. 유전자를 포함하는 유기체가 진화의 중심 단위이다.
벨라는 축의 시대(axial age)를 다루면서 생물학자 마크 커슈너와 존 게하르트의 공저 <The Plausibility of Life>에 관심한다. 이들은 고전적인 자연선택을 확대하면서 변이에 대한 유기체의 콘트롤을 발전시켰다. 무작위적인 변이가 아니라 유기체에 의한 선택이 검토되며, 이것은 보존 핵심과정으로 설명된다.
모든 생은 일차적 핵심과정 즉 원핵 세포의 창조와 발전에 근거한다. 유기체의 몸은 해부학적 구조를 갖지만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몸의 기능은 신진대사와 생화학적 메카니즘에서 보존적 핵심과정에서 볼 수 있다. 유기체는 오랜 변이와 선택의 역사에 연관되며 자신의 진화와 발전에 참여한다. 용이해진 변이가 일반 진화 과정의 윤곽을 완성한다.
용이한 변이에 의한 진화 가능성의 분석은 적자생존에 기초한 사회 진화론의 선택적 조건과는 다르다. 역사는 경쟁과 생존투쟁에 의해 결정되는 자연선택의 산물이 아니다. 역사는 깊은 구조와 사회들의 역사를 의미한다. 역사는 이러한 조직들과 적응 능력 그리고 혁신 가능성 더 나아가 신비한 변이와 다양성에 서식처를 제공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The Plausibility of Life, 264).
이러한 관점은 진화에 대한 문화적 구성에 적극적인 의미를 제공한다. 로버트 벨라는 이러한 문화구성을 모방적, 신화적, 이론적 문화에 연결한다. 이러한 개별문화는 보존 핵심과정으로 수용된다. 개별과정의 계기는 새로운 과정으로 재조직되며, 변이와 적응과 혁신에 기여한다. 그러나 개별적인 본질은 문화의 흠없는 총체에 여전히 본질적이며 실종되지 않는다 (Bellah, Religion in Human Evolution, 65).
벨라의 진화에 대한 문화적 구성은 이미 루소의 자연상태나 <언어기원론>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공명할 수 있다. 그리고 칸트의 유기체론과 종교철학에 가깝다.
종교의 제의와 합리적 사고 그리고 상징체계는 네러티브를 통해 종교적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집단의 사회성을 통해 사회와 문화에 접근하는 것은 단지 격렬한 경쟁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
부모의 돌봄과 공감
특히 벨라는 포유류의 발전에서 부모의 돌봄에 서 자녀들의 발전된 공감능력에 주목한다. 여기서 공동 창발성 가설(프랑스 드 발)이 중요하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2억년 간의 포유류의 진화에서 자녀에 대한 모성의 섬세한 반응에서 시작된다. 부모의 돌봄과 발생은 공감능력과 윤리의 발전에 토대가 된다. 이것은 후손에게 유전된다.
벨라의 입장은 윌슨이 <사회 생물학> 16장에서 부모의 돌봄이 유전자적으로 프로그램화 되어있다는 것과 대립한다. 윌슨에 의하면 생태학적 요인들은 부모의 돌봄의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돌봄은 일반적으로 스트레스적인 환경에서 음식물의 결여와 특히 약탈자의 억압이 있는 곳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생태학적 환경 보다 부모의 돌봄은 자녀들과의 사회적-가족환경에서 더 진화할 수 있다. 설령 자기보존에 기초한 공격성과 이빨과 발톱에 붉게 물든 자연의 잔임함이 도처에 있지만, 역설적으로 투쟁의 과정에서 협력이 나타나며 서로를 방어하기도 한다. 공격성은 사랑보다 오래된 것이고 여기서부터 윤리가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벨라에 의하면 사랑의 기원은 부모의 돌봄에서만 근거된다. 자녀들을 돌보는 동물들에게 가까운 그룹이 형성된다. 그룹 형성과 개인의 우정과 친교는 부모의 돌봄에 근거하며 짝짓기로 발전된다. 공감이 인간의 사랑에 도달 할 때, 신체접촉이 나타나며 이해능력은 뒤따라 온다. 공감은 도킨스처럼 이기적인 행위로 부를 수 없다. 이기적 태도는 다른 존재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Religion in Human Evolution, 73).
리차드 도킨스는 부모의 돌봄을 혈연선택에서 파악하고 혈연 이타주의의 특수한 예로 말한다. 그는 윌슨이 <사회 생물학>에서 혈연선택을 그룹선택의 특수한 예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했다. 혈연선택은 그룹선택의 특수한 예가 아니라 유전자 선택의 특수한 결과이다 (<이기적 유전자>, 158).
윌슨은 <사회 생물학> 5장 그룹선택과 이타주의에서 부모의 이타적 돌봄은 그룹선택의 차원에서 본다. 윌슨의 기본입장은 도킨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읜적인 의미에서 유기체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유기체의 일차적 기능은 다른 유기체를 재 생산하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유전자를 재생산하고 유전자의 잠정적인 운반자 역할을 한다. 유전자의 진화에서 자연선택이 작용하며 유기체는 유전자를 보존하고 유포한다.
예를들면 닭의 존재는 계란이 다른 계란을 만드는 방식에 불과하다. 유기체는 DNA가 보다 많은 DNA를 만드는 방식에 불과하다. 유기체의 복잡한 사회적 행동에 유전자의 테크닉이 첨부될 때 부모의 돌봄과 같은 이타주의가 과장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Sociobiology, 21).
그러나 벨라는 유전자가 아니라 유기체의 진화와 발전에 더 큰 주목을 한다.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의 세계에서 부모의 돌봄과 공감행위 그리고 사랑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유전자가 아니라 유기체가 진화화며, 환경적응의 진화에서 유전자는 추종자이지 주도자가 아니다. 유기체는 발현형질의 변이를 생산하면서 진화에 참여하고 변이를 조절한다. 진화에서 나타나는 행동적이며 상징적인 측면은 유전자의 능력위에 세워지지만 유전자에 의해 콘트롤 되는 것이 아니다.
공동조상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자연선택에서 유기체의 진화와 변이의 강조는 문화발전의 시작을 예고한다. 공감과 모성의 돌봄은 포유류의 진화의 오랜 시간에서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즉각적 반응에서 발전해왔다. 여기서 실패할 때 모성은 유전자를 재생산할 수가 없다.
유기체 (발현형질)의 진화에서 새로움이 재조직되며 이것은 유전자의 산물을 넘어선다. 유전자의 변화는 오히려 유기체의 재조직화된 조건에 의해 이끌려진다. 부모의 돌봄의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인간은 진화의 시간에서 완전히 새로운 유기체의 문(phylum) 이 된다.
문은 생물 분류 단계에서 (식물)계나 (동물)계 아래에 속한다. 언어습득은 기억과 연습에 관여하며 언어는 절차적인 기억과 더불어 특정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에피소드 기억과 융합이 된다. 여기서 내러티브가 발생하는데 종교의 진화와 발전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진화론적 언어게임에서 보면 상호주관적인 소통과 정보전달에서 협력과 혜택이 원시사회에서 존재했다. 특히 네러티브의 발생은 벨라에 의하면 진화론적 언어 게임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방적 문화에서 신화/네러티브 문화 그리고 축의 시대로 특징되는 비판적 이론문화의 틀에서 전개된다.
네러티브의 기본성격은 삶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데 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네러티브의 경향성이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부산물이다 (ibid., 1 02). 내세에 대한 믿음은 불교나 힌두교에선 영혼의 윤회로 개념화 되기도 한다.
종교와 시스템 접근
문화 인류학자 클리포드 거츠는 벨라에게 종교의 의미를 열어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 종교는 상징들의 시스템이며 인간에 의해 수행된다. 종교는 강력하고 오래 지속적인 무드와 동기를 설정한다. 이것들은 존재의 일반질서의 이념에 타당하다. 물론 이러한 종교 시스템 안에는 신성함에 대한 믿음과 제의적 실천이 포함된다 (Religion in Human Evolution, xiv).
종교에 대한 시스템적 접근은 종교를 문화의 본질(심층)로서 그리고 문화를 종교의 형식(표층)으로 보는 틸리히의 실존적 이해를 전도 시킨 다. 종교의 계보학은 실존적 이해와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네러티브 그리고 제의적 수행을 통해 문화의 시스템과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생물학적 유기체와 문화는 공동진화하며 종교는 모방적 단계와 신화/네러티브 그리고 비판 이론적 문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존되고 재조직된다.
종교는 문화적 시스템으로서 존재의 일반질서로 작용하며 인간의 실존적 태도는 종교의 일반질서 안에 기초된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일상적 삶의 세계에 에포케를 치고 다른 문화적 상징적 실재에 관여하는 것이다. 특별한 종교를 말하지 않고 종교에 관해 말하는 것은 특별한 종교가 될 수 없는 하나의 종교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실망적인 귀결을 낳는다 (xviii).
예를들어 기독교의 전통에서 있는 사람이 불교로 넘어갈때 여전히 불교의 특수교리를 무시할 수 없다. 불교의 교리를 기독교의 특수교리에 습합시켜 보편종교를 만들려고할때 기독교와 불교의 특수성은 실종된다. 이런 습합종교를 보편종교로 고양시킬때 종교경험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될 수 있지만 거기에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는 종교는 없다.
종교는 언어와 더불어 출현하며 상징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게서 일상적 삶의 세계는 기능과 적응과 생존으로 특징된다. 인간의 문화가 산출하고 제공하는 다른 실재들은 일상의 세계와 중첩 되어있다. 종교는 사회질서를 구성한다.
일상적 삶의 세계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현상하지만, 이에대한 불신에 판단 중지한다. 다양한 다른 세계들 ㅡ문화영역과 상징 시스템 ㅡ에서 자연적 태도 즉 당연시 여기는 상식적인 생각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종교 시스템에서 제의는 결정적이며 현실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는 상징적 형식 안에서 융합된다. 종교적 준수의 구체적 행동의 콘텍스트로 부터 종교적 신념은 인간적인 수준에서 출현한다. 인간은 비로소 믿음에 도달한다.
네러티브: 진화론적 언어게임
종교제의가 세계를 창출한다. 이것은 초기 모방의 문화 특히 토템종교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모방문화는 진화론적으로 언어게임이 발전하면서 신화/네러티브 문화에서 세계를 구성한다. 특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신화론적 네러티브는 그리스 문화를 창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와 비극의 문제를 이야기 구성 (플롯)에서 창조성을 보았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종교의 의미는 그것이 사회질서를 기술해서가 아니라 형성하기 때문에 있다 (ibid., xvii). 이것은 문화 상징적 실재에 대한 종교의 사회구성을 말하며 네러티브와와 제의수행은 사회 구성원의 존재의 일반 질서를 창출한다.
문화적 발전에서 유전자가 아니라 유기체가 문화와 종교에서 진화한다. 생물학과 문화는 공동진화하며 1-2백만년전 부터 문화의 세 가지 단계들 ㅡ모방적, 신화적, 이론적 ㅡ을 거쳐 발전해왔다. 이백만년 전 직립인(homo erectus)에서 모방문화는 소통에서 나타난다. 음악과 춤과 제스처와 단순한 언어능력으로 특징되는데, 이것은 이후 발전의 단계에서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조직이 되고 보존된다. 벨라에 의하면 종교의 진화는 원시종교에서 고등종교로 진보하지 않는다.
25만년 전 부터 10만년 전 사이에 문법의 언어가 발전하고 복잡한 네러티브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새로운 신화적 단계를 의미한다. 네러티브는 그리스의 미토스(신화)로부터 온다. 이것은 개념적 명료함이나 이론적 반성과는 다르다.신화의 문화는 모방문화를 확장시키지만 제거하지 않는다. 신화의 네러티브 문화는 모방 문화에 얽혀있으며 부족 종교에서 나타난다.
음악과 제의
플라톤은 <국가론 3권>에서 음악양식을 그의 이상국가에 규제하길 원했다. 음악의 심리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음악은 질서나 무질서를 영혼에 가져오며 개인을 사회와 우주적 질서에 적합하게 맞추거나 또는 실패하기도 한다.
이것은 공자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은 제의와 더불어 개인과 사회와 우주적 질서를 하나로 묶는 매우 중요한 방식이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공자는 젊은이들의 교육에서 음악을 중심적으로 보았다.
<논어> 제 15편 10절에서 안연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물었을때 공자는 말한다. 음악은 순임금의 것을 따르며 정나라의 음란한 음악을 몰아내야 한다. 7편 13절에서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인 소를 들은 후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잃었다고 한다."음악을 하는 것이 이런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플라톤에게서 노모스는 윤리적 규범과 음악적 정도를 재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철학의 중심에 속한다. 플라톤은 81살에 죽으면서 한 소녀에게 플루트를 켜줄 것을 부탁했다. 소녀는 노모스의 음을 몰라서 플라톤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고 전해진다.
음악은 모든 상징작용에 공통적이다. 야생의 문화에서 음악은 신화와 제의에 연결된다. 레비- 스토로스에 의하면 신화와 음악은 다른 방식에서 언어의 기능을 하며 무시간적이다. 음악을 들음으로써 우리는 불멸성으로 들어간다. 음악은 역사를 초월하는 신화를 닮았다 (The Raw and the Cooked, 15-6).
헤겔은 근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이며, 객관정신은 깊은 측면에서 문화로 표현된다. 사라져버린 객관정신의 계기들은 여전히 현재의 심층에 놓여있다. 정신의 계기들은 과거처럼 현재 안에서도 여전히 진행된다.
축의 시대에 내러티브는 개념적 반성과 비판적 태도로 이행한다. 그리스 시대에 에피스테메는 논리와 관찰에 기초한 과학적 지식이며 공론 (독사)에 대립한다. 플라톤은 신화를 비판하기위해 개념을 사용했고 대화편에서 네러티브 차원으로 재통합했다.
축의 시대에 종교는 예언자적이며, 기존질서에 대한 사회 비판적이며 새로운 대안을 제공한다. 신화의 미메시스적 차원과 네러티브 그리고 합리적 이성은 축의 시대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철학적 사유에 놓여있다. 언어는 네러티브 형식에서 인간의 의식과 도덕성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밸라의 종교 사회학은 다윈의 진화론이나 윌슨의 사회 생물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의 사회학에서 유전자 환원주의는 거절되며 스테판 굴드의 단속 평형론와 리차드 르온틴의 유기체 생물학 그리고 슈트워트 카우프만의 생의 창조성이 중심으로 들어온다.
비판적 배움
나는 벨라의 사회학에서 시스템 생물학에 대한 그의 창조적인 접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분에 대한 존경이 여기에 있다. 나는 굴드의 생의 출현 구조이론과 세포 생물학에서 중지-평형-혁신의 역사 변증법적 과정을 과학 사회학에 수용한다.
이것은 다윈 모델이 경제학과 정치학에 종종 편향되게 적용되는 것을 거절한다. 오히려 코어보존과정에 기초한 촉진된 변이가 복잡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조직, 공학의 설계 요소, 또는 컴퓨터 과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나는 변이와 다양성을 생성하는 수단을 강조하는 촉진된 변이가 자연 선택보다 구조와 제도를 검토하는 데 다른 관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자연 선택은 선택, 생존, 그리고 번식 성공을 강조했다. 20세기 초에 이러한 접근은 사회 다윈주의로 전개되었고, 종종 현재의 질서를 자연적으로 정해진 것으로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유럽중심주의 기초가 되며 이전 식민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는 변이와 다양성의 가치를 그 자체로 고려하고 자연 선택과 진보와 성공의 논리에서 말해지지 않는 것 (unsaid)이 무엇인 지를 비판적으로 묻는다.
유기체는 수백개의 코어보존과정의 복잡 시스템이며 촉진된 변이는 유기체의 다각화로 분화된다 (The Plausibility of Life, 260-1). 이 지점에서 "인간 사회의 주요 혁신의 길들은 생물학에서 코어 과정애서 혁신과정에 병행이 될 수 있다" (Ibid., 263).
나는 이러한 생물학적 생의 출현과 구조이론을 사회학에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 모델로 발전 시킨다. 종교의 코어 이념은 사회적 담론을 통해 행위자들을 통해 다각화로 분화되고 유포된다. 이러한 담론은 네트워크에 연결 고리를 가지며 코어 이념과는 다른 사회 문화적인 귀결을 나타낸다.
"최소한, 촉진된 변이를 통한 진화 가능성의 분석은 자연 선택의 조건을 강조한 사회 다윈주의와는 다른 지평을 열어준다. 역사는 단순히 외부 환경이나 경쟁에 의해 결정되는 선택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의 깊은 구조와 역사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조직, 적응 능력, 혁신 능력, 어쩌면 심지어 암호화된 변이와 다양성을 수용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The Plausibility of Life, 264).
생의 출현이론에서 구조와 역사는 서로 접합되며, 코어과정 (이념)과 촉진된 변형의 다각화와 분화에서 삶의 새로은 질서와 혁신이 출현한다. 베버는 이념과 물질의 선택적 친화력을 통해 행위자들의 혁신적 활동 (신분과 경제활동)에 주목을 했다. 나는 이러한 선택적 친화력을 코어 과정과 축진된 변이에서 파악하고 구조와 역사를 통전하는 사회학에서 역사화된 담론구조에 주목한다.
선택적 친화력의 사회학
물론 벨라는 종교의 사회구성을 알고 있었고 배버의 전문가였지만 베버와 이념과 물질의 선택적 친화력을 푸코의 담론구조와 연결하지 못했다. 종교의 사회구성론에서 종교적 이념이나 담론은 폭넓은 물질직 이해관계에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며, 여기서 행위자들의 역할은 교육에 의해 형성된다. 신분형성은 이러한 선택적 친화력을 문화 사회적 영역에서 추동 시켜나간다. 여기서 권력관계의 네트워크가 펼쳐지고, 종교의 사회적 구성에서 순기능이 있는 가하면 동시에 역기능이 같이한다. 드뤼캠의 언어로 표현하면, 합리적인 분업이 이루어질 떼 유기적 연대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사회의 이행과정에서 비합리성과 억압이 작용할 때 병리현상과 아노미가 나타난다.
베버는 공리주의적 합리성, 다시말해 목적 합리성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청교도의 이중 예정론과 세계내적 금욕의 태도에서 발생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영적인 귀족주의적인 태도를 낳으며 쇠우리 창살에 갇히고 만다. 이것을 극복하기위해 베버는 가치 합리성에 주목하고 헤겔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규정하면서 사용한 무우주적 사랑(acosmic love)을 부각시켰다. 베버는 삶의 의미 상실을 넘어서기위해 책임윤리와 심정윤리를 접합시키고, 종교의 사회구성을 발전시켰다.
이 지점에서 나는 울리히 백의 위기사회테제를 종교의 사회적 구성이론에 수용하고 성찰적 근대성을 포스트콜로니알 사회안에서 부각시킨다. 포스트모던의 거대담론의 비판은 거절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의 변증법과 생활세계론의 틀에서 검토된다. 벡의 성찰적 근대성은 종교와 생태학을 다루는 문제에서 중요하다. 왜나하면 성찰적 근대성은 아남네시스적인 차원을 가지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Beck, Democracy Without Enemies, 20).
베버가 본 신체의 규율과 관료제는 푸코의 권력관계를 선취한다. 그러나 베버는 권력과 담론의 관계가 종교의 사회적 구성에서 어떻게 비오폴리틱 (신체장치학)과 섹슈알리티로 전개되는 지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종교의 사회학적 연구에서 네러티브와 지배담론을 구분하고, 네러티브를 생활세계에 관련짓는다.
생활세계는 베버가 간과해버린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서, 칼빈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칼빈 자신의 예언자적인 경제윤리로부터 수행된다. 종교에 대한 내재적 비판은 공공신학에 결정적이다. 왜냐햐면 이것은 종교의 경전과 내러티브에 대한 사회학적 성서해석을 요구하며, 그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텍스트를 사회적인 삶의 자리에서 문제틀하고 새로운 의미지평을 비판적으로 열어간다. 여기에 내재적 비판을 기초로 한 해방의 기획이 담겨져 있으며, 이것은 전통의 억압과 편견 그리고 불명료함으로부터 물러선다.
종교적 이념의 선택적 친화력을 폭 넙은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과 담론의 메카니즘에서 발전 시키는 것은 나에게는 공공신학의 인식론에 속한다. 비교 종교학을 전개하기위해 나는 애른스트 트뢸취의 역사비판방법--유비론적 상상력, 비판적 접근, 종교적 아프리오리, 상관관계-- 과 그의 종교 보편사를 생활세계의 틀에서 수용하고 역사 상대주의의 제한성을 수정한다. 벨라의 종교사회학에는 에른스트 트뢸취의 자리가 없다. 벨라는 틸리히에 가깝다.
더 나아가 나는 생활세계와 시민사회 정치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을 벨라의 종교 사회학과 내러티브 이론에 접합시키고 사회와 자연적인 생의 접합되는 생태 시스템 (사회 자연성: socionature)에서 환경 사회학으로 전개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벨라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동시에 먼 거리에 서 있다. 나는 생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를 부각시키며, 공공신학을 다차적 현실들 (mupltipe realities--알프레드 슈츠)을 비판과 해방의 측면에서 탐구하고 재구성한다. 이것은 벨라가 초기 시민종교에서 공적 종교로 전환하는 학문적 유산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나는 시스템 생물학을 환경 사회학과 더불어 발전시키고, 종교와 생태학구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스승에 대한 진정한 존경은 비판적 배움을 통해 그를 넘어서는 담대한 정신에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