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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 오토포이에시스와 과학 사회학

by 파레시아 2024. 12. 14.

세포: 오토포이에시스

 

스탠포드 대학의 생물학 교수 드보라 고르동은 최근 개미연구에서 개미군집이 탈중심적인 소통의 네트워크에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중심적인 개미의 지성이나 권위와는 상관이 없다. 잠언 6장 7절의 표현처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 심지어 한 군집의 개미는 다른 군집의 개미와 음식 조차도 서로 나누지 않는다.

 

사회 생물학에 경도된 곤충학자들은 유전자를 생의 블루 프린트로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시스템 생물학에서 유전자 정보는 항상 세포의 네트워크에서 삭제되거나 편집된다. 세포들간의 상호작용에서 유전자는 항상 꺼지기도하고 켜지기도 한다. 개미 집단은 유전자처럼 블루 프린트나 프로그래밍이 없이 작동한다 (Deborah Gordon, "What humans can learn from the non-hierachical organization of ants, Boston Review, 2010, Sep. 13).

 

드보라는 개미연구에서 생태학의 오이코스, 다시말해 에코 시스템에서 웰빙하는 서식처의 구성을 제시한다. 세포의 오토포이에시스 (자율성과 창조성 그리고 매개와 심비오시스)가 없이 인간은 지구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세포의 삶에서 코어 보존 과정 (중지와 평형)과 새로운 혁신과 출현이 접합된다. 여기에 근거해 유기체의 해부구조와 생리학 그리고 사회적 활동이 창조적으로 나타난다. 하버드 대학 메디칼 센터의 저명한 막 커슈너 교수에 의하면, 유전자는 유기체의 발전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으며, 유전자 우수성이 유기체의 문화적 삶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The Plausiblity of Life).

 

유전자가 문화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의 삶(문화)이 유전자의 목줄을 쥐고 있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이 자본주의적 진보 신념과 공해로 찌들어버린 인류세를 생활 세계/생명 망의 시냅스와 오이코스로 거듭나게 하는 오토포이에시스 문명의 대전환이다.

 

크로마틴의 규제 시스템

 

DNA 복제과정에서 이전 단계의 히스톤 변형에서 일어난 원래의 DNA가 한 가닥으로 복제된 딸 DNA에 종합된다. 여기서 이전 DNA의 메텔화 반응은 딸 DNA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DNA 변형을 분석하는 에피제네틱 연구영역에 속하며, 유전자 결정론을 무너뜨린다.

 

인간의 유기체의 삶은 매우 복잡하며 환경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한다. RNA 전사과정을 통해 세포는 회복되며 단백질을 합성하여 유기체의 조직을 유지한다. RNA 전사 프로그램에서 피드백은 게놈안에 기입되고, DNA 시퀀스에 묶여진다. 복잡한 규제의 회로가 설정된다.

 

게다가 DNA 자체는 크로마틴 섬유에 배열되고, 크로마틴 섬유는 DNA 시퀀스를 따라 에피제네틱의 외부정보를 주입한다. RNA 전사과정과 DNA 복제 그리고 손상된 DNA 복구, 돌연변이를 조절하는 재결합 등은 크로마틴의 건축술 안에서 가능해진다.

 

생의 담론은 사회생물학의 언어를 문제틀 한다. 사회생물학의 언어는 하이퍼 칼빈주의 전적타락을 방불케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역사의 도처에 전쟁들이 있다. 다른 한편 인간의 공격적 행동은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서 예견된 패턴에 따라 구조화 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윌슨이 주장하는 유전자-문화 (자연선택) 모델이며 뉴런 유전자의 에피게놈의 규칙성에 기초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거나 자연선택으로 경쟁투쟁에서 적자가 생존하지 않는다. 또한 뉴런의 에피게놈으로 인간의 행동이 규칙화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유기체의 발전과정에서 유전형질은 예속되며, 뉴런의 에피게놈은 불변적으로 유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사회적 삶의 조건과 문화적 침전도에 대한 책임적 비판과 해방의 기획을 요구한다. 이것은 유기체-환경문화의 공동구성과 변혁을 부각시킨다.

 

에피/에코에 대한 예민함과 숙론적 반성과 실천(프로네시스; 아리스토텔레스-칸트)은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새로운 생의 구조와 패턴에 대한 현상학을 제공한다. 이것은 또한 유전자 풀에서 나타나는 다문화의 가능성을 포스트 자본주의 틀에서 새롭게 모색하게 한다.

 

인간 게놈 지도의 한계

 

스티븐 로즈의 생명선 이론은 세포 생물학의 차원에서 해명을 필요로 한다. 에피게놈 이론은 DNA 유전정보를 변형시키는 에피제네틱 변형의 집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히스톤 꼬리를 통해 나타는 효소의 변형은 DNA를 켜기도하고 끄기도 하면서 규제한다.

 

모든 유기체는 부모로부터 특질이 유전되며 이러한 특질은 뉴클레오타이드의 4개의 염기서열에 기입되어 있다. 모든 진핵세포의 유기체는 DNA의 이중 나선구조에 근거한 게놈을 소유한다.

 

물론 염기서열과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유전자의 특질을 표현하지만, 유전자 표현은 게놈의 기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전자료는 DNA 복제와 게놈의 유전 그리고 히스톤을 통한 게놈의 변형에 있다.

 

간략히 말하면 게놈은 유기체를 생성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유기체의 생성을 위해 세포의 네트워크이 필요하다. 세포핵에서 DNA 복제와 RNA 전사 그리고 단백질 합성과 번역의 전체과정은 크로마틴의 규제의 건축술에 의해 변형되고 복구되고 삭제되고 편집된다.

 

그렇다면 유전자가 세포의 니트워크에서 운전석에 앉아 독불장군처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크로마틴 건축술과 히스톤 변형에서 일어나는 메텔화 반응이 결정적이다. 메텔화 반응은 외부로 들어온 음식물 섭취효소나 흡연 또는 약물 등 사회적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유전자 혁명>으로 나사 캐리 교수는 저명한 영국의 Royal Institution 강연 서두에서 2001년 인간 개놈지도 완성을 축하하는 클린톤 대통령의 인사말을 언급하고 어이없어 했다. 클린톤은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언어를 발견했다고 자축했다 (What is Epigenetics by Nassa Carey).

 

사람의 유전자 2만 5천여개 가운데 질병을 일으키는 것 외에 정확한 기능을 모르는 것이 1만 2천여개나 있다. 문제는 인간게놈 지도에서 과연 에피제네틱스 과정을 통해 변형된 DNA와 복잡한 질병의 문제가 발견이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프랜시스 콜린스 미 보건 국립 보건 원장은 2001년 당시 게놈지도를 이용하면 2020년까지 유전자 조작 인간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호언 장담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인간게놈 지도는 왓슨의 유전자 결정론과 이를 추종하는 과학자들의 정치 로비를 통해 이루어진 거대한 과학 펀드 비즈니스였다. 물론 인간 게놈 지도의 성과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DNA 변형애서 돌연변이로 인해 생기는 치명적인 질병을 스크린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게놈 지도에서 크로마틴 수준에서 일어난 복잡한 에피제네틱 질병은 탐지를 할 수없다. 예를들면 당뇨의 발병에 관련된 유전자들만 1500개이다. 당뇨병 2형의 발생은 히스톤 변형의 메텔화 과정에서 오며, 이것은 외부의 환경에 기인한다. 설령 이것이 인간게놈 지도에서 변형상테가 탐지 된다해도 유전자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

 

과학 사회학의 프로젝트

 

현상학적 구조 생물학에 기초한 과학 사회학은 후설-메릴로 퐁티의 지각과 신체의 현상학에 관심한다. 의미와 분업 사회학 (베버와 뒤르캠)이 여기서 융합된다. 이러한 사회학적 착상은 과학적 담론이 어떻게 테크노 파라다임에 엮어져 상품화되고 권력의 지배방식에 포섭되는 지를 역사 사회학적으로 검토한다. 삶의 현상에서 연약한 자들이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과학의 진보를 가장한 사회 진화론이며 정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Lewontin, Biology as Ideology).

 

구조 생물학에서 존재론 (기능성, 에이전시, 의미, 가치, 창조성)은 사회적인 삶과 문화적인 환경에서 상호 신체성과 심비오틱 윤리에 기초한다. 테크노 파라다임은 공공선 거버넌스를 통해 규제되고, 의료혜택은 공정하게 분배 되어야 하며, 생명의 웹은 에피제네틱스의 돌봄에 기초한 에코-거버넌스에서 수행된다.

 

인간의 진화는 자연안에서 존재의 선함에서 도덕적인 가능성으로 출현하며, 욕망과 총족의 체계변화애서 책임성으로 진화한다. 자연환경에 대한 보호와 방어는 존재 자체로부터 나온다  자연은 가치의 근원이 된다. 신학적으로 볼 때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로 이해된다.  창조의 선함에 대한 종교적 이념이 자연의 생에 대한 과학에 의해 밀려나갈 이유는 없다.

 

인접 가능성과 서식처 구성은 사회 문화안에서 유기적 연대와 분배적 정의를 위해 합리화되고 제도화될 수 있다. 생이 있는 곳에 창조성과 새로움 그리고 심비오틱 의미가 있다. 새로운 질서의 자유는 죽음충동과 허무주의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열린 존재로 살아간다. 생명권과 통전되는 생활세계 이론은 존재론적 이원론과 유전자 일원론을 거절한다. 생명의 세계에서 죽음을 피하고 생명을 향한 유기체의 지향성은 창조의 선함을 보여준다.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자연의 세계안에서 다른 피조물들과 엄청난 분리를 드러내기 보다는 생활세계를 통해 출현한다. 이러한 생활세계는 인간적인 문화와 전통 또는 역사로 이해되지만, 여전히 자연의 생명권과 연결되어있다. 이미 생활새계의 개념은 사회자연성(socionature)을 포함하며, 인간은 자연적 본성에 의해 도덕적 존재로 불려진다.

 

한스 요나스애 의하면, 유기체 존재들은 사물의 본성에 따라 자연안에서 생의 가치 즉 매개와 공생이라는 도덕적 차원을 개방한다. 자연과 윤리는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죽음을 피하고 생을 향한 가치가 있다. 가치의 객관적 실재 다시 말해 선함자체는 존재들을 방어하는 윤리적 구속력을 갖는다. 삶의 선함을 통해 모든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긍정을 한다. 인간만이 존재론적인 진리를 갖으며 책임의 정언명령으로 불려진다  (Hans Jonas, Phenomenon of Life, xv) .

 

과학 사회학은 생의 가치 지향성과 인간존재의 책임성의 정언명법을 수용하며, 생의 현상을 유기체와 환경문화의 상호작용에서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는 지 검토한다. 또한 이것은 과학의 리서치 프로그램이 테크노-파라다임을 통해 어떻게 물질적인 이해관계와 권력의 신체 정치학 그리고 관료 지배에 묶여지는 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과학의 의미는 테크노-파라다임에 결합된 과학자의 위신과 권위 그리고 지배력을 강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키는 계몽에 있으며, 시민사회와 환경세계 그리고 글로벌 시스템에서 공공선 거버넌스와 심비오시스를 위한 것이라야 한다. 이것이 과학의 소명이며 윤리적인 책임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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