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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의 파시즘과 탄핵 정국

by 파레시아 2025. 1. 5.

헌법과 이해 충돌

 

대한 민국의 탄핵정권은 내란죄 혐의를 받는 윤석열에 대한 공수처 체포 영장의 집행실패와 더불어 정치 에콜로지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BBC NEWS 코리아의 특파원 진 멕켄지는 '한국,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섰다'고 보도했다 (2015년 1월 4일). 국민 대부분이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분노하고 있고, 그는 국회의 탄핵 소추안의 가결로 인해 권력 박탈을 당한 상태이다.

 

대한민국에서 과연 누가 권력의 주인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 1항은 대통령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사태에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계엄 선포를 할 수 있다. 4항에서 계엄을 선포 시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 해야한다. 그리고 5항에서 국회가 재적인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해제를 요구할 경우 이를 해제해야한다. 

 

그러나 헌법 제 1조 1항과 2항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성문화한다. 대한민국 헌법의 문제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통령의 비상사태 권한과 계엄령이 헌법 제 1조 1/2항과 이해 충돌 (conflict of interest)이 될 경우 고고학적 담론 해명을 요구한다. 민주 공화국의 국민주권과 국민으로부터의 권력 (일반 의지: volonte general)이 대통령이 국민 주권을 찬탈하고 비상계엄을 실행할 경우, 그것이 아무리 적법한 절차를 통해 시행되었다고 해도 헌법정신에 위배될 수 밖에 없다. 당연히 탄핵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희안하게도 내란죄 담론이 위헌이며, 오히려 비상사태 계엄령이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속한다는 궤변이 등장한다. 내란죄는 형법 제 87조에 명시되며, 우두머리는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 형법이 헌법의 우위에 존재 하는가? 아니면 헌법의 빛에서 형법의 규정이 판단되는가? 헌법과 형법의 이해 갈등이 생겨난다. 

 

이런 상황에서 이호선 교수 (국민대학 법과 대학장)는 헌법 재판관 6명에게 내용증명을 발송하고 한덕수 권한 대행 탄핵소추 효력 정지를 판단 지연하는 것은 국정안정을 외면하는 것으로 말했다. 그리고 헌재가 내란죄를 근거로 수사기관보다 먼저 판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미 연방대법원 판례를 인용하고 대통령의 통치권을 위한 재량권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비상계엄의 발동은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권한 속하며 직권 남용해당 여부가 된다. 비상 계엄령이 단지 직권 남용에 해당하는 가? 그렇다면 형법에 규정된 내란죄 혐의는 어떻게 되는가? 과연 트럼프의 내란혐의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었나? 전혀 그렇지 않다!

 

미 독립선언서 (1776년 7월 4)에서  모든 인간은 창조주에 의해 동등하게 피조 되었으며, 타인에게 양도할 수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삶과 자유와 행복추구이다. 정부는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기위해 피 지배 "국민의 승인"으로부터 이들의 정당한 권력을 돌출하면서 설립된다. 정부의 형태가 시민의 기본권리를 파괴할 경우, 정부를 변경하거나 폐지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그리고 미 헌법 (1787-8)은 미 독립선언서의 국민을 미합중국의 '우리국민'으로 명시하며, 재확인한다.    

 

지금 대한 민국의 탄핵정국은 헌법에 성문화된 민주 공화국의 정신을 파시즘으로 변질시키는 과정에 놓여있다. 헌법의 기본정신 즉 민주 공화국의 의미가 위협당한다. 법률가들의 기술적 용어들에서 트럼프의 내란죄의 역사적 상황은 법의 합리성에 연관되어 파악되지 않고, 오히려 윤석열의 사안에 기계적으로 갖다 부치는 사기방식이 드러난다. 이러한 해석의 갈등을 파악하기 위해 독일의 파시즘에서 나타난 칼 슈미트의 비상사태와 주권자의 통치행위의 정당성을 사회학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 슈미트와 주권통치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에서 국가주권을 사법적인 틀을 넘어서서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지배와 정치적 결단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1933년 나치정당에 가입했고, 1945년까지 베를린 대학의 법학 교수로 재직했다. 


하이데거가 철학에서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슈미트 또한 정치이론과 주권을 다루는 문제에서 국민의 생사 문제를 결정짓는 신체 정치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그런가 하면 슈미트는 정치적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호모 사케르' (아감벤)로 분류하고 포로 수용소에서 고문이나 살상으로 이어지는 전제주의 국가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흥미롭게도 극우파 슈미트가 좌파 딱지를 달고 등장하는 학자들에게 미치는 기묘한 현상이 나타난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공유하는 전체주의 독재라는 살해의 비오폴리틱이 분석의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나 슈미트나 스탈린 처럼 진영논리로 정치 전략을 지배하던 시대는 글로벌화된 다원주의 사회에서 적용되기 어렵다.

 

누가 그리고 "누구"의 좌파이며, 누가 그리고 "누구"의 우파인지 구분이 투명하지 않은 시대를 산다. 전망이 안개처럼 불투명하다. 이슬람-마크스주의란 용어는 어떤가? 정치 에콜로지는 복잡성으로 특징된다. 정치이념과 물질적 이해 그리고 권력 관계에서 '누구에 의해' 선택적 친화력이 나타나고 주도되는 가에 의해 탄핵 정국의 향방이 가늠될 수 있다. 이것은 헌법 (공화 민주주의/ 비상계엄)과 형법 (내란죄)이 충돌되는 데서 볼 수 있다.

 

카테콘: 억제하는 자

 

슈미트의 정치신학에서 드러나는 국가 주권론은 16세기 왕권 신수설과 같은 카톨릭 신학에 기초되어있고,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거쳐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새로운 국민주권에 기초한 국가론을 거절한다. 시민국가와 국민주권 그리고 일체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슈마트는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전제적 지도자의 정치적 영도력에 기초한 정치신학을 주장했다. 히틀러는 국가의 비상사태에서 하나님이 슈미트에게 보낸 기적의 선물에 속한다.

 

1934년 6월 30-7월 2일 사이에 히틀러와 괴링이 나치 민병대의 해체를 수행했을 때, 슈미트는 히틀러의 행동을 지지하면서 8월 1일자 신문에 "지도자는 법적 질서를 보호했다"는 기사를 썼다. "긴 칼의 밤"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민병대장 하인리히 룀은 정치 조작에 의해 반역자로 체포되고 수백명의 부하들은 사살 당했다. 민병대는 해산되고 동성애자였던 룀이 제거되었을 때 슈미트는 히틀러의 정치 능력에 만족을 표시했다. 도덕과 질서에 기초한 통제국가에서 동성애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민족 사회주의는 하나님의 도구이며 악한 자들을 원수로 삼고 제거해야한다.

 

슈미트는 바울의 데살로니가 후서 2: 6-7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연시키는 억제세력(katechon)을 카톨릭 교회로 보았고, 스스로를 도스트엡브스키의 소설 <대심문관>에 연결지었다. 카톨릭 교회가 히틀러의 독일제국에서 실현되고 "카테콘"으로 파악하는 슈미트의 방식은 바울의 메시야적 종말론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바울에 의하면 불법의 신비가 이미 작동하지만, 그것은 카테콘에 의해 억제되고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제거될 것이다. 슈미트는 이러한 바울의 종말론적 복음에서 독일의 기독교 제국을 카테콘으로 일치시키고 전제주권 이론을 정당화하는 그의 정치신학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제국을 카테콘으로 보지 않았다. "멸망의 자식"은 믿음을 배신하는 일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남용하고 자신을 하나님으로 주장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히틀러 제국은 카테콘이 아니라 멸망의 자식을 의미한다.

 

담론해명과 권력의 계보학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파시즘 이론을 고고학적으로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담론해명과 권력관계를 역사 사회학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내재적 비판을 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고고학적인 담론 해명에서 부르주와지 개념은 프랑스 혁명에서 평민계층을 말하고 하위계급과 연대하면서 1848 전 유럽혁명에서 의회 민주주의와 관련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에 나타난 사회경제 문제를 부르주와지와 프로렐타리아트로 이분화하고 혁명을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를 위해 차티스트 운동에 가담했다.

프랑스에서 금융귀족과 중산층 비판적 지식인 그리고 하위계층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십팔번인 부르주아지 딱지나 이항의 논리와는 맞지 않는다. 마르크스 이론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영국 식민지배 분석, 더 나아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개된 복잡한 상황에 관련되어있다. 특히 1848 년 전 유럽에서 발생한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회학적  분석을 고고학적으로 해명하지 않을 경우, 마르크스 이론은 실천적 상황과 유리된 채 박제되거나 상품처럼 남용된다.

 

이것은 흔히 진보 좌파들에게서 시민사회를 마치 부르주아지 사회로 등치시키는 용감한 무지 (?)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민 사회는 마르크스 이전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를 로마 공화제 민주주의와 결합하고 시민사회 민주주의를 확립한 사상가들이 로크와 스피노자, 루소 그리고 철학적으로 칸트에게서 표현된다. 마르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경제학의 사유의 영향권에 서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탄핵정국에서 시민사회의 의미와 일반의지 그리고 헌법 정신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대로 군주제로 회귀하는 파시즘에 먹혀버리고 만다. 공공신학은 오늘날 탄핵정국에서 정치이론과 국가이해에 대한 고고학적 해명을 해야한다.


슈미트가 의회 민주주의를 도매금으로 거절하고 토마스 홉즈의 <리바이어던>을 자신의 파시즘 국가론으로 변질 시키킬 때 사정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홉즈는 하나님의 보편적 지배에서 근대정치 이론을 사회계약론에서 전개했다. 그는 오이코노미아 신학을 구상하고 일인독재의 무제한 권력을 비판했다. 이에 저항하는 시민 승인권과 경제적 분배정의 그리고 심지어 혁명의 자리를 열어놓았다. 홉즈는 진영논리와 파시즘의 전근대적인 야만의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 사회 계약론을 거처 흐르는 포괄적 민주주의 정신은 바로 시민승인권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즈의 <리바이어던>은 남용되었고, 신학의 영역에서 칼 바르트는 루소의 관점에서 파시즘에서 출현하는 리바이어던 정치를 악의 세력 (herrenlose Gewalten)으로 비판했다.  

 

https://www.gettyimages.com/detail/news-photo/swiss-theologian-photographed-c1940-news-photo/541066591?adppopup=true

 

다시 한번: 칼 바르트와 파시즘 저항으로!

 

바르트는 독일에서 나치즘을 경험하면서 공동 인간성을 인간의 삶의 기본형식으로 보았고 일체의 비인격화하는 관료주의 지배에 저항했다. 공동 인간성이 사라지고 경쟁과 생존투쟁에 기초된 자본주의 물화현상이 사회로 침투할 때, 이것은 전쟁과 제국주의로 갈 수 밖에 없다. 바르트의 공동 인간성과 관료주의 비판은 시민사회 안에서 인정과 공공선 거버넌스 그리고 경제 분배정의를 정치 덕목으로 파악한다. 교회는 시민사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방향과 노선을 이렇게 추구해야 한다.

 

정치 철학적으로 볼 때, 정부지배에 조응하는 시민 덕목이 존재한다. 군주제에서 명예가 정치적인 덕으로, 공화제에서 덕목이 정치행위로, 독재정부에서 공포가 현상한다면 (몽테스퀴외), 후기 자본주의 포스트콜로니얼 조건에서 집단 이기주의와 사회 진화론이 권력투쟁을 강화하고 신체 정치학의 현실로 드러난다. 바르트는 여기서 저항의 신학자로 나타난다.

 

<바르멘 선언> 제 5항에서 바르트는 세계와의 투쟁에서 제자직의 과제로서 정의로운 권리와 평화를 표현했다. 아직 구원이 되지 않은 세계안에 교회는 존재하며, 국가는 신적인 위임에 따라 정의와 평화를 제공할 과제를 갖는다. 이러한 과제를 위해 국가와 교회는 공동책임성을 갖는다. 이러한 입장은 국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특별한 사명을 파괴하고, 교회의 소명을 탈취하고 흡수하는 통제 방식에 저항한다.  

 

바르트는 나치즘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생의 위협을 거절하고 시민의 자유를 공공선과 더불어 확인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에 기초하며 이것은 시민들의 공동 결정과 밀려나간 자들의 사회 경제적 안전망을 구축하는데서 참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1946>에서 루소의 정치이론을 중요하게 수용했다. 일반의지는 1789년 <인권과 시민권리 선언> 6항에서 다음처럼 표현된다.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바르트에게서 종교개혁은 사회개혁을 포함하며, 보다 많은 민주주의와 보다 많은 사회정의를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숙고하고 전진한다. 종교개혁(ecclesia semper reformanda)은 끝난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societas semper reformanda)과 더불어 진행 중에 있다. 

 

바르트의 공동 인간성과 시민 사회국가론은 오늘날 탄핵 정국에서 헌법의 제 1조항을 파괴한 대통령의 통치방식을 위헌으로 간주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파면권을 지적한다. 일반의지는 공공선 거버넌스를 고려하는 시민의지를 말한다. 국민이 법에 복종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반의지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국가 살해범죄는 헌법의 빛에 의해 국민파면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담대한 것을 행하라!" (Tut um Gottes Willen etwas Tapferes). 파시즘 세계화 현상에서 신앙고백의 지평을 확대하고 갱신하는 일(status confessionis)이 무엇보다 더 시급하다. 

 

트럼프와 윤석열

 

2021년 1월 6일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선거 불복으로 위싱톤 DC 의사당을 2천명에서 2천 5백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점령했을 때, 이것은 트럼프의 친위 구테타 또는 내란으로 간주되었다. 270만 달러 이상의 피해와 5명이 죽었다. 174명의 경찰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FBI는 이 사건을 국내 테러리즘으로 규정했다.

 

트럼프는 하원에서 내란으로 탄핵 소추를 당했다. 그러나 상원에서 57-43표결로 기소를 지지했지만, 필요한 2/3를 얻지 못핵서 탄핵을 면했다. 2024년 3월 4일 미연방 대법원 (Supreme Court)은 트럼프를 대통령 입후보 자격을 박탈할 수 없다고 만장일치 (9-0)로 판단했다. 트럼프가 형법에 규정된 내란죄로 부터 구사일생한 것은 일차적으로 상원의 2/3을 얻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이것은 쿠데타라기 보다는 내란에 속한다.

 

미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의하면, 연방 주의 법의 짜깁기 (patchwork) 나 발췌나 결정으로 미연방의 대통령직이나 관리직 입호부의 권리를 제거할 수 없다. 2023년 12월 콜로라도 주의 대법원은 트럼프를 의사당 내란사건으로 인해 (헌법의 14번째 수정 내란조항) 대통령 입호부 자격을 박탈을 결정했다. 그러나 미연방 대법원은 대통령의 내란죄를 결정짓는 것은 의회의 권한으로 기각시켰다. 

 

이러한 판결의 절차를 무시한 체, 대한민국의 한 헌법학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행사를 절대면책으로 판단한 미 연방 대법원의 판례를 인용했다. 그것은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을 헌법 재판소에서 행할 때 법률 여건 위반 만을 내세워 '발췌 심판'의 형식으로 탄핵심판을 해서는 안된다는고 한다. 이것은 헌법 정신과 체계 안에서 탄핵 심판을 고려해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위해 들었던 사유 (국회의 입법권 남용, 탄핵권 남발,  예산 삭감으로 인한 행정부 기능 마비, 선거 시스탬 부정행위 개입 가능성 등)에 대한 현재의 판단이 먼저 있어야한다.  

 

그러나 이호선 교수의 주장이 사기에 가까운 이유는, 트럼프의 대통령 입호부를 허락한 미 연방 대법원의 만장일치가 바로 콜로라도 주 대법원이 아니라 상원이 내란혐의를 결정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미연방 대법원장이 배석하지만 트럼프는 상원에서 내란죄애 대한 탄핵이 기각되었다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No. 23–719. March 4, 2024).

 

대한민국에서 헌법학자가 법의 합리성이 아니라 트럼프의 판례를 정치적으로 악용한다. 윤석열의 계엄령의 경우, 트럼프의 내란이나 폭동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의 계엄령은 헌법 체제 안에서 시민 승인권의 우위성과 교회의 공동 책임성 그리고 민주 공화국의 정체성을 파괴한 범죄행위에 속한다. 그런데 왜 헌법학자들이나, 정치 철학자들, 심지어 공공 신학자들은 한 마디도 이것을 언급하지 않는가?

 

헌법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발췌심판 금지를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에 연결지을 때,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미 상원에서 탄핵 소추안이 2/3를 얻지 못해서 부결된 것을 의도적으로 빠트리고 있다. 트럼프의 경우를 윤석열의 탄핵과 연결하는 시도는 법의 합리성과 내란의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기계론적으로 갖다 부치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포스트콜로니얼 사회에서 나타나는 법의 모방행위 (미미크리)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더 칼 바르트는 파시즘의 상황에서 법의 역사적 상황과 합리성을 도외시한 체 기계론적인 적용방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교회는 독일의 고백 교회로부터 법의 합리성과 교회의 공동책임성의 차원을 배울 필요가 있다. 칼 바르트를 전공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데 대한민국 파시즘의 위기에서 왜 이들은 신앙고백을 갱신해야하는 위급성(status confessionis)과 루소와 칸트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가? 교회와 국가의 문제와 사법 관료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공공신학의 핵심에 속한다!

 

헌법이 형법의 우위에 있다. 탄핵은 형사소송이 아니라 헌법재판이며, 형사재판은 윤 대통령의 행위가 형사처벌이 되는 내란죄에 해당하는 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탄핵재판은 더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걸릴 수 있다. 그러나 탄핵소추문에서 민주당이 형법상 내란죄 위반소지 부분을 철회하는 것은 국회의원 200인 이상이 동의한 탄핵소추문을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생긴다. 더우기 한덕수 대행이 내란행위 공모로 탄핵소추가 된 상태에서 정당성의 문제도 생긴다. 게다가 탄핵재판에서 과연 계엄행위를 내란 죄로 인정될 수 있는 지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더우기 헌법 제 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수처가 대통령을 체포할 수가 있는가? 형사소송법 제246조는 국가 소추주의로서 "공소는 검사가 제기하여 수행한다."

 

이러한 이해의 충돌에서 대통령의 계엄행위가 헌법 제 1조 민주 공화국의 정체성에 대한 위반이라는 것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다. 국가는 합리적-사법의 권위와 정당성에 기초하며, 정치 리더십에 속한다. 이것은 카이사르 선동정치에 기초한 정무적 판단이라는 어쩡정한 표현으로 은폐될 수 없다 (막스 베버). 사법적 민주주의는 법적 합리성에 기초하며, 헌법 제 1조는 법률 집행에서 국민의 일반의지를 구현하는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작용한다.    
 
정치적 결단주의와 전제권력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 1922>에서 주권 문제에 몰두하고, 이것을 사법적 관료지배와 지도자의 결단주의를 통해 전개했다. 국가의 주권은 사법적 규범주의에, 정치운동은 정치적 결단주의에, 그리고 민족은 사회의 조직과 제도에 관련된다. <정치신학>의 첫 머리에 주권을 정의하면서 슈미트는 다음처럼 쓴다: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이것은 슈미트에게서 단순한 예외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비상계엄 상태를 오로지 통치자에게 환원시키고, 민주 공화국의 국민주권을 선동과 조작을 통해 전체주의로 삼켜버리는 시도를 말한다.   


그러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주권은 절대적이며 신성하며 손상 될 수 없으며 권위주의적 통치 행위와 상관이 없다. 국민주권을 침해할 때 권위주의적 비상상태는 시민의 일반의지에 의해 파면될 수 있다. 모든 사회적 결사와 도덕성, 시민들의 삶은 공공선 거버넌스에서 그 권리를 갖는다. 개인의 존재는 시민 사회의 정치 공동체 안에서 권리와 힘을 행사한다. 이것은 개인, 시민 그리고 국가간의 공동 책임성을 의미한다. 개인은 시민으로서 도덕적 존재인 공민 (시트와이앤) 즉 정치 주체로 살아간다
(Iring Fetscher, Rousseaus politische Philosophie, 110).

 

공화제 민주주의를 위한 루소의 공공철학의 진수는 개인의 자유란 공공선 거버넌스에서 구현되며, 시민의 경제적 분배 정의는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에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슈미트에게서 예외상태는 입법적인 조치나 가이드 라인을 통해 경제적인 위기나 자연재해 등을 극복하지만, 비상상태는 입법의 체계 밖에서 행사되는 지도자 개인의 절대권력을 통해 작동된다. 이러한 결단주의는 정치적으로 진정한 것이며, 정당성을 갖는다. 슈미트에 의하면 입법조항을 통해서 진정한 정치결정은 생기지 않는다. 주권의 본질은 법적지배가 아니라 비상상태에서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을 통해 드러난다. 사실 이러한 무제한적 권력은 근대정치 이론보다는 역사적으로 볼 때 군주제에서나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윤석열의 계엄령은 슈미트의 입장에 근접한다. 국힘당 윤상현 의원은 대통령 지지 집회애 가서 "윤석열 대통령을 지켜야하는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이 결국 대한민국 체제 그 자체"로 선동했다. 윤석열이 대한민국 체제 그 자체하면 그가 "짐이 곧 국가" (L' Etat, c'est moi) 라는 태양왕 루이 14세라도 된단 말인가? 지금 대한민국이 왕권 신수설의 시대에 살고 있나? 기가 찰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이호선 교수는 트럼프의 내란 사건에 대한 미 연방대법원 판결을 인용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취한 행위에 대하여 공소제기가 가능한 지를 보기 위해서는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을 우선 파악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개별적 법률 (laws)을 넘어 헌법과 그 정신을 포함한 법체제 (the Lws) 전반을 생각해야한다."

 

이러한 판례를 근거로 이 교수는 "대통령의 권한은 하위 법률을 위반했다는 것 만으로 바로 권한 밖의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뉴데일리 2025-01-02. 이호선 교수 "윤 대통령 탄핵 발췌심판'은 명백한 헌법정신 훼손").  

 

이것이 과연 미 연방 대법원 판결의 의미인가? 미국의 헌법은 민주주의적이며, 공화 민주제를 표현하는 독립선언의 빛에서 독해된다. 여기에 왕권 신수설이나 군주제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행위는 상원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트럼프는 계엄령을 통치행위로 한 적이 없다, 그는 투표결과에 대한 불만으로 내란을 획책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의 탁월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보다 더 확연하게 민주 공화제와 국민주권과 승인권을 성문화한데 있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은 존 로크보다 장 자크 루소적이다. 

 

지금 이 교수는 이러한 미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윤대통령의 계엄에 기계론적으로 적용 시키고 두 판결의 서로 다른 사안을 혼동하고 있다. 사법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제적 대통령 주권주의가 출현한다. 헌법학자란 사람이 민주 공화국의 토대인 <사회 계약론>을 파괴하고 있다.

 

사실, 민주 공화국은 정치 철학적으로 볼 때 (로크와 루소) 시민권력을 기초로하며, 그것이 설령 투표로 나타난다고 해도, 국민적 승인과 저항권을 포함한다. 이러한 균형이 <법의 정신>에서 사라질 때 대통령의 통치행위 정당성은 군주제나 파시즘을 옹호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광화문 태극기 부대를 통해 나타나는 기독교 인종 민족주의자들은 여과없이 윤석열의 비오폴리틱 담론을 환호한다. 이것이 과연 기독교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가면을 쓴 인종 파시스트들인가?   


슈미트의 분석에 따르면, 16세기 서구의 세계는 하나님과 성서에 대한 신학적 이념에 기초 되지만, 17세기에는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을 기초로 한 합리적 연구가 나타난다. 18세기에는 도덕과 의무를 토대로 한 윤리적 휴머니즘이 세계를 해석했다. 18세기에는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 시스템이 세계를 해석하고 사회를 지배했다. 그리고 20세기를 지배하는 것은 기술이며, 여기서 가치중립과 비정치화가 출현한다. 기술 진보시대에 인격성은 사라진다. 이러한 세속화 상황에서 슈미트의 정치신학의 명제는 다음과 같다. "근대 국가이론의 중심 개념은 세속화된 모든 신학적 개념이다." (Schmitt. Political Theology, 36)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하나님은 전능하신 입법자가 된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예외상태는 신학에서 언급하는 기적에 비교된다. 근대의 사법적 민주주의는 이신론에서 시작했고, 자연법칙을 준수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는 기적을 거절했다.

슈미트는 여기에 베버의 세계의 비주술화와 합리화 과정을 첨부하고, 근대국가의 모든 이론들을 세속화된 신학의 개념으로 말한다. 슈미트의 세속화 이론은 그의 정치신학의 저변에 깔려있고, 그는 이전 시대에 누리던 국가주권과 정치적 권위를 근대의 국가이론에서 회복시키려고 한다. 근대의 가치와 합리성에 역행하는 파시즘의 현상학이 위대한 지도자의 실존주의 정치결단을 부각하면서 나타난다.

 

그러나 베버의 합리화 사회학은 전근대로 되돌아가는 일인 독재정치를 구축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 아니다. 의회 민주주의 안에서 선동정치나 비밀 관료정치를 방어하기위해 그는 정치가의 윤리를 소명과 책임으로 부각시켰다. 베버는 오히려 슈미트나 윤석열의 주권자의 통치행위의 정당성을 의회 민주주의를 살해해버린 범죄자로 비판할 것이다. 파시즘은 내란 죄 혐의가 아니라 이미 의회 민주주의 살해범 즉 시민국가 살해범죄가 된다.  

비상상태 정치

아감벤의 분석에 의하면,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그는 국가와 독일 국민보호라는 구실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바이마르 헌법의 조항을 정지시켰다 (2월 28일). 사법적 측면에서 제 3제국은 비상사태 국가로 이후 12년간 지속되었다. 근대적 의미에서 통제국가는 사법적으로  지지되고 권력자의 정치적 결단인 비상상태와 더불어 시작된다. 반대파들에 대한 시민전쟁이 법적으로 선언되고, 반대파들 뿐만 아니라 전제 정치에 통합될 수 없는 시민들의 신체를 구금하고, 인종차별 정책을 근거로 수용소를 세워고 살해의 정치가 시도되었다. 이것은 유대인 수용소나 미 정치에 의해 시도되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여살히 드러난다 (Agamben,  State of Exception,  2-3).

사회주의 국가에서 혁명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가 전복되고 권력장악을 하는 일당 독재지배와는 달리, 파시즘 혁명은 정치 지도자의 위대한 비상상태 선언과 고뇌에 찬 실존적 결단을 위해 이른바 의회 민주주의 틀에서 사법제도를 남용하면서 출현한다. 이것이 윤석열의 계엄령에 깔려있는 파시즘적 군주제로의 회귀를 말한다.

 

그러나 보다 더 위험스런 것은 트럼프 제 2기 행정부에서 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기꺼이 대한민국을 '돼지 저금통' (money machine)으로 넘기려는 '광화문' 개신교의 역사적 범죄에 있다. 그러나 교회가 '왕관과 재단'의 향수에 내몰릴 때 그것이 가져오는 귀결은 끔찍하다.

 

교회와 사회개혁

 

루소는 제네바 도시국가 출신으로서 <사회계약론>에서 장 칼뱅을 존경했다. 칼뱅에게 경제적 분배정의는 그의 의회 민주주의 구상에 토대가 된다. 칼뱅은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저항권과 사회적 평등한 삶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칼빈주의는 왕권 신수설이나 정의를 덮어버리는 '기묘한' 하나님의 섭리나 화해로 역류한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화해와 인정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바르트가 강조하는 악의 현실들 (herrenlose Gewalten)--<리비어어단>, 맘몬주의, 인종 민족주의, 파시즘을 향한 이데올로기 호출--은 하나님의 화해와 그리스도의 고난의 빛에서 해체되고 보다 많은 민주주의와 보다 많은 사회정의를 향해 변혁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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