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복권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은 여전히 자리를 가질 수 있다.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철학을 한다고 말한다. 경이로움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느낀다.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하며 앎을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이것은 어떤 유용함이나 쓸모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네 역시 보편적 지식으로서 이러한 경이로움의 영역에 속하며 자연과학은 철학적 차원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수학을 가치절하하지 않았다. 수학의 공리는 제일 철학에 속하며 상이한 지식의 체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아르케에 속한다. 수학은 기하학과 산술학에서 공동원리로 사용된다.
수학 공리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 수학철학은 보편적인 대상에서 확실한 원리와 진리성을 가져야한다. 모순율은 논증을 성립시키는데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하며 모든 공리들의 원리일 수가 있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테스처럼 동일한 것이ㅡ'이면서' ㅡ'이지 않다'는 입장을 반박한다 (사람은 동일한 강물에 두번 둘어갈 수가 없다. 강물은 동일하지만 동일하지가 않다.)
모순율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같은 것이ㅡ'이면서'ㅡ'이지 않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모순관계에 있는 명제들은 동시에 참이지가 않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는ㅡ그의 자연과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ㅡ본질과 우연적 속성을 일치시키는 진리 이해를 가지고 있다. 수학은 자연의 생을 다 포괄할 수 없고 일정한 측면에 접근한다. 수학의 한계와 현대 물리학이나 생물학의 한계는 새롭게 드러나는 자연의 생에 의해서 교정된다.
양자 물리학에서 입자와 파동의 상호 보완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의 한계를 교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의 본질은 질료와 형상의 관계에서 볼 때 입자와 파동에 공명할 수 있다. 이것은 본질을 술어적으로 또는 우연적 속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두 가지 다른 속성들이 양자의 본질을 규정하며 상호결합과 보완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한정적인 것 (입자와 파동)은 잠재적으로 가능하지 현실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형이상학> 1007b 26- 29).
근대 물리학의 한계
불확정성의 원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의 틀에서 인과율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유기론적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것은 생태학적 사유에서 생명의 알레테이아로 나타난다. '피'지스는 생명의 스스로 드러남을 역동적으로 (디나미스) 그리고 현상학적으로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디나미스 개념은 움직임의 가능성을 말하며 질료 자체의 본성에 있다. 형상은 개별 사물의 본질이며 일차적인 본체이며 자체안에 변화의 기원을 갖는다. 질료는 이러한 변화를 수여받고 성장하고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잠재적인 것의 현실태는 변화이다. 자연은 변화와 변경의 원리이다. 디나미스 즉 힘의 개념은 에네르기아 (활동력)에 연결되며, 자연적인 움직임의 속도의 증가와 하락은 물체의 본성에 의존된다. 그러나 이러한 물체의 본성에 대립하는 움직임은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힘에 원인이 있으며, 이것은 자연에 거스르는 움직임이다.
자연적인 움직임은 물체 자체의 본성 다시 말해 본질에 있다. 후기 중세신학과 철학은 다음처럼 명제화했다: Operari (agere) seqitur esse (움직임은 존재로부터 나온다). 본체는 일반적으로 자연으로 부르며, 본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지며 자체안에 움직임의 기원을 갖는다 (Metaphysics, Bk. V. Ch. 4. 10). 유비는 변화의 출발점으로서 잠재태태의 가능성을 현실태와 연관하여 표현한다.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에서 아리스텔레스는 일차 동작인으로서 잠재테에 앞서 있는 현실태를 말한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 생산되며, 일차 동작인으로 인간은 이미 현실태적으로 존재한다. 알레테이아에서 현실태는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잠재태에 대한 우위를 갖는다.
그러나 갈릴레이-뉴턴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서 관성의 법칙과 중력의 문제는 결정적이다. 뉴턴에게서 힘의 본질은 기본적인 운동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f-ma).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에 거스리는 폭력적인 힘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갈릴레이의 관성과 뉴턴의 중력법칙으로 인해 근대의 고전 물리학에서 배제당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세후기 스콜라주의와는 달리 과학적 인식을 발전시키고 존재자들 안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일치와 상응을 강조했다.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은 이미 데모크리토스 (460-370)에 의해 나타나며, 갈릴레이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관성의 법칙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더우기 아리스토텔레스는 < De Caelo>에서 뉴턴의 관성의 법칙을 선취할 수 있지만 여전히 천동설의 입장에 서 있었다. 천계의 운동은 지상의 물체의 운동과는 달리 영원하며 동일하다.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 (1571-1630)는 자신의 천문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가벼운 여행이며 <De Coelo>에 대한 보충으로 여겼다. 사실 케플러에 앞서 코페르니쿠스 (1473-1543)의 지동설은 이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쿠스 (310-230)의 태양중심적 사고에서 선취된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독자적으로 1543년 <천계의 혁명>에서 과학의 역사에 파라다임 전환을 이루었다.
유기체적 삶으로 전환
근대 물리학에서 자연개념은 더 이상 내적 원리가 아니다. 이로부터 물체의 움직임이 나오지 않는다. 물체는 시공간안에 놓여있는 위치의 질서와 연장에 불과하다. 지구는 시계장치처럼 완벽하게 작동하는 기계로 파악되며 인간에 의해 지배된다. 이러한 자연지배는 세계의 수확화로 나타나며 산업혁명와 식민지배에서 절정에 달한다.
근대의 자연지배적 기계론적 사유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유기체적인 사고를 했다. 잠재태와 현실태의 과정에서 유기체는 자연환경과 교류하면서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를 발전시킨다. 유기체의 자기실현 (목적론)은 자연적인 본성(선함)의 빛에서 고려된다. 이러한 과정은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며 질료/형상은 진리의 현실태로 현상한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적들> II 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생물학자로 자리매김한다. 유기체의 잠재태는 씨앗을 품고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나간다. 이러한 운동과 변화에서 유기체는 본질에 내재한 잠재성을 현실화한다. 자연은 잠재태에 속한다. 영혼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첫 번째 엔텔레키이며 형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포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지나친 영향아래 역사주의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Popper, 6).
그렇치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풍부한 역사적 분석을 담고있다. <자연학>에서 <형이상학>에 이르는 길에서 역사의 변화와 생성의 변증법 (헤라클레이토스)은 깊숙히 들어와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 이전 철학의 흐름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통한 헬레니즘 문명의 선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physis의 p가 형상의 pa로 스스로 드러내는 진리이며 이것은 네 가지 원인과 자연 환경과 엮어있다. 그리고 <형이상학>에서 신은 탑 다운 방식으로 잠재태와 현실태의 변증법적 과정을 너머 스스로 진리를 드러내며 인간은 여기에 참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생물학주의자가 아니라 현상학의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학과 형이상학을 역사적 사유로 매개한다. 자연은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지며 형상은 목적이다. 모든 것은 목적을 위해 존재하고 움직인다. 이러한 목적지향과 실현은 변화의 지속적인 과정을 거치며 외부의 폭력에 의해 결여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Physics, Bk II. Ch.8.15)
자연의 세계에서 진리는 질료/형상에서부터 완성에 이르는 길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이러한 목적론은 역사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만 운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목적론을 판단하는 것은 선함이며 공공선이며 중용의 도덕적 태도에 있다. 이것은 잘못된 역사의 흐름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담고있다.
질료와 형상은 이분화되지 않고 본체를 공동구성하며, 이것은 물질에 대한 근대 물리학의 인과율이나 세계에 대한 시계장치와 같은 기계론적인 이해를 거절한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체적인 이해는 자연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 실현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생태학적 차원이 담겨져있다. 자연은 환경에 매우 예민하며 조그만 동요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체가 창조적으로 발생한다.
자연은 기계나 수학공식으로 재단되는 생의 세계가 아니다. 자연의 생은 복잡성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져있으며, 인간은 더 이상 지배와 콘트롤이 아니라 자연과의 새로운 대화와 협력과 존중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자연철학의 경이로움에 속한다.
근대과학의 독자성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자연학과의 결별로 볼 필요는 없다. 파라다임의 변화는 이전 그리스 철학을 해체하기보다는 중세의 세계관을 지배하던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미우스 (100-170)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이해하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으로 볼 수 있다.
비록 프톨레미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주의 (De caelo II, 13-14)를 수용했다고 해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프톨레미우스의 차원을 훨씬 넘어간다. 양자역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접합된다.
양자 물리학의 파라다임의 이행에서 뉴턴 물리학이나 아인슈타인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들의 법칙이 적용되는 삶의 형식들이 다르게 존재한다. 각자의 리서치 프로그램 (임마 라카토스)은 적용되는 범위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에피스테메는 역사적인 콘텍스트에서 파라다임의 변형을 겪으며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는 불가 공약성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다윈의 진화론에서 자연선택과 경쟁 그리고 생존투쟁을 기초로 한 점진적인 적자생존과 재생산의 이데올로기는 자연의 생에서 나타나는 새로움과 창발성 그리고 내적인 힘과 경향성을 해명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에 주목한다. 생물학적인 분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동식물의 세계와 더불어 성장하며 모든 자연적인 존재들안에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존재 한다고 말한다. 자연의 일이 행해지는 곳은 목적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진다 (Parts of Animals 1.5).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2 8.2>을 <종의 기원, xiii>에서 인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옥수수를 자라게 하기 위해 비가 내린다고 말하지 않는다. 치아는 필요성에 의해 자란다. 앞 이빨은 날카로우며 찢기 위해 적응된다. 아래 이빨은 평평하며 음식을 씹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우발적인 결과이며 누적을 위한 적응일 수 있다. 전체의 부분들은 마치 무엇인가를 위해 만들어지며 내적인 자발성에 의해 보존되고 구성된다.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서 자연선택의 원리가 드리워진 것을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 현실태에서 나타나는 환경의 작용 원인을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의 역동성에 근거해 파악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동물은 시력을 가지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다. 동물은 시력이 있어서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만드는 기술이 있어서 배를 만든다. 인간은 배 만드는 기술을 가지기 위해서 먼저 이론화 하지 않는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배운다. 질료는 잠재태의 상태에서 존재하며, 그것은 그 형상을 얻게된다. 이것이 현실태적으로 존재한다면, 질료는 형상안에 존재한다 (Metaphysics,Bk.IX. Ch. 8).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와 현실태의 변증법은 실천을 매개로 하며 알차 동작인으로서 유기체의 활동이 강조되며 선한 삶을 향한 목적과 열망으로 표현된다. 여기에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자기실현을 위한 선한 삶을 향한 열망 즉 코나투스가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 사이에 있다. 이것은 적자생존을 기초로한 다윈의 진화론과는 전혀 다르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생존투쟁과 경쟁에 기초해 전개 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선한 목적은 다윈의 빅토리아 시대의 자본주의 잔인함과 제국주의에 대립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연쇄와 위계를 통해 식물과 동물의 영혼을 고려했지만, 다윈처럼 공동조상의 유래와 종의 변형과 다른 종으로의 변이를 말하지 않았다.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관계에서 자연환경은 작용인으로서 질료의 디나미스와 에네르기아를 통해 현실태의 완성 즉 엔텔레키아로 실현된다. 잠재태에 앞서 현실태가 선행하며 진리의 알레테이아는 과정과 생성의 변화를 통해 현실태에서 실현된다. 현실태는 작용인 안에 있으며 보는 행위는 보는 주체안에 있다. 본체나 형상은 현실태이며 잠제태에 앞서있다. 이러한 현실태는 영원한 본래적 동작의 현실테로 되돌아가며. 신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이념/형상이나 잠재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것들안에는 나쁘거나 결핍되거나 왜곡되거나 변질적인 것은 없다. 변질은 나쁜 것이다. 잠재태는 변화와 운동의 과정에서 구성을 통해 현실태에 비추어 발견되어야하며 진리는 여기에 있다 (Metaphysics, Bk. IX. Ch.9). 진리의 알레테이아는 인간의 실천을 통해 현실태에서 완성되어야한다. 이러한 실천변증법은 진리가 스스로 드러나며 현존재와 더불어 계시와 은폐의 과정을 거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과는 다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변증법적이며 유기체의 결여와 심지어 폭력에 의한 사전봉쇄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선함의 목적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자연은 잔인하기보다는 여전히 선함과 경이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과 철학>에서 아리스트텔레스의 잠재태의 개념에 주목했다. 양자의 세계에서 잠재테는 비결정적이며 측정에서 개연성으로 드러난다. 하이젠베르크는 근대의 과학과 계몽주의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기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형이상학을 검토했다.
지향성과 개연성
앙자의 세계에서 개연성은 주사위를 던져서 결과를 아는 것보다 더 비결정적이다. 개연성은 경향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 (potentia)의 개념을 확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잠재태는 가능성 (걸을 수 있는)과 불가능성(걸을 수 없는)을 동시에 포함한다. 현실테를 가질 때 그것은 가능성을 갖는다. 현실태는 엄격이 말하면 운동이지만 성취와 연결된다 (Metaphysics, Bk IX. Ch. 3. 20). 사건의 이념과 실제의 사건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가능성과 현실태 사이에 물리적인 실제가 있다 (Heisenberg, Physics and Philosophy, 396).
이것은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지향성으로 볼 수 있다. 존재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세계 안에서 지향성으로 특징지워진다. 양자의 행동에 내재한 개연성은 잠재적이며, 무엇을 향한 경향성이다. 질료는 잠재태로서 형상(의미 세계)을 향행해 지향성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모든 것은 합리적 잠재태를 가지며, 이것은 잠재태를 향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실천으로 나타나며 어떤 조건에서 외부의 장애를 제거하는 대로 나간다 (Metaphysics, Bk. Ch.5.15).
잠재성과 경향성은 원초적인 질료 또는 에너지의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가 잠재적 경향성으로 정의 된다면, 이것은 에너지와 비교될 수 있다. 에너지를 통해 질료가 기본입자로 만들어질 때 현실태에 이른다 (ibid., 440).
하이젠베르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근대과학의 비판에서 구출해내고, 질료는 항상 잠재태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에네지의 형식으로서 경향성으로 파악되며 에너지를 통해 입자/파동에서 확인된다. 양자물질은 파동과 입자의 상보성에서 자기실현을 향한 지향성을 갖는다.
이런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개념은 잠재태와 현실태를 표현하는데 여전히 중요하다. A가 B안에 있다면, B와 C는 D안에 있다. 질료가 형상안에 있다면, 쟘재테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현실태와 실현된 형상의 완성에 대해 유비론적으로 표현된다. 무한한 것이나 비워있는 것 그리고 모든 비슷한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즉 잠재적으로 그리고 현실태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에네지가 질료와 연관되는 것도 유비론적으로 표현된다 (Metaphysics, Bk.IX. Ch.6.5).
과학의 소명
과학철학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과학과 기술을 지배하는 정치권력의 지배방식과 여기에 조응하는 사회구성과 계층의 위계질서를 검토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자연과학은 목적과 선함의 빛에서 정치와 경제의 지배방식을 비판하는 과제를 가져야 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적으로 평가했지만, 그의 순진한 반증주의와 비판적 테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복잡성이 정치, 경제, 역사, 예술, 논리학 그리고 언어이론에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는 시스템을 파악하지 못했다.
포퍼의 과학철학은 관찰자의 주관적 관점에 기초해 오류를 드러내기위해 서치 라이트를 밝히는 방법으로 특징된다. 포퍼는 역사를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기술하는 랑케의 실증주의 입장을 옹호한다 (Popper, 251). 그러나 실제로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중요한 것은 과학의 이념이 어떤 물질적 이해관계와 권력의 지배방식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존 사회 안에서 담론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바판적 합리성과 더불어 관찰과 경험에 기초하지만, 동시에 과학자는 역사적 영향과 사회 문화적 삶의 자리를 피해갈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철학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것은 그가 플라톤의 철학을 너머서는 파라다임의 변화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서치 프로그램은 몇 가지 오류를 논박하는 반증주의나 과학적 실증주의로 재단하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과학은 진리와 공공선의 소명을 담고있다. 이러한 차원이 실종될 때 과학은 고삐풀린 기술 합리성과 경쟁개발로 인해 인간과 자연의 삶을 송두리체 뒤흔들어 놓는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이것은 막스 배버가 말한 <소명으로서 과학>의 의미에 공명한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여전히 이전 무덤으로 돌려진 신들은 재출현하며 자신들의 가치요구를 위해 투쟁한다. 과학은 가치 중립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치투쟁에서 윤리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 과학의 소명은 허무주의에 저항하며 자기갱신을 통해 "어둠을 밝히는 촛불" (칼 세이건)과 같은 비판적인 태도와 계몽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