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몰아세우는 틀(Gestell)과 기술
1953년 하이데거는 "기술에 관한 문제"에 대해 강연을 했다. 기술문제는 후기 하이데거의 철학의 핵심에 속한다. 이 강연은 하이데거가 나치전력으로 인해 대학강의가 금지된 후 3년만에 행한 것이어서 중요하다. 같은 해 하이데거는 1935년 강의 <형이상학 입문>을 편집 출간했다 (GA 40: 208.2-5=222.5-8).
여기서 하이데거는 민족 사회주의 내적 진리와 위대함을 언급한다. 그것은 글로벌 기술과 현대인의 만남에 관한 것이다. 기술문제가 히틀러 파시즘의 위대함과 내적진리에 속하는 가 하는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이미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1920-30년대에 취한 정치적 견해와 태도를 말했다. 하이데거는 모든 것을 위조하고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였다 (Young-Bruehl, Hannah Arendt, 247).
기술문제는 하이데거가 사랑한 독일 서남부의 자연 낭만주의와 시골생활에 거대한 위협이 된다. 이러한 낭만주의 자연철학에 기초해 하이데거는 탈존의 현존재 신비를 위해 근대성의 합리성과 가술진보를 공격했다.
그는 1933년 히틀러가 권력장악 후 탈존의 현존재의 신비와 기술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기대했다. 오히려 이러한 위대한 일을 위해 기술은 선용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1933년 3월 다카우에 유대인 집단수용소가 설립된 것을 알면서도 이런 기대를 민족 사회주의 위대함으로 말했다.
기술진보로 인해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순전한 희생자들이었다. 하이데거는 게슈타포에게 대학동료들을 밀고하고 박사과정 학생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논문지도를 거부했다. 이것은 이미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론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에 대한 비판적 물음에서 하이데거는 현대 산업 사회의 기술 합리성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세우는 틀 또는 장치로 파악했다. 이것은 근대기술의 본질에서 힘과 지배구조를 드러낸다 ("The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 Heidegger Basic Writings, 302).
존재자들은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파악되고 쓸모있는 것들만 의미가 있다. 이것들은 재고품처럼 부품으로 남겨있다. 고유한 존재성은 박탈 당하며 단순히 유용성의 위치로 전락한다. 이것은 착취의 세계를 의미한다. 몰아세우는 틀의 세계는 기술 합리성의 지배와 관련된다.
기술의 정의
하이데거는 기술적인 것을 생산적인 기계도구로 말한다. 기술은 테크노롤지로서 목적을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기술활동과 합리성을 포함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테크네(기술지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판본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푸코의 기술경제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을 개별적인 것에 그리고 테크네를 보편적인 것에 관련짖는다. 생산과 만드는 것은 개별적인 것에 연관되며, 지식과 이해는 경험이 아니라 테크네에 속하며 테크네는 원안을 안다. <형이상학 1권>서두에서 "인간은 본성상 앎을 원한다." 인간은 테크네와 이성에 의해 살아간다. 존재론에 앞서 인식론이 위치한다.
더 나아가 테크네는 사 원인들의 상호작용과 목적론적인 틀에서 본질 또는 실체는 작용인의 테크네에 관련되며 기술개념은 현실태 (목적/완성)과 선함에 관련된다. 잠재태에서 현상태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생성의 변증법은 중요하게 고려된다.
기술지식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생산함으로써 의미있는 현전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자연(피지스)이 씨앗에서 나무의 완성태로 출현하는 것과 다르다. 테크네는 다양한 삶의 형식에서 예를들면 장인이 침대를 만드는 경우 그 가치가 존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이데거와 달리 폭넓은 지식과 지혜의 스펙트럼에서 파악한다.
서실 하이데거의 기술개념은 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 VI. 3-4장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크네 의미를 다양한 삶의 형식들에서 사 원인들의 상호작용에서 파악하지 못했고 목적론의 선함의 빛에서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가 있는 인간의 삶을 지성의 삶으로 간주하고, 이론과 실천에서 사태를 정확하게 (또는 부정확하게) 이해하는 능력을 소유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이 개념을 탈존으로 해석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유 (지성적 직관; 담론적 지식; 지혜)를 "어떻게" 인식하는 사유 (테크네; 기술과 산출적 사고; 실천적 지혜)로부터 구별했다. 이 두 가지 인식을 통해 사물은 의미있는 현상으로 출현한다.
하이데거는 테크네에 주목하고 산출적 사고와 도구적 목적 합리성을 분석했다. 이것은 <존재와 시간>에서 구체적 주목(Hinsicht), 그런가하면 실천적 지혜는 존재론적 둘러봄(Umsicht)에 가까울 수도 있다. 둘러봄은 목표와 수단을 향해 앞서 예견하는 실존론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이성(에피스테메; 연역적ㅡ귀납적 과학이성 )과 테크네(기술 또는 예술), 실천적 지성 (프로네시스)과 이해 그리고 철학적 지혜를 분류했다. 존재론적이 아니라 삶의 다른 형식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접근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를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영역에 적용하고 선한 삶을 위해 발전시켰다. <정치학>에서 국가의 본질은 정치가의 테크네에 연관되기도 한다. 지나친 부의 탐욕경제는 경제의 본질과 자연에 적합하지 못하며 경제의 목적의 빛(충분한 자급자족의 경제: 오이코노마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의 의미에 주목하고, 이것이 근대의 기술 합리성에서 실종 되었다고 말한다. 산업사회는 자연환경을 식민지화했다. 평균적 인간의 뿌리없는 조직, 대중에게서 나타나는 영적인 삶의 저하, 땅의 파괴와 신들의 떠나감, 물질적 생산관계의 규제와 지배 등이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산업사회의 기술지배의 본질과 참담한 귀결울 철학적으로 즉 고대 그리스의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파악했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 체제와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검토하지 않는다. 물론 하이데거는 극대화를 산출하는 경제원리와 산업 노동자들의 착취와 사회적 소외를 짤막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점은 서구의 산업사회가 은폐된 진리의 트임과 탈존으로서의 인간의 본질 그리고 의미의 모든 근거를 망각한데서 본다. 이 모든 재난은 존재망각으로 부터 온다. 라인강에 세워진 수력발전소는 전기 에너지를 산출하며 라인강은 수력을 공급하는 발전소로 인간의 손에의해 지배된다.
라인강은 전력작업을 위해 강요되고 횔더린의 라인강에대한 시적표현과 다르다. 수력발전소에도 불구하고 라인강은 여전히 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근대의 기술을 통한 지배는 자연에 도전하며 자연안에 은폐된 에너지를 드러내고 규제하고 변형시키고 비축한다 (ibid,, 321-2).
하이데거에 의하면 산업사회의 비인간적 현실은 형언할 수 없는 존재(es gibt)에 의해 구원되어야한다. 존재는 모든 의미로 충만한 세계들을 우리에게 주고 보낸다. 존재의 신비가 착취의 세계(Gestell)와 기술시대에 현존재의 열어밝힘과 사방세계에서 구원을 준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는 햔재의 기술시대를 변혁하는 <존재의 종말론>을 말한다. 신들의 신이 나타나며 더 이상 존재망각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애통의 슬픔도 눈물도 그리고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러한 구원이 있다 해도 여전히 은폐되어있다 (261). 하이데거의 존재의 종말론에는 영지주의 구원과 유사 기독교의 묵시적 모티브가 뒤섞여있다.
시적인 것의 구원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기술의 본질은 과학혁명 이전에 위치하며 과학혁명의 귀결로 볼 수 없다. 기술은 서구 문명의 역운이며 인간과 자연을 위협하면서 출현한다. 테크놀로지의 틀은 지배의 의지로서 팽창적이며 모든 것을 유용성과 조작으로 환원시킨다. 기술의 본질로서 몰아세움은 자연과 인간을 기술목적을 위해 재고품 내지 부품으로 만든다. 이것은 기술이 갖는 힘에의 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놀로지의 틀은 진리의 본질을 지배할 수 없다. 이것은 존재를 보호하는 예술에서 구원으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정치적 실천은 사라지고 시적인 것(poesis)이 테크놀로지의 위협과 팽창을 막을 수 있다.
물론 하이데거에 의하면 기술에대한 도구적 정의가 기술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이론 (질료와 형상, 목적과 작용인)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이러한 네 가지 원인이 어디서부터 오는 지 묻는다. 그리스어에서 신중한 고려는 로고스이며, 무엇인 가를 출현으로 가져가는 다시말해 드러내게 하는 아포판시스에 기초한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네가지 원인론에서 드러내게하는 로고스 구조가 없다고 비판하고 오히려 플라톤의 <심포지움>에서 poesis 단어를 끌어내 이것을 출현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체 또는 본질 (우시아)이 10가지 범주들을 통해 드러난다. 우시아가 유비론적으로 속성들로 나타나며 속성들은 우시아에 일치해야한다. 이러한 존재의 본질구조에서 잠재태의 디나미스가 활동(에네르기아)을 통해 완성태(엔텔레키아)로 드러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 존재구조를 피해가면서 플라톤의 poesis를 자연(physis)의 출현 (나무의 성장/꽃 봉오리의 핌 등)에 그대로 적용한다. 이러한 poesis의 틀에서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네가지 원인론을 재구성한다. Poesis는 은폐에서 탈은폐 (또는 계시 Entbergen)로 가는 것이며, 알레테이아는 라틴어에서 진리로 번역된다 (313-8).
테크놀로지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알레테이아에 관계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 원인론을 검토한다. 테크네는 장인의 활동과 숙련된 기술뿐만 아니라 poesis에 속한다. 테크네는 에피스테메(지식)에 관련된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 VI. ch. 3. 4에서 에피스메와 테크네의 구분을 수용했다. 테크네는 알레테이아이며, 이것은 생산하고 수단을 사용하거나 조작하는 것과 상관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테크네는 작용인의 기능에 속하며 나무를 침대로 만들고 현실태로 드러난다. 테크네는 경험과는 달리 원인을 알고 생산하는 기술적 지식이며 능력이다. 테크네는 원인을 아는 지식이며 알레테이아 개념과는 다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리스적 테크네 개념이 근대의 기계생산과 테크놀로지에 적합하지 않다. 엄밀과학으로서 근대의 물리학과 테크놀로지 개념은 그리스의 테크네와 다르며 근대 물리학은 기술적 기재(apparatus)와 진보에 근거한다. 여기서 poesis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포에시스 (만듦 또는 출현하게함)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테크네의 지식을 통해 드러난다. 기술은 유용성을 넘어서서 경탄의 대상이 되며 더 많은 기술들이 발견된다. 테크네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말하며 알차적 원리들과 원인에 관계한다. 포에시스에 앞서 테크네의 지식과 지혜가 있다.
하이데거: 근대 물리학 비판
하이데거는 <근대과학, 형이상학, 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입각해 뉴톤의 물리학을 비판했다. 뉴톤의 관성의 법칙은 이전 갈릴레이의 실험에서 기인한다. 피사의 탑의 실험에서 갈릴레이는 물체들이ㅡ경 중의 상관없이ㅡ동일하게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낙차의 시간의 차이는 오로지 공기의 저항으로 인해 온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주의 주장ㅡ물체는 본성에 따라 움직이며 무거운 것은 밑으로, 가벼운 곳은 위로 올라간다ㅡ을 뒤집는다. 무거운 물체는 당연히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땅에 떨어진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과 적대자들의 견해는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보고 해석 했다고 주장한다. 물체의 본질과 운동의 본성을 다루는 문제에서 하이데거는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모든 물체들은 같으며 속도는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모든 장소와 또한 모든 계기는 서로 같다. 모든 힘은 오직 동작의 변화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동작의 변화는 장소의 변화로 이해된다.
자연적인 과정에서 질량의 움직임은 시공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물체의 내적 가능성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시공간에서 움직임의 상황에 놓여있는 영역이 된다. 자연적인 물체들은 특질과 힘과 가능성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시공간의 영역에서 질량의 측정과 작용하는 힘에서 스스로를 들어낸다. 근대 물리학은 실험과 수학의 투사를 통해 고대 그리스적 사유를 해명했다 (291-2).
그러나 하이데거의 주장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만일 플라톤이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을 선취했다면 왜 중세에서 플라톤의 자연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 났는가? 중세신학에서 플라톤-어거스틴의 입장은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갈릴레이가 플라톤의 영향을 받고 관성의 법칙울 주장했다면 하이데거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플라톤의 영향을 받고 관성의 법칙을 수립했다는 것은 입증하기 어렵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 천체 자연학을 뉴톤의 <수학원리, Principa matematica>와 갈릴레이와 비교 검토하면서 플라톤을 이끌어냈다. 플라톤은 이미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을 선취한 것처럼 해석된다. 근대과학은 명제와 자명한 지식에 대한 의지에 근거한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한 토대나 청사진을 투사하는 데, 이것은 자의적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쉽게 이해될 수도 없다.
존재자 일반의 본질은 존재자들을 존재자들로 있게하는 것인데, 이것은 수학이 아니라 사유에서만 접근될 수 있다. 수학은 좁은 의미에서 자명한 지식에 대한 응답이지 결코 이러한 지식의 근거는 아니다. 하이데거는 수학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분석하고 근대과학과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수학의 지배시대에서 현존재의 기본입장은 무엇인가? 수학은 어떻게 현존재를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하는 가? (295).
하이데거의 평가에 의하면 근대의 자연과학과 수학 그리고 근대철학의 형이상학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은 넓은 의미에서 수학의 뿌리에서 부터 출현하고 존재자들의 존재에 접근한다.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나는 인간주체로서 명석판명한 아르키메데스 점으로서 그의 철학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물리학에 대한 이해는 데카르트의 수준에 머문다. 1930년대 이미 생물학의 분야에서 유기체에 대한 시스템적 사고는 전체와 부분의 연관성을 주장하면서 데카르트의 분석적 사유를 넘어섰다. 데카르트에게서 전체가 부분에 의해 분석된다는 방식은 시스템 사고의 콘텍스트적이며 생태학적 파라다임에서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네트워크 사유는 양자역학에서 결정적이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 또는 열역학에서 근대 물리학의 수학적 투사는 여전히 변경된 것이 전혀 없다.
근대과학의 문제는 하이데거가 근시안적으로 생각한 것처럼 뉴톤ㅡ데카르트의 수학적 모델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적 파라다임은 살아있는 유기체를 관찰하고 실험하면서 생의 원초적 형식이 네트워트에 있음을 발견한데서 나타난다. 더우기 하이데거의 시대에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과 철학>에서 데카르트의 방법을 넘어섰다. 물리학의 토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카르트가 세웠던 확실한 토대는 더 이상 없다.
고대와 중세에서 근대 물리학의 이행에서 물체들은 질량으로, 장소는 위치로, 동작은 관성으로 경향성은 힘으로 변화된다. 뉴톤의 법칙은 양자의 세계에서 적용될 수 없다. 닐스 보어는 하이데거가 강력하게 비판한 칸트의 물자체 이론을 자산의 양자이론에 수용했다.
뉴톤의 고전적 실재론에서 과학의 이론은 관찰자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물자체를 기술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론에서 뉴톤의 물리학은 인과율의 범주를 통해 세계를 기계처럼 산출하며 지성의 표상에 머문다. 그러나 칸트애개서 인간의 인식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또는 존재론적으로도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칸트의 형이상학은 뉴톤의 수학적 투사를 넘어선다 (Barbour, Religion and Science, 168).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자체를 알레테이아 사건으로 돌출한다. 양자의 세계에서 전자는 입자와 파동으로 관찰된다. 입자를 입자로 파동을 파동으로 드러나게 하는 존재 사건은 무엇인가? 네트워크의 사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나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는 적용될 수 없다. 여기에는 하이데거의 존재의 알레테이아도 없다
숲에서 모든 나무들의 뿌리는 서로 연결되어 뿌리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개별적인 나무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는 없다. 나무가 과학자의 지각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또한 과학적 관찰과 측량방법에 의존된다.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이 과학자의 질문과 방법에 드러난다 (Capra, The Web of Life, 40).
이러한 인식론의 문화는 네트워크적 사고에 입각한 질문의 방식이며 오히려 현상학적인 특징을 갖는다. 과학은 진리에 대해 잠정적인 답변을 통해 보다 예민하고 깊은 질문에 접근하며 자연현상의 본질에 점차적으로 접근한다.
하이데거는 당대 생물학의 발전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근대과학과 기술의 문제는 단지 수학적 투사에 있기 보다는 자연을 지배하는 방식에 있다. 자연은 죽은 물체로 다루어지고 무제한적으로 인간의 유용성과 자본축적을 위해 착취된다.
이것은 단순히 과학적 실증주의나 기술지배 그리고 수학적 투사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자연과학자들의 자연의 생과 신비함을 언급하며 자연은 더 이상 평형적이지도 않으며 일직선으로 나가지도 않으며 비결정성으로 조직 되어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며 불확정성이 지배한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
현대 물리학의 발전과 루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은 자리를 가질 수 있다.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철학을 한다고 말한다. 경이로움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느낀다.
무지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우리는 철학을 하며 앎을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이것은 어떤 유용함이나 쓸모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네 역시 보편적 지식으로서 이러한 경이로움의 영역에 속하며 자연과학은 철학적 차원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수학을 가치절하하지 않았다. 수학의 공리는 제일철학에 속하며 상이한 지식의 체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아르케에 속한다. 수학은 기하학과 산술학에서 공동원리로 사용된다.
수학 공리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 수학철학은 보편적인 대상에서 확실한 원리와 진리성을 가져야한다. 모순율은 논증을 성립시키는데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하며 모든 공리들의 원리일 수가 있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테스처럼 동일한 것이 ㅡ이면서 ㅡ이지 않다는 입장을 반박한다 (사람은 동일한 강물에 두번 둘어갈 수가 없다. 강물은 동일하지만 동일하지가 않다.)
모순율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같은 것이 ㅡ이면서 ㅡ이지 않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모순관계에 있는 명제들은 동시에 참이지가 않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는 ㅡ그의 자연과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ㅡ본딜ㅡ질과 우연적 속성을 일치시키는 진리 이해를 가지고 있다. 수학은 자연의 생을 다 포괄할 수 없고 일정한 측면을 접근한다. 수학의 한계와 현대 물 리학이나 생물학의 한계는 자연의 생에 의해서 교정된다.
양자 물리학에서 입자와 파동의 상호보완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의 한계를 교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의 본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술어적으로 또는 우연적 속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두 가지 다른 속성들이 양자의 본질을 규정하며 상호결합과 보완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한정적인 것(입자와 파동)은 잠재적으로 가능하지 현실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1007b 26- 29).
이런 점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는사 원인의 틀에서 인과율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유기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것은 생태학적 사유에서 생명의 알레테이아로 나타난다. '피'지스는 생명의 스스로 드러남을 역동적으로 (디나미스) 그리고 현상학적으로 표현한다.
자연은 환경에 매우 예민하며 조그만 동요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체가 창조적으로 발생한다. 자연은 기계나 수학공식으로 재단 되는 생의 세계가 아니다. 자연의 생은 복잡성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져있으며, 인간은 더 이상 지배와 콘트롤이 아니라 자연과의 새로운 대화와 협력과 존중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자연철학의 경이로움에 속한다.
문제는 자연과학과 기술을 지배하는 정치권력의 지배방식과 여기에 조응하는 사회구성과 계층의 위계질서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자연과학은 목적과 선함의 빛에서 정치와 경제의 지배방식을 비판하는 과제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