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갈등과 위험성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동맹으로서 페르시아와 오랜 전쟁을 하고 승리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는 데미스토클레스의 탁월한 전략으로 페르시아를 패배시키면서 그리스의 강자로 부상했다. 페르시야의 재침을 방어하기위해 델로스 동맹(478)을 강화하고, 아테네는 점차 제국 팽창의 길로 들어선다. 헤로도토스는 오랜세월에 걸친 페르시아와 그리스 전쟁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기술과정에서 과장과 억측이 드러나기도 한다.
헤로도토스 이후 투기디데스는 아테나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시스 전쟁사를 매우 사실에 기초해 기록했다. 그 역시 펠로폰네시스 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여했다가 패배로 인해 추방당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경험과 객관적인 자료들을 기초로 전쟁사를 기록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시스 지역의 동맹을 이끌고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살라미시 해전을 결정적인 승리로 이끈 테모스토클레스는 그간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아테네의 성벽을 보수하고 해군력을 강화했다. 장차 있게될 전쟁을 준비하기위해 아테네를 요새화하고 피레우스 항구도시를 잇는 70 킬로 미터의 거대하고 긴 성벽을 쌓기시작했다. 이것을 통해 아테네가 포위될 경우 바다를 통해 식령과 물품을 공급받을 수가 있게된다. 이런 공사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는 평민들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델로스의 동맹권의 강화되지만 테모스토클레스는 키몬에 의해 도편추방당하고, 페르시아에 의탁한 후 자살을 했다. 귀족 출신 키몬은 페르시아 지배에 있던 이오니아 지역 ( 그리스를 마주하는 아나톨로이아 해안지역)을 점령하고 매우 유리한 조건의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는 동맹국의 군자금을 아테네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키몬의 친 스파르타 정책과 뇌물수뢰 혐의로 인해 엘피아테스를 통해 도편추방을 당했다. 민중파 엘피아테스는 당대 아레오파고스의 서법권을 귀족이 아니라 평민의 참여에 개방하고, 배심원들을 민주적으로 구성했다.
키몬 당시 스파르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노예들이 반란이 일어나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키몬이 군사를 파병하지만, 오히려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정예화된 군사를 두려워하는 바람에 아무런 수확이 없이 되돌아오게된다. 결국 이것이 키몬의 도편추방의 원인이 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해군력 증강과 델로스 동맹의 주도권 그리고 성벽재건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했다. 결국, 에게해 지역에서 아테네의 패권확장이 지진과 사회적 위기에 있던 스파르타에 두려움을 심어주고, 이후 펠로폰네시스 전쟁의 불씨가 된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사람은 엘피아테스의 친구였던 유명한 지도자 페리클레스(495-429)였다. 그는 아테네를 교육과 문화와 예술과 축제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고, 포퓰리즘 정책과 선동 민주주의가 절정에 달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원전 6세기 말엽 솔론의 온건한 정치개혁, 경제 그리고 사법개혁 이후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클레이스테네스가 기원전 507년도 정치개혁으로 도입했다.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 모든 시민들의 동등한 권리와 도편제도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전쟁 승리이후 키몬의 군사력 강화와 막대한 동맹금이 아테네를 위해 사용되면서 이후 황금시기를 예비해주었다.
평화, 음모, 그리고 배신
421년 니키야스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시도되지만 알키비아데스의 반대로 전쟁은 복잡한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명문가문의 출신이었고 미모와 재능의 인물이었고, 현란한 언변과 음모정책을 통해 니키아스 평화조약을 비판했다. 당시 아테네를 방문한 스파르타의 사절단을 속이면서 이간질에 성공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의 이간질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아테네는 비동맹국가인 멜로스를 공격하면서 자기 편에 설 것을 요구했다. 아테네에 보낸 멜로스의 사절단과 나눈 대화가 알려진다. <멜로스의 대화>에서 투키디데스는 기록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당신들도 입장이 바뀌면 우리처럼 행동할 것이다."
아탈리아의 시칠리아는 오래 전에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 도시국가였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의 도리아인들이 세운 도시국가였고 이를 정복하는 것이 아테네에게 중요했다. 니키아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키비아데스의 연설로 인해 시칠리아로 원정이 결정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지휘관으로 참전했지만 국내에서 신성모독 범죄혐의 (헤르메스 조각상의 파괴)로 소환되어 그는 스파르타로 망명을 했다. 물론 이 사건은 알키비아데스가 출항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원정응 이끄는 지휘관의 책임으로 인해 국내에서 자신에 대한 고발을 소명할 기회가 없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알키비아데스의 배신과 시라쿠사의 원정의 대참패 (41 3)로 인해 아테네는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전쟁의 소식을 들은 페르시아는 이전 이오니아지역의 지배권을 위해 스파르트에게 도움을 제공했다. 여기에 알키비아데스의 카멜레온적인 이간질은 한몫을 했다. 그는 이오니아 지역의 도시국가들에게 반 아테네 정책을 취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스파르타의 왕비와의 뷸륜과 왕의 사살명령을 미리 알아채고 페르시아로 도피하고 이곳에서 정치 조언자 역할을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귀족들과의 협상을 통해 페르시아의 지원을 끌어내 위기의 아테네를 구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조건은 아테네에 민주정을 폐지하고 과두정을 실시해서 자신이 아테네로 귀향하는 데 있었다. 결국 400인 과두정이 들어서고, 독재정치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주변 아테네 동맹국들의 실망과 불만 그리고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다시 민주정이 회복되어었지만, 아테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귀국하기를 요청했다. 귀국 전 그는 자신의 전쟁 지휘관으로서 공적을 명분으로 삼고 싶어 스파르타 동맹국들과 전쟁을 승리를 이끈 후, 심지어 칼세돈과 비잔티움을 정복했다. 407년 알키비아데스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먼서 영웅으로 귀환했다. 시민들은 그에게 이전에 신성모독의 누명을 씌워서 이런 일이 발생 했다고 뉘우칠 정도였다.
알키비아데스는 민회에서 해군과 보병의 최고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극심한 재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봉급문제로 불만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에베소에 가까운 노티움 전투에 참가했지만, 동맹국의 모금을 걷기 인해 전쟁에 직접 지휘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장수 안티오크스에게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남겼다. 그러나 안티오크스는 복종하지 않고 공격하다가 사망했다.
전쟁실패로 알키비아데스는 그의 적수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그는 민중의 공분을 사서 다시 아테네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는 항상 자신에게, 실패는 동료 장군들에게 돌리는 태도로 인해 많은 시기와 원성을 산 인물이었다. 404년 알키비아데스는 고레스 대왕이 세운 아키메니드 제국 (오늘날 이란)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스파르타의 사주로 페르시아가 보낸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의 살해에 대한 원인과 기록은 분명치가 않다.
406년 아르기누세스 전투에서 6명의 유능한 아테네 장군들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폭풍으로 인해 25척의 함선의 선원들의 생명을 구조하지 못한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소크라테스는 민회에서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능한 지휘관을 잃어버린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제 2차 전쟁은 404년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것을 흔히 28년간 지속된 펠로폰네시스 전쟁으로 부르며 아테네의 공화정은 친 스파르타의 30인 참주지배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알키비아데스를 부와 명예욕에 사로잡힌 야망의 인물로 비판했지만 그를 아테네의 파괴의 책임자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가이자 유명한 연설가인 데모스테네스 (384-322)는 알키비아데스의 공적을 치하했고 민주정과 애국주의를 가진 인물로 평가하기도했다. 투기디데스는 전쟁의 원인을 아테네의 동맹을 통한 패권확장과 이에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 그리고 민주정의 무분별한 선동정치에서 찾았다. 동맹들간의 크고 작은 이해충돌이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민중 포퓰리즘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민중선동과 더불어 시민전쟁 또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로가기 때문이다.
더우기 투키디데스는 전쟁기간 중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들에서 나타나는 동맹을 둘러싼 민중파와 귀족파들간의 이념 투쟁과 폭력의 심각성을 질타했다. 아테네와 동맹국인 케르키라는 친 스파르타 고린도의 스파이 침투로 동맹을 둘러싼 이념분쟁이 생기고, 결국 쿠데타로 인해 내란에 휩싸였다. 내란과 이념분쟁은 인간의 마음을 난폭하게 만들고, 권력욕과 진영논리로 공동체의 삶을 폭력으로 물들게했다. 이념분쟁으로 인해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이 있었다. 반대파를 진압하기 위한 꺼리낌없는 폭력사용과 자기가 속한 진영의 집단 이기주의는 믿기어려운 광신행위를 초래했다. 어째튼 투기디세스의 역사기술은 칸트가 언급한 것처럼, 객관성을 유지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원인과 결과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한다. 여기에는 신들이 전쟁에 관여한다는 신화는 배제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과학적 역사기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전쟁의 패배로인해 아테네는 삼십인으로 이루어진 독재정권이 들어섰다. 이전 민주정을 전쟁실패의 원인으로 공격하고 독재정치를 하지만, 1년도 채 못되어 민주정이 들어섰다. 이 시기에 소크라데스(470-399)는 아테네의 신들을 부정하고 젊은 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민회에서 고소당하고 평민법정에서 사형당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은 독재정치로 귀결한다는 유명한 비판을 했다. 아테네의 민중민주주의는 어리석은 자들의 정치로 끝났다.
헤게모니와 실존적 위협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영국수상에게 왜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와 그토록 사이가 좋지 않은 지를 물은 적이있다. 오히려 더 큰 도전은 미국이 아닌가? 그의 대답은 독일의 정치적 헤게모니와 해군전력증강이 영국에 존재론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의 국제정치학자인 그래함 엘리슨은 그의 저서 ”전쟁으로의 운명: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세스 함정을 피할 수가 있 는가?” 에서 전쟁의 패턴을 기술한다.
부상하는 패권국으로서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구조적인 압력을 느끼게 한다. 4년에 걸친 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폐허가 되었다. 독일의 카이저 황제는 폐위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러시아의 차르는 레닌의 볼세비키들에 의해 전복 되었다. 리버럴 세계질서에서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가? 아테네는 당대 패권국인 스파르타를 도전했다. 독일이 영국에 도전했던 1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와 전쟁
그러나 투기디데스의 함정이론은 존 홉슨의 “제국주의”에서 전쟁에 대한 반성을 비켜간다. 홉슨은 당대 최고의 대영제국의 식민주의를 분석하면서 해외시장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쟁의 열쇠로 보았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분석하면서 그는 민족의 위신과 자존심이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민족주의가 시민사회나 의회 민주주의를 무력화 시킬 때 해외정책과 안보문제를 구실로 군사비용지출이 강화된다.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영국의 사회주의당 조차도 민족주의와 군사정책에 굴복하고 1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다.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에 기초하며 해외정책와 독점과 자본축적과정에서 결국 이웃국가를 향한 공격과 정복으로 나타난다. 홉슨은 전쟁에 대해 정치경제학적인 접근을 제공하고 과도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결합에서 전쟁의 원인을 보았다.
민족주의는 특정지배계급에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며, 보호주의 정책과 잉여수익의 증대, 그리고 국제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억압적이며,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민족주의 정치는 자본가들의 후원과 이익에 연계된다. 자본주의 무역과 금융경제가 민족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의회 민주주의는 특정 지배계급에 의해 변질된다. 사회 경제적 자본주의 시스템과 민족주의 결합은 군비확장과 더불어 근대 제국주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국가간의 적대감정과 계급전쟁을 유발하고, 결국 세계전쟁으로 나가게한다 (J.A Hobson, “Why the War Came as a Surpise,” 1920, September).
홉즈의 제국주의 분석에서 흥미로운 것은 전쟁의 여파로 인해 실업과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지만 전쟁은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온다. 1929-30년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경제는 발전했다. 전후 자본주의는 전쟁의 여파나 재앙을 넘어서서 새로운 생산성의 급격한 성장을 보여준다. 제국주의와 전쟁의 관계에서 경제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는 반드시 전쟁에 의해서 혜택을 본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일정부문은 정치적 영향으로 인해 전쟁에 관여되고 군비사업은 여기에 해당된다 (Hobson, Imperalism, xv, 1938 개정판).
미국의 경우 대공항은 1929년부터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알리는 1939년 사이에 있었다. 대공황의 원인은 소비하락, 소비자들의 과도한 부채, 산업생산의 저하 그리고 증권시장의 과도하고 급속한 팽창으로 들 수 있다. 1920년대 미국의 경기는 대호황이었고 "솟아오르는 20년대"로 불렸다.
그러나 증권시장은 뉴옥의 월가에 집중되고 수 많은 사람들과 투기상품과 증권에 투자를 했다. 1929년 8월 증권시장은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생산이 저하되고 실업자율이 발생했다. 저임금과 더불어 소비자들의 채무는 증폭이 되고 가뭄으로인한 농촌경제의 하락은 식품공급과 가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은행은 원금을 회수하지 못한 채, 부채상환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1929년 10월 증권시장이 붕괴했을 때 은행파산이 나타나면서 세계경제의 위기를 일으켰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유럽에서 파시즘으로 발흥으로 이어졌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통해 경기부양책을 썼지만, 독일의 히틀러와 전쟁하는 영국과 프랑스를 지원하면서 미국은 방위산업이 부흥이되고 고용율이 증가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은 2차세계대전에 개입하고 공장들은 풀 가동되면서 제조산업과 군비산업의 증대되었다. 1942년 징집으로 인해 실업울이 저하되고 대공항은 끝이났다.
동맹보다는 세계질서
이러한 정치경제학적인 접근은 동맹관계를 단순히 실존적인 위협이나 힘의 균형의 불안을 넘어서서 민족주의와 금융자본과 정치 이데올로기 그리고 문화적인 요인들을 전쟁분석에서 고려하게 한다. 이것은 세계질서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에 주목한다.
시진핑이 시에틀을 방문했을 때 투키디세스 함정과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열강들이 전략적인 산출에서 실수할 때 그러한 함정은 민족주의와 글로벌 경제문제와 신속하게 결합된다. 대만과의 긴장과 갈등에서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동맹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질서를 둘러싼 패권다툼과 경제적 충돌에서 러-우전쟁보다 훨씬 큰 확대전선으로 나타날 수 있다.
대만은 미국의 패권이 과연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꺾고 향후 우위를 점유할 수 있는 가 하는 리버럴 세계질서의 재편으로 나타난다. 여전히 정치이데올로기가 중요해진다.
2400년 전 스파르타에게 전쟁의 불을 부친 것은 부상하는 아테네 도시 국가에 대한 불안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우크라이나와 전면전을 벌이는 러시아의 푸틴에게서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동맹국으로 간다면 이것은 러시아에 실존적인 위협이 된다. 그러나 부다페스트협약에 대한 푸틴의 파기 또한 그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나타난다. 우쿠라이나는 2014년 크림반도 처럼 쉽게 병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과 나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푸틴을 공격하고 크림반도 재탈환을 시도하고 있다. 오늘날 전쟁에는 군사위협에 대한 실존적인 생존염려와 함께 국제협약을 지켜야하는 국제 정치적 정당성을 필요로한다. 이것은 후기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말한다. 푸틴의 약점은 전쟁명분에서 글로벌 시민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데 있다. 더우기 길어지는 전쟁에서 미국이나 서방세계 그리고 중국과 인도등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기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전쟁은 오늘날 글로벌 비즈니스가 되고 있다.
고전적 민주정과 사법재판
솔론이후 클레이스테네스 (기원전 510-462)는 과감한 개혁을 실시했다. 권력은 오백인 평의회와 6천명의 정족수의 에클레시아 (입법기관이자 민회) 그리고 배심원 제도로 나누어졌다. 배심원은 30세 이상의 시민들로서 10개의 부족의 자치단체인 데모스에서 제비뽑기로 추첨된 6000명이었고, 주요사안에 따라 배심원의 수가 결정되었다. 집정관보다는 열명의 군지휘관이 데모스에서 직접선거로 선출되고 민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솔론의 아레오파고스의 원로역활은 변경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에 의하면, 클레이스테네스는 군인다운 자질이 뛰어났으며 대중의 호감을 샀다. 그는 경기에서 패배 판정을 내린 심판에게 상을 내렸다 (<정치학> 5권 12장 1-2).
민회는 아테네의 최고 의결기구이며 매달에 한번 또는 두 서너번, 필요시 그 이상도 모이기도 했다. 여기서 외교문제, 재정, 전쟁, 군사작전, 장군선발, 범죄재판 등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모든 중요한 일들이 처리되었다. 20세가 되면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민회에는 여당이나 야당같은 양당제도가 없었고 다수결 투표로 결정되었다.
500인 평의회는 10개의 부족에서 자치 단체인 데모스에서 추첨에의해 선출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평의회는 민회에서 논의될 안건을 선정하고, 선출직 공무원의 감독과 일상 행정을 관장했다. 권력은 민중(데모)에게 있고, 정치가들의 전횡을 막기위해 도편추방이 도입되었다. 여전히 아레오파고스의 원로회는 판결을 했고 민중배심원의 전횡을 막았다.
민중 민주정에서 배심원 자질
살라미스 해전에서 해군력이 중요해지면서 가난한 민중둘이 대거 참여했다. 보뱡에 참여하기 위해 무기를 사야하는 부담을 가진 민중들은 해군력에서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것은 고전적 민주정에서 민중정으로 이행되는 권력의 역동성울 말한다. 그러나 고전적 민주정은 페리클레스에게서 직접선동 민주정과 32년간 일인독재로 변질되었다. 투기디데스는 <펠로폰네시스 전쟁사>에서 평민들이 사실이나 법률이 아니라 선동에 의해 쉽게 현혹 당한다고 지적한다. 투기디데스에게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의 헌법>에 의하면, 당대 사법체도에는 재판관이나 전문적인 변호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6000명의 배심원이 해마다 사안에 따라 법정에 참석하는데 일반적으로 배심원의 수는 501명으로 추정된다. 물론 재판의 경중에 따라 배심원의 수는 51명에서 1051여명까지 이른다. 6000명의 배심원에게 재판의 내용과 경중에 따라 개별적인 재판에 배치되기 때문에 이들 모두에게 뇌물을 주고 재판에서 이길 승산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재판과정에는 오늘날 검찰이나 국가가 선출하거나 개인이 고용한 변호사는 없었다. 심지어 재판관도 없었다. 개별 시민이 필요한 경우에 직접적으로 법정에 고소하고 원고와 피고가 되며, 고소의 내용을 써 주는 사람을 고용할 수가 있다. 고소장의 연설문을 써 주는 전문인들이 아테네에 많았다. 정의와 공평성을 다루는 사법에서 아테네는 전문 법조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의 비밀투표와 다수결에 일임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현대의 사법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즉 법조인들의 관료지배가 없는 체제였다. 원고가 패소할 경우 그는 상당한 액수를 국가에 벌금으로 물어야한다. 그러나 승소할 경우 배상액을 피고에게 요구하고, 피고 또한 배상액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경우 적절한 액수로 역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재판절차에서 한편에서 배심원의 자질과 능력의 문제가 있고, 다른 한편 고소장의 연설문을 써주는 전문가의 수사적 능력에 있다.
일례로 5세기에 매우 유명한 전문 기록인에게 원고가 찾아와서 고소장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전문인은 고소장을 유려한 필체와 복잡한 법적논증을 가미해서 설득력있게 작성 해주었다. 부탁을 한 사람은 한번 흩어보고는 매우 만족해서 고소장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고소장을 부탁한 사람이 다시 찾아와서 불평을 늘어놓는다. "다시 한번 집에서 살펴보니 당신의 필체는 화려하고 법적 논증은 너무 복잡하고 헛점이 많아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고소장 전문가가 이런 말을 한다. "진정하게나, 친구. 배심원들은 얼간이들이어서 당신처럼 두 번씩 고소장 내용을 읽지 않네."
이러한 재판절차에서 나타나는 연설문 선동이나 배심원들의 편견과 자질문제 그리고 신속한 처벌결정은 많은 철학자들이나 양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재판절차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민중 민주정에서, 그리고 이후 406년 아루기네세 해전의 지휘관들에 대한 재판에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즉결재판의 안건을 불법으로 반대한 이유로 자신이 성토를 당하고 법정으로 끌려갈 정도로 말한다. 그리고 30인 참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살라미스의 한 선량한 사람을 범죄에 연류시키기 의해 체포하라는 명령을 거절한 이유로 사형당했을 것으로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진리에 서서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의하면, 국가가 함대를 만들거나 전쟁문제를 결정할 때 또는 국가예산을 책정할 때, 추첨에 의해 선출된 민의에서 아무런 교육배경과 전문성이 없는 군중들에 의해 결의될 수가 있는가?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정은 진실과 지혜가 실종되고 비방과 무지와 모함의 사회로 고발한다. 배심원은 정의와 진실에 따라 재판을 해야한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3명의 원고 중 한 부유한 상인 정치가는 배심원에게 뇌물을 주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아테네 선동민주정에 대한 시민적 불복종이며 잘못된 중우정치방식에 혁명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관용과 표현의 자유를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계약론적인 시민 불복종은 <크리톤>에서 여전히 법에 대한 존중으로 나타난다. 모든 개인은 시민으로서 법에 대한 의무가 있다. 도피함으로써 법에 대한 의무를 손상하고 불의를 행할 수 없다. 국가와 시민들간의 계약은 소크라테스에게 시인 멜레토스의 악의적 고발에 비판적 변론을 허락하고 국외로 추방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를 거절한 소크라테스가 부유한 친구 크리톤의 도움으로 탈옥을 하는 건 국가와 시민의 계약에 어긋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도덕의 원칙에 서 있었고, 시민으로서 사회계약을 준수한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의 표현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정당성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뇌물에 매수당한 사람들었다.
페리클레스 (기원전 462-429)는 군지휘관으로서 가난한 계층의 시민들의 지지로 권력을 장기간 유지했다. 그는 공무수당을 통해 모든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시행했다. 비록 투기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찬미자로서 430년 행한 페리클레스 추모사에서 페리클레스와 아테네의 삶의 영광의 순간으로 보았지만, 그의 정치 포퓰리즘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파국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다.
델로스 동맹이후 아네테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띄기 시작했고 동맹자금을 아테네를 위해 건축과 도시개발에 유용하면서 결국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돌입하게된다.
소포클레스 (497/6-406/5)는 480년도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축하하는 시를 쓰고 합창단이 신에게 받치는 노래로 불렀다. 443년 경 그는 페리클레스 시기에 도시국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다. 441년 그는 <안티고네>의 성공으로 열 명의 군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고 페리클레스와 함께 사모스 정벌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Beer, Sophocles and the Tragedy of Athenian Democracy, 69). 소포클레스는 도편추방당한 키몬을 지지했고, 피레클레스의 독재정치에 가장 비판적 인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의 절정으로 간주했다.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멸망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파괴하지 않고 당대 부상하는 테베를 견제하기위해 참주 30인 과두제를 옹립했다. 그러니 스파르타가 테베에게 대패하고 몰락의 길을 가면서 아테네의 참주 과두정은 1년 후 민주파로 회복되었다. 아테네는 333년 마케도니아에 정렴 당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의 정당성을 방어하고 문제의 발단을 페리클레스의 민중 민주정에서 보았다. 페리클레스는 9명의 지도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아레오파고스의 권한을 봉쇄하고, 법원에서 일하는 민중 배심원들에게 비용을 지불했다. 이것은 솔론의 의도와는 달랐다 (Politics, 2.1274a). 투기디데스 또한 페리클레스가 전권을 가지고 휘둘렀고 아테네는 명목상 민주정이었다고 말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65).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국가의 목적이 선함에 있으며 분배의 정의(비례의 정의)와 사법적 교정의 정의에 기초 한다고 본다. 정치질서 (politeia)는 주권체 (polit- euma)인 통치방식을 의미한다. 그는 가급적 모든 사람의 공공선을 공정함에 기초한 분배의 정의에서 추구하며, 과두정 (부를 독점한 소수의 지배)과 민중 민주정에 독재가 있음을 비판한다. 시민의 능력과 덕에 기초한 정치질서는 공정한 법에 기초되어야하며, 실천적 지혜와 신중한 경험를 통해 밥을 심의하고 입법화되어야한다. 이것은 공동체안에서 살아가는 정치적 동물인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그리고 시민의 도시국가이다.
<정치학> 6권 9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적인 정치질서에서 시민들은 번갈아가며 관직을 맡는다ㅡ이것은 자연적이며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들은 관직과 공공재산을 취급하는데서 오는 이득 때문에 계속해서 관직을 독점하려고한다. 이것은 권력을 향한 병든 열정일 수가 있다.
<정치학> 7권 5ㅡ6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폭군정치는 왕정이 타락한 형태이고 과두정치는 귀족정치의 왜곡된 형태이다. 이것은 부자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하는 정치이다. 민주정은 혼합정치의 타락이며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만을 위해서 하는 정치이다. 지배자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만을 고려하는 정치질서는 왜곡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정과 귀족정치에서 폭군정치나 독재와는 다르게 자질과 도덕적 품성 그리고 절제정치에서 유사점을 보았지만 왕정 역시 내분의 분란이나 법을 어기는 폭군적 지배로 인해 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왕정은 한물간 정치형태이다 (<정치학> 5권 10장 37절).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5권 11장 5절에서 폭군정치와 독재방식을 분석한다. 정적을 제거하거나 기개가 높은 사람들을 없애지만 공동식사제와 사회 클럽이나 문화적 집회 등을 금지한다. 이것은 국민 상호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며 상대방에게 이방인처럼 대하도록 만든다. 피지배자들에게 복종의 습관을 강요하기 위해 롱적장소에 나타나고 궁전 문 근처에 서송거리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언동을 감시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 비밀첩자 또는 스파이를 심는다. 여기에는 주로 여자 정보원이 활동한다. 폭군지배는 피지배자들을 가난하게 만들어 무기를 갖지 못하도록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질서의 아포리아를 극복하기위해 공동이해를 돌보는 데 주목한다. 과두정치와 민주정의 차이는 부와 빈곤에있고 이로인해 권력투쟁을 한다. 민주정의 정의개념은 평등이지만 모두에게 평등한 것은 아니다. 만일 민중들이 다수라는 근거에서 부자들의 소유를 마음대로 나누어 갖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것은 약탈의 법에 기초한 극단의 부정의이며 (<정치학> 10장 1항), 훗 날 폭도정치(ochlocracy)로 말해진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여 민주주의를 위해 솔론의정치를 지지한다. 솔론은 중간계급에 속했으며 아리스토텔레르의 귀족정치는 중산층에기초한 시민 민주주의 즉 중용정치를 지향한다. 시민들은 심의와 사법적인 기능에 참여한다. 시민들은 관리를 선출하며 임기 후 책임을 묻는 기능을 가져야한다 (10장 8항).
정의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상대적이다. 국가는 선을 고취하는 목표 즉 좋은 행위에 헌신해야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분배도 받는 사람들의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아리스토텔레르는 <정치학> 10장 10-11항에서 의료문제를 다룬다. 이들에게 환자를 진단하고 차료하는 기능이 주어진다. 의료 전문가들의 판단과 기능은 국가에 의해 존중되어야한다.
이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윤석열 정부와 의료인들의 갈등과 투쟁에서도 볼 수 있다. 정의의 개념이 절대적이고 완벽한 거라는 입장은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의료인에게 공정한 가치와 몫을 그리고 국민들에게 건강의 권리와 생명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정당한 몫을 주지 않을 때 독재는 불이익을 당하는 다수의 사람들의 이름으로 출현한다. 때론 환자들이 의료정의를 의사들 보다 더 피부에 절감할 수 있다.
이것은 뛰어난 건축가보다는 실제로 집을 소유하고 살아본 사람이 집에 대해 더 잘 아는 것과 같다. 의료인들이 국가의 공공선에 기여도를 가질 때 이들의 탁월함과 특권 그리고 명성은 단지 국가보상체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분계층의 기여도에 근거한다. 시민사회의 공공선과 합리적 선택과 중용에따라 의료 공동체가 국가권력에 저항할때 이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다. 실천적 지혜와 중용의 합리성은 시민 민주주의에서 결정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타의 독재에 대한 혐오감 가지고 있었다. 도시국가가 자유인들의 결사라면 왜곡된 정치조직은 독재체제이다. 독재자는 종교를 이용하며 민중을 선동하며 특히 노예와 여자를 정탐꾼으로 이용한다. 폭군정치는 나쁜 사람둘을 친구로 선택하는 체제이며 <민주정치의 아첨꾼들>을 좋아하며 이들은 대중 선동꾼들을 환호하는 노예도덕을 가진 자들이다 (<정치학> 5권 11장 12절). 아리스토텔레스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앞서 폭군의 지배벙식을 기술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정치는 폭군정치와 정반대에 서 있다. 그것은 분배정의에 기초한 정의의 본질에 관련되며 공공선 거버넌스의 원조가 된다. 이것은 폭군정치와 독재에 저항하는 고결한 귀족의 도덕과 탁월함 그리고 비판적 시민 민주주의 내용을 담고있다.
헤시오도스의 우화
가원전 750년과 650년 사이에 살았던 헤시오도스는 아티카에 가까운 조그만 마을에서 농사를 짖던 시인이었다. 그는 호메로스와 동시대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속인 형제와 재산문제로 인해 다투다 불의한 관리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 그는 <일과 날>에서 매와 나이팅게일 우화를 인용한다. 강한 자와 싸우는 것은 어리석다. 남는 것은 패배와 수치와 피해 밖에 없다. 힘은 정의의 우위에 있다.
그러나 헤시오도스는 이러한 교리가 잘못된 것으로 비판한다. 정의의 신 다이크는 도시 공동체에서 억울한 자와 같이하며 악한 자들을 처벌한다. 정의와 덕을 행하는 곳에서 도시 공동체는 번영하지만 폭력과 불의는 망하게한다. 공동체의 정의는 평화와 관련되며 약자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선한 삶을 살려면 도시 공동체에서 살아야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1장 "역병과 아킬레우스의 분노" 에서 아킬레우스는 회의장에서 아가멤논과 격한 말다툼 끝에 회의장에서 자신의 여인을 빼앗겨 모욕과 분노로 인해 트로이 전쟁에 참가를 거절했다. 이것은 보상과 분배의 정의를 둘러싼 강자의 이익 즉 사자의 몫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올림푸스 세계에서 제우스와 다른 신들과의 관계에서도 반영된다. 제우스는 자신의 뚯을 명령하지만 신들을 존중하고 이들은 제우스의 명령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때론 불평하도 하고 주저하기도 한다. 하나의 일치와 동맹의 충성은 군주제적 극단인 독재로 가지 않는다 (Hegel, Philosophy of History, 349).
정의는 도시국가와 연관되며 더 이상 강자의 이익에 봉사해서는 안된다. 한 사람의 악한 자가 도시국가를 망칠 수가 있다. 개인과 국가 공동체의 관계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주의에 기초된다. 개인의 불멸성은 자녀들을 통해 이어지며 또한 도시 공동체를 통해 기억된다.
정의가 전쟁의 상황에서 강자의 이익이라면, 연약한 나라의 권리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네오 현실주의자들처럼 강자에게 항복하고 주권을 상실한 채로 살아야하는 것이 연약한 자들에게 속하는 정의인가?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일 것이다. 전쟁에 임하는 태도는 시민의 애국주의와 정치제도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오늘날 러-우 전쟁에서 반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전쟁의 역사는 영원히, 즉 세상 끝날까지 반복된다. 그리고 이를 멈추려는 평화의 노력도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