롼경문제는 사회문제로부터 온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생의 환경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생산활동은 동료인간과 더불어 환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환경문제와 위기는 공론장의 주요 이슈에 속한다. 1970년대 사회학은 거의 롼경의 문제틀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와 자연의 파괴를 거치면서 사회학에서 새로운 생태학적 파라다임이 등장하고, 사회와 문화가 애코 시스템에 의존돠는 것을 인식했다.
자연적인 생의 환경에 대한 개념적 명료함은 매우 복잡하며, 한경사회학은 생산관계와 소비가 자연의 자원에 미치는 변형과 공해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환경파괴는 인간의 삶을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지구는 인류를 위한 삶의 자원이 된다.
환경의 문제틀은 공해, 자원부족 그리고 인구폭발로 특징된다 생태계의 장애는 보다 많은 복잡한 환경문제들 즉 해양에 넘치는 쓰레기와 열대우림 벎목, 기후변화, 그리고 다양종의 집단 멸종과 같은 심각한 위가를 야기한다. 이것은 환경오염을 넘어서서 전 지구의 애코 시스탬의 문제로 이동하며, 이러한 생태학의 재난에 인간의 삶이 주범으로 등장한다 (Dunlap and Marshall, Environmental Sociology, Annual Review of Sociology · November 2003, 329-340).
물론 나는 환경 사회학을 에쿄 사회학을 이분화하기 보다는 사회학적 에콜로지 측면에서 사회자연성(socionature) 에 주목한다. 환경오염의 정치경제학과 기술지배는 에코 시스탬의 파괴로 이어진다. 환경 사회학에서 생태계를 지배하는 정치 경제학은 중요하게 고려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의 트래드밀 (Treadmill of prodcution) 기계와 같다. 과도생산은 경쟁으로 인해 필연적이며, 마찬가지로 과소 소비의 위기가 나타난다. 환경문제의 정치 경제학과 산업화는 사회학의 주요 의제로 들어온다. 자원부족은 소비를 줄어거나 보다 적절한 삶의 스타일을 통해 조절되지 않고, 착취를 위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통제사회애 대한 반성은 사회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들뢰즈와 통제사회
들뢰즈가 시스템이론에 기여하는 것은 다양한 사회제도들 (정치, 경제, 관료제, 교육 등)을 기계개념으로 파악하는데 있다. 세계는 기계/시스템들의 기능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기계/시스템들은 상호작용을 하며 서로에게 장애를 일으키기도한다.
푸코가 18세기까지 유럽의 주권지배사회 (세금과 인간의 생명을 지배한다)와 18세기-19세기까지 규율사회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들뢰즈는 20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통제사회를 분석대상으로 삼는다. 규율사회에서 인간의 신체가 규제되고,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지 특정공간이나 환경에 닫혀진다.
통제사회에서 흐름과 에네지 그리고 정보수단에 의해 인간의 삶은 자동적으로 자료화 되고 디지탈화가 된다. 통제사회는 사회버네틱스 피드백 회로로 가동되며, 모든 사회적 시스템 들에서 개인의 접근을 정보코드화된 자료 (학교성적자료, 취업자료, DNA프로필, 건강기록 등) 를 기초로 결정한다. 더 이상 인간은 규율사회를 통해 닫혀진 공간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 라 흐름과 열린환경에서 새로운 자유를 경험하지만 통제당한다. 욕망은 사회적 권력관계안에서 발생하며, 욕망과 힘은 더불어있다.
여기서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 상품 물신숭배는 어떤 상품이 물신으로 등장하는 가로 전환된다. 마르크스가 산업혁명에서 본 것은 증기기관과 생산력의 관계를 통한 대량생산이였다. 그러나 콘트롤 사회에서 기술진보는 디지털 혁명을 통해 상품의 특성을 바꾼다. 생산 관계 (인프라구조)와 더불어 사회전체 부문에서 유래없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제 컴퓨터 칩이 석유와 가스란 에네지 상품을 넘어갈 수가 있다. 이것은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측면에서 들뢰즈는 후기 자본주의 정보 소통양식과 유래없는 사회의 번화가 어떻게 생태학적인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개 해준다. 이것은 산업자본주의를 넘어서는 환경 사회학에 통찰을 제공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주채라는 측면을 말한다
모든 기존의 배치는 이전의 영토화에서 탈영토화가 된다. 욕망과 생성에 따라 배치가 탈주적 흐름을 타면서 변환된다. 욕망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노마딕 주체는 털주선을 타고 탈영토화의 삶의 방식을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비위계질서적이며 탈중심적 네트워크 구조로 나타나며 인터넷과 컴퓨터 테크놀로지에서 잘 볼 수 있다.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헤겔)는 힘과 생성 그리고 탈주, 탈영토화 그리고 노마딕 주체란 측면에서 파악한다.
기술진보와 새로운 상품의 출현은 인간에게 편리함과 환경에 묶여있는 신체규율을 넘어서는 자유를 허락하지만, 새롭게 출현되는 디지털 상품에 의해 지속적으로 통제 당한다. 통제사회는 성과에 따라 샐러리를 주는 변조기술(modulation)원리에 기초하며, 사이버네틱스 메카니즘을 통해 미래를 결정 한다. 모든 필요한 것은 컴퓨터 과학을 통해 정보코드와 패스워드에 입력되된다. 생태 시스탬 역시 기술의 통제로 들어온다.
이것은 통제사회를 특징짓는 기술과 정보 합리성과 사회 시스템의 분화로 볼 수 있다. 지속적인 네트워크에서 동질화하고 제어해버는 사이버네틱스의 원리가 가동된다. 통제사회에 대해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은 모든 것을 동질화해버리는 글로벌 제국과 소통지배 네트워크에서 차이와 다름을 옹호한다 (Deleuze, Postscript on the Societies of Control). 들뢰즈의 철학은 노마딕 주체의 재영토화와 타자를 통한 자기변혁을 지적한다.
들뢰즈의 통제사회론과 기술합리성은 생산의 트레이드 밀에서 파악될 수 있다.상품의 물신숭배는 루카치의 사물화로 전환되며, 이러한 사물화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통제 당하고 모든 것들은 동질화 되어 버린다. 마르크스와 베버에게서 가치 합리성은 중요한 분석이 대상으로 들어온다, 마르크스가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를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구분한다면, 오히려 베버는 공리주의적 목적 합리성이나 생산의 목적힙리성에 대해 가치 합리성을 윤리적인 심정의 차원으로 대립시켰다.
목적 합리성과 가치 합리성 그리고 기술 합리성은 전체 사회구조를 권력관계를 통해 이끌어가지만 국가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통제 사회론은 사회학적으로 볼때 지나차게 지름길을 택한다. 사회구성의 전개에서 다차적인 영역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은 고유한 발전 경로를 가지며 독특한 역사와 리듬으로 전개된다. 시스템의 분화애서 합리화, 전문화 그리고 관료지배가 일어나지만, 이것이 통제와 동질적인 지배로 등치 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 합리성과 정보양식 그리고 권력관계는 단지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종교나 문화가치의 저항도 있다. 법적 과정을 거치는 의회의 토론이 있으며, 시민사회로부터 정당성을 얻기위한 담론과 소통 또한 무시되지 않는다.
물론 들뢰즈의 통제 사회이론은 환경이 사회적으로, 특히 테크노 파라다임을 통해 어떻게 인간사회로 흡수되고 통제되는 지는 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들뢰즈의 통제사회와 기술솨 정보합리성에서 생산의 메카니즘과 금융 자본이 어떻게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사회생태학적 분석이 없다. 물론 들뢰즈는 리좀의 사고를 발전시키지만, 리좀의 사고가 생태 시스템에서 어떤 네트워크를 통해 작동되는 지 충분한 반성이 없다.
환경연구는 다학제적인 틀을 가지며 이것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에 걸쳐있다. 특히 환경 사회학은 생태학의 문제틀에서 그 중요성이 인식된다. 들뢰즈는 철학자이며 칸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의 전통에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이론을 다윈진화론을 넘어서 새롭게 설정한다. 무엇보다더 들뢰즈의 복잡성과 리좀의 사유는 생태학적인 영역에 중요한 통찰을 준다.
들뢰즈: 복잡성과 리좀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 의하면, 리좀 사고법을 지적하는 데 세포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은 서로 접속되고 다양한 요소가 혼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리좀은 새로운 부분이 접속되거나 단절 될 때 성질이 바뀌는 다양체이기도 하다. 리좀은 자기복제를 통해 끊임없이 주름접기와 펴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자기조직화의 과정이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존재로 볼 수 있다.
사이 존재로서 리좀이 자기조직화의 과정을 지적한다면,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세포의 오토포이에시스에 접근한다. 이러한 리좀개념은 숲의 생태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숲은 다양한 나무들이 중심부들과 연결된 복잡한 시스템이며, 서로 겹치기도 하는 연결망에서 나무들은 피드백과 소통과 적응을 통해 생명계를 유지한다. 숲의 생태계에서 리좀은 곰팡이와의 공생관계 즉 균근의 연결망을 형성하는데, 곰팡이는 뿌리를 보호하고 물과 영양분을 발견하게 돕는다. 그 대가로 뿌리는 곰팡이에게 탄소와 다른 영양분을 제공한다. 이러한 공생의 균근관계 (mycorrhiza)에서 곰팡이들은 나무의 생에 해로운 박테리아나 곰팡이들의 감염을 차단하는 항생제 역할을 하기도한다.
균사체 (mycelium)는 하얀 곰팡이 실로 이루어진 균사의 집단인데 뿌리와 관계를 유지하고, 나무들은 균사체를 통해 이웃의 나무들과 소통한다. 버섯은 뿌리를 감싸고 있는 광활한 균사체의 네트워크에서 자라난 균사의 열매로 볼 수 있다. 균사체는 전체 나무와 식물 종들의 65%에서 작용하며, 나무 뿌리에 미네랄 (질소와 인)을 제공한다. 훍 속의 내균근은 뿌리의 세포벽을 뚫고 들어오며 세포막은 군사를 거푸집처럼 둘러싼다. 외균근은 나무의 작은 뿌리를 감싸고 주의의 흙으로 뻗어나간다. 세포들 사이에서 균사 연결망이 형성된다.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수잔 시마드 교수는 숲의 생태학을 전나무와 자작나무의 소통관계를 연구하면서 균사가 두 나무를 연결시킨 것을 분석했다. 땅속에는 가느 다란 곰팡이실 (균사)들이 모든 나무의 잔뿌리를 에워싸고 있다. 균사는 토양에서 질소나 인 등 영양성분과 수분을 빨아들여 나무 뿌리에 공급한다. 균사는 그 대가로 나무가 잎에서 만든 광합성으로 인해 탄수화물의 양분을 공급받는다. 전나무와 자작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당분으로 변화시켜 뿌리로 보내고, 탄소를 서로에게 보낸다.
숲의 복잡 시스템에서 나무들은 탄소뿐만 아니라 질소와 인과 물 그리고 방호신호 대리 화학물질과 호르몬 정보를 교환한다. 균근의 줄기에서 근류의 끈실이 나와 균사체를 이루고, 균사체는 모든 나무와 식물들의 뿌리에 감염되어 서식하고 숲속의 다른 개체들을 인터텟처럼 연결한다. 뿌리가 넓고 깊게 뻗은 큰 나무 (중심나무 또는 엄마나무)가 균근 연결망을 통해 숲 그늘에 가려 광합성에 어려운 묘목들에게 여분의 탄소를 보내주면서 보호한다. 중심나무는 수백 개의 작은 나무들에 얽혀있고, 이것은 숲의 생태학에서 ‘나무 연결망’을 지적한다 (수잔 시마드, 나무가 서로와 대화하는 방법, TED 2016).
뿌리는 곰팡이 균과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며 이러한 연결망에서 나무들은 화학적인 시그날을 보내면서 직접적인 대화(cross talk)를 통해 생태계에 침해들어오는 해로운 요소들 (병원균, 독성물질, 약탈자 등)에 방어력을 형성하고, 영양분을 서로에게 제공하면서 건강한 삶을 유지한다. 심지어 벌목이 되는 경우 스트레스 시그널을 서로에게 보내기도 한다. 이것은 공생을 기초한 소통과학이며 환경 사회학에 결정적이다.
들뢰즈 비판
들뢰즈에게서 차이와 반복은 니체의 영원 회귀를 생물학이론을 차용하면서 철학적 인식론으로 발전시켰다. 주체의 동일성은 니체의 영향아래있는 들뢰즈의 노마딕한 개별 주체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영원 회귀에 참여하는 초인인가? 고결한 윤리를 가진 노마딕한 개별 초인이 있는가?. 오히려 주체는 역사적인 전개와 사회의 합리화와 전문화 과정 (에피 스테메)에서 자율적인 시스템과 물질적 이해 그리고 권력관계 안에서 구성된다. 주체는 문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생활세계의 일부에 속한다.
식물뿌리 진화에서 드러나는 리좀은 뿌리 끝 세포들이 벽을 뚫는 드릴처럼 나선형으로 뻗어 나가는데, 여기서 분자의 집단적 촉매역할은 중요하다. 곰팡이균과 박테리아를 통해 뿌리는 영양분을 섭치하며, 뿌리를 통해 흡수한 물과 영양분이 식물로 보내면서 식물의 성장과 생존을 돕는다. 나무의 광합성 과정에서 60-70% 이산화탄소는 뿌리를 통해 토양에 저장된다.
뿌리는 부식하지 않으며 토양의 생명을 유지한다. 뿌리는 식물이나 나무를 독성과 병원세균으로 부터 보호한다. 뿌리가 없이 토양은 나무나 식물의 생을 유지 하지 못한다. 식물은 토양을 안정 시키고 뿌리의 네크워크는 토양을 성장시키고 확장시킨다. 네덜란드의 경우 바다의 낮은 수면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준다. 리좀은 식물뿌리의 진화에서 공생의 미학과 생명을 지탱해주는 근거로 나타난다 (Will roots save the world?. DW Documentary, 2021 8월 5)
숲의 생태학에서볼 때 리좀적 사고는 균근관계에 기초되며 나무의 성장을 도우며 열린 환경에서 태양의 빛을 통해 광합성의 작용을 거치는 전체-부분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생명계 (또는 생활세계)는 태양의 역할처럼 빛을 보내주며 광합성의 과정을 통해 산소를 생산하고 나무의 성장과 생은 리좀과 균사와 공생관계를 통해 이웃 나무들과의 소통과 정보교환을 하며 악성 박테리아나 병원체나 약탈자로부터 방어한다.
급진적인 것은 뿌리에 천착하고 뿌리로부터 사고하는 것이며, 이것은 관계에 기초된 시스템 사고를 말한다. 급진적인 것은 관계의 총체안에서 뿌리박고 사유하는 것이며, 뿌리가 없이 토양의 생명은 유지될 수가 없다. 리좀의 개념은 균근관계와 나무의 성장교류 그리고 생활세계와 연결되어있는 소통 시스템이며 심비오시스의 급진성을 지적한다.
공공신학과 위기 사회
생활세계는 자연과학과 인식론에서 잊혀진 의미토대로 고려될 수 있다. 생활세계는 배를 조정하는 인간이라는 메타포와 더불어 시스템적 사고를 강화해주며,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산출하는데 기여한다. 인간은 생명권의 일부로서 심비오시스안에서 살아가지만, 여전히 그 혁신적인 능력 (이마고 데이)은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동역자로서 (Mitarbeiter) 중요하다. 인간은 생활세계와 더불어 소산구조의 생의 출현과 분자의 영역에서 오토포이에시스에서 증폭되는 에코 시스템을 책임지고 보호한다.
생활세계에 기초된 인식론적인 총체성은 진화 (자기 조직에서 나타나는 기능적인 분화)와 혁명 (소산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구조와 질서의 새로운 변화)을 복잡성, 촉매작용, 그리고 공동창조을 통해 접합한다. 이러한 오토포이에시스에 기초한 구조변화이론은 선택적 친화력을 사회학적으로 유용화하고, 상호관련, 창발성, 생명계의 공감의 가치윤리 그리고 새로 운 근접한 발전에 주목한다.
이런 점에서 기후변화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다룰 때, 환경 사회학은 구조(사회구성)와 개별 시스템 그리고 사건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에서 그리고 글로벌 상관관계안에서 변증법적으로 그리고 문제틀적인 방식으로 검토한다. 생활세계에 기초한 환경 사회학의 시스템이론은 기능적 분화와 자기생산성 그리고 시스템 소통을 넘어서서 위기와 갈등, 대립 그리고 새로운 질서을 향한 파열을 인간의 실천과 생명계의 구조 (정치, 경제, 문화등)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켜나간다. 이것은 기후정책에서의 혁명을 의미하며, 인식론적 파열과 더불어 사회 시스템들간의 열린 소통과 도전 그리고 협력을 요구한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이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기사회”를 출간하고 새로운 근대성의 필요를 주장했다. 환경문제나 생태학적인 위기는 산업사회의 귀결로부터 온다. 후기 근대사회는 성찰적인 근대화를 요구하며 리스크와 안전망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위험요인들을 줄여가면서 지속가능한 삶을 기획해야한다. 산업화 과정을 통해 기술 합리화가 급증하며, 일과 사회조직과 전반적인 삶의 스타일에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성에 대한 사회학적인 분석에서 쟁기, 증기기관, 마이크로칩은 이러한 사회발전의 바로미터가 되며, 전체 사회구조를 재설정한다. 생태학의 문제가 동반된다.
환경의식을 강화하기위해 출현이론은 사회학습을 통해 시민들의 집단적인 행동에 토대가 될 수있다. 이러한 환경교육은 성찰적 근대성을 옹호하고 위기사회를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혁신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환경에 대한 사회교육은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들과 관료제에 의해 봉쇄되지만, 사회개혁과 혁명애 대한 열린 태도는 위기의 시민사회를 방어한다.
울리히 백의 위기사회는 성찰적 근대성을 고려하며, 근대화와 산업화의 혜택을 거절하지 않은 체, 어떻게 하면 환경 사회 운동을 통해 위기사회를 변형할 것인가에 관심한다. 그의 성찰 근대성은 정치와 경제 시스템과 제도들을 갱신하고 생태학과 보다 합리적인 관계로 가져간다. 이것은 후기 자본주의에서 드러나는 대안 근대성에 접근한다.
위기 사회 파라다임에서 생산의 트래이드 밀은 산업사회가 근대화의 과정에서 위험스런 요인으로 배출한 완경오염에 관련된다. 환경오염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헤로운 영향을 미친다. "굶주임은 위계질서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부의 분배 사회는 위기를 동등하개 분배하는 사회의 출현에 직면한다. 위기사회 모댈은 제 3세계의 경제발전과 환경위기를 고려한다.
위기사회는 부매랑의 효과에 직면한다. 과학이 합리성을 독점한다는 환상은 부서진다. 역설적으로 과학은 점점 더 필요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진리의 구속력에서 점점 더 불충분해진다 (Beck, The Risk Society: Towards a New Modernity, 156).
20세기를 지배하는 과학 합리성은 새로운 사회 합리성 또는 자본주의 진보를 비판하는 공공선 합리성애 의해 대처되어야한다. 공론장으로 지향된 과학자들의 독점과학과 특권에 대한 비판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이미 1990년대 하버대학에서 터져나온 사회생물학 논쟁에서도 볼 수있다. 시민사회를 위한 공공과학이 필요하다. 정치영역에서 시민사회와 생활세계를 옹호하는 정당이 들어서기도 한다.
문제는 환경기술을 통한 리스크의 관리와 조절에서 신중한 정책 결정이 수행되어야한다. 여기서 과학의 소명의 의미가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연관을 맺고 거기서 나오는 소산을 먹고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거친 자연정복개념이 아니라 자연을 가꾸고 돌보는 삶의 교감과 더불어 같이 느끼는 유대적인 연민(com-passion)에 기초한다. 인간의 삶은 환경을 떠날 수 없으며 사회 문화적 환경은 민주적이며 창조적으로 빌전해야되며, 자유의 진보와 공공선이 이루어지는 생활세계와 시민사회를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