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정의와 기독교 신앙
레리 라스무센은 <지구 공동체, 지구윤리>에서 에코 정의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규정하고 하나님-교회-세계의 연관성을 하나님-우주-지구-교회로 바꾸어 놓았다. 라스무센은 지구를 향한 전환을 강조하고, 데카르트와 칸트의 근대성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중세의 우주론과 신중심을 부각 시킨다.
그런데 중세는 신중심보다는 카톨릭 제도교회의 지배 시대가 아니었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환경보호나 에코 정의에 관심이 있었나?
어째튼 라스무센은 에코 시스템에 정당한 몫을 제공하는 것을 에코 정의로 말한다. 그러나 에코 시스템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나 비평형상테의 열역학 법칙에서 드러나는 생의 출현이론은 고려되지 않는다. 심지어 창조와 진화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도 충분하지 않다.
라스무센은 에코 정의를 네 가지 수준에서 설명을 한다. 1) 지구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과의 연대, 2) 생태학적인 지속 가능성, 다시 말해 환경에 적절한 생활 습관을 통해 번영하는 것, 3) 조직적인 나눔의 기준으로서 충족성, 4) 생계와 건강한 삶을 얻기위한 결정에 정의로운 사회참여와 공공선 관리.
이러한 네가지 기준을 라스무센은 공적인 것으로 말하며, 기독교 신앙을 지구, 다시말해 생명의 전체 공동체를 존중하는 신앙으로 강조한다. 생명신학을 위해 본토 주민들의 목소리와 지혜를 발견해야한다 (Rasmussen, Is Eco-Justice Central to Christian Faith?, Christian Social Teachings, Forell, ed. rev. updated by Childs, 414-419).
라스무센의 에코신학의 모델에서 자연환경이나 생태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생태학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말해 유기체의 삶과 환경은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전개된다. 에코 공공 신학을 전개하려면 기본적으로 유기체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런가하면 근대성에 대한 그의 이해는 성찰적이고 대안적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기술적이다.
근대 이후 과학 기술의 발전은 엄청난 삶의 질의 향상과 더불어 위기를 그 부메랑으로 가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를 포기하고 중세적 세계관이나 우주적 영성으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사회 생태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체르노빌 사건이나 9/11 테러에서 후기 근대사회는 환경문제와 더불어 이슬람과의 건설적인 대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더우기 판데믹을 경험하면서 근대성을 도매금 처리하고 반근대적 테도는 문제를 더 키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근대적 사유안에서 대안적 사유를 돌출하고 성찰적 반성을 통해 후기 근대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는 시도가 보다 더 사실주의적이다 (Beck, A Critical Introduction to the Risk Society, 3).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의 숭고미가 인간의 미적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하나님은 자연의 숭고미를 통해 미학적으로 경험된다. 칸트는 당대 드믈게 서구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코스모폴리탄 환대의 윤리를 기획했다. 데카르트는 제 3 성찰에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것은 임마누엘 레비나스를 통해 타자성으로 전개되었다.
계몽의 비판적 환경론적 유산
서구의 근대성의 역사에는 스피노자 (1632-1677)가 있으며, 그의 자연이해와 존재들의 평등성 그리고 시민국가의 이해는 새로운 근대성과 사회 생태학 그리고 환경국가를 모색하는데 여전히 중요하다. 무엇보다 더 스피노자의 '하나님 또는 자연' (Deus sive Natura) 철학은 저명한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네스 (Arne Naess)에게 심층 생태주의 (deep ecology)의 비전을 제공했다.
물론 나는 아르네 네스처럼 스피노자를 범신론자로 파악하지 않지만, 스피노자의 철학과 윤리 안에는 생태적 홀리즘을 위한 에코 인간성과 환경 윤리의 차원이 있다.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은 신성 또는 실체를 의미하며, 소산적 자연 (natura naturata)은 하나님의 속성 (사유와 연장)을 말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양태는 하나님에 의존되며 동시에 상호의존성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다른 존재들과 시간과 관계 안에서 존재하며, 이러한 시간적인 양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환경/자연에대한 의존성을 말한다 (시간성의 관점에서). 그러나 인간이 본질은 하나님 (실체)의 부분이며, 이것은 영원성의 관점에서 코나투스를 통한 하나님/자연에 대한 직관적 사랑에서 파악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자연의 변용들이며, 그것은 코나투스 즉 하나님의 무한한 힘의 변용을 의미한다. 코나투스는 존재의 내적인 추동력 (자극 또는 본능)으로서 시간의 관점에서 개인의 심리적이며 신체와 연관되며, 삶을 보존하고 지속하게 한다. 그러나 영원성의 관점에서 코나투스는 하나님의 무한한 힘의 한 부분으로 파악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적 윤리는 코나투스를 통해 나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며 자연의 생에 대한 사랑임을 말한다. 내가 나의 본질을 영원성의 관점에서 실현할 때 나는 다른 존재들과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필연적으로 모두와 연결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코나투스를 가지며, 자신들을 보존하고 지속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열망한다. 이러한 자기실현의 측면은 생태주의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배단타의 신비주의 (브라만과 아트만의 합일)로 나가게 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동물의 위치가 제한적이고 인간과의 차이를 고려하며, 심층 생태주의자들 처럼 비-인간중심주의적 평등성이나 생태학적 자아 (브라만/아트만)를 말하지 않았다. 동물 또한 생을 보존하는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지만 영원성의 관점에서 자신의 생을 실현하거나 완성할 수 없다. 스피노자는 동물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하며, 동물의 삶을 인간의 이익이나 만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거절한다. 자연의 생은 인간의 만족에 적합한 방식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자연의 생에는 지배가 아니라 돌봄이 있다, 스피노자에게 에코 인간성은 생태적인 삶의 상호 의존적이며, 식물과 동물에 대한 돌봄의 환경의 윤리를 말한다 (Eccy de Jonge, Spinoza and Deep Ecology: Challenging Traditional Approaches to Environmentalism, 73).
이런 측면에서 스피노자는 범신론이 아니라 코나투스를 기초로 관계론적 신론을 구성한다. 그는 유대적인 유일신의 관계성을 근거로 인간과 자연의 생 그리고 세계와 더불어 사고한다. 관계론적 사유는 사고와 연장의 속성을 기초로 다양한 양태존재들로 나타나지만, 이것을 매개하는 힘은 선한 삶을 보존하고 실현하는 인간의 열망 즉 시간적이며 영원한 코나투스이다. 더우기 하나님은 사유와 연장을 넘어서서 무한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제힌성으로 인해 남김없이 파악될 수 없다.
영원성의 관점에서 이성을 통해 원인결과를 파악하는 지식이 있으며, 그런가하면 보다 고차적으로 나의 감정 또는 느낌으로 부터 얻어지는 명석 판명한 직관적 지식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데 대한 지적 사랑을 말한다. 이것은 나의 영원한 코나투스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서, 무우주적인 사랑 (심정윤리)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사랑은 나에게 기쁨과 자기승인을 가져오며, 전 지구적인 생의 형식들의 총체성과 다양성과 풍부함을 껴앉는 무우주적 사랑으로 나타난다.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인식론-- conari ergo sum--은 데카르트의 인식론--cogito ergo sum--을 넘어간다.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철학은 공공신학을 위해 에코 인간성과 환경의 심정윤리로 발전될 수 있다. 이것은 환경 시민국가를 지향하며 일체의 식민주의를 거절한다. 스피노자는 토마스 홉즈의 <리바이어던>을 비판적으로 갱신하고 자연의 생에는 <리바이어던>이나 가이아 같은 지구의 여신과 같은 섬뜻한 존재가 아니라 선한 삶을 열망이라는 코나투스의 활동과 영원성의 관점에서 나타나는 무우주적 사랑을 보았다. 사회와 국가는 여기에 공명하여 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런가하면 루소의 자연철학과 사회계약론은 라스무센에게서 탈각된다. 이미 라스무센이 언급하는 정의로운 사회참여를 통한 공공선 관리는 루소의 <불평등 기원론>에서 분배의 정의로 나타나며, <사회계약>에서 참여 민주주의로 전개된다. 이것은 칸트의 정치철학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존 롤스의 공평함으로서의 정의로 전개된다. 적어도 루소나 칸트에게서 스피노자처럼 식민주의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계몽의 비판적 유산은 성찰 근대성을 발전시키는데 여전히 중요하다. 공공신학에서 에코 정의는 환경 국가개념을 고려하며, 생산과정에서 녹색 기준에 적합한 상품에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을 고려한다. 환경 사회학은 공공신학과 생태학을 발전시키는데 주요한 대화의 파트너가 된다. 어째튼 라스무센이 언급하는 에코 정의에서 토착인들의 자연에 대한 경험과 영성 그리고 지혜를 발견하는 것은 오늘날 에코 페미니즘에서도 나타난다.
사회 생태학과 환경 구성 (oikos)
1970년대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네스 (Arne Naess)는 자연중심적인 심층 생태학을 구분했다. 심층 생태학은 환경보존이나 지속 가능성을 피상적인 생태학으로 비판한다. 이것은 종교적이며 다양한 영성으로 발전된다. 물론 나는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철학을 환경윤리로 전개하는데서 심층 생태학을 거부하기 보다는
지나친 종교 다원주의적 존재론에서 거리를 둔다. 스피노자는 여전히 생태 인간성과 환경의 심정윤리를 통해 공공신학에 소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어째튼 에코 페미니즘은 공공 환경신학보다는 심층 생태학에 공명할 수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가부장적 지배를 모든 지배와 착취의 원형으로 본다. 자연의 착취는 여성의 착취와 동일시되며, 페미니즘과 생태학의 연관성은 영성의 차원에서 전개된다. 에코 페미니즘은 영성적 생태주의로 표방되며 다양한 종교들의 의식과 자연에 대한 경험을 반영한다. 여성의 경험적 지식은 실재에 대한 생태학적 비전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회 생태학은 자연의 지배방식과 착취를 사회 경제적 구조와 기술진보에서 파악하고 자본주의에서 작동되는 시장을 문제 삼는다. 경제 구조의 재구성과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비전을 발전시킨다. 가부장제도나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는 지배방식의 시스템으로 비판되며, 여기에는 생태학적 사회학이나 또는 에코 실재에 대한 사회구성 (social construction of ecological reality) 이론이 포함된다. 이것은 여성착취와 자연착취가 동일시되는 거대담론을 문제틀하고, 여성 또한 자연의 착취를 통해 합리화 과정에 관여한 존재로 파악한다.
레온나르도 보프는 자속가능한 발전과 사회 생태학을 연결짓고 사회적 모델은 이분법적으로 비판한다. 가부장적인 제도의 사회는 특히 유대-기독교 전통의 유일신론에 기초하며, 이러한 신은 군주론적이며 반 삼위일체적이고, 공동체적 교제에 대립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유일신론은 사회와 환경의 일치와 상호 의존성안에서 나타나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오랜 우주적 생물학적 과정의 귀결이며,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그리고 원초적인 화학요소들이 없이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보프의 접근은 다윈의 진화론적이며,인류는 자연의 세계로부터 출현하고 인격의 세계로 도달하며, 인격의 세계에서 사회문화론적 세계로 진보한다 (Boff, Ecology and Liberation, 26).
보프는 그의 진화론적 생태학에서 사회 생태학을 자연 생태학에 일치하여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보프애개서 생의 출현이론 즉 소산구조와 비평형 상태에서 새로운 질서와 생으로 출현하는 열역학 법칙은 고려되지 않는다. 나는 생태학을 중지평형이론(스테판 굴드)과 세포의 코어보존과정과 촉진적 용이함 (막 커슈너) 그리고 세포의 오토포이에시스와 복잡성의 내트워크를 통해 생의 다각화로 파악한다. 이러한 생의 출현이론과 다각화는 자연에서 인격으로, 그리고 인격에서 사회문화의 진보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린환경과의 작용을 통해 자연의 생과 사회적인 삶은 새로운 질서의 고차적인 구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사회 생태학을 기초로, 환경 사회학과 사회구성이론을 자연과학 특히 비평형상태의 소산구조의 출현이론과 분자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오토포이에시스의 자기 생산성을 공공신학의 인식론으로 발전시킨다. 공공신학 모델은 심비오시스와 생의 출현이론의 틀에서 환경 사회학과 사회 담론 구성이론으로부터 중요한 통찰을 수용한다. 자연과 인간의 생에서 드러나는 선한 삶을 향한 열망과 증대 즉 코나투스는 자연, 환경 그리고 사회문화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유기체적인 생의 이해는 결정적이며 환경과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보게한다. 허버드 대학의 리차드 르온틴은 변증법적 생물학을 옹호하며, <트리플 헬릭스>에서 설득력 있게 말을 한다. “환경 없이 유기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유기체 없이 환경도 존재할 수 없다.... 지구는 자전축을 따라 세차 운동을 하며 주기적인 빙하기와 간빙기를 만들어낼 것이고, 화산이 폭발할 것이다...”그러나 빙하 하천, 화산재 퇴적물, 그리고 물웅 덩이...는 환경이 형성될 수 있는 물리적 조건들이다. ...유기체의 환경은 그것과 효과적인 상호 작용을 하는 외부 세계의 측면과 관련된 외부 조건의 반그늘이다” (Lewontin, The Triple Helix, 48-9).
유기체의 환경이 외부세계의 측면과 관련된 외부조건의 반그늘이라면, 환경 사회학은 사회구성의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다시말해 환경은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과학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안 생물들이 서로 유동적이며 콘텍스트적으로 구성돠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기체나 환경이 일방적으로 선결정하지 않는다 (A. Irwin, Sociology and the Environment, 178).
한경의 반그늘 성격은 유기채의 역동적 활동을 강조하며, 또한 사회자연성 (socionature)의 스펙트럼을 열어준다. 이제 환경구성(oikos)에서 사회와 자연간의 거대한 분리는 제거되고, 사회자연성이 역사적이며 지역적인 과정으로 들어온다. 사회와 자연은 이분화되지 않는다. 환경은 사회적으로 생성되고 변형이 된다. 사회자연성의 생성은 변증법적 성격을 가지며, 여기에 관여되는 구성요소들은 언어, 담론구성, 이데올로기적 실천, 사회적 관계, 문화실천, 그리고 기술적 개입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의 전개에서 변종 즉 부분적인 사회성과 부분적인 자연성이 환경구성의 성격을 갖는다 (Swyngedouw, ‘Modernity and hybridity...', Annals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Geographers, 89(3): 443–65).
사회자연성의 틀에서 나는 정치 경제학의 요인 (정치 생태학)과 권력과 지배의 문제를 분석하고, 심비오시스 네트워크안에서 에코 휴머니즘을 통해 비판적으로 갱신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생태학은 사회생물학의 진사회성 (eurosocial)의 한계를 넘어선다. 개미연구에서 나타나는 집단행동의 생태학 (드보라 고르동)은 바로 르온틴의 변증법적 생물학과 유기체와 한경의 상호작용에 기초하며, 사회자연성의 틀로 수용될 수 있다.
진사회성이 인간의 사회자연성과 생태적 사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생태 시스템은 사회적으로 형성되며, 자연성을 환경의 영역 안에서 생산한다. 사회관계들이 생태 시스템안에 내재하며, 생태적 관계는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학적 인식론은 역사의 발전을 기초로한 진화론적 생태학이론을 거절한다.
사회진화성의 변종개념에서 소산구조들에서 새로운 질서와 생의 출현이 나타나며, 오토포이에시스의 생명망이 결정적이다. 이러한 생물학적인 전망은 에코 휴머니즘을 고려하게 한다. 책임성은 단순히 인간학적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지배에 대한 에코 책임성에서 발전될 수가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진사회성의 개념에는 에코 휴머니즘과 소산구조의 생의 출현과 오토포이에시스는 고려되지 않는다.
소산구조의 변증법은 중지-평형-혁신을 통해 구조와 시스템으로 통합되며, 사회자연성 이론은 담론과 물질적 이해관계 그리고 권력의 분배와 사회게층의 위계질서를 환경 사회학안애 톻합된다.구조와 시스템은 생활셰계 안에서 접합되며, 새로운 사건의 출현은 십층 구조에 깔려있는 중지 평형-혁신과정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은 유언비어나 루머에 의해 선동되기 보다는, 새로움을 창출하는 사건은 열린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생의 구조에 대한 성찰적 반성을 통해 인식론적 파열로 나타난다. 이것은 울리히 벡의 위기사회테제를 사회학적 생태학을 통해 비판적으로 보충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생태학은 심층 생태학이나 자연 중심주의 세계관에 기초한 해방신학이나 에코 폐미니즘과 다르다. 에코 페미니즘은 남성주의를 가부장 지배로 도매금 처리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경험을 기초로 한 인간 중심주의가 있다. 그것은 여성의 경험과 지식체계를 통해 권력/담론의 관계를 확장하고, 억압받는 여성과 함께 위기에 있는 에코 시스템을 남성주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해방주의 입장을 말한다. 그러나 여성주의 역시 사회자연성의 네트워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환경구성(oikos)에서 사회자연성에 대한 변증법적인 환경이해와 위기사회 문제틀은 여성 해방주의나 창조/자연영성주의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