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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자연과 인격성: 문제틀

by 파레시아 2025. 1. 25.

노자와 <주역>

 

도법자연 (<도덕경> 25장)은 도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무위이화 (<도덕경> 57)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교화한다." 도는 스스로 자연의 길을 따른다. 여기에는 자연의 객관적 생의 움직임에 따라 인간의 삶과 사회질서를 세우려는 내용이 함축되어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주역>의 발생론적 사유애 가깝다. <도덕경>에서 도에서 하나가 생기고, 하나에서 둘이 생기고, 셋에서 만물이 생긴다. 만물은 저마다 음을 구비하고 양을 함유하는데, 이 음양 2기가 상호작용 함으로써 화기가 생긴다" (8장).

 

여기서 노자의 화기는 공자의 화이부동에 가까울 수 있다 (<논어> 23장). 성인의 도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를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은 소인배의 동이불화에 대립한다. 유무는 상생하며, 유물은 혼성하며 천지보다 먼저 나왔다 (<도덕경> 25장). 큰 나라는 강의 하류이며, 큰 나라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작은 나라를 얻는다. 작은 나라는 아래에서 큰 나라를 섬김으로써 큰 나라를 얻는다 (<도덕경> 61장). 

 

노자는 본질주의가 아니라 관계론자이다. 도는 비어있고 유무가 상생하고, 유물이 뒤섞여있다. 이것은 천지보다 먼저 나왔고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상제가 있기 보다 먼저다(상제지선).

 

자연의 생태계에서도 유물은 혼성되어있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새로운 오이코스를 구성하는데 공생과 매개와 심비오시스가 보다 더 중요한다. 이것이 생태계의 편형과 맥동을 유지한다. 노자는 자연의 생을 통해 인간의 수립할 질서와 나가야 할 길을 본다.   

    

<주역>의 계사전 11장에 의하면, 역에 태극이 있고 (역유태극), 이것이 양의 (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 계사전 5장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도는 음이 되었다가 양이 되었다고 하는 상호작용이다. 도를 이어받아 이러한 작용을 계속하는 것이 선이며, 도를 이어받아 이룬 상태가 성이다. 성이 도로부터 온 것이라면, 이것은 <중용>에 공명한다. 주역은 <중용>과 노자를 --차이와 다름에도 불구하고--매개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 자사의 저작으로 전해지며 맹자의 스승으로 언급된다. 주자 역시 맹자이후 실종되버린 성인의 가르침을 회복한 사사가들을 주렴계와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로 말한다. 이런 점에서 주자 역시 <중용>에 심대한 관심을 가지고 태극/무극의 우주론적인 차원에 기초에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하늘이 부여한 것 (천명)이 성이고, 성을 따르는 것이 도이고, 도를 닦는 것이 교육이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성은 마음 심과 삶의 합성어이므로, 이것은 살려는 의지, 다시말해 삶을 보존하는 열망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으로 볼 수 있다. 천명이 전체를 표현한다면, 성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성이 발휘되는 길이 도이다. 성은 도로부터 온 것이다.  인간의 성은 천명이며 도로부터 온 것이다.

 

<주역>은 노자와 사서에 걸쳐있고 팔괘를 통해 음양 오행설을 하늘과 땅과 인간의 삶을 파악한다. 여섯가지 효가 변동하는 것은 천, 지, 인 삼극이 작용하는 것이다 (계사전 2장). 우주간의 모든 존재가 대업이고, 끊임없는 혁신이 성덕이고, 끊임없이 낳고 또 낳는 것이 역이다. 역의 진리는 사려하는 일이 없고 작위하는 일이 없다. 역은 만물에게  참된 삶의 방식을 열어주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로 하며, 천하의 모든 도리를 망라한다 (계사전 10장. 11장).

 

역이 작위하는 하는 일이 없는 무위로 연결되는 것은,  역에는 태극(능산적 자연)이 있고, 역은 (소산적) 자연처럼 끊임없이 낳고 또 낳는다. 역유태극은 자연의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생의 질서를 출현 시킨다. 자연은 소산구조 (dissipative structure)로 이루어져있고, 음양의 열림과 상호영향을 통해 작위하는 하는 일이 없는 오토포이에시스 (자기 생산성)을 말한다. 

 

역과 <태극도설>

 

변화는 음과 양의 진퇴과정에서 상호보완 작용과 대립에 의해 야기된다. 역은 이런 점에서 노자보다는 인간의 삶과 자연의 생의 세계에서 역동적인 변증법적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오행설과 팔괘가 <주역>에서 혼합되는 양상을 보이며, 이것은 주렴계의 <태극도설>에 근접한다.

 

주렴계에 의하면, 무극은 태극이다. 태극은 운동하여 양을 낳고, 극에 달하면 고요함에 이르고 음을 낳는다. 음양의 양의가 수립이 되고, 이것이 변하여 오행 (수화목금토)을 낳고, 5기가 펼쳐지면서 사계절이 운행이 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은 생길 때 각각 하나의 성을 갖으며, 무극의 참됨과 음양오행의 정수가 오묘하게 합하여 응축이 되면 건도는 남성이 되고 곤도는 여성이 되어 두 기운이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변화 생성시킨다 (풍우란, <중국 철학사> 2, 442). 

 

<주역>의 계사전 11장에 의하면, 역에는 태극이 있고, 그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는 4상을 낳고, 4상은 8괘를 낳으며, 8괘가 길흉을 결정하고 길흉이 대업을 낳는다. 그러나 주렴계의 태극도는 8괘가 아니라 오행을 수용하며, 역에 근거하지 않는다.

 

주렴계는 <통서>에서 운동하지만 운동이 없고 고요하지만 고요가 없는 것을 정신으로 파악한다. 정신은 만물에 신묘하게 작용한다. 사물은 통하지 못하지만, 태극의 경우는 정신이 있다. 음 가운데 양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으면서 만물에 신묘하게 작용한다. 태극은 도이며, 하나이고 리이며, 음행오행은 기다. 주렴계에 의하면, 역에 태극 (역유태극)이 있다면, 이것은 정신을 말한다. 태극의 정신 (리)로 인해 음 가운데 양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있고 만물이 신묘하게 작용한다. 역은 리(능산적 자연)와 기(소산적 자연)의 변증법적 관계로 설정된다. 

 

도법자연과 인격성: 문제틀

 

주문에 나오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내안에 한울님을 모시는 것은 인간의 내면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생명력이 다른 자연의 존재들과의 네트워크를 말한다. 수운의 수심정기는 참된 (성) 마음 고이 지켜 공경하고 (공) 믿는 데서 (신) 그 기운을 바로한다. 이러한 수심정기는 천도 (하나님의 조화)와 연결되며, 사람이 인위적으로 애쓰지 않고도 그저 저절로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지켜 기운을 바로하여 그 성품을 쫒고 가르침을 받으면 된다 (조화). 이것이 자연한 가운데서 나오는 법이다. 

 

수운의 습합이론은 성리학의 자기수양을 노자의 무위이화로 연결짖는데 있지만, 동시에 개념적인 명료함이 없다. 노자의 도법자연과 무위이화에서 시천주와 수심정기가 가능한가?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조화의 지극한 기운이 인간의 마음과 동일시 되는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자의 상제지선은 수운의 상제와 화해되기 어렵다. 시천주의 개념이 상제귀신과 민간신앙과 습합될 때 기독교의 천주 체험과도 다르다. 마찬가지로 수운에게서 무위이화는 한편에선 지상선인이라는 도교적 차원으로 연결되지만, 다른 한편 성리학과 수심정기의 틀은 노자의 도법자연과 다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수운의 수심정기와 무위이화를 격물 치지와 수신에 따라 코나투스적으로 파악한다. 코나투스의 기는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증대되며, 대학의 세 가지 강령 (명명덕, 친민, 지어지선)을 상세히 설명하는 팔조목(격물, 치지,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은 시간적인 선후관계라기 보다는 서로 코나투스의 양과 음의 기운의 활동으로 서로 엮어져서 화기처럼 작동된다.

 

도법자연과 무위이화는 수운의 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나 자연에 담겨있는 인격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귀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도와 하나가 된 세상에서는 귀신도 신통력을 부리지 못한다. 사람을 지배하거나 해치지 못한다. 도의 경지에 있는 성인은 오로지 무위로 다스리기 때문에 사람을 해치거나 벌주지 않는다. 도는 스스로 그러할 뿐이며 이름을 붙이거나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천지의 시작이며 (무명, 천지시지),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유명, 만물지묘)가 된다 (<도덕경> 1장).


더우기 노자에게 천지는 어질지 않다. 이것은 자연도 마찬가지다. 대도는 만물을 감싸 양육하지만 주재자로 자처하지 않는다 (<도덕경> 34장). 도는 스스로 그러함 (자연: 스스로의 본성)을 본 받는다 (도법자연). 도는 언제나 작위하지 않지만 이루지 않는 일이 없다 (상도무위이무불위) (<도덕경> 37장). 도에서 음양의 기가 생기고, 음양의 2기를 상호작용을 통해 화기가 생긴다 (<도덕경> 42장). 천지 우주론에서 음양의 상호작용을 통한 화기가 나타난다. 

 

그러나 수운의 도법자연과 무위이와에서 자연이 어질지 않는 차원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수신정기는 수운에게 도법자연이나 무위이화보다는 만사지로 이어진다. 만사를 파악하는 지는 <대학>의 격물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신의 내적인 의미로서 격물, 치지와 성의와 정심이 있고, 수신의 외적인 사회적인 차원에서 제가, 치국, 평천하가 있다. 시천주의 주문은 성리학의 틀을 유지하며, 노자의 도법자연과 무위이화를 접합 시킨다. 그러나 노자에게서 일컬어지는 도는 영구불변의 도가 될 수 없다. 노자의 도는 비어있는 것이며 상제 이전에 존재한다 (상제지선) (<도덕경> 4).

 

수운은 <동경대전>의 논학문에서 그에게 나타난 상제는 나의 마음이 수운의 마음이며,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며 귀신이라는 것도 상제로 말한다. 그래서 수운은 한편에서 주문을 짓고, 한편으로 강령의 법을 짓고, 한편으로 글을 지었으며 이것은 절차와 도법이며 이십일자로 된다. 수운은 선비들이 찾아와 물었을 때, 서학 (양학)은 우리의 도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다.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는 아니다. 이것은 보국안민을 위한 계책이기도 하다.

 

서학비판과 종교습합

 

나는 수운이 서학의 종교체험을 습합시키면서  동학을 변종시키는 시도를 본다. 수운은 서학과 동학에서 천도의 다름을 무위이화로 말한다. 그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가 난다. 서학에는 한울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자기 몸을 위하여 빌며, 몸에는 기화지신이 없고 학에는 한울님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 형식은 있지만 자취가 없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이 없고 도는 허무한데 가깝다. 

 

수운의 당대 서학비판을 보면 몸에는 기화지신이 없고 (신무기화지신), 도가 허무에 가깝고 주문이 없다. 그러나 수운은 한울님을 위하는 주문은 지금 글에도 있고, 옛글에도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논학문에서 천도는 형상이 없는 것 같으나 자취가 있으며, 이것을 한울에 연결한다, 한울에는 구성이 있으며 (천유구성) 땅에는 팔방이 있고 팔괘에 응한다. 음과 양의 상호작용에서 백천만물이 나오지만 오직 사람이 가장 신령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운은 당대 성리학의 틀을 견지하고 주역의 팔괘를 수용하고, 한울을 오행의 벼리로, 땅은 오행의 바탕이며 사람은 오행의 기운으로 정의한다. <주역>의 천지인의 삼재의 수를 여기서 본다. 그러나 새로운 것이 았다면 접령하는 기운과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다. 수운은 수심정기하고 어찌하여 이런지 하고 물었다. 수운의 종교체험에는 인격적 차원이 있다. 내 마음이 곧 내 마음이며, 귀신이라는 것도 나다 (귀신자오야).

   

주자학에서 리는 우주적인 기의 작용이나귀신과 등치되지 않는다. 노자는 무위이화에서 귀신의 힘을 하락시켰다. 그러나 수운은 천주를 나의 마음과 귀신으로 등치한다. 이것을 그는 자신에게 천령이 강림하고 천도로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무위이화로 말하고, 한울님의 성품과 가르침을 받는 것은 자연한 가운데 화해난다.

 

한울님의 성품과 가르침은 시천주로 요약되며 이것이 무위이화이다. 수운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자는 내유신령이다. 안으로는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가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옮기지 않는다.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 천주는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기는 상제이며 천주이다. 조화는 무위이화이다. 정은 그 덕에 합하고 마음을 정한다. 만사지는 무극대도를 알아서 지혜를 받는 것이며, 덕을 밝게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성인에 이른다 (<동경대전>, 논학문)

 

한울님을 부모님처럼 모시고 섬긴다면 한울님은 인격적인 존재로 설정되는가?, 아니며 인격을 넘어선 불연의 세계에 설정되는가? 내가 보기에 한울님은 불연과 기연에 속한다. 한울님은 도법자연이지만 또한 최초의 원인 (causa sui)이 된다. 수운은 서학을 허무로 비판했다. 그것은 당대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한울님을 부모처럼 모시고 섬기지 않는 제사에 연관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수운은  <중용> 19장에 공명한다. 효는 조상의 뜻을 잘 이어받고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 죽은 자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한다. 없는 사람 섬기기를 살아있는 사람 섬기듯 하는 것이 효이다. 교사의 예 (제사)는 상제를 섬기는 수단이고, 지신까지 포함한다. 종묘의 예는 조상에게 지내는 수단이다.  

 

주자학에서 귀신은 천지우주의 작용으로서 인격적인 존재로 보기가 어렵다. 더우기 수운의 무위이화는 "명명기덕 염념불망즉 지화지기 지어지성"에 가깝다 (덕을 밝고 밝게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않으면 지극한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른다).

 

여기서 노자는 수운과 갈라선다. 비어있는 도는 자연처럼 있지만 이름 할 수 없는 것이다. 도에서 하나의 기가 생기고 이어 음양의 2기가 생기고 또한 셋 (음기, 양기, 화기)이 나오고 만물이 생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안에 생을 보존하는 열망의 힘인 코나투스가 작동한다. 천지만물은 유에서 생겨나며 유는 무에서 생긴다 (<도덕경> 40장).

 

자연의 생의 코나투스가 생태학적인 차원에서 파악된다면, 노자에게 천지는 어질지가 않다 (천지불인).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다룰 뿐이다 (<도덕경> 5장). 천지우주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고 움직일 수록 더 많은 것을 생성시킨다. 

 

수운의 습합이론에서 무위이화와 수심정기는 노자의 사유가 아니라 성리학과 민간신앙과 접합된다. 상제와 수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자리매김하면서 서학의 체험을 벤치마킹한다. 이러한 수운의 혼합주의에서 해석학적 지평이 인식과 존재론으로 펼쳐지기 보다는 개인의 종교체험과 영부와 주술으 실천으로 막을 내린다. 동학은 인내천을 강조해도 혼합주의 종교적 변종을 벗어나기 어렵다. 수운은 성리학의 전통에 잡혀있고 주문과 신접 그리고 부적을 통해 시천주를 민간신앙화했다. 여기에는 정감록 같은 풍수 도참사상이 습합된다. 인내천은 부적과 신접 그리고 주문을 통해서만 가능한가? 인간은 부적과 신접과 주문의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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