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이념형
마르크스는 1848년 2월 혁명을 보면서 쓴 공산당 선언(1848)에서 부르즈와지의 승리를 보면서 공산주의 유령이 유럽사회를 사로잡고 있다고 쓴다. 유럽이 낡은 권력들이 유령을 쫒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와 기조등을 그 핵심 인물로 명명했다. 그러나 혁명으로 인해 런던으로 쫒겨난 자는 2월 23일 프랑스의 기조 총리였다. 다음날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 또한 같은 도시로 망명했다. 샤를 10세가 1830년 불만의 배출구를 알제리 식민지 점령으로 돌리고, 의회 해산과 더불어 선거권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7월 라파이에트 장군이 바리케이드를 친 시위대에 나타나고, 공화파의 승리로 끝난다.
샤를10세는 오스트리아로 도피하고 이 시기의 7월 혁명을 드라크르와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라는 유명한 그림으로 표현했다. 메테르니히 역시 왕정복고 보수 반동체제를 1815년 빈체제를 설립했지만 그 역시 영국으로 쫒겨났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마르크스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당대 노동자를 혁명의 전위로 이끌던 공산당이 어디에 있었지?
물론 국제 공산당은 1847년 6월 1일 런던에서 창립 되었다. 이 당을 위해 <공산당 선언>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브뤼셀에서 썼다고해도, 이 당은 1848년 유럽의 혁명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852년 쾰른의 사법재판을 통해 해산되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당시 신라인 신문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1848년 민주주의 혁명을 분석했고, 엥겔스는 1849년 프러시아에 대항한 바덴의 전투에 참가했다.
마르크스는 당내의 갈등으로 그리고 빌핼름 바이틀링과의 견해차이로 결별수준에 있었다.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전용용어도 아니고 1840년대 자코뱅 클럽의 좌파들로부터 지지되었지만 그것은 1796년 프랑수아 바뵈프가 자코뱅의 이념을 실현하기 의해 주도한 사회주의 쿠데타에서 기인한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에서 1848 혁명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관련짖고 그의 특유의 몰역사적인 해체적 읽기를 시도한다. 위고는 1832년 공화파들이 일으킨 이틀 간 있었던 파리의 6월 반란을 말하지만, 이것은 루이 필립의 7월 군주제를 전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1848 년 유럽혁명의 시기에서 검토되지 않을 경우 마르크스와 공산당은 사라져간 유령으로 끝나고 만다. 1848년 혁명은 중산층을 중심으로 일어난 정치투쟁이었고, 오히려 파리에서 노동자 계급은 학살을 당했다.
당대 유럽전역을 휩쓴 이념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였지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물론 마르크스는 1848년부터 50년 사이에 일어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당대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영국에 있었다. 그의 글은 1850년에 가셔야 신라인 신문에 기재되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은 금융귀족에 대한 저항이며, 프로렐타리아트는 다수의 농민과 쁘띠 부르주아지 사이에 섞여 있었다. 부르주아지와 프로렐타리아트의 사이에서 국민대중이 전위로 나타나고 프로렐타이트는 이들의 이해를 관철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외부의 관찰자로 마르크스의 분석은 프랑스의 사실과는 동떨어지지는 않지만, 이 혁명을 <공산당 선언>을 통해 보는 시도는 오류를 드러낸다. 2월 혁명 분석에서 여전히 마르크스는 자신이 이념형으로 생각하는 혁명을 표현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드러나는 계급대립이 중요하다. 여기서만 근대적 생산수단이 혁명적 해방을 위한 수단과 토대를 창출한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산업 자본주의와 프로렐타리아르를 공산당과 연결지어 혁명의 이념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이념형은 사회학적 분석과 더불어 역사적 사건과 경험을 토대로 하지만, 여전히 보편적인 원리나 신조로 나타난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꿈꾸는 혁명은 이전단계의 모든 착취와 지배 시스템을 급진적으로 철회하는 단절이며, 새로운 토대위에 종교도, 가족도, 도덕도, 소유관계도 세우려고 한다.
이것을 위해 첫 번째 단계가 이념형에 속하는 무산자를 지배계급으로 고양시키고, 민주주의적인 전투에서 승리해야한다. 여기서 그는 차티스트의 계급투쟁을 조직된 프로렐타리아의 정당으로 중요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차티스트는 의회민주주의를 향한 진입이지 공산당과는 거리가 멀다.
마르크스와 민주주의 영혼
마르크스의 의회정치는1850년 “공산주의 연맹 중앙위원회 연설”에서 언급되는 그의 영구혁명론과 관련된다. 노동자 계급은 궁극적으로 권력을 획득할 때까지 부르즈와 민주주의 혁명세력을 지지하고 심지어 강화해줄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의회 민주주의는 여전히 중요하다. 의회 민주주의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사회주의당은 공장과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키는데, 여기서 국가는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로렐타리아트 국가를 말한다.
국가의 집중화를 통해 전체 생산력을 가급적 신속하게 증대시켜야한다. 이것을 위해 부르주아지 생산양식과 소유관계를 철폐하고 토지경작이 공공목적을 위해 행해져야한다. 제조업과 농업이 결합되고 도시와 지방의 격차가 보다 평등한 분배를 통해 해소되어야한다. 아동노동이 철폐되고 공교육이 무상으로 실행되어야한다. 연방은행은 국가 자본의 독점으로, 통신과 교통수단 역시 국유화가 되어야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계급의 격차와 적대 감정이 사라지고, 모든 생산은 연합된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정치권력도 사라진다.
여기서 노동자 계급독재도 철폐된다. 부르주아지 독재와 계급적대의 자리에 자유로운 개별 생산자들의 연합이 나타나며,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된다. 자아와 타자는 하나인 ‘우리’ 라는 공동체적인 인정과 연대감으로 묶여진다.
여전히 헤겔의 인정투쟁과 보편주의는 마르크스의 민주주의에 기초에 깔려있다. 루소의 자연적 존재와 시민사회는 마르크스에게서 국가소멸로 나타나고, 자본과 임노동이 지배하는 필연의 왕국에서 창조성과 평등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자유로운 왕국을 향한 해방의 연대가 중요해진다. 사회화된 ‘개인’의 삶은 여전히 중심에 서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영혼이다.
과학적 사회주의 논쟁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경험주의는 이러한 유토피아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부른다. 이것은 다른 유형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차별화되는 이념형으로서 사회주의를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마르크스가 1875년 오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가 지도하는 독일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 즉 아이제나파에 보낸 <고타 강령비판>에서도 나타난다. 1875년 아이제나파는 페르디난드 라살레(1825 -64)파와 연합하면서 사민당으로 통합되었다.
1863년 라살레는 독일 사회노동당을 창립하고 비스마르크와 접촉하고 리버벌 부르즈와지에 대항하여 보수당과 제휴 하려고했다. 1861-2년 마르크스는 베를린과 이후 런던에서 라살레를 만났지만 그의 과대망상적 정치견해를 혐오했다. 라살레의 철의 법칙은 임금은 노동의 공급과 수요에 의해 결정되며, 노동자들과 자녀들의 기본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임금은 폭넓은 스펙트럼에서 즉 경기의 호황과 불황, 세계 시장, 기술진보, 농업의 궁핍, 노동운동, 중산층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라살레에게서 임금상승은 직접 보통선거를 통해 노동자들이 국가에 압력으로 가능해지고 국가는 인간조직의 최고의 형식에 속한다. 국가는 자본주의 조건안에서 여전히 노동계급의 자유와 해방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라살레는 프러시아 애국주의 관점에서 리버럴 국가론을 비판했다. 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의 적수가 되기 때문에 사회주의당은 비스마르크와 제휴해야한다. 라살레는 인간의 진보와 신의 섭리를 대변하는 독일국가만이 인류의 역사에서 자유의 챔피언이며 희망이다. 피히테의 민족주의는 라살레의 정치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국가의 영광과 민족의 유기적 일체감, 독일의 정신적 리더십—이것은 비스마르크나 히틀러 파시즘에 가깝지 마르크스와는 전혀 결이 다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민당이 독일제국내에서 합법화될 경우, 적어도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난 공화 민주주의의 차원을 고려해야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이행에서 국가는 노동자 계급의 독재로 존재한다. 사회주의 초기단계에서 각자는 각자가 한 기여에 따라 분배가 주어진다.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으로 인해 시장의 교란과 주기적인 위기가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퇴락한 자본주의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프로렐타리아트 국가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가급적 신속하게 생산력의 총계를 증대해야한다. <프랑스 내전>에서 그는 파리 꼬뮌에서 수행된 국유생산을 공동기반으로 규제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독재가 사라지고 당과 국가가 소멸할 때 각자는 능력에 따라서 노동을 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가 된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의 최고의 단계를 말하며, 생산력이 정점에 달하고 부의 원천이 충만한 상태를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생산, 분배, 교환, 소비의 네트워크를 알고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생산의 사회화에 주어지지 분배의 평등과 정의에 별 다른 해명이 없다.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에 기초한 집단사회에서 생산자는 상품을 시장에서 교환하지 않는다.
시장 (교환)과 분배의 정의가 실종된다면 집단사회는 거대한 공장사회가 된다. 사회주의 이행의 초기단계에서 상품과 교환되거나 자본으로 전환되는 화폐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용가치로서의 화폐증서가 소비를 위해 발행된다. 이것은 시장에서 노동교환에 기초된 상품가격을 말한다. 노동이 상품가격을 결정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한계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분배와 교환의 문제를 거의 분석하지 않았다. 시장은 단순히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영역이 아니라 경제활동으로서 상업적 교류와 교환에서 문화적 차원을 갖는다.
물론 이러한 노동증서는 1820년대 영국에서 로버트 오웬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뉴 라낙(New Lanark)의 직물 대공장의 공동 소유자였고, 1800년도부터 노동자들의 빈곤을 퇴치하기위해 조합경제와 분배협업, 노조 그리고 아동교육에 헌신했다. 놀라울 정도로 오엔은 다른 공장주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는 산업과 화폐 시스템 그리고 임금과 교육을 단지 노동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사회를 위해 개혁하려고 했다. 그는 산업혁명의 병리현상을 비판하고 기술개선을 하면서 직물공장에서 어린아이들의 노동시간을 줄이는1819년 공장법을 통과시켰다.
마르크스는 라살레처럼 오엔의 사회주의를 공격하지 않았다. 물론 마르크스는 오엔의 유토피안 사회주의 한계가 계급의 타협과 일치에 기인하고 일종의 새로운 사회복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엔의 노동자 교육과 계몽은 높게 평가했다. 오엔은 기존의 국가와 계급의 일치에서 노조운동이나 정당을 통해 경제개혁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은 광범위한 생산자들의 체계적인 연합의 수중에 집중되어야하한다. 상품교환이 규제되고 국가의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상실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한 반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마르크스는 1839년과 1842년에 일어난 차티스트 운동에서 계급투쟁의 성격을 보았고, 프로렐타이트로 조직된 정당으로 간주하고 부르즈와지 국가에 대한 사회투쟁으로 파악했다. 자유로운 영역에서 해방의 삶을 위해 누리기 위해 사실적으로 노동자당을 구성하고 영구혁명의 길을 모색했다.
국가권력을 쟁취하기까지 노동자 당은 새로운 질서를 향해 공화주의 진보 민주당과 선거경쟁과 연대도 하지만, 결국 산업시설과 철도, 통신수단등 대자본은 국유화 정책으로 나가야한다. 자본가들에 대한 진보적인 세금정책이 실시된다. 민주당이 대지주의 이해를 대변한다면, 사회주의당은 대토지를 소농의 입장을 위해 자유로운 결사의 공동재산으로 전화시킨다. 공화제 안에서 권력과 자본을 국가의 수중에 맡기고 윤리화하는 길은 머나먼 길을 향한 진지전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비전은 공산당-국가관료독재에서 지도자와 인민들의 직접적인 교류와 신뢰를 통해 매개되기 어렵다. 인민들이 자본주의에 혜택을 국가경영을 통해 구가할 때, 인민의 사익추구와 극대화 그리고 자본을 향한 자유와 경쟁은 더 심하게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을 검토할 때 자유의 이념은 일직선상으로 진보하지않고 정체되거나 후퇴한다. 혁명이전 시대가 이미 저항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고, 이것이 혁명을 기획하고 실천하게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나폴레옹 3세 전제주의 시기 (1808–73)에 독재에 저항할 충분한 자유가 없었다. 1850년대는 1780년대 보다 더 억압적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억압은 경제정책이 실패로 나타날 때, 결국 인민저항이나 아니면 전쟁으로 진화한다. 사회주의 역사에서도 이런 부정의 변증법을 본다.
권력의 중앙집권과 인민의 신뢰에서 포풀리즘이 나오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정치적 억압은 민주주의적 ‘영혼’과 시민사회의 창조성을 밟아버린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멈출 때 인민은 모든 책임을 국가권력으로 넘긴다. 정치 군주제의 전철을 밟게된다.
변증법은 자유방임주의와 바나바 공화국을 넘어선다
마르크스의 민주주의는 산업혁명과 자유방임주의 그리고 영국의 인도식민 지배에 대한 분석과 저항에서 나타난다. 그의 맥락적 사고는 변증법적이며, 역동적이며, 사회화된 개인의 자유와 자발적 결사를 위한 해방과 연대로 특징된다. 이것은 헤겔적인 의미에서 구체-보편 변증법에서 나타나는 인정과 자유 그리고 창조성의 원리이기도 하다. 물질적인 삶을 둘러싼 주인과 노예의 인정 투쟁에서 노동과 생사를 건 실천이 나타난다. 이러한 인정원리는 자유, 비폭력, 그리고 창조성을 통한 개념의 원리로 발전하며 타자와 다름의 영역이 열린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에서 보편은 인정과 개념의 원리이며 구체적인 것은 영국의 산업자본주의와 1848년 유럽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정치이론과 경제분석은 서로 상호 보충적으로 접합되며 해외시장과 식민지 비판의 맥락안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식민지배의 민중들과 연대했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에서 기계발전을 통한 엄청난 생산력의 증대를 보았고, 극심한 경쟁에 기초된 ‘생산을 위한 생산’이라는 기묘한 논리에 주목했다. 자본의 자기팽창을 위해 세계시장이 개척되고 세계적인 규모에서 자본축적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드러나는 생산양식(생산력과 생산관계)이며, 해외시장과 코스모폴리탄 금융자본의 팽창으로 나타난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이다”—이것은 자본주의 정신이지만 민주주의 영혼과는 적대적이다. 자본주의 생산의 확장은 돈의 수익과 자본을 신용과 투기에 집중하게 한다. 자본의 과도축적을 위해 경쟁 국가들 간의 긴장과 갈등 그리고 전쟁은 이미 예견된다.
과도생산과 과도 자본축적의 변증법을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에서 오염과 자연의 파괴에서 보았고,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의 해방 역할을 기대했다. 무역과 생산이 증대될 때 기업 간의 경쟁은 심화된다. 이러한 경쟁은 임금을 상승시키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서 기계설비와 개발에 투자한다. 결국 수익율은 평균적으로 하락되며, 경제위기가 올 때 노동자 계급의 궁핍화가 일어나며 혁명의 시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노동자의 귀족화를 보았고 해외시장과 식민지에서 유입되는 잉여자본이 노동자계급을 중산층화면서 시민사회로 통합 시키는 현상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의회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간파했고 차티스트운동과 연대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규모에서 체계적으로 발전된 영국의 자본축적과 금융자본의 사이클은 마르크스의 이념형과 혁명의 예측을 빗나가게 했다.
그러나 21세기 신자유주의 세계질서는 그의 비판을 여전히 비켜가지 못한다. 실패한 마르크스의 혁명의 예측과 그의 프로렐타리아의 이념형은 후기 지본주의에서도 시민과 하위계급의 연대로 나타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은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에서 인정과 자유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국가와 사회에서 드러나는 불의와 착취에 대해 마르크스는 여전히 도덕적 정언명령 (임마누엘 칸트)을 지킨다. 인간을 목적으로 존중하지 더 이상 수단으로 다루지 말라는 도덕의 문법이 들어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파시즘적인 정치와 자유방임적 태도에 반한다. 21세기 인정투쟁은 시민사회의 연대와 해방 그리고 민주주의 가치를 인종과 문화적 영역에서 확장시키며 나타난다.
최근 트럼프는 의회난동사건으로 인해 연방경찰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 부당한 조사이며 미국은 이제 바나바 공화국이 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은 일차적으로 트럼프의 백인 인종정책에 주어져야한다. 그의 아메리카 퍼스트의 인종정책과 미중 무역전쟁에는 신중상주의와 나토의 군사력 지불분담에 있었다. 민족공동체는 인종 공동체로 뒤바뀌고 공화당은 대통령의 권한에 예속된다. 비백인의 시민권리와 인권은 억압되고 쇼맨쉽의 선동정치에 백인보수 기독교인들은 ‘고레스’로 환호한다. 국가는 인종차별을 지지하고 파시즘 바나바 공화국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21세기에 드러나는 정치지배 현실일 수가 있다.
포스트콜로니얼 조건에서 드러나는 다문화 사회에서 여전히 지배와 예속의 변증법은 훨씬 더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나며 우리의 현재사에 속한다. 세계경제의 중심부-세미 주변부-주변부의 네트워크에서 침투, 분활, 착취 그리고 군사적 동맹과 이민의 물결로 인해 시민사회는 물화되고 권력의 메커니즘 (정치권력, 자본지배, 관료제, 매스미디어, 이데올로기 호출)에 의해 전 영역이 침탈당한다.
산업혁명과 자유방임적 태도를 세계사적인 자본축적에서 이어가는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사회화된 마음의 습관과 민주주의의 영혼을 지키는 것은 더 없이 중요하다. 탑 다운 방식으로 행해지는 정치 지배구조와는 달리 민주주의화된 문화와 도덕의 영역과 공론장의 토론과 합의는 생활세계를 지켜나가는 인정정치일 수가 있다. 이것은 해방과 연대를 지향하는 시민 사회의 문법에 속한다. 여전히 마르크스는 시대적 한계와 역사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콜로니어 사회에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