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보학적 문제틀: 마르크스와 파리 코뮌
소련 해체 이후 사회학자들은 마르크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르크스를 러시아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유럽으로 되돌려 보내는 작업이다. 마르크스가 서 있던 프로메테우스 전통은 유럽의 휴머니즘 전통에 재설정되고,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정치철학적 지평을 새롭게 평가한다.
일차적으로, 1871년 마르크스의 파리꼬뮌(3월 18ㅡ5월 28)에 대한 해석은 최근 파리 꼬뮌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통해 다루어진다. 마르크스는 당시 런던에 있었고, 독어와 영어와 불어로 된 신문과 잡지 그리고 파리 꼬뮌에 관여했던 인물들을 통해 <프랑스의 시민전쟁, 1871>을 집필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을 인터네셔널 중앙위원회에 보고했다.
이글은 1871-72년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고 파리 코뮌 5주년 때 독일어 팜플렛으로 재출간되었다. 1891년 20주년 파리 코뮌 기념일에 엥겔스는 그의 유명한 서문을 쓰고 독일 사민당의 방향을 지지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2판의 서문에 코뮌에 대한 분석을 기초로 다음의 짤막한 문장을 첨부했다.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단지 장악할 수 없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이 문장은 이후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레닌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을 일으켰다.
레닌에 의하면, 파리의 혁명가들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파괴하지 못했다. 국가파괴를 통한 인민독재에 이르는 길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 민주의자들에 의하면 폭력혁명의 길이 아니라 의회 민주주의 길을 통해 기존의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혁명을 위해 이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러한 해석의 편차로 인해 파리 코뮌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 지 실종된다. 마르크스의 분석은 불충분하고 많은 한계를 갖는다. 최근의 연구에서 파리 꼬뮌은 프랑스 혁명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난 사회 공화제의 참여 민주주의를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수에 볼과했고 푸르동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었고, 권력집중의 국가형태가 아니라 연방제의 민주주의를 기초로 대표를 파리의 국민의회에 파견했다. 중앙정부에 약간의 중요한 기능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업무들은 각 지역의 코뮌--조그만 마을의 정치조직--의 책임적인 행정요원들에게 넘겨졌다.
물론 마르크스는 이러한 중앙정부의 관료제를 넘어선 지역코뮌의 탈중심화된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혁명이후 마르크크스는 사회주의로 이행해나가기 위해 잠정적으로 국가수중에 권력의 집중화를 지지하기도 했다 (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1: 145).
마르크스의 입장은 사회적 콘텍스트에 의존되며 교조적이 아니다. 파리 코뮌 당시 마르크스의 불충분한 지식과 사건에 대한 자료와 정보의 한계를 굳이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에서 해명되지 않은 국가론은 헤겔과 루소사이에 있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헤겔의 <법철학>에서 전개되는 국가론에 수긍을 하고 또한 루소의 공민개념을 옹호한다. 이것은 계보학적 해명을 필요로 한다.
마르크스: 헤겔과 루소 사이
마르크스에게서 의회 민주주의 제도는 프로렐타리아트 지배와 양립하며 심지어 조건이 된다. 파리 코뮌에 기초한 그의 독재개념은 민주주의에 대립하는 특수한 당의 전제 통치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민주주의 원리와 다당제, 자유선거, 자유로운 의견교환에 입각한다. 볼세비키의 당 관료 지배가 아니라 참여 민주주의적인 사회적 내용들이 나타난다. 이것은 사회 공화주의에서 나타나는 루소적인 시민국가와 참여 민주주의에 공명한다. 루소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혁명을 말하지만 전제권력이나 독재는 타락으로 경멸했다. 루소의 <불평등 기원>에서 소유권과 경쟁을 기초로 분석되는 노동과 부 그리고 인간의 소외는 마르크스에게 공명한다.
마르크스: <유대인 문제>와 루소
<유대인 문제, 1844>에서 마르크스는 헤겔과 루소의 관점에서 브루노 바우어의 입장을 비판했다. 바우어에 의하면, 프러시아 기독교 군주제에서 유대인 해방은 일차적으로 유대교로부터 자유로워야되고 시민권리가 주어질 때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러시아 군주제에서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가 사법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국가가 종교를 넘어서서 보편성을 갖는다면 마르크스는 여기에 동의한다. 국가종교가 사라지는 곳에서 유대인들과 더불어 시민의 해방이 가능해진다. 종교로부터 해방된 정치사회 즉 국가의 보편성에서 유적인 공동존재가 출현한다. 그러나 시민사회(부르주아 사회)에서 사적개인은 이기적인 경제적인 삶을 추구하며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해는 헤겔의 시민사회론을 답습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헤겔의 시민사회론에서 간과한 것은 노동의 합리적 조직을 통해 노동자의 소외가 아니라 노동자들간의 연대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특히 뒤르캠에 의하면 사적개인이 이기적인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그것이 공공선으로 지향되고 계몽된 교육의 차원을 갖는다면 노동분업은 소외나 병리현상이 아니라 연대와 시민의 도덕성 그리고 법의 합리화를 강화한다.
어째튼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랑스에서 혁명시민(시트와이엥)은 정치적 삶의 참가자이며, 부르주아지와 동일시 할 수 없다. 이들은 공민(Staatsbűrger)이며 살아있는 사적개인이나 상인과 다르며, 일용 노동자도 아니며, 토지 소유자가 아니다. 종교적인 인간(기독교)이 정치적 인간(국가)과 대립하듯이, 부르주아지는 공민과 대립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민사회는 공익과 사익의 대립이 사라지는 유적존재를 지적하며, 루소의 일반의지에 입각한 시민국가에 근접한다.
비록 마르크스가 헤겔의 국가와 시민사회(만인대 만인의 투쟁)의 구분을 수용하고 국가의 보편성을 우위에 놓지만, 이러한 국가의 보편성은 유적인간에 기초된다. 마르크스는 루소의 공민국가에서 유대인 문제와 더불어 인간의 해방의 차원을 본다. 인권은 정치 공동체 즉 국가에 대한 참여이며, 정치적 자유는 공민의 권리를 전제한다. 보편적 인권이 공민의 권리와 다른 것은 전자가 오로지 시민사회의 부르주아 개인에 기초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영락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공동체 (시민국가)와 루소의 공민에 기초한 시민국가의 전통에 서 있다.
1793년 <프랑스의 인권과 시민권선언>에서 자유를 구성하는 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 하지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에게 해로움을 주지않는 것은 공익과 경제의 분배정의를 전제한다. 여기에 입각해 시민 또는 공민은 자유를 행사하고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분배적 정의를 충분히 읽지 못했다.
이러한 분배의 정의는 루소의 <불평등 기원에 대한 담론>에 근접한다.
마르크스는 공민의 권리를 안전과 법적 평등 그리고 사유 재산권을 기초로한 부르주아적 경제이익으로 비판했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오해이다.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주의를 국민주권에 기초하고, 상업과 산업의 증대에서 출현하는 중산층 부르주아지를 새로운 민족주의 담지자로 보았지만, 인권과 시민권리를 종교와 무관하고 또한 모든 가난한 자들에게 적용하려고 했다.
어째튼 마르크스에게서 종교를 넘어서는 헤겔의 국가의 보편성과 루소의 공민국가는 만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의 결론에서 루소가 부르주아 시민사회 안에서 드러나는 정치적인 인간의 추상적 이념을 올바르게 보았다고 말한다. 실제의 인간은 이기주의적 개인의 모습에서 인정되지만, 진정한 인간은 오직 추상적인 공민의 모습에서 인정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유적인간(Gattungswesen)을 의미한다.
루소에 의하면, 모든 개인은 국민의 공적제도를 설립할 때 보다 큰 전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본성을 변형시켜야한다. 개인인간이 공동체의 삶에서 유적존재가 될 때, 자신의 힘을 사회적 힘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이 이기주의적 개인인간의 정치력과 분리하지 않을 때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해방은 성취된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마르크스의 유적인간과 공민을 매개하는데서 자리를 잡는다.
엥겔스는 <안티 뒤링>에서 뒤링이 루소의 불평등의 과정에 대한 분석을 오해했고, 루소의 이념을 속류화 했다고 비판했다. 루소의 비전에서 불평등은 점점 더 평등으로 변한다. 이것은 이전 원시인들의 순진한 평등에서가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사회계약의 평등에서 변화된다 (“Anti- Duhring,” 25: 133). 엥겔스에 따르면 루소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공명하며, <불평등 기원>은 프랑스 계몽주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Engels, 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 24: 289).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 보충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의 결론에서 루소에게 동감을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저작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애 의하면 부르주아 시민사회 안에는 정치주체인 시민이나 공민에 대한 추상적 이념만 나타난다. 실제의 인간은 이기주의적 개인의 모습에서 인정되지만, 진정한 인간은 오직 추상적인 공민의 모습에서 인정된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루소 사이에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의 루소비판에 주목하지 못했고, 루소의 <불평등 기원>과 <사회계약>의 내적 연관성이 루소의 <정치 경제학 비판>에 이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시민과 민주주의 문제를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추상적으로 비판한다.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 개념과 자본가 개념을 혼동한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지들은 전문 교육을 받은 법률가들이었고 귀족이나 금융자본가나 고리대금을 하던 상인들과는 다르다.
또한 프로렐타리이트 독재란 말을 개념적 명료함이 없이 사용한 원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표현이 탈중심화된 참여 민주주의와 연합된 개인의 공공선 거버넌스를 의미한다고 해도 레닌-스탈린의 교조주의에서 독재를 위한 계급투쟁과 지도자 개인숭배를 옹호하는 전체주의로 변질되었다.
루소는 소유권에 대한 비판을 단지 도덕적 차원에서만 행하지 않았다. 루소는 공공선 거버넌스를 위해 경제적 약자들을 지배계급의 착취로부터 보호한다. 모두가 복종해야하는 정의와 평화를 사회질서로 확립해야하고, 여기에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지 예외가 없다. 그것은 모든 시민들이 하나의 지고한 주권으로 통합되며, 지혜로운 법의 지배를 말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족쇄를 물리고 부자들에게 특권을 제공히는 사회와 법은 자연의 권리인 자유를 파괴하고, 소유권과 불평등을 영구화한다. 소수의 지배자들을 위해 이러한 사회는 모든 인류를 노동과 노예상태와 비참함으로 몰아간다 (ibid., 160).
이것은 악한 계약에 속하며 저항과 혁명을 부른다. 선한 계약은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소유권에 대한 합리적인 법적 질서를 통해 경제적 분배정의를 고려하며 사회의 안전망을 만든다. 루소는 18세기 사회에서 노동시장의 문제와 노동자 파업의 문제에 직시했고, 노동의 상품화와 일용 노동자의 문제는 훨씬 이전 중세의 농촌사회로 올라간다 (Braudel, ibid. 54).
루소가 말하는 자유는 아무도 양도할 수 없는 자연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며 누구에게도 팔거나 또는 전제 권력에 예속될 수 없다. 마르크스 역시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을 향한 엑소도스를 말하지만, <자본 3권>에서 그는 자유의 왕국을 지상에 온전히 설립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실토한다.
인간이 자유의 왕국을 향해 전진한다면, 일당독재가 아니라 자유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정부는 전제권력으로 시작해선 안된다. 독재는 타락이며 블평등을 만들어내며 극단의 경계에 서 있다 (Rousseau, ibid., 168). 정부를 위한 진정한 사회계약은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 합리적 헌법에 있으며, 참여 민주주의와 주변부로 밀려나간 하위계층에 대한 인정과 연대에 있다.
마르크스가 끔꾸던 직접 민주주의는 천사들에게나 속할 것이다. 불평등의 일차적 원인은 소유권에 있으며,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관계를 전제적인 법으로 구속시킨다. 이차적 것은 대표 지배방식의 부당성에 있으며, 여기서 강자와 약자가 설정된다. 세 번째는 적법한 권력이 독재로 변질 되는데,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출현한다. 결국 혁명이 발생하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된다 (Rousseau, ibid.,17 2). 이러한 부패와 타락에서 "우리는 거짓되고 공허한 외관을 가지며, 덕목이 없는 명성과, 지혜가 없는 이성과 행복이 없는 만족만을 가질 뿐이다." (ibid., 180)
해겔의 인륜국가가 참여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정신 현상학>의 인정원리와 <대논리학>의 개념원리 (타인에게 해로움을 주지않기, 창조적 능력과 자유)를 구현한다면, 루소의 시민국가론에 공명할 수가 있다. 루소는 변증법적 사고가 아니라 자유와 공공선 거버넌스를 통해 불평등의 원인들을 제거하려는 정치 철학자이다. 루소는 여전히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이들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보충해줄 수가 있다. 이러한 헤겔과 루소를 기초로 한 마르크스 입장에 대한 해석은 마르크스를 집으로 되돌려보내는 중요한 시도에 속한다.
시민 사회국가
아런 점에서 알렉시스 토크빌의 정치철학의 갖는 자리가 있다. 토크빌은 루소의 <사회계약>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개인은 공공선을 위해 일반의지에 존중해야한다. 시민사회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관료행정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방어해야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출현하는 다수의 독재에 토크빌은 민감했고, 그는 몽테스퀴외의 <법의 정신>에서 삼권의 분립과 견제를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즉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권력의 분산애서 해결책을 찾았다. 평등민주주의에서 출현하는 독재와 중앙집권화와 관료행정을 방어하는 것은 타운십을 기초로하는 행정자치를 의미한다.
타운십 시스템은 중앙정부의 권력을 견제하는 곳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실제로 자치 정부를 실천하면서 배운 것이다. 그들은 직접 커뮤니티의 다양한 업무를 관리하나 — 교육, 도로 및 기타 공공 사업, 병자와 저소득층에 대한 돌봄, 경찰, 소방서 등 — 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선출하고 감독했다. 지역 차원의 민주주의는 주나 국가 차원의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지방 자치 단체는 자유 국가의 힘을 구성한다. 타운 미팅은 자유에 있어 자연 과학에서의 초등학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은 자유를 국민의 손이 닿는 곳으로 가져오고, 사람들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즐기는지를 가르친다. 한 나라는 자유 정부를 설립할 수 있지만, 지방 자치 단체 없이는 자유의 정신을 가질 수 없다 (Ralph Raico, Alexis de Tocqueville, 33).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시민국가의 지배방식은 마르크스처럼 경제적 조건으로 환원될 수 없다. 시민사회국가나 자유의 문제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것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산업혁명에 일치시키는 것은 오류일 수가 있다. 사회안에서 인간의 경제적 활동은 국가의 권력에 기초한 제국주의적 경제방식 (국가 자본주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세계체제를 의미하며, 국가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는 그 진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물론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의 사이클과 더블어 역사적인 단계에서 출현하며, 본격적으로 16세기 중상주의 정책에서 남미 식민주의와 아르리카 노예제애 맞물려있다. 국내적으로 자본주의 영향은 사회구성과 더불어 관계들의 총체에서 경제와 정치 사회와 문화와 문명이 각자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전쟁을 동반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세계체제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되며 국가의 역할이 강조된다.
오늘날 트럼프 2기와 시진평의 관세전쟁에서 오히려 미국의 자본주의는 신중상주의 정책을 선호하고 1930년대 파시즘으로 회귀힌다. 중국의 국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공산당 독재 지배방식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미국의 새로운 질서 재편에 반응을 할지는 두고볼 일이다. 문제는 자본축적의 사이클과 위기에서 미국의 신중상주의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의 충돌에 있다. 정치의 지배방식과 경제 시스템은 하나의 영역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분화가 되고 전문화가 된다. 정치언어와 경제언어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사화의 위기와 혁명은 정치와 경제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비자본적인 영역을 방어하고 시민과 하위계급을 민주주의 정치주체로 간주하고 사회화된 도덕과 공공선 거버넌스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문화사회에서 인정정치(찰스 테일러)와 연대를 향한 자유와 해방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