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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대성은 복합 시스템이다

by 파레시아 2025. 2. 4.

 

근대성 논쟁을 시작하면서

 

흔히 말하듯이, 근대성이 자본주의와 등치 되는가? 자유와 인권 그리고 의회 민주주의, 경제적 정의 등과 같은 근대적 사유는 모두가 다 자본주의적인 불의와 불평등으로 거절 되어야 하는가?

 

계보학적으로 볼 때,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1000년부터 800년 사이 해외 교류와 더불어 이오니아 해안가와 이탈리아로 식민 이주를 하면서 르네상스가 일어났다고 역사학자들이 말을 한다. 아테네에서 솔론의 개혁을 통해 경제 정의와 법적개혁 그리고 참여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시작하고, 페리클레스 시기에 들어 오면서 직접 민주주의와 철학과 예술이 자리잡게 된다. 그리스와는 달리 로마의 공화제 시기에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로마가 제국으로 이행하기 전에도 로마 공화제는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의 참여와 사법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루어진 정치 민주주의나 사법제도는 근대적 사유로 말해야 하나? 이 시기에 발전한 경제적 부와 축적은 자본주의인가? 서구에서 자본주의는 일반적으로는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좀 더 거슬러 올러가면 13세기 상업혁명에서 설정된다. 상업자본이나 중상자본 시기에 고대 그리스처럼 직접 민주주의나 경제적 정의가 있었나? 

 

자본주의와 근대성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경제가 민주주의와 문화와 예술의 토대가 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경제 시스템이지만, 국가 자본주의는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해외교역을 통해 부와 자본을 축적해나가는 정치 경제적 양식이며, 어느 곳에서도 존재했다. 국가가 자본축적의 원동력이 되고 해외교역에서 독점의 형식이나 공물부역이나 조공의 형식을 취하면서 나타난다. 

 

중국 공산당의 경우, 국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갖는다고 해서 근대성이나 시민사회가 존재한다고 말을 할 수 있는가? 국가 자본주의를 근대성으로 등치할 수도 없으며, 정치 시스템은 공산당 독재로 구축된다. 스탈린 시대에 거대한 자본축적은 가혹한 전체주의를 통해 성취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태도나 시민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의 근대성을 논의할 때 자본주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식민주의와 자연과학과 기술진보를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과학과 기술진보 그리고 군사력이 없이 자본주의를 언급할 수 없다. 처음부터 자본주의는 세계체제로 시작되었고 국가의 역할이 중심적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태도나 사유는 오히려 자본주의나 식민주의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면서 시민사회나 정치 민주주의의 토대로 등장했다. 근대성=자본주의 담론은 망상에 불과하다. 서구 근대성은 복잡성의 시스템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서구 근대화의 복잡성

 

     서구의 근대화에서 헌법이 등장한 것은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중산층이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광범위하게 시민사회에 자리잡았다.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었다. 정치적인 요인으로서 십자군 전쟁(1095-1272)으로 인해 지중해 동쪽지역인 아랍문명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슬람 스페인과 빈번한 접촉과 무역이 늘어났다. 

 

     장원제에서 성행한 교환체제와는 달리 교역과 해외무역이 성행하고 화폐수단이 발전했다. 상업혁명은 르네상스와 지리적 탐험과 정복의 시대와 더불어 정점에 달했다. 중상주의는 국가권력을 금과 은의 양의 소유로 평가했는데, 수출증대와 수입제한을 원칙으로 식민지로부터 원료재를 얻어내 가공했다. 임금을 낮추고 상품을 수출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경제 시스템이었다. 모직물 시장, 향료 획득 등 독점을 위해 동인도 회사와 같은 식민지 주식회사들이 설립되고, 토지를 구입하고 주민들을 지배했다. 원활한 독점무역을 위해 은행업이 강화되었다.

 

       중세 말엽과 초기 르네상스에서 사업의 부채와 신용을 기록하는 장부가 발전했고, 피렌 체 수도사 루카 파시올리 (Luca Pacioli, c. 1446-1517)가 1494년 이중 복식장부를 펴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피렌체와 베니스 그리고  다른 유럽의 상업도시들에서 교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우기 한자동맹(The Hansa League)은 13세기에 브레멘, 함부르크 그리고 뤼벡 등70여개의 중세도시들을 연합하면서 해적의 노략질을 막고 해외무역을 발전시켰다. 무역과 교역에서 상인들과 은행가들이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했다. 푸거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왕들과 교황 그리고 추기경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스페인 제국의 해외무역에서 수익과 정치권력을 얻어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네상스와 예술을 후원하면서 도시정치에 관여했다.

 

     심지어 메디치 가문의 두 사람은 교황이 되기도 했다 (레오 10세와 클레멘트 7세). 은행업은 국가와 상인들에게 자본을 대여해주면서 금과 은을 대신할 화폐를 발전시켰다. 암스테르담 은행 (1609) 과 영국은행 (1694)이 대표적이다.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1600) 아시아와 교역을 증진시켰다. 버지니아 회사(1606)를 통해 미식민지 버지니아와 교역을 증대하고, 화란의 동인도 회사(1602)와 프랑스의 동인도회사 (1664)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의 진입은 단순히 상업과 산업 그리고 해외교역이 아니라, 이러한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해준 정치와 문화의 근대적 발전에 있었다. 종교개혁,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민족국가, 산업혁명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이념은 서로 그물망처럼 엮어있었다.     

 

     종교개혁을 통한 신성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된 연방국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인권과 민주주의가 근대화의 길을 선도했다.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마틴 루터의 혹독한 비판은 마르크스가 <자본 1>에서 인용하고 옹호할 정도로 대단했다. 

 

       시장경제는 중상주의를 넘어 상업자본을 거처 근대의 자본주의를 확립했다. 생산수단은 사적소유가되고 자본은 상품생산과 분배에 투자가 되고 시장에서 자유경쟁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 시장경제는 국가개입이나 독점 보다는 자유 방임적으로  행해졌고, 이것은 공장제에 기초된 산업 자본주의에 조응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자유방임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영국이 거대한 식민지로부터 빨아들이는 자본축적에 있었다.

 

     상업 자본주의와 세계 체제론

 

     저명한 경제 사회학자 자넷 아부 루그호드 (Janet Abu-Lughod)는 유럽의 헤게모니 이전에 1250년부터 1350년 사이에 비유럽권의 세계 체제론을 분석했다. 이집트의 카이로는 이 시기에 중세 유럽의 도시국가들에 뒤지지 않는 시장경제와 도시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심지어 12세기에 세계는 시장과 상업적 교역과 무역에서 교환 시스템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계교환 사이클은 13세기 말엽부터  14세기 초 정점에 달했다. 유럽과 중국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상업혁명은 비서구 권에서도 나타났다. 송시대에 해상무역이 꽃을 피웠다.

 

      세계 체제론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역사적인 시기를 거치면서 상업자본—중상자본—산업자본—금융자본 등의 유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상업 자본안에 금융의 확장과 무역팽창이 나타나고, 산업경제도 나타난다. 국가와 자본이 융합 되면서 정치적 자본주의가 해외 식민지와 관련하여 등장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정신으로 표현되는 세계내적 금욕의 태도나 경제 합리성(막스 베버)은 칼빈주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유교와 이슬람, 힌두교에서도 나타난다.

 

     1250년부터 1350년 사이에 세계경제는 유럽과 중국, 이집트, 그리고 인도에 교환과 무역 시스템 안에 있었다. 13세기에 상업 자본주의는 제조업 분야에서 산업 시스템을 이미 세계 시장규모에서 시작했고, 자유노동과 지불과 교환수단은 근대의 산업생산에 앞서 나타난다.

 

     상업혁명에서 일어나는 세계무역은 16세기 산업혁명의 대량생산보다 훨씬 더 수익을 올렸다. 1293년 제노아의 해상무역은 당대 프랑스의 전체예산의 세배 정도였다. 유럽의 13세기는 자본주의 제도와 자유 임금노동 그리고 산업생산을 가지고 있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파악된다.

 

     중국의 경우 송 (960-1279) 특히 남송시대 (1127-1279)에 상업자본과 상품경제가 발전했다. 1041년에서 48년 사이에 활판인쇄의 발명이 있었다. 공장제 수공업과 임노동은 남송의 경제활동에서 볼 수 있었다. 12세기 발전한 중국의 금속공학은 유럽에선 16세기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아랍권에서 면과 명주의 대량생산이나 인도와 중국에서 면과 비단은 유럽의 직물 산업에 뒤지지 않았다. 13세기 중국의 유교사회에서 상업과 해상무역, 금융발전 그리고 자본축적은 독자적인 경로를 거쳐 산업경제에 이를 수가 있었다.

 

     일본의 근대화와 사무라이

 

     이러한 세계경제 시스템에서 볼 때, 유교가 서구 자본주의 발전에 적합하지 못하거나 사회 경제적 개선에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유교와 상업의 발전은 무엇보다 더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시기에 볼 수 있었다. 막부의 중앙집권제는 각 번 주들의 일년간 체류정책을 통해 에도는 대 도시로 발전했다.

 

     기술장인과 숙련공은 전쟁무기나 고가품목 또는 생필품을 만드는 데 필요했다. 이들에게 특별한 세금면제가 주어지고, 품목들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국내시장의 공급망이 오사카에 집중되고, 교토와 에도로 상품이 유통되었다. 현금이나 신용 지불수단이 발전했다.

 

     오사카와 교토의 상인들이나 고리대금 업자들은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고객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오사카 상인과 장인 (조닌)은 당대 일본의 부의 70% 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고급 사무라이들과 어울리고 가부키와 같은 문화생활을 즐겼다.

 

     1705년 요도야 타츠고로는 오사카의 가장 부유한 상인이었고 막대한 금액을 다이묘에게 빌려주었다. 그는 쌀 상인으로서 2대에 걸쳐 치부를 했고, 그의 사치스러운 삶과 금권은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그의 재산과 농지가 모두 몰수되어 오사카에서 추방 당했다. 1691년 막부는 미쓰이 가문을 에도와 교토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공식적인 상단으로 결정하고 은행업과 국내교역을 할성화하기도 했다. 상인계층이 부상하고 사무라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이 시기에 중요한 인물은 이시다 바이간 (1685–1744)인데, 상인으로서 불교와 신토 그리고 유교를 공부했다. 신도와 일왕은 태양여신의 후손으로 숭배되었다. 1729년 그는 집에서 무료강좌를 열고 석문심학(신가쿠)을 설파했다. 교토는 장인들의 가내 수공업과 질 높은 상품으로 유명했고 국내시장에서 유통되었다. 석문심학에서 신과의 합일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마음과 합일)이 주장되고, 맹자는 윤리적 신비주의를 위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사무라이, 농민, 장인 그리고 상인들이 다른 계층과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도, 이들 모두는 제국에 봉사하며, 일본 정신의 뿌리인 무사도로 특징된다. 상도덕과 무사도가 다르지 않다. 경제활동은 유교의 인에 관련되고 자선 활동이 부각되며 막부의 지원을 얻어냈다.  

 

     검약과 부의 축적을 천명으로 삼는 상도덕은 이후 메이지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제영역에서 상인은 사무라이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산업화는 서구의 부르주와 혁명이 아니라 국가주도와 정치지배를 통해 일어났으며, 주역은 상인이 아니라 사무라이였다. 결국 이것은 동 아시아의 불행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생활세계: 대안 근대성

 

     윤치호는 일본이 한 것은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조선인을 위해 발전시킨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일본이 놓은 철도와 기간 산업이 무너지면 조선인보다 일본인이 더 큰 피해를 입는다. 박노자 교수는 윤치호(1865-1945)가 1883-1884년에 작성한 문서를 보면 오늘날 웬만한 대학생의 영어 작문보다 고급스럽다고 한다. 윤치호의 일기에 씌여진 일부 고급 영어 어휘는 현재 웬만한 미국 지식인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수준이 높다. 윤치호는 미국 유학시절 인종차별로 몸서리를 쳤다. 그것은 인류의 평등의 원칙인 성서를 가르치는 미선교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영어를 아는 사람이고 박노자의 평가에 긍정한다. 나는 윤치호의 영어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 근대성의 자리를 반성하는 데 관심이 크다. 윤치호의 친구이자 선배인 유길준 (1856-1914)은 <서유견문>으로 유명하다. 그는 최초 미국과 일본 유학생이 었지만, 미국을 우방이 아니라 조선과 통상의 상대로 여겼다. 유길준은 서구 의회 민주주의와 합리주의 사상을 수용할 것을 강조했고, 김홍집 내각에 참여해 갑오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윤치호처럼 영어가 아니라 국한문 혼용체를 주장했다. 유길준의 사후 도산 안창호는 그를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했다.

 

    윤치호와 유길준을 통해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들 개인의 한계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시기에 계몽과 근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유길준의 동도서기론 (서양의 최신과학 기술과 문명은 수용하되 고유의 것을 부정하지 말자)이나 입헌 군주제에서 점진적 개혁론 그리고 의병을 사칭하고 민간을 약탈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 등은 구한말의 계몽과 근대성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유길준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의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는 당대 식민지 이론의 첨병인 사회 진화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고, 일본국가를 모델로 삼았다. 

 

     윤치호와 유길준의 예는 근대성 논의에서 구한말의 계몽사상과 근대 정치이론을 친일이나 친미지향으로 매도할 이유가 없다. 계몽사상과 근대성은 우리 시대의 현재사에서 대안 근대성의 의미를 쓰려는 사람에겐 매우 중요한 지적 그리고 실천적 자산에 속한다.  

 

     식민지 근대화 이론이 있다. 이것은 일제 식민지 기간에 근대적 사유제도와 행정과 사법의 분리가 잘 갖추어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본다. 이러한 근대의 제도들은 식민지에 기원에 둔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에 문명을 이식하고 자비로운 해게몬으로 말한다. 일제는 조선에 근대적인 법과 제도 그리고 시장경제와 같은 유산과 교육과 유학생을 통해 인적자본을 남겨 놓았다.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구한말의 계몽과 근대화를 향한 치열한 노력에 대한 평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가하면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부터 이미 근대화적 요소가 시작했다고 보고, 일제는 식민지를 수탈했다고 말한다. 일제의 법령은 근대적이라기 보다는 조선인의 집회, 결사등의 자유를 탄압했다. 일제는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교육제도와 계몽운동 그리고 독립협회를 통한 근대의 민주주의 길을 말살했다. 조선인들이 받은 거라곤 황국 신민화 교육밖에 없었다. 위안부 문제도 있다. 그러나 조선 근대성의 생활세계에 대한 이해와 정체성에 대한 정의가 빈곤하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은 나름의 중요한 점들을 지적한다. 그러나 나는 사회학자로서 앞서 설명한 근대성과 자본주의 그리고 세계 체제론을 보면서 한국의 대안 근대성을 정조시대의 체제공의 상업자본과 다산의 경세유표와 주권재민에서 그 기원을 본다.

 

     다산이 동학혁명에 미친 영향을 간과할 이유가 없다. 동학사상이 조선의 민중에 뿌리를 박고있는 것은 일본의 신토리즘이나 사무라이 파시즘과는 비견될 수 없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대한 근대성의 생활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제1차 갑오개혁으로 시작된 근대화의 길과 독립협회의 계몽사상 그리고 민주 공화제를 향한 길은 고종에 의해 봉쇄 되었지만,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삼일운동에서 동학의 정신이 살아나며, 임시정부의 헌법 1조에서 민주 공화제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명시된다.

 

      이러한 생활세계와 정체성을 기초로 대한민국은 국제적인 교류와 사상의 흡수와 상호영향를 통해 대안 근대성의 보편적 성격과 특수성을 함께 담지한다. 일제의 제국의 브로커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사상은 역시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보편사의 영향의 틀에서 나는 일제시대의 문제와 계몽사상을 둘러싼 논쟁에서 참혹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다시 쓴다. 이런 점에서 근대성=자본주의라는 얼치기식의 논리는 생활세계를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하고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와 비판적 후기 근대성의 태도를 함양하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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