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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굴드: 아프리카와 에덴?!

by 파레시아 202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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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의 고생물학자 스테판 제이 굴드 (1941-2002) 교수가 60세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마감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닐스 엘드리지는 형님을 잃었다고 애통해 했다.
 
1992년부터 1999년 버클리에서 종교와 과학을 공공신학과 과학 사회학의 관점에서 연구분야를 개척하던 나로서는 참으로 암담했다. 로버트 벨라의 <인간진화의 종교>에서 굴드는 야구광으로 언급될 정도로 경이로운 생을 살다간 불꽃 같은 사람이었다.
 
굴드는 그의 하버드 동료교수인 리차드 르온틴과 더불어 사회 생물학의 거두이자 유전자 결정론자 에드워드 윌슨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논쟁을 벌였다. 이 격렬한 논쟁은 단순히 생물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고, 인문학, 사회학 그리고 철학과 종교의 영역으로 충격파처럼 퍼져나갔다.
 
굴드는 르온틴과 더불어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식민지론에 의해 채색된 다윈이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과 <통섭>의 전체주의에서 재발되는 것을 통렬히 비판했다. 굴드의 캄브리아기의 버제스 셰일의 화석 기록연구는 70년대 엘드리지와 발표한 단속 평형론(punctuated equilibrium)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대변화가 예고되었다.
 
버제스 셰일
 
버제스 셰일 (Burgess Shale)은 고생대의 첫 번째 시기인 캄브리아기 (5억 4200만ㅡ4억 8830)에 속하는 화석들을 말한다.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국립공원에 보존된 동물의 화석기록은 바위에 퇴적물로 되어있고 지질학적으로 5억 3천만년 전 시기에 속한다.
 
굴드는 <Wonderful Life, 19 89>에서 고생학자들과 더불어 행한 표본 분석을 설득력있게 제시했다. 이 시기의 동물군은 갑작스럽게 다각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군 (phylum)은 생물학적 분류에서 계 (kingdom) 아래에 속한다.
 
다윈에 의하면 진화는 환경으로부터 오는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 환경은 진화의 변경과 속도와 정도를 규제하는 모토가 된다. 그러나 캄브리아기 대폭발에서 다세포 생물을 위한 생태학적인 장이 만들어졌다.
 
생은 이러한 빈 공간으로 빛을 발하고 증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생태학적 빈 공간에서 경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윈에게서 경쟁은 거대한 규제자이지만 그러나 버제스 셰일의 생명체에서 개체들의 다양성과 다름이 스스로를 규제한다 (ibid.,16 8).
 
다윈의 관점은 캄브리아기의 폭발에 적합하지않다. 동물인지 식물인지 확실하지 않은 모든 문 (phylum)은 계 (kingdom; 인간은 동물계다) 아래에 속하는데, 캄브리아기에서 문의 증가는 예고도 없는 대폭발로 알려진다. 갑작스런 생물 다양성의 증가에서 비슷한 동물 군이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며 중국의 원난성이 유명하다.
 
굴드에 의하면 생명체는 캄브리아 시기 이후 페르미안 (permian) 대 재난에서 95% 정도의 해양의 종들이 집단 소멸을 당했다. 그러나 폭발적인 종의 차이를 갖는 버제스 셰일 현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페르미안 대소멸 이후 생은 급작스럽게 스스로를 개체화하고 다양화시켰다. 그러나 초기 캄브리아기의 종의 폭발과 포스트 페르미안의 생의 다양성은 매우 다르다.
 
텅빈 생태학적 통은 버제스 셰일의 종의 차이와 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개체간의 경쟁은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캄브리아기의 대폭발 현상은 외부의 생태학적 환경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유기체와 환경은 캄브리아 시기에 다르게 나타난다. 종의 폭발과 이후의 중지는 변화된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잠재성에 의존한다. 유기체들은 이들의 진화의 방향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하며 이들은 단지 자연 선택의 모토에 원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ibid , 169).
 
캄브리아기의 모든 동물은 형태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전 캄브리아기의 공동조상에 앞서 개체들이 다양화가 되었다. 심지어 공동조상도 찾을 수가 없다. 자연선택에 의해 생은 완전성을 향해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경로들에는 자연법칙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복잡성과 외부 환경의 영향이 있다. 짧은 폭발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집중되거나 집단적인 종의 소멸이 있다. 무질서와 우연성이 나타난다 (Gould, The Evolution of Life on Earth).
 
굴드에 의하면 역사는 무시간적인 자연법칙과 결정성이 아니라 오히려 우연성과 비예측성으로 특징된다. 진화는 더 이상 진보개념이나 적자생존 그리고 예측 가능성으로 언급될 수 없다. 인간의 기원은 집단적인 역사의 우연성이며 집단소멸에서 소수가 생존한다. 이러한 소멸은 생존투쟁에서 적응의 문제로 인해 온 것이 아니다.
 
자연의 세계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 장소도 아니며, 적자가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적응은 생존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다윈에게서 사슴은 포식자의 세계에서 보다 빠르고 오래 달리기 때문에 생존하지 환경적응 때문이 아니다. 캄브리아기의 거대한 포식자 anomalocaris는 생존하지 못했다 (ibid., 175).
 
우리가 과거의 세계를 정확하게 구성 한다고 해도, 그리고 상대적인 적응도와 서로 다른 재생산, 그리고 고대의 동물의 생리학적 효율성을 안다고해도, 진화의 과정에서 누가 생존했고 소멸했는지 예측할 수 없다. 진화는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생의 다양성으로 다각적 분화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버제스 셰일의 동물상을 재구성하고 생명의 역사를 테이프로 다시 재생한다고 해도 생명에 대한 전혀 다른 견해가 나타난다. 생의 테이프는 다윈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진화가 실제로 취한 길과는 급진적으로 다르다 (ibid., 51).
 
다윈의 적응을 통한 누적 변화는 국지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며 보편이론으로 설정될 수 없다. 인간의 진화는 매우 드문 케이스이며 생명의 테이프를 수백만번 돌린다고 해서 호모 사피엔스가 다시 출현하지 않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우연성과 비결정성으로 출현하며, 유인원과 공동조상을 갖는 것은 다윈의 가설이다.
 
창조와 다각화: 에드워드 윌슨과 스테판 굴드
 
에드워드 윌슨은 <창조>에서 남침례교 목사에게 편지를 쓰면서 17장에서 생명보존을 위해 연맹을 제의한다. 윌슨에 의하면 "과학과 종교는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두 세력이다. 과학과 종교는 창조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나 윌슨은 성서의 창조를 거절한다. 생은 체계화된 분자들의 무작위 변형과 자연선택에 의해 스스로 합성되었다. 이 지점에서 윌슨은 지적 설계론자들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지적 설계론에 의하면 진화는 있었지만, 초월적인 지성에 의해 인도되어 왔다.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생물학자들은 다윈주의가 눈과 같은 복잡한 시스템을 자연선택에 의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윌슨은 자연선택을 신봉하는 다윈 근본주의자이고(ultra-Darwinian), 지적 설계론을 과학으로서 자격미달로 본다. 그리고 과학에 기초한 신학, 예를 들어 이안 바버의 자연의 신학이나 테드 피터즈의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기초한 구성신학을 거절한다.
 
여기서 윌슨의 오만한 태도가 나온다. 자연선택을 거절하면 과학으로 인정되지 않는가? 이미 세포 생물학에서 크릭과 왓슨의 중심 도그마는 몰락한지 오래다. 에피제네틱스 이론에서 유전자 결정론도 과학으로서 자격 미달로 공격 당한다. 윌슨이 무슨 능력과 권위로 최근 괄목할만한 뇌과학과 에피제네틱스 그리고 시스템 생물학을 사이비 과학으로 폄하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버제스 셰일에서 다윈의 자연선택과 심지어 공동조상의 부재를 말하는 하버드 대학의 스테판 굴드도 사이비 과학인가? 브라운 대학의 저명한 세포 생물학자 케네쓰 밀러도 진화와 종교의 문제를 접근시키는 점에서 사이비 과학자인가?
 
다윈은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신체적 특질들의 유사점을 보았고 고릴라와 침팬지가 사는 아프리카를 공동조상을 찾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보았다. 그러나 다윈은 지적으로 독단주의자가 아니었다. 다윈은 심지어 진화에서 다양한 요인들을 강조했고 배타적으로 자연선택에 의존하지 말 것을 경고하기도 했다 (Gould, The Evolution of Life on Earth).
 
다윈의 딜레마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말한다. 만일 수 없이 점진적으로 누적되고 미세한 변형에 의해 형성되지 않은 복잡한 기관이 존재하고, 이것이 입증된다면 나의 이론은 절대적으로 붕괴할 것이다 (The Origin of Species, 191).
 
다윈에게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 (Natura non facit saltum). 그러나 혼란스러움은 다윈 자신에게 있다. 그는 말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개체는 오랜기간 동안 변경되지 않은 체 남아 있으며 변형을 겪지 않는다 (The Species of Origin, 119-20).
 
만일 다윈이 언급한 "오랜 기간동안 변경되지 않은 채 남아있으며 변형을 겪지 않는다"는 표현이 진화의 과정에서 중지와 평형을 의미 한다면, 다윈에게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생의 폭발
 
굴드는 다윈의 입장을 다각화를 고려하지 않는 단선적인 종발생적 점진주의 (phyletic gradualism)로 비판했다. 1999년대 미생물학계에서 굴드의 단속 평형이론은 교과서에서 진화를 다루는데 정통이론의 자리를 차지했다.
 
수백만년 동안 살아있는 것들이 생태적 관계에서 진화가 중지와 평형상태에 있었다. 새로운 종들은 자연선택이나 오랜시간 누적된 변이가 아니라, 유전자의 즉각적인 변화와 폭발에서 출현했다. 화석기록에서 조상과 후손의 관계는 없다. 유전자 메카니즘은 형식과 기능에서 도약을 한다.
 
그러나 굴드는 땅콩 달팽이 (Cerion)연구에서 화석기록을 분석하면서 소진화의 과정에서 (만년에서 이만년 사이) 세대적인 스케일은 다윈적인 의미에서 진화론적 변화에 수긍한다. 이것은 고생물학적인 대규모의 스케일과 수백만년의 화석기록과는 다르다. 그러나 굴드는 이만년된 달팽이 화석기록에서 점진적인 서열이 아니라 오히려 평형상태를 분석해냈다.
 
이것은 다윈 근본주의자들이 지질학적 시간을 압축할 경우 진화의 변형의 시간을 갑작스럽고 돌연히 나타나게 보인다는 억지와는 다르다. 분자 생물학에서 새로운 종들의 창발성은 분자들의 집단적인 자기 촉매과정을 통해 오토포이에시스로 현상한다.
 
지질학적 관점에서 종의 즉각적 기원과 이후 수백만년 동안 이어진 안정과 평형상태는 다윈의 점진주의와 다르다. 오랜 기간 진화의 정체성을 말하는 굴드의 단속평형설과 캄브리아기의 다양한 종의 폭발적인 증가는 생명권에서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창조되고 발생하는 지를 보여준다.
 
아프리카와 에덴
 
다윈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서는 아담 (인류와 개인 인격)이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기쁨의 정원)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창조의 은혜는 역사의 전승과 내러티브를 담고있는 사가(saga)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그리고 계약은 창조의 은혜 안에서 일어난다. 사가는 신화나 동화가 아니다.
 
에덴은 하나님의 안식과 연결되며 인간의 책임은 창조를 돌보고 경작하며 살아가는 봉사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안식은 아담의 존재에 자유와 기쁨과 쉼을 준다. 안식은 하나님의 세계 내재성이며, 지속적 창조이며 창조의 왕관이다 (칼 바르트). 사제의 기능이 아담에게서 나타나며 에덴 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나무를 자라게 했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 네페쉬 (몸과 영혼)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이 불어넣어준 영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간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하나님의 영이 불어 넣어진 자들이며 땅에 봉사하도록 창조되었다.
 
성서의 창조는 생태학적 관계에서 인간을 본다. 창조는 다윈적인 의미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유인원과 공동조상을 갖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마른 뼈들의 계곡에서 에스겔에게 경이로운 생의 차원을 보여준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사건은 창세기 2장 7절ㅡ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아있는 존재(네페쉬)ㅡ을 해석한다. 인간은 땅에 사는 생명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초월적인 관계에서 살아간다.
 
굴드는 <경이로운 생>에서 에스겔 37장 6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했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덥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생은 자연선택이 아니라 버제스 셰일의 대폭발처럼 지속적 창조로 온다.
 
굴드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중첩될 수 없는 권위체계로 인정했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이나 세포 생물학에서 캐네쓰 밀러 그리고 신학에서 칼 바르트에 공명한다.
 
에덴과 아프리카?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하고 엄청난 자연의 대재난과 집단적인 종의 소멸 그리고 화산 폭발들을 거치며 생존하고 살아왔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기적과 같은 존재이며 창조의 은총에 속한다. 이것은 과학의 영역에 속하며, 과학자의 소명은 미신으로 사로잡힌 세계와 어둠 속에서 촛불을 키는 것이다.
 
에덴?!ㅡ버제스 셰일이 에스겔의 환상처럼 출현했다면 에덴의 내러티브는 폄하될 이유가 없다. 호모 사피엔스는 하나님의 영이 불어넣어진 존재이고 땅에 봉사하기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다윈도 <종의 기원>결론에서 이것을 믿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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