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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수운: 대화 가능성

by 파레시아 2025. 1. 19.

스피노자가 불교나 원불교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랫동안 스피노자를 연구해온 저자로서는 마음이 흐믓하다.  종교는 서로 만나고 상호관계 안에서 부딪침이 없으면 앙상한 교리체계로 변질된다. 교리가 살아서 작동하려면 외부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환경과의 열린 태도를 취해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오이코스를 재구성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학자들의 몫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회학자로서 종교의 사회 문화적 기능과 영적-윤리적 그리고 우주적 형이상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이념이 상징-물질적 이익과 권력관계 그리고 사회구성을 통해 어떤 담지자들이 선택적 친화력을 발견하는가. 더 나아가 나는 이념과 담지자들의 실천이 역사와 사회에서 어떻게 분화되고 계층화 되는 지에 주목한다.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신)은 수운의 신천주 이념에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스피노자는 예언 또는 계시를 하나님에 대힌 해석으로 본다. 종교적 체험이 자연적 지식(이성의 빛)과 분리되지 않는 이유는, 자연의 빛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18세기 스피노자의 자연철학과 19세기 동학이념은 전혀 다른 정치 문화적 배경에서 등장했지만, 이 두 가지 이념의 사회적 기능과 삶의 실천은 비교 사회학의 대상으로 들어온다. 나는 스피노자 (1632-1677)와 수운 (1824-1864)의 사유를 검토하고 현재의 삶을 위한 유효한 역사를 기술한다.    

 

스피노자의 생태학적 통찰

 

스피노자는 생태학의 삶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자연철학에서 자연의 사물들이나 인간의 신체에 대한 입장은 신적인 실체와 양태의 변용의 관계를 보여준다.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적합한 이념(adequate idea)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양태의 존재는 실체에 속하며 실체 또한 존재를 통하지 않고 생각할 수 없다. 개별 개체들은 실체의 변용으로서 양태들로 규정되며, 이것은 원자론적인 개체가 아니라 공동원인으로 작용하는 다수의 복합체이다. 

 

인간은 자기실현을 통해 존재론적인 상호 연관성(내재적 존재론)을 가지며, 모든 존재의 양태들 (나무, 바위, 인간 등)은 실체(신)의 변용이나 우연성으로서 상호의존적이다. 실체(우주적 생의 근거: 능산적 자연)는 양태들의 우발성에 앞서 있으며, 유한한 것들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체의 다양한 개별적인 변용이다. 능산적 자연으로서 하나님은 실체이며, 무한한 속성들과 힘 가운데 존재한다.

 

그러나 자연의 체계는 목적론을 갖지 않는다. 몸의 양태들은 상호간의 효력과 영향을 미치며, 인과적이다. 모든 몸의 양태들은 서로 관련되어 파악되며, 신(자연)안에서 살아가며, 신은 모든 존재자들의 삶에 거주하는 원인자이다. 이것은 자연의 삶에서 나타나는 생태학적인 상호 인과율과 시스템을 지적한다. 또한 이것은 생의 세계의 평등성을 지적하며, 스피노자는 우주적 생의 관점(영원성의 관점)에서 외부에의해 생겨나는 정념들--증오, 시기, 탐욕 등-을 비판했다.

 

코나투스와 내재적 존재론

 

스피노자에게서 이성이나 마음은 사유(속성)의 양태로서 몸에 대한 이념이다. 몸은 개별화가 되고 움직임과 정지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출현하지만, 이것은 코나투스에 의해 선한 삶을 긍정하는 욕구와 노력에서 발생한다.

 

자기보존과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코나투스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 시키지 않는다. 인간의 몸은 매우 복합적인 개별적인 몸이며, 다양한 외부적인 변형들을 통해 독특한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구조가 인간의 몸에 영향을 미친다. 코나투스는 모든 양태들이 삶을 보존하려는 본질이다.

 

몸을 유지하는 신체적 능력과 이러한 능력을 일으키는 효과는 마음에 영향을 미치며, 사유의 능력을 증대한다. 보다 작은 힘에서 보다 큰 힘으로 이행에서 긍정적으로 미덕과 기쁨이 산출된다. 삶의 힘을 하락시키는 변형에서 사유의 힘은 하락되며, 여기서 정념이나 슬픔의 감정(감정의 수동성)이 산출된다.

 

인간은 우주적인 생에서 특권의 자리 즉 예외주의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도덕성과 존재의 특질로 인해 다른 동물들이나 자연의 사물들과 평준화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가능한 각각 자기보존을 하려고 하며, 자신의 독특한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증강하고 노력한다. 몸은 이러한 노력의 힘을 자신의 본질로 갖는다 (<윤리학>, III. p7).

 

몸의 상호작용을 통해 몸은 자기보존의 능력을 증대한다. 이러한 코나리(conari)는 지속적인 노력과 평형상테 (호메오스타시스)를 유지한다. 생태계의 삶에는 자기보존의 힘과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힘들이 서로 작용한다.

 

근대의 기술지배와 자본주의와 더불어 인류세(anthropcene)는 우주의 생을 파괴하고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야기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형이상학적 존재의 특권을 갖지 않는다. 모든 양태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코나투스에 기초해 생의 규칙과 리듬과 의식과 힘의 효과들을 산출해나간다. 그러나 인간의 코나투스는 다른 생명권의 코나투스와는 다른 인간적인 가치 (선한 감정, 미덕, 사랑, 지성)을 갖는다.

 

스피노자는 생명권의 삶의 권리와 가치를 인간화하지 않고 개별적인 코나누스를 배려하고 확장한다. 다른 생의 권리와 가치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적합한 윤리적 행동은 스피노자의 내재적 존재론의 중요한 인식론에 속한다.

 

자연에는 유익함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 지진과 재해 또는 질병 등과 같은 장애와 파괴가 존재한다 (Ethics, Appendix 1). 이것은 자연법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 때문이 아니다. 자연 안에는 유익함과 불편함이 공존한다. 이것은 생태학적 삶의 현실을 지적하지만,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는 삶을 향한 열망과 가치가 있다.

 

스피노자의 양태적 존재론에서 유기체의 중심적 사유가 나타나며 시스템 생물학에 근접한다. 공통개념들(Ethics, II. prop.37-40)은 모든 실체들에 공통적인 것 (연장, 운동,정지 등)이나 일부의 신체들 (상호신체들)의 공통적인 것을 표상한다. 이것은 적합한 관념이며 생물학적이며 유기체의 전체와 부분에 연관된다.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 스피노자의 사유안에 민주주의와 평등이 있으며, 인간은 더 이상 데카르트적인 생각하는 주체(코기토)가 아니라 삶의 의지를 향햔 코나투스의 존재가 된다. 다양한 감정의 효과들과 영향들은 다른 양태들의 욕구와 충족의 변화체계에 서 있다. 인간은 도덕과 지성의 함양을 통해 삶을 긍정적 가치를 확장하면서, 파괴적인 욕망충동과 증오의 효과들을 줄여갈 수가 있다.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며 개인의 코나투스를 함양시키는데 있다.

 

인간은 코나투스를 기초로 자연적인 욕구와 열망의 존재이지만, 자연의 양태들은 자신들의 코나투스와 자기 생산성에 따라 생을 창조하고 실현해나간다. 이것들은 인간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생의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자기생산성이 존중된다. 스피노자의 자연의 해석학은 녹색사유와 더불어 생태학의 차원을 향해 전개될 수 있다. 그의 코나투스는 생명권에서 나타나며 조화와 평형의 호메오스타시스나 자연의 삶에서 나타나는 자기 생산성 (autopoesis)과 삶을 매개해주는 상호 연관성에서 개념화 될 수 있다 (De Jonge, Spinoza and Deep Ecology).

 

이런 점에서 심층 생태주의자들이 스피노자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심층 생태주의에 의하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적 사랑은 생태학적인 홀리즘을 말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하나임을 인정하며, 존재자들의 총체성과 하나님/자연과의 분리될 수 없다. 상호 연관성은 내적인 관계로 이동하며, 이것은 생태학적인 존재론의 토대가 되며, 자연의 전체는 살이있는 개별성이 된다.

 

이것은 스피노자를 범신론적 무신론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심층 생태주의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영원성의 관점이나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적 사랑이 무신론이나 인간 중심주의로 환원되지 않는데 있다.

 

종교체험과 시천주

 

스피노자는 단순한 범신론자나 종교를 거절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모든 종교체험에서 만나는 심정 윤리 또는 무우주적 사랑과 존재의 평등성이 있다. 종교 사회학에서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근대성이 산출한 합리화 과정과 기술지배 그리고 관료제의 쇠창살에서 니체의 허무주의에 공유했다, 그러나 그는 스피노자의 심정윤리를 책임윤리와 더불어 부각시켰다.

 

스피노자는 <신학과 정치 논집>에서 예언자의 종교체험을 경시하지 않았다. 예언자적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이성의 지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해석을 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의 본성은 신적인 계시의 첫 번째 원인이 된다. 히브리 성서의 종교적 체험 (모세, 사무엘 여호수아, 예언자들 등)에서 하나님은 말씀이나 꿈이나 비전이나 상징에서 계시하고 이들은 상상력을 통해 이해하고 이스라렐 백성의 이성에 계시의 의미를 해석하고 소통시킨다.

 

하나님의 자기소통은 예언자들의 지각과 마음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일치한다. 이런 소통체험에서 하나님 자체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예언자의 종교체험이 인격적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제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계시한다.

 

이러한 종교체험과 심정윤리는 비교 사회학의 틀에서 볼 때, 수운의 시천주 이념과 만날 수 있다. 수운은 21세 때부터 10여 년간 장사를 하면서 주류팔로의 길을 나섰다. 1854년 귀가해서 이후 을묘년에 금강산 유점사의 한 스님으로부터 "기도에 관한 가르침" 다시말해 <을묘천서>를 받았다. 

 

1860년 4월 5일, 구미산 아래 용담정 자택에서 무극대도의 체험을 했다. 그것은 몸의 떨림과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의 들림이었다. 이러한 천어의 종교체험을 기술하고 사람을 가르칠 것을 소명으로 여긴다. 포덕문을 통해 수운은 조선 민중의 각성을 요구한다. 도는 본래 하늘의 길이며, 그 자체 스스로 그러한 대로 있다. 힘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위이화). 무위이화는 <노자> 25장의 도법자연에서 따온다: "도는 인위적인 조작에 의해 운행하거나, 자기가 본 받아야 할 도체가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을 본 받는 것이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연의 세계를 무위이화로 말하지만, 천도와 덕은 우주의 생에 관련되며 천주(한울님)와의 연관에서 파악된다. 기운이 상하고 쇠하고 하는 주기의 변화는 한울님의 생성과 변화의 자취가 하늘아래 밝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포덕문 1-1). 하늘의 길이 늘 그러함 (천도지상연)은 끊임없는 순환의 항상성이다. 상제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다. 마음으로 상제와 소통한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신 또는 자연 (Deus sive natura)에 중첩된다. 스피노자의 예언적 체험의 해석에서 마음을 통해 인격적 소통과 언어가 중요하다. 

  

천리(하늘의 이치)를 순종하지 않고 천명(하늘의 명령)을 빗나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음의 두려움에 빠진다. 이러한 두려움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잘못된 욕망(cupiditas)에서 나타나며 상대적인 악이다. 수운의 상제(한울님)체험은 대화를 기초로하며 인격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종교체험에서 한울의 마음이 수운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도법자연의 차원에서 무궁한 도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닦는 영적 수련과 고결한 도덕적 지성의 삶을 살아간다.  노자의 자연내재성은 상제의 체험과 개인의 영적수련으로 연결된다. 

 

"놀라지 말라! 두려워 말라! 세상사람들이 나를 불러 상제 (하느님)이라 하느리라. 너는 상제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말이냐? " (포덕문 1-5). 상제는 영부(영험한 부적)를 가지고 있고, 선약으로 부르며 그 형상은 태극과도 같으며 궁 자를 연속시키는 모습 (궁궁)과도 같다. 그리고 주문을 받아 상제를 위해 살도록 가르치면 천하에 덕을 펼치게 된다 (포덕). 수운은 영부를 받아 종이에 써서 태워 물에 타 마시고 병에서 나았다. 그러나 이것은 미신이라기보다는 영부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하나님 (천주)를 위하는 자가 효험을 얻었다. 물론 스피노자에게 주문이나 주술에 가까운 영부는 유대 철학의 합리적 사유에서 매우 낯설지만, 그러나 유대 영지주의에서 마술적인 주문이나 치유나 보호를 위한 신령한 물건(gems)을 찾아볼 수 있다. 

 

시천주를 통해 상제의 기운을 모신 사람은 <용담유사>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지상신선이 된다. 동학의 입도를 통해 나는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됨으로써 지상신선이 될 것이다. 도교의 신선사상이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없는 신선만을 위한 것이라면, 수운은 시천주를 통해 모두가 정성스러움과 공경함과 믿음 (성, 경, 신)에 기초해 지상신선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보면 수운의 신개념은 애매한 만유재신론으로 보기 어렵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신은 세계를 만들며 세계가 또한 신을 만든다. 신과 세계의 공동영원성에 대한 종교체험에서 인격의 변화와 다시 태어남의 개념은 보기가 어렵다. 그런가하면 수운의 시천주는 신플라톤주의나 유대교 카발라 신비주의에서 침줌개념과도 다르다. 이것은 신이 자기 제한성을 통해 세상의 유출로서 창조를 말하고, 영혼의 윤회를 말한다. 수운은 윤회보다는 한울님에 대한 종교체험을 통해 다시개벽과 지상신선으로 새로 태어남을 부각시킨다. "누각에 오른 사람은 학의 등에 신선" 같다 (<동경대전> 화결시). 

 

상제/귀신이 나의 마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상제/귀신이 인격적이 아니라 종교체험의 '나'가 인격적이기 때문이다. 수운은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히브리 예언자적의종교체험에서 그 인격성을 이해할 수가 있다.  

 

논학문 9절에서 수운은 무위이화를 자연의 세계를 기계론적으로 보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울님의 성품과 마음을 받고 살아가면서 자연 안에서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도법자연과 무위이화는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존재론적이기 보다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신성한 빛에 공명한다. 능산적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신성한 존재의 빛을 담고있다. 능산적 자연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자체이다.   

 

시천주와 영원성의 관점

 

시천주는 조화정 (사람이 하늘의 덕과 마음에 조화롭게 합일한다)으로 이어지며, 이것은 스피노자의 영원성의 관점을 도달한 차원을 가리킨다. 시천주의 선험적 불연을 조화정의 경험적 기연으로 체화하는 과정은 종교적 수행실천인 수심정기를 통해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둘은 이원론적이 아니라 대학의 성심과 수신과 연결되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실천의 중요성을 말한다.   

 

한울님 조화의 지극한 기운은 삶의 의지와 신에 대한 적합한 이념을 실현하는 인간의 코나투스적 열망의 토대가 된다. 천지만물이 한울님을 모시는 것이 이와 같으며, 시천주는 인간의 내재적 평등으로 나타난다.  영세불망하는 것은 <주역>의 원형이정의 덕이며, 천도가 나타나는 참된 모습은 사계절의 작용에서 나타나는 원(인) 형 (예) 이(의) 정 (지)의 조화이다.

 

이러한 순환적인 미덕의 작용에서 수운은 지성적 차원 즉 만사지라는 통찰과 보편적 사랑과 평등을 견지한다. 만사지는 단순한 인식의 지가 아니라 종교적 체험인 시천주에 기초하며 인식과 몸의 실천을 포함하는 존재와 개벽에 관련된다.

 

수심정기는 유교의 인의예지와 병행하여 수운이 정했지만, 이것은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에 기초하며 의심을 깨치고 정성을 지키는 것이다. 시천주의 틀에서 입으로 외우는 주문이 스물한 자이며, 가슴에 불사약을 가지고 있고 그 형상은 긍을이다. 이렇게 유교의 가르침은 불교와 도교 그리고 민간신앙과 더불어 재해석된다 (<동경대전> 수덕문 8-9).  

 

스피노자와 수운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직관적 사랑에 도달한 사람은 자유로운 인간이 되며 영원성의 관점을 취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사랑하는 영원하신 분으로 표현되며, 나의 직관적 사랑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부분이 된다. 여기에 스피노자애게 인격의 차원이 담겨져있다. 물론 하나님은 인격이 아니라 그분을 체험하는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내세의 보상과 처벌이 아니라 영원한 생으로 채워진다. 영혼불멸성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유의 인간은 선한 삶의 열망에 향한 코나투스로 인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지복으로 채워진다 개벽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나의 삶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시천주에서도 천주와의 인격적인 대화에서 그리고 천주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라는 데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제가 귀신과 등치 된다면 상제는 인격성을 넘어선다. 상제는 음양의 기운의 작용을 통해 우주만물에 편만해 있으며 귀신은 이러한 틀에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수운의 상제귀신론은 스피노자의 신/자연의 틀에서 볼 때 수용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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