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가 읽은 알뛰세
알뛰세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틀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새롭개 개념화한다. 그는 스피노자의 하나님 또는 자연개념에서 무한한 실체개념에 주목하고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과 비-총제적인 방식에서 모든 유한한 존재들안에서 스스로를 생산하는 자연의 측면을 수용했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알뛰세는 구조를 새롭게 이해했다. 구조는 다양한 요소들을 담고있고 복잡성과 원인은 그 영향적인 귀결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가 있다. 이러한 효과에서 원인을 파악하는 방식은 개별적인 결과들의 자율성과 동질성과 특수성을 산출한다.
알뛰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이데올로기의 일반개념을 발견하고 왜 사람들은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투쟁하는 지를 이해했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단순한 전도된 의식이나 오류가 아니라 상상계가 물질계와의 관계에서 출현한다. 그것은 사유 (상상계)와 연장(물질계)의 측면에서 볼 수 있고, 이러한 구조적 연관성은 주관주의를 넘어선다. 정치적 주체는 이러한 구조의 총체에서 움직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프로렐타리아트는 혁명의 주체가 될 수가 없다.
구조가 원인으로 작동되며, 역사는 주체가 없는 과정이 된다. 사회적 관계와 경제적 교환관계 (부와 자본)은 주체의 활동이나 계급투쟁으로 환원되지 않고 오히려 물신을 숭배하는 사회구성으로 현상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에 대한 직관적 지식이 중요하고 사유와 연장된 사물의 관계에서 여전히 사유가 중요하듯이, 알뛰세에게 철학은 과학적 지식을 제공하는 이론적 실천으로서 중요하다. 스피노자를 통해 알뛰세는 헤겔의 종결된 절대지 체계를 넘어서고 인간주의나 주체주의로 부터 자유롭게 물러선다.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에 기초한 사회구성은 과학적으로, 즉 다양한 계기들의 복잡성과 구조적 총체성으로 이해된다. 자연과학적 계기와 더불어 대립과 불균등 발전은 균일적이 아니라 상호연관성에서 접합된 것으로 고려된다 (전자본주의 경제형식은 여전히 자본주의적 형식과 접합 되어있다). 다차적 계기들이 공론장에 존재하며 사회경제적 수준과 전개를 통해 일반화되지 않는다.
계급투쟁에 앞서 지배 구조들을 파악하기 위해 (대립, 불균등 발전,구조적인 인과율, 중층결정) 사회구성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요구된다. 역사는 생산양식의 대립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지만, 이것은 주체가 없는 과정이며 사건이다. 개별계기들이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투쟁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또는 이념적인 물질성의 관계와 접합에서 전개된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반드시 진보를 의미 하지 않는다. 생산관계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적 통합기제들은 (가정, 교회, 학교, 시민사회등)은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영향으로부터 오는 알뛰세의 인식론적 파열이지만, 그는 베버의 지배 사회학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알뛰세는 스피노자의 삶을 긍정하는 욕망과 충족의 변화체계를 그의 사회구성이론안에서 충분히 고려를 하지 않았다. 인간은 욕구하는 신체적 존재이며 삶을 증대하는 힘과 능력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의지와 욕구는 비판적인 이성에 의해 인도된다. 프랑스 68 혁명당시 알뛰세에 대한 비판적 슬로건이 이것을 말한다: "구조가 가두에서 시위행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범신론자가 아니다
나는 스피노자를 공공신학을 위한 중요한 유대철학자로 파악한다. 철학적 논의에서 스피노자의 성서해석과 히브리적 사유는 거의 실종되다 시피했고, 그의 코나투스 이론과 세계의 양태들은 범신론적으로 오해되었다. "하나님 또는 자연" (Deus , sive Natura in Ethics IV. preface)은 하나님을 자연화하거나 자연을 신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하나님은 능산적 자연이며 무한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외 모든 다른 자연적인 것들은 소산적 자연이며, 능산적인 신/자연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신의 속성의 양태들이 된다. 실체로서 하나님은 양태들이나 효과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실체로서의 신은 칸트의 물자체에 공명하지만, 자연/이성안에 들어와 있다. 신은 자유 안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존재이며,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일부가 되며, 그분의 영광의 빛을 본다. 여기서 인간은 영원성의 관점을 취하며, 진정한 자유의 존재로서 우주를 사랑으로 덮는 사랑으로 채운다.
신은 무한하며, 자기원인이며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우주에는 단 하나의 신의 실체가 있다. 그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Ethics, I. 5). 이것은 만유재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개별자가 고통을 당하면 자연적 고통이 하나님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신으로부터 자연의 유출을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랑자체인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사랑을 통해 참여를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몸의 현상학
하나님의 속성들 안에 있는 것들은 무한한 양태들이며, 여기서 욕구와 충동으로 세상에 반응하는 감정효과와 신체의 변용(affections)이 있다. 양태들은 신체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변용(affectio/affection)은 신체에 대해 말해지며, 감정/정서(affectus)는 이성/관념에 관계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성은 인간의 몸 자체를 알기보다는, 오히려 몸에 영향을 미치는 변용에 대한 관념을 통해 몸을 인식한다 (Ethics, II.p.19). 증오와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은 자연의 힘을 쫒는다. 감정은 신체의 변용으로 이해되며, 신체 행위의 힘은 변용에 대한 관념과 더불어, 증가 되거나 하락하며 도움이 되거나 제한된다. 우리가 신체의 변용의 적합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감정에 의해 행위를 이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은 열정이 된다 (Ethics, III. D3).
여기에 선한 삶을 향한 열망인 코나투스의 의미가 존재하며 인간의 지식은 이성에 의해 인도될 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헤겔의 정신자체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관념이 감정의 형식을 구성하며 신체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적은 힘과 실재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감정이 자신의 기원이 되는 관념으로 돌아올 때, 능동적인 차원에서 기쁨은 사랑이 되고, 부정적인 이미에서 슬픔은 증오가 된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신체의 현상학을 드러내며, 인간의 몸은 많은 변화를 거쳐 변용되며, 객관적 대상의 인상과 흔적과 이미지를 담는다. 몸은 감정의 영향을 받는 인식의 장소가 되지만, 인간의 마음은 대상에 대한 지각을 통해 명석판명한 관념을 갖는다. 인간의 지식과 관념은 마음안에서 질서가 잡히며, 몸의 변용이나 그 이미지는 몸 안에서 질서가 잡힌다. 관념의 질서와 연결은 몸의 질서와 연결의 상호관계로 들어온다 ( Ethics, V.P1). 그러나 열정과 같은 수동적 감정이 중지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감정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가질 때이다.
명석판명한 관념/이성은 신체자체가 아니라 (연장), 순수한 마음/이성으로 부터 온다 (사유의 속성). 인간이 자유롭게 출생한 것은 선악의 상관성을 갖지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은 이성에 의해서만 인도된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사고이며 도덕적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신체/마음의 상관관계를 나는 코나투스와 이성에 기초해 몸의 현상학으로 파악하고, 스피노자의 종교철학을 조야한 유뮬론이나 경험론으로부터 방어한다. 스피노자에게서 하나님은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며 한 분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인이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사유의 속성에 대한 고려에서 파악된다. 하나님이 우주에 편만하다는 것은 연장의 속성에 대한 고려에서 표현된다. 사실, 하나님은 적합하게 정의될 수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통해 얄려진다. 하나님은 경험과 이성의 대상이 되지만 인간에 의해 흡수되거나 인수분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하나님은 스스로 사랑하는 분으로 말하며, 인간은 하나님에 댜한 직관적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부분이 되며, 영광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사유와 연장의 속성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자체로 나타나며,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사랑을 통해 영원성의 관점을 갖는다.
신의 사랑자체는 인격성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표현하고 체험할 수가 있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종교적 차원을 의미한다. 능산적 자연으로서 신은 스스로를 사랑하시는 분이며, 이러한 입장을 통해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신인동형론적 이해가 인간의 자유와 활동에 해로움을 주는 것으로 비판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스스로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이것을 배재할 때, 하나님을 분노와 질투와 심판으로 표현하는 인간동형론적인 표현은 인간의 경험과 감정에 기초한 제한되고 나쁜 표현형식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이성에 의해 안내되는 코나투스의 선한 열망에 관련되며, 하나님에 대해 인간은 직관적 사랑을 통해 인격적인 참여의 관계로 들어간다.
소산적 자연은 보편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보편적인 것은 하나님에 의존되는 양태들이며 (사유의 속성: 의지, 지식, 욕구, 사랑, 감정 등), 구체적인 개별성은 보편적인 양태에 의해 생산된다 (A Spinoza Reader, 55. 57).
무한한 양태들은 우주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를 포함한다. 그러나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들은 무한하지도 않으며 인과적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속성의 유한한 효과들이나 양태들로 볼 수가 있다. 이것들은 다른 개별적인 것들과의 영향과 인관관계에 서 있다. 자연의 법을 통해 살아있는 것들은 생산하고 창조한다. 자연의 양태들은 인과율 안에 있으며, 상호 의존성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연장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이 연장된 물체라면,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능산적 자연으로서 하나님은 스스로 사랑하는 분이다. 자연의 세계는 종교적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을 명료하고 적합하고 분별이 있는 지성적 지식이나 과학을 통해 이해한다. 이것이 인간을 계몽과 자유와 진정한 지복으로 인도한다.
모든 신체적인 사건들은 무한한 신체의 인과관계의 부분이며 자연의 연장과 인과적인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모든 이념이나 정신적인 사건은 사유의 속성으로부터 나온다. 우주와 자연의 모든 것들은 상호 관계성에 있지만, 이념과 몸 사이에 병행이 존재한다. 외부의 영향을 통한 신체의 변용에서 감정이 출현하며, 지각의 다양한 단계를 거치면서 감정에 대한 명석판명한 관념을 형성한다.
여기서 코나투스는 중요하다. 열정의 힘은 코나투스가 아니라 외부의 원인적인 힘에 의해 정의된다. 코나투스는 개인이 삶을 보존하기 위해 열망하고 이성에 의해 인도될 수록, 자유와 덕으로 채워진다. 반대로 개인이 이성의 안내와 존재의 보존의 열망을 망각한다면, 삶을 향한 힘을 상식한다. 도덕은 인간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의 힘 자체이다 (Ethics, IV. p.20).
덕은 자기존재를 보존하는 열망 즉 코나투스이며, 살아있는 것들의 본질이며, 코나투스가 덕의 유일한 토대이다. 덕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코나투스 즉 선한 삶을 향한 열망이다. 삶의 열망과 이해 그리고 이성은 서로 엮어져있다.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삶은 자연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성의 삶은 타인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으며 상호간의 삶을 조화와 도움에 의해 공동의 가치에 의해 살아간다. 이성으로부터 열망하는 코나투스는 이해이며, 이해는 인간의 마음의 절대적인 덕이다. 그러나 마음이 이해하고 아는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다.
스피노자는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인간이 이성과 코나투스에서 벗어나 폭력과 지배의 현실을 알고있다. 모든 사람들은 법에 의해 타인에게 해로움을 주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는 삶의 공동규칙을 명령하는 힘과 법률을 갖는다. 왜나하면 이성은 잘못된 감정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에 의해 유지되고 스스로 삶을 유지하는 사회는 국가이며, 법에 의해 보호되는 존재를 시민으로 불린다 (Ethics, IV.P 35).
각각의 다른 연장의 양태들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은 각각의 관념(사유의 양태)에 조응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양태/구조론은 알뛰세에게 영향을 미쳤다.
스피노자와 알뛰세
알뛰세는 스피노자의 양태 존재론에서 모든 사회적 총제 또는 구조가 능산적 자연처럼 인과적인 효과를 드러내며 각 개별의 계기안에 내재 한다고 본다. 모든 사건들의 원인은 부분들을 포함하는 구조의 총체성의 효과로 나타난다. 알뛰세에게 역사는 사르뜨르나 마르크스와는 달리 주체 (실존적 정치적 자유/프로렐타이아트)나 목적이 없는 과정이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는 알뛰세를 헤겔-마르크스의 변증법의 총체성에서 부터 해방시킨다.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과 전체화되지 않는 복수성은 모든 유한한 존재안에서 표현된다. 구조는 변하지 않는 어떤 정적인 콘테이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인관성과 복잡성을 가지고 있으며 상호 간의 효과를 통해 전개된다. 각각의 구조는 자체상 자율성과 단수성과 특수성에 따라 움직인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이념과 몸의 관계를 각각 사유와 속성의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주체중심을 해체한다.
알뛰세는 이러한 구조의 중요성을 헤겔적인 변증법적인 현재나 상응의 카테고리로 파악할 수 없다고 본다. 구조가 부분들에 영향과 효과를 미치며, 총체성은 부분들의 원인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실재들, 예를들어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개인 등을 해명할 수 있는 내적인 본질은 없다. 왜냐하면 원인은 구조적 총체성으로서 그파급 효과와 영향력안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적 실재는 효과로서 현존하지만 또한 부재한다. 모든 사건의 원인들은 구조적 총체성에 걸쳐 파급된다. 경제적 상부구조,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 이데올로기, 철학과 자연과학 등은 현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한다. 이러한 부재는 모든 개별적인 구조가 역사의 과정에서 균일화 되는 것이 아니라 탈구와 차이 또는 예속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만의 문서에 기초한 진보의 역사에 대립하는 유효한 역사의 영역을 지적한다. 알뛰세의 구조주의에서 유효한 역사는 동등성과 관용 그리고 공공선 민주주의에 기초한 스피노자적 성격을 갖지만, 니체-푸코의 권력의지에 기초한 계보학적 역사와는 방향이 다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구조와 시스템적 사유가 접합된다면 구조는 추상적인 콘테이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자체안에 개별 계기들의 복잡성과 상호신체성의 역동성이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시스템적 성격을 갖는다. 신체의 욕망 주체와 구조/시스템에서 볼 때, 근대성의 과도한 의식 중심주의나 프로렐타리아트 메시아적 혁명주체는 신 자유주의 방임주의 (신 식민주의)나 파시즘적 인민독재로 쉽게 노출된다.
알뛰세에 의하면, 사건들의 원인은 무한하게 구조적 총체성으로 펼쳐진다. 헤겔의 역사 변증법의 전개에서 드러나는 현재성은 현상을 포괄하는 본질의 현재이지만, 이것은 구조의 복잡성 (현재/부재)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Reading Capital, 99). 헤겔의 변증법은 현재의 동시성을 기초로 자유의 진보를 목적으로 삼고 역사의 다양성을 동질화 해버린다. 여기서 경제 인프라 구조나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 또는 이데올로기 구성과 자연과학과 기술진보는 헤겔의 동시적 현재성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구조의 총체성과 다차적 실재들이 단선적인 역사이해에 재동을 걸며, 인식론적 단절의 자리가 된다. 알뛰세에게 구조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파급 효과와 인과적인 관계안에 내재한다. 구조의 전체성은 특수한 모든 계기들의 효과로 구성되며, 개별 요소들의 특수한 결합으로서 구조는 효과의 그물망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Reading Capital, 189). 그러나 현재하지만 여전히 부재의 측면이 있다. 이러한 부재의 현상은 각각의 다른 계기들의 전개나 역사가 이성이나 자유의 진보와 같은 이념으로 균일화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재와 탈구의 계기들은 유효한 역사에 속한다.
이러한 부재는 스피노자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경험이나 감정이 이성으로 하여금 생각하지 못하도록 할 때 부재는 발생한다. 이것은 해롭고 악한 것이며 이성을 봉쇄해버리는 분노나 폭력이나 살해와 같은 감정의 효과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권력관계에서 탈구된 부재와 희생이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삶에서 이러한 정치적 폭력을 집단적 이기주의로 경험했다. 유효한 역사는 역사의 진보에서 균일화되지 않는 다차적인 계기들의 리듬과 전개와 특수성을 파악하게 하며 (부재로서의 역사), 또한 권력관계에서 밀려나간 자들과 희생자들의 삶에 주목하게 한다.
알뛰세의 구조의 총체성은 뒤르캠의 테재, 즉 “신과 사회의 동일화”에 근접하며,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실체(신)는 무한한 속성들에서 존재하며, 개별적인 양태들은 이러한 무한하고 영원한 것의 본질을 표현한다. 실체는 능산적 자연으로서 자체안에 있는 자기원인이며, 외부의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효율적인 작용인이며, 양태들의 삶은 관계의 총체안에서 중층 또는 다차적인 방식으로 결정이 된다.
물론 헤갤의 입장에서 보면, 스피노자에게서 개별적인 결정은 본질에서 추론되지 않는다. 부정은 오직 무로 현재한다. 부정성과 존재, 되어감과 매개 그리고 운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스피노자에게서 모든 결정은 부정이다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 무엇인가를 결정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로부터 제거함으로써 제한하는 것이다. 에를들면 나무를 녹색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나무의 색이 청색이나 다른 색으로 되는 가능성을 배재한다 (Hegel, 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ophy).
중층결정이나 다차적 결정은 해겔적인 변증법이 아니라, 스피노자적인 다차적 실재들이 상호작용에서 나타난다. 정치가 경제를 결정하며, 자연과학의 진보가 정치와 사회와 문화를 결정하며,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안에 들어와있다. 다양한 계기들이 처음부터 경제 결정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경제는 전개의 맨 마지막 단계에서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는 스피노자처럼 인간의 본성을 구체적인 시회적 관계와 현실성에 따라 파악했지만,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물론에서 혁명의 주체로서 프로렐타리아트의 이념형은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다. 사회적 관계나 경제 시스템 (교환, 부, 자본)에서 나타나는 복잡성과 인관성은 주체들간의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는 프로렐타이아트를 포함하여, 자본주의 물신숭배사회라는 구조와 시스템에 의해 포섭되고 구성된다. 선한 삶을 향한 코나투스와 이성적 비판을 통해 안내되는 공공 지성인들이 혁신과 변혁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
많은 다양한 영역들과 사물들의 질서 (정치, 자연, 기술, 사회, 문화등)에서 개별적인 계기들이 각각 생산과 재생산을 통해 사회관계과 투쟁의 방식을 형성한다. 경제투쟁이 정치나 문화투쟁에서 기대한 효과를 보기 어렵다. 주체는 사회 형태학과 과정의 역사에서 발견되며, 정치나 사회 투쟁은 이러한 구조적 과정에서 새롭게 재구성된다
주체중심의 철학과 구조주의의 대립을 알뛰세는 구조적 인관성의 이념과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접합시키고, 주체의 문제는 이러한 접합에서 파악한다. 이미 노동자는 경제구조의 인과성에 붙들려있고, 정치 주체로서 노동자는 역사의 과정에 함몰된다. 사회의 모든 형식에서 생산과 관계들은 상호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 발전의 단계에서 마르크스는 경제적 결정요인을 고려했다. 유몰론자는 사건을 미리 예단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객과 같다. 그는 우발적이며 예기치않은 것들 그리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형식을 부여한다 (Williams, "Althusser and Spinoza," Diefenbach, et al. eds. Encountering Althusser).
알뛰세는 스피노자의 인식론을 신과 자연의 동일화로 파악하고, 자연은 실체의 속성(능산적 자연; 자기 창조)과 속성의 양태 (소산적 자연; 구조)로 분류한다. 개별적인 양태들은 구조안에서 상호보충적인 인과관계에 있고 다원성으로 나타난다. 세계는 하나의 실체의 무한한 속성의 양태들로 구성되며, 인간주체는 자연의 부분이며, 삶과 힘에의 의지로 파악된다. 알뛰세에게 개인은 생산관계의 담지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알뛰세의 총체성은 루카치의 변증법적 총체성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루카치에게서 변증법적 방법은 관계들의 총체를 파악하는 것이며, 이러한 시스템적인 구조안에서 개별계기들의 대립과 부정 그리고 매개와 지양을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생산관계에서 합리적 과정, 기술화, 전문화등을 거쳐 사회구성을 결정 짖는다 (베버의 사회학과 마르크스의 물신숭배사회).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은 사회의 물화현상에 주목하고 이러한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계급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러나 알뛰세에게서 구조 총체성은 변증법적이라기보다는 사회학적이며 모든 계기들의 상호 연관성과 중층결정을 고려한다. 생산력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계급의식보다는 생산관계와 시민사회의 통합 이데올로기적 영역(가정, 종교, 문화, 교육, 노조, 미디어등)에서 드러나는 헤게모니를 둘러싼 행위자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계급과 신분과 지위는 개별 영력에서 행위자의 실천에 조응한다.
이러한 헤게모니 기제를 기초로 알뛰세는 사회구성을 다루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분석에 주목하고, 지나친 계급투쟁이나 이데올로기 비판 (허위의식)을 넘어선다. 그의 텍스트에 대한 징후발견적 해독은 마르크스의 사유를 당대 이데올로기적 흐름의 일부로 파악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의 저술에 혼재된 부르즈와적 요소를 해체한다. 이러한 텍스트 독해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적 (합리적) 성서해석을 유물론적으로 변형시키고, 1854년까지 초기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헤겔과 포이엘바하의 영향권에 있는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적 형식 즉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구조 시스템과 새로운 정치학
알뛰세의 인식론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 변증법과 휴머니즘을 문제틀하고, 스피노자를 통해 과학적 지식을 얻기위한 이론적 실천 (경험적 자료에 대한 이론적 변형)의 절차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인식론적 절차는 역사 변증법적이 아니라 경험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다.
여기서 인식론적 단절 (또는 파라다임 전이)은 이전의 이데올로기적인 과학과는 다르게 드러난다. 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성을 근거로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에 대한 과학적 이론과 스피노자의 양태 존재론을 구조적 인과율과 총체성으로 접합한다. 다차적인 계기들간의 상호작용과 중층결정이 사회구성과 변화에서 일어나며,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알뛰세에게 마르크스의 경제주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양태들은 복합적인 구조안에서 본질과 존재를 가지며 신체를 통해 상호관계를 하면서 상호 영향을 미친다. 행위자의 역할은 삶의 의지와 힘의 증강을 위해 중요하다. 신은 사물들의 존재의 충분한 원인이며, 또한 이들의 본질의 원인이다. 총체성의 특별한 본질은 없다. 신의 능력은 본질과 동일시된다. 신이 필연적인 본성으로 인해 충분한 원인이 된다면, 인과율은 다양한 계기들에 의해 중층적으로 결정이 된다. 다양한 양태적인 계기들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생산하면서, 구조는 항상 새롭게 형성된다.
여기서 구조는 정적인 체계로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태존재들과 더불어 새롭게 창출된다. 이것은 일종의 구조적 시스템과 같다. 다양한 계별적인 계기들과 존재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시스템이 형성되고 구조화가 되며 이것은 새로운 구조형성을 위해 열려있다.
여기서 알뛰세의 중층결정은 더 이상 경제적인 계기가 상부구조를 결정 짓는 다는 속류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거절한다. 이것은 오히려 막스 베버의 합리화 분석과 기술지배 그리고 관료제와 연결될 수가 있다. 헤겔-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인간 실천중심의 아니라 관계의 총체 즉 시스템적인 구조를 통해 설정된다. 이론적 실천이 계급투쟁의 한계를 교정한다.
그러나 알뛰세는 스피노자의 삶의 의지와 욕망체계 (코나투스) 그리고 타자와의 신체 상호성을 그의 구조/역사이론에서 투쟁의 차원에서 충분히 개념화하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우리 시대를 위한 스피노자>에서 스피노자의 양태 존재론을 시민 민주주의 정치를 방어하기 위해 전개한다 (Spinoza for Our Time: Politics and Postmodernity).
알뛰세를 너머서서
스피노자는 알뛰세의 해석처럼 단순하게 경험주의자로 볼 수 없다. 계급투쟁에서 열정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혼란스런 관념이지만, 이러한 관념을 넘어서는 것은 우리가 이성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명확하게 구분할 때이다. 감정은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그러므로 명석판명한 개념을 구성하지 않는 감정은 이성적으로 문제될 수 없다 (Ethics, V. P 7). 마음은 적합한 관념을 사유하고 형성하는 힘이며, 이것이 코나투스와 이성에 의해 인도될 때 역사와 사회안에서 자유와 평등과 도덕의 진보가 나타난다. 스피노자의 몸의 현상학은 불의에 대한 사회투쟁을 거절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새로운 사회구성을 평등한 민주주의에 기초한 시민국가를 구상한다.
스피노자의 내재적 존재론은 근대적 사유의 한계 (자유주의, 개인주의, 민족주권)을 대중의 욕구와 공공선을 향해 변형시킨다. 스피노자의 내재적 존재론은 신체 연관성에 기초하며 자연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성의 질병현상을 넘어서서 민주주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으며, 구조 시스템으로서 중층적으로 결정되며 시민대중의 욕구와 관심에 의해 변화되어야한다. 스피노자의 정치적 평등성은 지본주의 생산양식을 교정하고 시민사회의 심비오시스 더 나아가 생태학적 녹색 정치를 고려한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제공한다. 개인의 자유는 타자와 더불어 공공선 안에 설정되며, 사회정의는 자유안에서 구체화된다. 코나투스는 힘(potentia)이며 선함을 위한 존재의 욕구와 열망이다. 이러한 선한 삶을 긍정하는 의지와 욕구에 기초한 힘은 지배 계급으로부터 부여되는 권력(potestas)과 접합된다.
코나투스의 정치는 시민대중이 공유하는 자유와 정의에 기초한 시민사회를 기획하며, 권력지배의 힘(주권과 법)은 공공선 거버넌스와 더불어 배열 되어야한다. 존재론적인 힘의 개념은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사회 계약론에 대해 내재적인 존재론적인 평등과 자유의 의미를 부여한다. 스피노자의 욕망과 사랑의 개념은 정치 사회적 삶안에서 민주주의 정치로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
스피노자의 내재적 존재론과 공동체 거버넌스는 몸에 기초한 삶의 욕망과 열망에 근거되며, 근대의 주체 철학과는 먼 거리에 있다. 이성애 의해 인도되는 선한 삶의 열망은 국가안에서 보다 많은 자유에 연결되며, 인간은 고독이 아니라 공동결정에 따라 살아간다. 코나누스는 자연의 일부이며 개인은 타자가 없이 적합하게 생각할 수 없다.
이성의 안내를 통해 영원성의 관점을 취하는 것은 신체의 본질을 파악하며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사랑을 말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신체를 시간성과 지속과의 연관에서 파악하는 것을 거절 하지 않는다. 신체의 시간성은 시민국가 이론으로 이어진다. 집단적 욕구는 선한 삶을 향한 도덕과 지적 성찰 그리고 자연의 생을 포함한 시민 사회 안에서 공생과 매개 그리고 공동관심에 의해 충족된다. 이것은 군중 집단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와 전쟁을 거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