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히브리적 사유
스피노자에게 히브리 성서적 사유는 결정적이며 그의 철학은 그의 종교적 사유와 분리되지 않는다. 사실, 헤겔과 알뛰세 그리고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서 히브리적 사유와 성서해석의 중요성을 거의 고려하지 못했다. 스피노자에게서 의식은 사고와 지성에 관련되며, 지성은 보다 중요한 부분이며, 그는 자연에대한 지식을 통해 보다 완전한 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자기보존과 활동을 향한 노력 또는 욕망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말하며, 이러한 욕망의 증가는 적합하게 이성의 힘에 의해 활동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남아있는 욕망은 열정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선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식의 결여일 수도 있다.
신체와 인식론의 인덱스
인간의 몸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더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몸을 통해 드러나는 지각은 일차적으로 지시적이며 이해의 단계는 아니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변화는 상태이지 본질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선악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으로 사고한다
두번째 지시적인 단계는 현상이며 인과율에 따라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지시적인 단계는 합리적 지식과 이해에 긍정적인 기능을 갖는다. 스피노자에게서 신체와 지각을 기초로 한 현상학적 이해 또는 문제틀적인 인식이 나타난다.
이것은 알뛰세에게 진리에 대한 징후발견적 측면을 지적하는 데, 그는 기존의 이론적 경험적인 (이데올로기) 실천을 과학적 진리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문제틀에서 과학적 문제틀를 향한 지시적 징후이나 전거를 발견하고 변형시키는 인식론적 파열을 말한다.
이것은 문제의 싸인과 담론의 영역이 지시적인 단계에서 어떤 역할을 의미하는 지를 검토하는 시작의 단계를 말하는데, 이것은 책의 인덱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개념들에서 징후를 발견 하려는 해독이다.이것은 다음의 단계의 진리를 위한 전거를 찾아내고 문제틀 하면서 우회로를 찾는 인식론적 파열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거적 인식론의 파열은 헤겔의 개념적 파악이 진리를 부분적으로만 포함 한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헤겔을 예견하지만, 알뛰세는 이러한 이론적 기제(apparatus)에서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며, 자신의 유물론 철학을 위해 우용화한다(Althusser, For Marx, 89-90).
스피노자의 몸의 철학은 지시적인 인식단계와 관련하여 유물물적인 경험론로 읽을 수 있지만, 스피노자를 단순히 무신론자로 볼 수는 없다. 그에게 인간의 마음은 몸의 감정의 질서와 관계에 따라 상호적으로 나타나지만, 열정은 혼란스런 이념이다. 하나님에게는 열정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적합한 이념을 형성하는 힘이다 (The Ethics, P 1, 4). 이것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신체적인 삶의 상호 연관성을 지적한다. 공동의 삶은 사고를 가능하게 하고 보다 유효하게 발전시킨다.
영원한 관점과 쉴라이에르마허
스피노자는 인간의 최고의 행복과 축복은 지성과 이성의 힘에 근거짓고, 이것을 최고의 욕망으로 말하고, 이것이 이외의 다른 모든 욕망들을 완화시킨다. 지성을 완벽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활동을 이해하는데서 오며, 축복은 마음의 충족함이며,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으로부터 온다 (The Ethics, Appendix IV).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지식과 사랑에서 무우주적인 사랑의 윤리를 드러낸다.
인간의 마음의 가장 위대한 욕망은 세번째의 직관적인 지식에서 오는 데,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불멸하는 것을 파악하는 직관 이며 여기서 마음의 충족이 나타난다. 이것은“영원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지식의 세번째 단계를 말한다. 이것은 열정과 혼합된 혼란스러운 마음(첫번째 지식)이 아니라 적확한 이념 (두번째 단계의 보편적 지식)을 거쳐 이르는 영원한 마음의 상태이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적이며 직관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이러한 직관적 사랑에서 하나님의 이념에 의해 동반되는 기쁨과 사랑이 일어난다. 영원의 관점에서 파악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직관의 사랑은 영원하며, 무한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적인 사랑의 부분이 된다.
이 지점에서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론>에서 우주에 대한 직관을 종교의 가장 보편적이며 최상의 형식으로 말한다. “저 높은 정신이 그 [스피노자]를 감화시켰으며 무한자가 곧 그의 시작이고 끝이었고 우주는 그의 하나뿐인 영원한 사랑이었다. 그는 성스러운 무흠함과 깊은 겸손으로 자신을 영원한 세계 속에서 비추어 보았으며, 그 또한 이 영원한 세계의 가장 성스러운 거울이었음을 주목해 보았다. 그는 충만한 종교였으며 그것도 충만한 성령의 종교였다.” (쉴라이에르마허 <종교론>, 최신한 옮김, 60)
그러나 쉴라이에르마허가 보지 못한 것은 스피노자에게서 “하나님은 무한한 지적인 사랑으로 스스로를 사랑한다.”(P.35)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이며 직관적인 사랑과 동일하다. 모든 것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된다.
이러한 무우주적 사랑에서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며 스피노자에게 이것은 구원이며 지복이며 자유를 말한다. 이것은 성서가 말하 는 영광이며, 마음의 충족이다. 축복(하나님의 사랑)은 덕스런 행동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덕 자체 이며, 인간에게 힘을 주며, 구원을 즐기면서 욕망을 억제한다 (The Ethics, P 42).
이것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감정보다는 신의 무한한 사랑에 직관적인 지식을 통해 참여 하는 것을 말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이러한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사랑은 토라를 통해 이스라엘의 삶에서 가능해진다. 쉐마 이스엘 (신 6:4)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오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며 가장 고귀한 지복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은 진정 한 자유와 온 마음을 다해 행해져야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선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지식은 가장 고귀한 선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지향해야하는 궁극적 목적이다.” (D. [14],[15], A Spinoza Reader, 29)
죄 보다는 선을 향한 사랑
스피노자에게서 급진적인 죄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담에게 악의 공포가 아니라 선에 대한 사랑을 위해 선을 추구하라는 의미 였다. 이러한 신적인 결의는 영원하고 필연적이지만, 아담은 무지로 인해 이것을 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십계명도 마찬가지다. 악자체가 아니라 무지로부터 악함은 온다. 하나님의 법은 계명과 처벌에 기초한 인간의 법을 초월한다. 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알 수가 없다. 기적은 하나님에 의해 설정된 자연의 질서안에서 일어나는 제한된 것으로서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차원을 말한다.
죄에 대한 도덕적 투쟁 보다는, 스피노자는 자연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통해 계몽과 자유가 나타나며, 궁극적으로 신의 본질과 영원성을 파악하는 지복으로 나간다. 신을 향한 지성적 사랑은 지고 선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동적이다. 그것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덕이며, 행복이며 구원이다. 우리 모두가 이성의 안내를 통해 동일한 본성과 원리를 공유하며 상호간의 혜택과 관용을 통해 조화로운 사회를 형성한다. 이러한 윤리적 입장이 스피노자의 정치이념 즉 관용과 평등 민주주의 정책을 지적한다.
스피노자와 <리비이어던>
스피노자는 홉즈의 <리비이어던>을 공화제 민주주의로 수용한다. 홉즈는 자연의 상태에서 사익의 추구는 모든 개인들 사이에서 빗어지는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다고 보았다. 자연이 상태에서 일어나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은 절대주권인 <리비이어던>을 필요로하고 모든 개인들은 여기에 복종해야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국가를 리비이어던처럼 파악하지 않았다. 국가의 유용성은 국민주권에 기초하며 이들의 안정과 삶을 보호하고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다. 물론 스피노자는 인간을 단순히 합리적인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합리적인 욕구를 넘어서는 감정(명예, 부, 욕정의 삶)에 쉽게 예속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 이러한 폭력과 희생자들의 삶을 방어하위해 국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선한 것은 신에 대한 지식이다. 국가는 폭력을 막기 위해서뿐 만 아니라, 국민들이 가장 선한 능력, 즉 하나님 (자연)에 대한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러한 지식과 사랑이 사회와 국가를 무우주적으로 채워놓을 때 그것은 사회 공화제 안에서 평등 민주주의를 지향한다(A Spinoza Reader, xxxii).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은 당대 그를 파문한 유대인 공동체의 명망가들과 관련되어있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오렌지공 가문을 지지하고, 동인도 회사에 투자하면서 수익을 벌었다. 1640년 스피노자의 선생인 랍비 마나세 벤 이스라엘이 동인도 회사를 비판한 일로 파문을 당한 것은 우연 한 일이 아니다.
스피노자를 파문한 자들은 오렌지공의 정치를 통해 종교적으로 정통파 칼빈주의 를 지지했고, 동인도 회사의 주식투자가들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도르토 신조 (1618 -19)를 통해 국가종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오렌지 공의 정치와 칼빈주의자 들에게 대립한 얀 드 비트의 공화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한 것은 정치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Deleuze, Spinoza, 7).
스피노자와 헤겔의 매개
홉즈의 국가이론을 해석할 때, 스피노자는 헤겔의 초가 국가이론에 가깝게 서 있다. 예나시절의 <정치철학>에서 헤겔은 언어 (개념), 노동(생산), 소유 (개인과 공동체)를 통해 가족과 시민사회와 국가를 파악한다. 시민사회 안에서 인간은 노동을 하면 할 수록 인간은 더 소외되고 무력 해진다. 노동이 기계화되면 될수록 노동의 가치가 감소하며 인간은 더욱 더 혹사 당한다. 만인대 만인의 투쟁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이미 시민사회 안에서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토대로 일어난다.
헤겔은 산업혁명과 당대 영국의 정치경제학에 몰두했다. 프랑스 혁명을 검토 하면서 헤겔은 법의 지배 아래있는 합리적인 국가 즉 인륜의 실현에서 <리비이어던>의 전제지배를 넘어 섰다 (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97). 법의 지배는 노동과 경제적 정의를 둘러싼 갈등에서 사회 계약이 해결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국가는 윤리적으로 작동된다. 공동체의 일반이익에 통합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법률의 본질이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와 헤겔은 루소의 일반 의지와 입법의 권위에 접근한다. 물론 루소와는 달리 헤겔에게서 일반의지는 단순한 개인들의 사회계약보다는 세계정신에 기초된 국가의 결과이다. 이것을 헤겔은 독일의 종교개혁을 통해 실현된 기독교 국가로 보았다.
헤겔은 그리스의 비극에서 심정윤리를 파악한다
헤겔은 고대 그리스의 소포클레시스의 비극을 다룰 때 문명이전의 자연상태가 야만적이라는 것을 거절한다. 이것은 여전히 루소의 자연철학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시민을 기초로한 민주적이며, 공익은 시민들의 결정에 맡겨졌고, 이들은 아름다운 개인성이었다. 여신 아테타는 아테나 도시자체였고 시민들의 구체적인 정신이었다. 그러나 일반의지와 개인의지의 민주적인 직접성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상실되었다.
소포클레시스의 <안티고네>에서 헤겔은 인륜 (자연법-안티고네)과 인간의 법(독재자 크레온-실정법)의 대립에서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실정법을 어기고 오빠의 장례식을 치루어지는 신의 법을 지키는 자로 구현된다. “이런 법은 어제나 오늘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었다, 이러한 법이 언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안티고느) (Hegel, Phenomenology, 248).
그러나 인륜과 정부의 법은 상호보충적이며, 형제간의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자에게 크레온 왕은 정부의 실정법을 통해 처벌하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의 법에 저항하고 신적인 법 (가족의 인륜성)을 지킨 안티고느는 윤리적인 본질의 삶을 드러내고, 개인성(죽은 오빠)과 보편성 (장례를 통해 인간의 명예를 회복해주는 승인)에서 윤리는 무한한 총체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오빠의 장례를 치룬 안티고느는 인륜에 기초한 심정과 최상의 의무 (책임성)로 인해, 왕의 명령—오빠의 시체를 새들과 개들의 먹이로 버리라는—을 어김으로써 죽어야 한다.
안티고느에서 실정법의 죽음의 운명과는 달리, 인정윤리는 심정과 책임성을 포함하는 신성의 법이며, 그리스 비극에서 개인과 보편성은 아름다운 총체성으로 고양된다. 이것은 그리스 예술 종교에서 나타난다. 절대적인 것은 이러한 비극에서 영원히 스스로 수행한다. 이러한 차원은 예수의 화해의 죽음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러한 헤겔의 접근은 그리스 비극과 운명을 화해와 인정에서 지양한다. 타락이라는 운명에서 정신은 이것을 초월하여 구원의 계기로 나타난다. 유한한 것(죽음과 비극 또는 운명)안에 존재하는 무한한 것은 인간의 법에 처벌 당한 비극의 사람들에게서 신의 법을 추종한 책임과 심정의 윤리를 보게 한다. 이런 측면에서 헤겔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무우주적 사랑으로 보게 한다
스피노자의 무우주적 사랑과 심정윤리
헤겔은 스피노자를 단순히 범신론자나 무신자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를 무우주적으로 이해했다. 세계를 하나님으로 환원시키면서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생산되며, 하나님의 성품들의 양태로 긍정한다. 하나님이 만유안에 거하시며 만유가 하나님안에 있다.
이것은 만유재신론을 지적하며, 실체로서 하나님(능산적 자연)은 세계의 자연 (소산적 자연) 으로부터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후자 역시 창조적 능력을 갖는다. 만유가 하나님에 의존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며(초월성—Causa sui), 하나님 외부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과 죄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마음과 연관되어있다. 악은 인간의 주관적인 삶과 가치에 놓여있다.
지성적인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시되며 이러한 동일성의 수준에서 지복 또는 온전한 기쁨은 덕목자체로 얻을 수가 있다. 무우주적 사랑의 타입은 신과 합일된 것을 말하며, 이것을 막스 베버는 가치합리성에 기초해 세계를 변혁하는 심정윤리로 파악했다. 베버는 이러한 무우주적 사랑을 예수와 프란시스 아시시, 부처 혹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보기도 했다. 이것이 헤겔에게는 심정윤리를 인정으로 파악하는 절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베버의 사회학과는 달리, 헤겔은 스피노자의 우주적 실체로서의 신을 절대정신으로 파악하고, 역사와 사회에서 변증법적인 여정을 시작한다. 헤겔의 현상학의 드라마에서 이해 능력은 역사 사회적 콘텍스트안에서 기초된 지성의 노력과 활동이며,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화해의 현실과 심연을 거쳐 절대자 존재 자체로 스며된다. 지적인 노력으로서 이해는 매우 놀라운 능력이며, 역사와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의 의식들의 구체적인 풍부함과 충만함을 파악한다. 성서적 화해는 헤겔철학에서 절대지의 측면에서 개념화되고 보편적인 인정원리로 고양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절대지는 스피노자의 무우주적 사랑과 타인을 위한 책임안에 설정될 수 있다. 개인의 양심의 문제는 심정과 책임의 매개를 통해 칸트와는 달리 역사 사회적으로 자리매김 되는 데, 이것은 헤겔의 절대지에 기초된 심정의 신실함(도덕적 의식) 을 윤리적 가치로 파악될 수 있고 (Hyppolite, Hegel’s Phenomenology, 504, 507), 헤겔의 인정 합리성은 베버의 가치 합리성을 비판적으로 접합될 수가 있다. 이러한 비판적 보충을 통해 헤겔과 베버는 스피노자의 공화적 평등 민주주의으로 매개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