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은 사물의 존재 (onto)를 제일 원인과 즉 신과의 연관에서 추구하고 해명하는 점에서 존재-신학적 (onto-theology)으로 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철학은 진리의 학문이며, 그의 모토는 존재 (εἶναι)와 그 드러남 (알레테이아)에 관한 것이다 (Metaphysics II 1, 993b30–31).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중요한 자리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사물 (τὸ ὄν)은 존재 또는 존재를 갖는 실제적인 것을 말한다. 실제적인 것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모든 형이상학의 핵심질문이다. 아리스테렐스의 우시아는 실제적인 것을 실제적으로 만드는 것인데, 나무를 나무되게 하는 것은 나무의 실제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는 질료와 형상을 포함하는 실체로서 본질과 현실적 존재를 포함한다. 이것은 실제적인 것들의 실제성 (τὸ ὄν)을 의미하는 우시아이다다. 하이데거는 우시아를 사물의 존재성 즉 존재자들의 존재로 번역했다.
어째튼 아리스토테레스의 존재-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개념과 함께 하이데거의 존재의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가능의 근거 또는 존재의 사건에 중요한 관련성을 갖는다. 아퀴나스에게 신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전개되지만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개념과 존재론적인 유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나가는 활동을 통해 부동의 동자인 신에 접근된다. 이러한 존재의 유비는 아퀴나스의 자연신학과 유비론의 기초가 된다.
하이데거에게서 철학은 사물의 본질에 관한 지식이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현상학적으로 독해힜고, 존재는 사물의 이해 가능성이며 인간의 관심에 관련하여 의미있는 현전으로 파악했다. 인간의 지성은 누스 (Nous) 또는 로고스라는 넓은 의미에서 파악된다. 하이데거의 최종 목적은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지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이다. 이것은 숲속에서 존재가 열어 밝히면서 드러내주는 장소 (Lichtung/clearing)에서 현존재가 탈존의 경험을 하는 영역을 지적한다. 열어 밝혀주는 장소에서 진리 사건의 드러남은 여전히 파르메니데스의 미지의 신에 대한 탈존적 체험과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신의 문제
<형이상학 XII 6>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는 자연적인 것이 있으며, 또한 부동하고 영원한 것이있다. 운동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시간 역시 지속적 연속으로서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운동 특히 천계의 원운동과 시간의 영원성과 연속성에서 영원한 실체인 신을 돌출한다.
제일 천계를 움직이고 구성하는 제일 원인은 부동의 동자이다. 제일 천계가 부동의 동자를 아름다운 것, 자체로 욕구되는 것, 사랑의 대상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이나 모방과는 다르다.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영원한 실체이지만 그안에 운동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제일 원인 또는 실체로서 부동의 동자는 질료를 포함하지 않지만 활동을 본질로 가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적 활동성을 영원성으로 파악하며, 그것은 질료를 포함하지 않는 순수 형상이다. 이러한 접근은 질료-형상관계를 능력과 활동의 관계로 파악하는데 상응한다. 존재자들은 제일 원인을 향한 사랑의 욕구를 갖는다. 물질의 세계에는 형상이 들어와있고 생과 선함으로 채워져있다. 신에대한 지성의 관조는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이며 선한 삶을 향한 열망에 기초한다. 관조는 사유하는 대상과 접촉하고 본질을 받아들이면서 일치한다.
사유 (노에시스)는 부동의 동자에 접촉하고 즐거움을 향유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사유보다 더 좋은 상태에 있다. 삶은 신에게 속한다. 사유의 활동은 삶이며 신은 바로 본질적 활동이다. 신의 독립적 활동은 가장 선하고 영원한 삶이며 영원히 지속된다 (Metaphysics, Bk, XII. ch. 7. 1072b 24-30).
아리스트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론이며 경험적인 분석을 통해 보톰 업 방식으로 제일 원인이자 실체인 부동의 동자에 접근한다. 신은 영원하며 천체의 공간운동에서 툳히 원운동에서 원인이 되며 필연적이며 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유가 자신을 사유 한다면 사유의 사유를 말하는데 (<니코마코스 윤리> XII 91074b 27-35), 이 지점에서 사유의 사유는 부동의 동자로서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사유한다. 이른바 나르시스적 신 개념이 돌출될 수 있다. 나는 자기 자신만을 사유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은 아퀴나스의 신 개념과 다를 수 있다. 아퀴나스의 신은 부동의 동자이지만 유출을 통한 창조주로 변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살아있음과 영원성과 선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인간의 지성의 관조에 임재하는 배려의 차원을 간과하지 않았다.
아퀴나스 해석의 문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XII ch.7에 대한 주석에서 하나님이 생명자체에 주목한다. 지성적 활동 다시 말해 이해는 생의 일종이며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종류의 생이다. 현실태는 잠재태보다 더 완전한다. 현실태적으로 이해하는 지성은 쟘재적으로 이해하는 것 보다 완벽한 삶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실체는 현실태이며 하나님의 본래적 실체는 생이 된다. 하나님의 현실태는 그분의 생이며 영원하며 최상이다. 여기서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짐승이라는 일반적 견해를 돌출하고 영원하고 최상적인 것으로 말한다 (Aquinas, Commentary on the Metaphysics of Aristotle, vol.2: 500 [1961]).
그러나 "하나님이 짐승"이라는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비판적인 편집과 번역을 통해 수정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존재이다" "살아계신 존재로서 하나님은 영원하며 지극히 선하시다. 생과 지속성과 영원성은 하나님에 속하며, 따라서 이분이 하나님이다" (A New Aristotle Reader, ed. Ackrill, Metaphysics XII, ch.7. [1987]).
짐승은 지성의 관조를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감각적인 것들과 분리되어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살아계신 존재로서 영원성과 선하심 그리고 생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말한다,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사랑의 욕구를 갖는다. 그리고 대상을 사랑하심으로써 생산한다.
생이 지속적이고 영원한 지속으로 파악한다면 아리스토톨레스는 지속적 창조개념에 접근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삶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개념에서 인격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살아계시고 사랑의 대상을 생산하며, 하나님의 삶에 대한 인간의 참여와 더불어 알레테이아의 임재와 배려를 말한다.
아퀴나스는 오히려 신플라톤주의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참여에 주목했다. 물론 이것은 어거스틴의 저작에서 드러난다. 아퀴나스는 보에티우스에 대한 주석을 썼고 서방 전통의 기독교 신플라톤주의를 알고 있었다. 물론 아퀴나스는 신플라톤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 보다는 더 성서 주석적이지만, 여전히 그는 신존재증명과 유비론을 통해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의 전통을 비켜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선함은 무한한 존재의 수준으로 고양되며 인간의 마음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함이나 완전성 등을 초월해있다. 그러나 부분적 지식은 가능한데, 존재를 통한 하나님과 피조물의 유사성 때문이다. 이것은 존재의 유비 또는 유비에 의한 지식으로 부른다 (Clark, An Aquinas Reader,104).
그럼에도불구하고 아퀴나스는 제일 원인으로서 하나님을 존재의 활동 (Act of Being)으로 파악했다. 하나님은 존재의 수여자로 임재하며 자연적 세력인 작용인 또는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그 안에서 역동적으로 존재를 발전시킨다. 하나님의 자연적 임재는 은총의 삶의 근거가 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자체이며 스스로 존재하시며, 자신안에 존재의 완전성을 포함해야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돌출하고, 하나님이 창조의 세계에 임재하실 때 하나님은 사랑으로 임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여기에 참여한다 (ibid., 105).
그러나 내가 보기에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의 한측면 즉 operari sequitur esse에 사로 잡혀있고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인간의 삶에 임재하고 배려하는 차원을 보지 못했다--esse sequitur operari. 하나님의 임재는 진리의 사건 즉 알레테이아로 드러난다.
그러나 아퀴나스에게 중요한 원리는 신앙과 계시의 외부에서 하나님이 창조의 세계에서 미치는 효과 즉 피조물들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이지않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는 바울의 입장에 접합한다 (롬 1:20). 그러나 바울의 입장이 기독론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바울에게서 창조는 그리스도의 화해를 통해 포괄되지만 아퀴나스에게 창조와 화해의 상관성의 유비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물론 이로한 상관성의 유비는 칼 바르트에 의해 그의 화해론의 빛들의 교리에서 해명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은총은 자연을 전제한다. 완전성은 완전성을 위한 가능성을 전제한다. 따라서 신앙은 자연적 지식을 전제한다 (Summa Theologiae, I, q.2,a.2, ad.1). 이런 점에서 아퀴나스는 과학적으로 알려지고 증명된 것을 신앙의 조항으로 수용하는 것을 금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아퀴나스는 은총과 자연의 연관성을 다룰 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세계와의 화해는 뒷전으로 밀려나가고, 그리스도의 화해는 죄사함의 개인적인 차원과 성례전적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어째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세계와 생을 긍정하는 태도가 나타나며, 세계를 데무르고스라는 저급한 신에 의한 창조된 것으로 거절하는 영지주의 신개념과는 다르다. 오히려 세계는 모든 것들이 다르지만 하나의 목적과 관련하여 함께 질서지어지고 공유한다. 현존재는 선함을 향한 운동과 변화 가운데 있고 스피노자적으로 선한 열망의 코나투스적 존재이다. 선함과 공공선은 죽음 충동을 향한 현존재와는 다르다. 존재 사건이 알레테이아로 열어 밝혀질때, 진리는 목적론적 완성 즉 존재의 선함과 이분화 되지 않는다.
영지주의의 신
하이데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아포리즘을 자신의 존재론에 착상했다: "비법은 만물을 하나로 통합시켜 말할 수 있도록 하라. 이것을 위해 내가 아니라 로고스의 음성을 듣는 데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변증법과 로고스의 대립의 일치는 실종되고, 하이데거는 로고스의 발화를 파르메니데스의 고정불변의 영원의 세계에 예속시켰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현존재를 향해 말을 하고 현존재는 복종 해야하는 관계로 변형된다.
로고스는 진리의 알레테이아로 드러난다. 이것이 기발한 하이데거의 탈취와 모자이크 존재론이다. 형이상학은 극복된 것 이 아니라 존재론은 영지주의화가 되고, 이방여신을 섬기는 목동의 역할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흐름과 대립의 일치는 헤겔의 변증법에 가깝지, 하이데거의 존재론과는 다르다.
로고스는 세계의 질서(우주)에 편만 하지만, 동시에 초월한다. 우주자체의 영원한 움직임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마음 (로고스)은 영원히 존재한다. 여기에는 존재론적 상응관계가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볼 때 대립과 통일 그리고 변화에 대한 인식론적인 통찰이 있다. "나의 말이 아니라 로고스에게 경청하라." 변화와 대립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로고스는 신(제우스)을 의미한다 (Brann, The Logos of Heraclitus). 헬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담론이나 논증 또는 아포판시스와 다르다 (1407 b11 -18).
그것은 말과 음성을 넘어서 신적인 지성을 가리키며, 우주의 변화와 대립의 일치를 조화롭게 하는 숨겨진 원리로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시민은 제우스의 음성에 경청하며 살아야하는 현존재인가? 이것은 하이데거의 이방종교 제의인가?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신적 로고스를 우주적 이성의 편만성으로 변형시킨 것은 스토아 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