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탄핵정국과 세계 파시즘 현상에서 나는 알렉시스 토크빌을 다시 읽고 그에게 길을 묻는다. 의회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사법 시스템과 관료주의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검토 하는가? 변혁과 통전적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서 권력관계는 사법 시스템과 관료제에서 작동한다. 국가안보나 카리스마의 이름으로 기묘한 독재자나 정치 선동가가 출현한다. 이것은 글로벌 정치에서도 나타난다.
왜 알렉시스 토크빌인가?
중국 공산당의 규율 반장격인 왕치산이 반부패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크빌이 1856년에 펴낸 걸작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을 추천했다고 한다. 왜 이런 역설적인 책을 소개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 중국에는 지배자들이나 사상가들로부터 내려오는 옛 경구가 있다.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지마라’.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군주의 독재가 부패에 달하면 마침내 혁명이 찾아온다.
토크빌은 지금 이런 흔해빠진 이야기를 화두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혁명은 상황이 가장 나쁠 때가 아니라 상황이 개선되는 시기에 나타난다. 이것은 근대성의 특징이고 시민 사회의 성격 때문이다.
중국의 정치는 공산당의 중앙 집권화로 되어있고, 당 국가체제이다. 중앙정부는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이루어지고, 각 분야의 문제는 상무위원의 개별책임이 따른다. 이것은 지방정부의 조직과 행정체제에도 적용된다. 650만명 정도의 당원이 행정이나 다른 국가업무에 관여하고, 공무원 역할을 한다.
이러한 당-국가체제는 민주집중제와 당 권위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며, 인민 민주독재에 기초된다. 이러한 인민 민주독재에서 인사권은 중앙정부에서 결정되고, 사상주입과 조직통제 (당조), 무력과 국유기업과 경제통제가 행사된다.
그러나 권력 방식이 부패한 탐관오리에 의해 방해될 때 위기에 처한다. 공급망이 코로나 봉쇄나 또는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해 막힐 때, 열악한 금융 자본시장의 네트워크는 아킬레스 건이 된다. 중국이 세계 자본시장에 자유롭게 개방할 때, 중국내 신흥 부자들의 축적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트럼프 행정부 2기와 대결하면서 시진평의 공동 부유론은 사라지고 극심한 경제난으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왜 토크빌인가? 그것은 중국이 시민 사회를 활성화하고 경제적 분배정의를 실현해나가고 공산주의 정치 시스템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토크빌은 미국의 정치 제도에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있다.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정치 이론가 알렉시스 토크빌(1805-1859)은 1831년 미국을 방문하고 1년간 감옥 제도를 연구했다. 토크빌의 체류 기간 중 앤드류 잭슨은 대통령 직에 있었다 (1829-1837). 토크빌의 평가에 의하면, 앤드류 잭슨은 민중 선동가였고, 강한 지지를 근거로 자신의 개인적 정치 적수들을 과감하게 탄압했다. 그는 의회와 국민 대표들을 경멸적인 언사로 깔아 뭉겼다.
앤드류 잭슨은 오늘날 트럼프를 연상한다. 이들은 부유한 자들이었지만 정치 엘리트들을 혐오하고, 국가 정책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카리스마에 의해 대통령 직을 수행했다. 앤드류 잭슨은 인디언들을 학살한 주범이고 노예제를 지지했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1837년 경제공황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토크빌은 7월 군주제 (1830-1848)를 경멸했지만 1839년부터 정치에 관여했고, 노예제 철폐의 입장을 견지했다. 2월 혁명 이후 제 2공화국 (1849-1851)에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1851년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뜨가 12월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저항을 하고 구금되었다. 풀려난 후 그는 정계를 떠나, “앙시엥 레짐과 혁명” 이라는 유명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책은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는 데 마르크스의 혁명연구와 더불어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중도 좌파에 속한 비판적 자유주의자였고, 의회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토크빌은 자신에게 붙여지는 좌파라는 명칭을 거절하지 않았다. 1831년 4월 토크빌은 7월 군주정부로부터 미국의 감옥제도와 사회 교정 시스템을 연구하라는 위촉을 받았다. 그의 오랜 친구 버몽트 (G, d. Beaumont )와 함께 미국 로드 아일랜드로 출발했다.
그의 주저 <미국에서의 민주주의 (Democracy in America, 1835>는 이러한 여행의 결과물이었고, 미국의 정치와 사회 시스템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했다. 이 책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을 위해 쓴 민주주의 미래에 관한 것이며, 19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고전에 속한다.
프랑스 대혁명 (1789)으로 시작한 프랑스 사회는 1871년 파리꼬민의 대학살로 막을 내렸다. 크고 작은 혁명의 소용돌이들로 넘쳐났다.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 루이 필립 (Louis-Philippe)이 왕위를 계승하지만 그는 부르즈와 군주였고, 금융귀족들이 지배권을 독차지했다. 공화주의자들은 이전 부르봉 왕가와 별 차이가 없다고 실망했디. 1832년 6월 군주제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지만 실패로 끝나고,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명저 <레미제라블> (1862)의 역사적 배경이 되기도한다. 1847년 토크빌은 청년 좌파당에 속했고 노동문제와 임금인상과 누진세를 주장했다.
결국 루이 필립의 군주제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전복되고, 유럽전역으로 혁명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임시 선출되고 프랑스 제 2 공화국 (1848-52)이 수립되었다. 토크빌은 1849년부터 일반의회 의장으로 활동했지만, 1852년 루이 나폴레옹의 친위 쿠데타에 저항했다. 토크빌의 “앙시앙 레짐과 혁명”은 구비 구비 전개되는 혁명에서 반동, 진압, 쿠데타, 잔인한 학살의 흐름을 정치철학의 입장에서 검토한다. 틈틈히 미국의 민주주의와 비교되기도 한다.
토크빌은 그의 체류기간 동안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평등과 개인주의를 주요 특징으로 보았지만, 개인들이 원자화가 되고 군중속에 파묻혀버리는 위험을 보았다. 개인주의 사회는 국가를 매개하는 사회구조나 공동체 성격에서 벗어나기가 쉽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재로 흐르고 개인의 권리는 쉽게 타협되거나 희생 당한다.
토크빌은 미국의 경제의 안정과 교회의 성장 그리고 루소적인 의미에서 지역 공동체의 민주주의 발전에 주목했다. 동시에 그는 원주민들의 삶과 노예제도에 대해 우려를 표현했다.
미국 민주주의의 함정
정치 사회학자로서 토크빌은 미국에서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인 평등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지에 주목했다. 미국의 지방 자치정부와 헌법에 규정된 평등의 일반조건을 근본적인 사실로 보았다. 미국 사회의 조건의 일반적 평등은 토크빌의 분석의 초점으로 들어온다 (Democracy in America I, 12).
유럽의 봉건제 군주제를 기초로 귀족제의 신분들의 위계질서와는 달리 평등은 미국의 사회적 상황에서 발전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서 장코뱅주의가 독재와 공포의 지배로 이루어졌다면, 미국의 리버럴 민주주의는 부드럽다. 그런 혁명적인 폭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토크빌에 의하면 신분과 조건의 평등성은 보편적인 진보를 의미하며, 특히 기독교 국가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회적 평등의 점진적이고 점차적인 발전은 그들의 역사에서 과거이자 미래이며, 이러한 진리는 변화에 신성한 명령의 성격을 부여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저지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이 될 것이다" (ibid., 17).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선언했으며, 모든 시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ibid., 21). 이것은 영국으로부터 이주한 미국의 청교도의 영향과 중산층 그리고 자본주의적 경제에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민주주의가 봉건제와 군주제를 파괴하고 왕이 사라진 자리에 시민과 자본가들을 존경해야 하는가? (ibid., 16) 에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평등은 어떻게 추구되어야 하는가? 토크빌에 의하면 시민들 대다수가 번영의 삶을 살려면, 개인적 이해관계는 공동체의 이익에 일치해야한다 (ibid., 19).
루소의 국민주권이 유럽에서 유토피아적으로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토크빌은 미국의 정치 제도에서 어느정도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러나 토크빌에게 국민주권은 민주주의 시대에 자유와 평등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루소에게 일반의지가 민주주의를 다스리는 이념형으로 드러나지만, 토크빌의 정치학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중산층을 기초로하는 민주주의 정부와 권력을 콘트롤 할 것인가? 미래의 민주주의를 평등한 사회 조건에서 자유를 보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사회적 조건들이 중앙 집권화된 정부 형태보다 중요하다.
다시말해 자유와 평등은 로크나 루소처럼 자연의 상태에서 찾아질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의 의사에 반하여, 평등은 역사의 과정에서 발생론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조건들에서 찾아져야한다. 이것은 미국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토크빌의 견해를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에서 발전하게 될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전망한다. 유럽의 민주주의 역시 앞으로 평등한 사회적 조건들을 기초로 발전되어야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토크빌이 미국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다. 미국의 개신교가 공동체의 도덕성을 함양해주고 민주주의에 유리한 ‘마음의 습관’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토크빌은 1856년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을 분석하는 그의 책에서 종교문제를 매우 정확하게 보았다. 프팡스 대혁명 당시 카톨릭에 대한 공격은 외부의 관찰자가 보는 것 처럼 혁명세력이 무신론적이서 가 아니다. 교회가 봉건적 사회조직에서 부와 특권을 누리는 신분 때문이었다. 오히려 민중들은 종교적이었다.
마르크스가 국가종교에서 민중의 아편적인 성격을 본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을 담는다. 토크빌에게 종교는 민주주의와 혁명이 하려고 했던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크 루 (Jacques Roux)같은 신부들은 대혁명 당시 매우 급진적인 입장에 선 지도자였다.
프랑스 대혁명은 반종교적이 아니라, 종교의 특권과 부패에 대한 공격이었다. 만일 미국의 개신교가 사회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유리한 조건을 창출 한다면 바람직하지만, 인종차별과 파시즘적 형태를 취한다면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가 있다. 트럼프주의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토크빌에 의하면, 미국의 리버럴 민주주의는 로컬 정부, 자발적 시민 연합체, 다시말해, 루소적인 의미에서 꼬뮌 내지 타운쉽의 민주주의가 살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의 자치 정부는 보다 큰 정부나 중앙집권적 행정관료에 의해 침식당한다.
그러나 공동체 (꼬뮌 내지 타운십) 정신은 자발적인 시민연합이나 기구들을 통해 공동의 자유와 책임과 이해를 증진시킨다. 제국의 확장적 성격을 갖는 중앙 집권적 정부에 비해, 시민사회 안에서 문화와 예술, 그리고 종교는 시민 연합과 자발적 기구들이나 협의체에서 발전된다. 시민은 민주주의적인 ‘영혼’을 가진 도덕적 시민이 된다.
토크빌의 도덕의 현상학은 개인주의적이 아니라 자치정부에서 평등과 자유를 통해 서로 간의 연대와 유대감을 통해 만들어지는 문화적인 ‘마음의 습관’을 지적한다. 에밀 뒤르캠이 노동의 합리적 분업에 기초한 경제사회가 마르크스의 소외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간의 유기적 연대감의 출현으로 보았다면, 토크빌은 시민사회안에서 공동체적인 마음의 습관 즉 민주주의 영혼에서 도덕사회의 특징을 부각시켰다.
밑으로부터 자치 정부와 시민운동의 기구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하원이나 상원들과 충분한 소통을 해야한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 국가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한다.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사라질 때 중앙 집권화 된 정부의 지배는 파시즘적인 독재로 흐르고 특권층이나 올리가르히가 지배하는 사회의 위기로 나타난다.
토크빌은 시민 사회이론을 정치학적으로 규명하고 중앙집중적 국가권력의 횡포로부터 방어 하려고 했다. 이러한 횡포는 프랑스에서 카리스마적인 군인 나폴레옹이나 또는 미국의 보나파르트로 불리는 앤드류 잭슨의 군사주의에서도 나타난다. 반대의 의견의 소수자들은 추방되고 민주적인 토론이 억압이 되면서, 여론은 권력에 기생하며 선동적이 된다.
마르크스의 갈림길: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흔히 시민사회는 마르크스의 아킬레스 건으로 말해진다. 부르주아 사회는 경제영역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하지만, 시민사회는 시민이 정치주체로 등장하는 데 프랑스 혁명에서 부각된다. 독일은 이러한 정치주체로 시민을 표현하는 말을 공민 (Stattsbűrger)으로 사용하지만, 프랑스 정치이론을 담아내기에 품이 좁은 표현이다.
프랑스 정치이론에서 시민은 하위계급과 연대하면서 나타난다. 정치사회 (사법에 의해 지배되는 의회 민주주의)와 경제사회(부르즈와지 사회) 그리고 시민사회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가 분화된다. 시민사회에서는 공공선을 위한 통합적 이데올로기 기재들이 작동되고, 가정, 교육, 도덕, 종교, 문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중요한 역사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이다.
이러한 사회를 기초로 국민주권이 입법화되고, 보통선거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의지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공동체는 로마시대에 공화제 (공적인 일, res publica)로 번역되고, 근대에 들어오면서 그것은 국가지배로부터 독립된 시민결사와 연합 또는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조직이나 클럽으로 표현된다. 최근 언급되는 공공신학도 사실은 공적인 일, 즉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 종교의 문제를 민주주의와 경제정의와 관련하여 문제틀 하는데 기초한다.
“유대인 문제” (1843)에서 마르크스는 국가종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종교는 시민사회의 개인의 영역으로 돌아간다고 쓴다. 당대 프로이센 군주제에서 프랑스처럼 정치주체로서 시민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해방에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 국가일반에 대해 질문한다.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는 곳에서,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데서 유대인 문제는 해결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알렉시스 토크빌과 그의 친구 보몽 (Beaumont)의 미국정치 분석에 대한 저술을 알고 있었다.
정치해방은 인간해방의 문제가 되며, 종교로부터의 해방이 된다. 국가는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민주주의 (공화제) 국가가 된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출생과 신분 특권과 교육과 직업의 차이를 철폐하고,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을 국민주권에 기초하여 평등 하게 참여하게 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법철학”에서 종교 위에서 역할하는 국가의 보편-윤리적 기능에 여전히 주목한다. 온전한 정치-국가에서 인간의 유적 삶이 가능하며, 이기적인 경제의 삶이 지배하는 시민사회와 다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윤리적 국가개념과 루소의 시민국가가 매개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한다.
예를들면 정치-국가가 진정한 발전에 도달하게 되면 인간은 공동체적 보편존재로 전화된다. 그러나 시민사회 안에서 인간은 사익을 위한 물질의 삶을 추구하는 개인이 되고, 타인을 수단으로 취급한다. 여기에 여전히 마르크스에게 타인을 수단으로 취급하지않는 칸트적인 정언명법이 자리잡는다. 마르크스는 상인(부르주아)과 공민(시민)의 차이를 말하지만, 충분한 개념적 해명을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날카로운 (그러나 빗나간) 루소의 비판을 검토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와 시민의 분리에서 마르크스는 후자를 정치적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 파악 했다. 국민주권에 동등하게 참여함으로써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의 보편성이 드러난다고 본다. 이것은 루소의 시민국가론에 접근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시민 사회비판은 재고될 수 있다.
사실 마르크스의 ‘사회화된’ 개인의 관심은 국가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인 국가의 사라짐을 통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시민사회로 다시 들어온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 사회는 이전의 부르주아 사회를 부정한 단계 즉 부정의 부정을 말한다. 그리고 해방을 향한 연대와 자유라는 ‘마음의 습관’이 물신숭배와 착취 그리고 모방욕구를 넘어서서 민주주의 영혼에 기입된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학적 접합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마르크스의 원고를 새롭게 검토하는 과제를 갖는다. 독재가 아니라 비판적 민주주의자로서 마르크스의 모습을 복원시킨다. 그는 헤겔의 군주제를 비판하고 민주주의 휴머니즘을 옹호하고 날선 관료제 비판을 보여준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은 보통선거에 있음을 밝힌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헌법을 가지며, 실제적 인간, 실제적 국민으로 설정된다. 헌법이 국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헌법을 만든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헌법의 본질이되며 개별인간은 사회화가 된다. 헌법은 인간의 혜택을 위해 존재하며 그 반대가 아니다. 개인들이 입법 제정에 참여하는 것은 국가에 참여하는 것이며, 모든 개별의지는 국가의 실제적인 정치적 구성원이 된다. 보편선거에서 모두가 입법제정에 참여함으로써 정치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는 극복된다.
민주주의가 다른 모든 정치적 형식들과의 관계에서 “구약성서”가 된다. 보편과 개별의 진정한 변증법적 일치는 민주주의에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 안에서 국가는 사라진다. 이 대목이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전통에 서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토크빌과 마르크스
알렉시스 토크빌은 1830년과 1848년 사이에 정치가로서 활동을 했고 제 2공화국 (1848–52)에서 헌법작성에 관여한 제헌의회 부의장이였다.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항거하여 잠시 투옥되지만 사면 후 정계를 떠났다. 이 시기 중산층의 정신은 국내문제와 해외정치를 다루는 프랑스 정부의 일반정신이었다. 활동적이고 산업적이지만 허영심과 이기심으로 채워져있고, 때론 귀족주의와 혼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덕과 영광이라곤 없는 정부였다.
1830-1840년의 프랑스는 금융과 거대한 산업과 상업이 발전하고, 부르즈와지의 상승을 위한 정치를 대변했다. 군주에 의한 금융귀족이 지배한 사회였다. 자유농민은 조그만 토지를 소유했지만 무식했고, 이전 농노들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들은 계몽과 산업의 진보에서 혜택을 보지 못했고 낙후했다. 진보는 일직선상이 아니라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영향이나 불이익을 미치는 궤적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1848년 2월 혁명의 성격을 특징 짖는다.
이러한 토크빌의 체험적 기술은 외부인 관찰자인 칼 마르크스와는 많이 다르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의 서문에서 실토하듯이, 이 시기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모든 담론은 역사에 의해 틀린 것으로 단죄되었다. 1848년 이후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혁명적으로 발전하고 독일은 일급 산업국가로 진입했다. 폭동이나 시가전은 낡은 것으로 되버리고 보통선거권의 획득과 의회민주주의가 전면에 서게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혁명과 이후 독일사민당의 부상에서 프로렐타이트의 지배를 합법적인 민주주의 길에서 보았다면, 토크빌은 프랑스에서 민주주의와 공공선을 위해 아무 것도 연합되지 않는 무리의 모습을 보았다. 사회의 불평등이 재산관계에 근거되고 사유 재산의 제거가 완전한 평등을 위한 최종적인 스텝이다. 그러나 토크빌은 이러한 해체의 방항이 아니라 신뢰할 말한 사회제도와 조직의 설립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의 비전을 보았다.
마르크스 역시 토크빌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를 지지한 소농 계층은 1789 혁명에서 농작지를 받았지만 분업이나 기술적용을 통해 발전시키지 못했다. 사회적 관계들에서 별다른 계급 간의 격차와 갈등을 보이지 않았고, 부농이나 빈농간에 오히려 형제애나 사촌과 같은 유대로 묶여 있었다. 토지 자산을 지키는데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소통의 부재로 프랑스의 도시의 삶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농촌의 노동계급은 도시 노동자처럼 제대로 정치적 사건들을 알지 못했다. 파리에 많은 비판적인 정치세력들이 있었고, 제 2공화국의 보수정책에 저항했지만, 프랑스의 대다수는 농촌지역에 거주했다. 1848월 2월 혁명과는 동떨어진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6월 항쟁은 진보적인 정치클럽과 5월에 선출된 보수적인 국민의회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났는데, 국민의회는 6월 24일 군대진압을 통해 최종적인 권위를 쟁취했다. 1848년 12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 대통령으로 선출 되지만, 그의 선출은 능력 보다는 나폴레옹 황제의 명성에 기인했다. 그러나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통해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1년 후 스스로를 나폴레옹 3세 황제로 칭했다.
1848년 2월 혁명이후 제 2공화국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보나파르트가 황제가 되기위해 12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곳이 로드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 여기에 장미 꽃이있다. 여기서 춤을 추어라!” 어이없는 12월 쿠데다가 로드스 섬이고 장미 꽃이다. 다른 곳을 볼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의 혁명의 계보학은 삼촌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쿠데타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참혹한 대참사인 파리 꼬뮌의 대학살로 막을 내렸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조건 지워지고 넘겨받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간다.” 1851년 12월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보면서, 마르크스가 삼촌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과 비교하면서 쓴 문장에서 나온다. 역사가 되풀이 될 때, 첫 번째 (나폴레옹 황제)는 비극으로 두번째 (루이 보나파르트)는 소극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이것은 거의 블랙 코미디 수준이다.
쟈코뱅의 독재: 문제틀
자코뱅 독재는 테오도미르 반동(1794년 7월 27-28)으로 인해 기요틴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소비에트 공식 엔사이 클로피디아 (1979)의 평가는 상당히 우호적이다. 자코뱅 그룹은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구현이며,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먼저 착안하고 했다고 한다.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의 극단주의나 테러정치가 러시아 혁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어필한다.
1921년 독일 영화 “당통”이 1924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수입되어 방영되었다. 원본과는 다르게 혁명의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당통을 처단해야하는 로베스 피에르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이 덧붙여 각색되었다. 레닌에게서 자코뱅은 혁명적인 인민들과 더불어 있고, 그의 볼세비키의 이념형으로, 그런가하면 붉은 군대의 창시자로 파악 될 수 있다. 그러나 몰락의 운명도 함께 나눈다.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을 분석하면서,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구체제의 정치조직에서 보았다. 특히 프랑스 사회에서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귀족 신분제는 세금공제의 특권으로 인해 대부분 다른 계층들과 구별되었다. 금수저와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나온 사람들이다. 프랑스의 도시들은 지배가문을 통해 통치되었고, 각각 다른 법과 사법제도들이 있었다. 프랑스를 사회적으로 묶어주는 시민 통합제도들은 찾아보기란 어려웠고, 절대 군주에 의해 ‘탑 다운’ 방식으로 다스려졌다.
토크빌에 의하면, 계몽주의 이념은 사회의 조화로움이 자연적으로 동등한 인간의 권리에 기초된다. 일반이익이 사익이나 특수그룹(귀족 혹은 상인)의 이익에 우선한다. 프랑스 사회 조직은 이기적인 사익에 붙잡혀 있었고, 그로 인해 공공선을 위한 일반의지를 방기해버렸다. 계몽사상이 사회전반에 걸쳐 유포되고, 출생의 특권을 비판하는 인권을 귀족들은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계몽이념을 받아들인 대중은 프랑스 사회가 이러한 이념에 의해 작동되지 않은 것을 보았다. 군주제 개혁을 향한 강한 요구들이 계몽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표현했듯이, 이념은 유령처럼 배회한다. 이념의 담지자들을 사로잡아 새로운 사회를 향해 영혼의 불을 지른다.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특권과 부패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계급과 카스트의 신분의 장벽을 허물고 국민을 정치 사회적으로 통합하는 제도를 만들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무능이 개혁과 평등한 사회를 열망하는 공공 지식인과 대중에게 분노와 좌절을 일으켰다. 프랑스 혁명에서 첫 희생자가 귀족계급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결국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군주제 자체도 무너졌다. 개혁과 혁명의 관계를 볼 때, 토크빌의 입장은 명쾌하다. 중산층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거꾸로 부유해지면 일어난다. 증산층이 사회의 특권에서 배제되어서가 아니라 참여가 확대되면서 생겨난다. 귀족들이 계몽이념에 저항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점점 더 이러한 이념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생겨났다. 구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특권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데서 온다.
결국, 사회가 혁명으로 가는 길은 나쁜 상태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봉건 정치제도가 몰락의 전야에 분노로 가득찬 프랑스 대중을 선도하지 못한 지점에서 비롯한다. 무능한 루이 16세의 사소한 행동을 참기보다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전제 정치를 참는 것이 더 쉽다. 토크빌의 혁명이론은 정치제도와 사회구성에 주목한다. 그래서 사회학에선 혁명의 구조이론으로 부른다. 사회구성이 혁명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정치 에콜로지에서 나타나는 "토크빌의 효과" 또는 "토크빌의 덫"으로 부를 수도 있다.
자코뱅은 토크빌의 혁명분석에서 자리를 가질 수 있는가? 그의 부모는 공포정치 기간에 투옥 되었지만 간신히 희생을 피할 수 있었다. 루소의 제자로서 토크빌에게 민주주의 혁명은 피해갈 수 없지만, 테러와 살육으로 물들여진 독재와는 거리가 멀다.
몽테스퀴외의 <법의 정신>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영향음 미쳤지만, 혁명기간에 정치의 미덕은 공포가 아니라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에 기초한 권력의 상호견제와 분리에 있었야 한다. 몽테스퀴외의 관심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와는 달리 사회 안에서 제도들의 적절한 기능에 있었다. 공화국은 미덕에 의해서, 군주제는 명예를 위해서, 독재는 공포에 의해서 작동된다. 권력의 기능과 권위가 서로 침해할 경우 공포로 인해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The Spirit of Law, XI, 6).
몽테스퀴외(1689-1755)는 구체제에서 고급 재판관이었다. 권력의 견제와 균형은 공화제의 자유와 미덕을 부각시키며,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의 독립성이 제도의 고유한 기능을 위해 중요하다. 이것은 사법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 정치적 자유는 법적 지배아래서 개인의 안전과 의견에 기초한 마음의 평정에서 나타난다. (Spirit of Law, 11.6).
사법적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에 기초한 정부와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은 교육을 통해 법을 존중하며 법의 존중이 자신의 이해에 일치하며, 공공선과 애국의 중요성을 배워야한다 (Spirit of Law, 4.5). 사법적 민주주의는 불평등과 극단적인 평등주의로 의해 변질될 수 있고, 귀족이나 사법 특권주의자들에 의해 독재로 출현할 수 있다 (Spirit of Law, 8.2). 개인의 도덕성이나 정치적 견해가 법적 합리성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사법권은 선고 이전에 가시화되어서 안되며 개인의 권리를 해로움으로 부터 보호하며, 독립권이 보장되어야한다 (ibid., 11.6).
몽테스퀴외의 <법의 정신>에서 정치적 미덕은 공포와 독재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공공선 정의 그리고 사법권의 독립에 있다.
대한민국에 대한 염려와 기도
몽테스퀴외와 토크빌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사법 관료제와 법조인들이 헌재의 결정에 대한 정치적 간섭은 지나칠 정도이다. 법조인들이 법 조항을 가지고 특권과 권위를 행사하기 전, 먼저 몽테스퀴외의 <법의 정신>과 시민사회의 도덕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법조인은 국민주권에 봉사하는 기능인에 불과하다. 국민의 일반 의지가 법조인의 지식과 특권 그리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탄핵정국을 보면서 저자의 깊은 우려는 과연 향후 사법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정치적 카이사르주의와 이를 지지한 법적 사회의 특권세력들이다. 역사의 전개의 역설은 로마의 카이사르는 암살 당했지만, 이후 공화 민주제는 종언을 하고 로마 제국의 황제 즉 카이사르주의로 역발현상이었다.
민주주의는 흔히 얼치기 진보 좌파들이 '허풍'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공화제에서부터 기원한다. 민주주의는 전제권력에 막혀 있다가 1500년대 종교개혁을 거처 비로서 숨통을 트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영향을 통해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지만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역발현상의 사이클이 출현한 것을 정치 사회학자들은 알렉시스 토크빌의 효과 또는 덫으로 부른다.
저자가 대한민국의 탄핵정국의 시대를 보면서 알렉시스 토크빌을 다시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불안 때문이다. 나의 불안이 지나친 것일까? 그러나 탄핵 정국이후 대한민국은 정치적 카이사르주의가 사망 선고를 당한다고 해도, 기막힌 전제 국가로 회귀한다는 것을 방심할 수 없다. 사법 민주주의 기초는 시민을 도덕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시민은 자신의 일반의지가 담겨져있는 헌법과 법률 조항에 기꺼이 복종하고 의무를 준수한다. 법의 정신과 그 민주주의적 성격이 사라지는 곳에서 정치 에콜로오지는 먹이사슬과 포식자 그리고 거짓과 정글법이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리는 지옥이 되고 만다.
공공 신학자로서 나는 기도한다. 정말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지 않는가? 나의 조국이 수 많은 민주열사들의 희생 위에서 어떻게 만들어 온 국가였나? 이런 자랑스런 나의 조국이 전제주의로 역발현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전제주의를 막기위해 토크빌은 민주주의와 평등 그리고 다수의 지배독재를 방어하는 시민사회의 참여와 소수 의견의 보호를 강화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사회 문화적 측면을 강화하며 평등에 의한 진보와 그리고 위험요소를 탐구한다. 국민주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공화제는 자유의 남용과 제한을 자체안에 갖지만, 전문적인 재판관은 국민의 참여권과 개인의 자유를 집단적인 이기주의나 독재로부터 방어해야한다.
토크빌은 밑에서 위를 향하는 자유로운 결사체와 코뮌제도를 만들고 위로부터의 국가의 관료행정과 계릅지배로부터 시민사회의 자율적 영역과 침여 민주주의를 방어한다. 그러나 ‘자기이익’이라는 미국의 도덕문화가 산업 자본주의에서 영국의 자유 방임주의와 개인 이기주의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다. 토크빌의 민주주의는 극단적인 폭력주의나 영미의 자유방임주의와는 다른 길을 지적한다.
변혁과 인정정치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향한 길목에서 토크빌은 여전히 할 말을 가지고 있다. 탄핵 정국에서 사법 민주주의가 심하게 손상되는 위험사회에서 토크빌은 여전히 헌법 1조의 중요성에 기초하며, 자발적인 시민 사회의 승인과 시민주권을 강조한다. 정치적 카이사르주의가 자리를 가져서는 안된다. <헌법 1조가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