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에서의 민주주의>에서 원주민에 대한 야생의 문화를 언급한다. 문명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오랜 사회적 과정의 결과이다. 이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며, 각 세대는 이전 세대의 경험을 통해 이익을 얻는다. 모든 인종 중에서 문명에 가장 어렵게 적응하는 것은 사냥에 의존하는 부족이다. 목축 부족들은 실제로 자주 거주지를 바꾸지만, 이주의 경우 규칙적인 순서를 따르며, 종종 이전의 거주지로 되돌아온다. 반면 사냥꾼의 거처는 그가 쫓는 동물들의 거처에 따라 달라진다.
문명은 오두막에서 시작되지만, 숲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미국에서 인디언 법제자들의 오류는 한 인종을 문명화하는 데 성공하려면, 이들을 먼저 정착 시켜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다. 이들이 토지를 경작하도록 유도하지 않고서는 문명화는 불가능하다.
예를들어 프랑스 정착민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게으르고 교육받지 못했다. 그들은 야만인의 습관을 많이 익혔다. 영국 정착민들은 지능 면에서는 이들보다 훨씬 우수했다. 그들은 근면하고, 정보를 잘 알고 있으며, 부유하고, 자신의 공동체를 다스리는 데 익숙했다.
토크빌은 캐나다에서 두 인종 간의 지적 차이가 덜 두드러지는 곳에서, 영국인들이 캐나다에서 상업과 제조업의 주인임을 목격했다. 마찬가지로, 루이지애나에서도 상업과 제조 활동은 거의 앵글로-아메리칸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유럽인들은 이들의 자원과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원주민들이 토지 소유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대부분의 이점을 가져갔다. 그들은 매우 낮은 가격에 토지를 구입하거나 또는 강제로 점유했으며, 원주민들은 저항할 수 없는 경쟁에 의해 파멸되었다. 체로키 대리인의 보고서에는 인디언들의 피해를 기록한다. “백인들의 침입이 체로키족의 땅에 미친다면, 무해한 주민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Democracy in America, 376-84).
죠지 워싱턴은 의회에 보낸 메시지 중에서 “우리는 인디언 국가들보다 더 계몽되고 더 강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친절과 관대함으로 대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결한 태도와 고상한 정책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착민들의 탐욕은 지역 정부의 폭정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체로키족과 크리크족은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이전부터 자신의 영토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미국의 지역 주들은 이들을 독립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숲에 거주하는 인디언들의 아이들은 앵글로-아메리칸 판사, 법률, 관습에 의해 복종시키려고 했다 (Democracy in America, 384).
트크빌의 원주민에 대한 문화기술은 농업과 시장 그리고 사회적 노동에 대한 초점이 주어진다. 이것은 야생적 사고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노동, 시장 그리고 제조업과 산업은 문명의 발전에 토대를 이룬다. 토크빌의 분석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 인류학에 비교할 수 있다.
언어 기호학과 구조 인류학
레비 스트로스는 브라질의 아마존에서 야생의 문화에 접근할 때 인디언들을 만나지 못했다. 1935년대 단 한 사람의 인디언도 없었다. 그가 야생인들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이들은 레비-스트로스에게 이들의 관습과 신념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언어 소통을 할 수 없었다. 이들은 가까에 있지만 거울에서 보는 이미지와 같았다. 이들은 만질 수 있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과연 인간은 어느 곳에서도 항상 인간으로 존재하는 걸까?
문화 인류학자에게 호주의 원주민이나 브라질의 인디언 또는 아프리카 원주민은 야생인의 사고와 문화를 구성하는데 동일하지가 않다. 인류학자는 서구의 문화에 오염된 지역의 야생인들을 인간성의 측면에서 이해할 뿐이다 (Geertz,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350).
레비-스토르스는 자신의 구조주의 인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페르디낭 소쉬르의 랑그 (문법체계)와 파롤(소통)의 구분을 수용했다. 랑그는 시스템의 구조로서 집단적이며 공시적이지만, 파롤은 통사적이며 진화론적인 시간을 갖는다. 상징 구조와 전거들의 관계는 의미의 토대가 되며, 정서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기능적이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논리적이다. 언어에는 음소 (물/불/뿔/풀과 같은 낱말을 구별하는 기능의 소리)와 형태소 (일정한 의미를 지닌 최소단위) 그리고 단어와 같은 구성요소들이 있으며, 의미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의적이다. 미국인이 강아지를 dog로 부른다면 독일인은 Hund, 프랑스인은 chien으로 부른다. 언어는 문법과 문장의 구문에서 질서 잡히며, 소통을 위해 발화행위로 나타난다 (ibid., 354)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말하는 주체를 통해 발전되지 않는다 (파롤). 오히려 언어는 사인 시스템(랑그)이며, 언어학적 의미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와 연결망에서 결정된다. 언어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비교되는 데, 개별 연주는 이러한 심포니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언어는 사회적 현상이며 개별적인 언어의 사인 시스템은 사회관습에 의해 결정된다. 언어구조는 자율적이며 인간주체의 사유나 반성과는 상관없다. 랑그와 달리, 인간의 언어는 사회적인 관습이며 개인의 말하는 행위 (파롤)를 지배한다.
이것은 소쉬르의 기호학인데, 시니피앙 (나무라는 기호)과 시니피에 (나무 자체)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물자체는 언어의 시니피앙을 통해 알려질 수 없다. 소쉬르는 주체의 발화행위가 아니라 언어의 시스템에 주목하며, 언어 사용과 의미를 결정할 때 의사소통의 주체인 인간의 역할은 사라진다.
그러나 리쾨르는 기호학과는 달리 상징주의 시에는 다차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상징은 사유하게 하고 시를 읽는 사람의 반성과 해석을 필요로 한다. 한 개체를 사용하여 다른 개체를 대신하는 환유작용에서도 청와대는 대통령을 연상하며, 이러한 연상적 환원은 사실주의적인 산문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에서 환유작용과 다른 지향성의 차원이 있다. "시카코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ㅡ그곳을 여행 한다면 따뚯한 외투를 준비하라. 언어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말한다. 이러한 언어의 상징성은 구조 언어학에서 충분히 파악될 수 없다 (Ricoeur,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 77).
그러나 문화기술은 일차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접근하며 이후 현상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호학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야생의 사회와 문화연구에 적용되었다. 야생인의 관습의 총체성은 항상 질서화된 전체 즉 시스템을 형성하며. 이념형의 구조에 깔려있는 다양한 패턴들이 표현될 수 있다. 문화기술의 방법은 표면적인 패텬들을 기술하고, 이것을 기초로 심층구조를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들을 분석적인 틀에서 분류한다.
인류학은 외형상 관습과 신념 또는 제도들을 연구하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연구이다. 보편적인 문화 시스템이 인간의 정신과정을 구조화한다. 모든 언어의 공통인 문법은 구조를 의미한다. 이것이 말하는 주체 (파롤)을 결정한다. 언어학자는 표층현상에서부터 심층구조를 재구성한다. 문화 언어학자는 언어학자가 문법적 카테고리를 의식하듯이, 문화의 구조와 유형을 독해할 때 문화적 카테고리를 의식한다.
인간 주체는 언어-문화적 산물이다. 친족제도에서 (아버지/아들, 형제/자매, 고모/고모부/외삼촌/이모의 아들 등) 관계와 차이에서 의미적인 내용이 작동된다. 이항의 대립 (높고 낮음, 오른쪽과 왼쪽, 평화와 전쟁 등)은 기호학에서 처럼 야생적 사고와 문화의 토대를 이루며 소통체계를 가능하게 한다. 친족제도는 소통의 시스템이며 언어이다. 언어는 조직적인 체계이다. 인간은 단어를 교환하듯이 혼인규칙과 친족제도에서 여성을 기표처럼 교환한다.
이항의 대립은 식물분류와 개인적인 이름. 신성한 지명, 우주론, 머리 스타일 등에서도 확대되어 나타난다. 이항의 대립은 서로 관련되며 이러한 대립을 포용하는 보다 일반적인이며 보다 깊은 구조로 환원된다. 서로 다른 사회적 실제에서 우리는 결혼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교환, 교류에서 선물교환, 제의에서 상징교환 등에서 소통의 틀을 고려할 수 있다. 여기에 깔려있 논리적인 구조들은 심층해석을 통해 드러낼 수 있다.
예를들면 21세기 사회는 18세기 사회와 비교해볼 때, 역사적인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차이가 없다. 구조는 장기 지속하며 심층에 깔려있는 무의식과도 같다. 역사는 사건으로 이해되며, 구조는 공시적인 관계들로서 심충에 놓여있다. 모든 인간은 사회구조에 참여하면서 개인의 주체성은 구조 안으로 해소된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언어와 교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존재이다. 역사적 사건인 프랑스 혁명도 언어처럼 이중구조 (랑그와 파롤)를 갖는다 (Levi-Strauss, Stuructural Anthropology, 210).
모든 혁명의 심층구조로 프랑스 혁명은 랑그의 문법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개별적인 혁명사건들은 파롤과 같은 기능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레비-스토르스의 구조주의는 문명사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프랑스의 경제사학자 페르디낭 브로델은 지중해 문명을 분석하면서 일시적을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이나 개인의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장기지속에 주목하고 이것이 역사의 토대와 심층구조처럼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익명의 역사이며 심층에서 작동하며 종종 침묵속에서 천천히 흐르며 진행된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들은 대부분 변덕스러우며 모든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Braudel, On History, 28).
주체 중심과 외부 전거체계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무의식은 상징의 사회질서에 기초되며, 언어와 사회의 소통체계 즉 구조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러한 소통체계에서 더 이상 초월적인 전거나 주체는 중심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 관계들의 내적인 놀이와 교환을 통해 의미가 독립적으로 산출된다. 이것은 닫혀진 것이며, "구체성의 과학"으로 특징되며, 이러한 닫혀진 시스템의 틀에서 문화적인 형식들이 만들어진다. 토템의 법은 사회구조를 조직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문화를 만들어낸다 (Levi- Strauss, 240).
레비-스토로스의 토템의 법은 에밀 뒤르캠의 토템 종교의 분석에 근접한다. 전체나 집합은 개인의 합보다 더 복합적이며 개인의 우위에 있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는 언어 기호학을 통해 구조이론으로 발전된다. 예를들어 구조분석은 이후의 신화에서 달라지는 관계적인 변화들과 차이들을 고려하고, 신화에서 드러나는 반복과 차이와 대립과 해소의 법칙을 발견한다. 신화의 관계의 그물망에서 볼 때 신화는 근친상간을 프로이드처럼 주요 모티브로 해석될 수 없다 (Levi- Strauss, 217).
세계는 언어처럼 구성되며, 문화는 많은 관계들의 그물망과 소통체계로 형성되며 작동된다. 언어는 관계들의 체계안에서 무의식적인 구조로 파악되며, 문화의 측면 (친족체계)에 대한 개념적 모델이 된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칸트적인 의미에서 선험적인 구조가 존재한다. 이러한 선험구조는 문화의 영역에서 사회적 소통/교환 체계에 상응한다.
문화 언어 기술학에서 칸트의 이성 철학은 주체의 이성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의 전거체계로 이동한다. 근친상간의 금지의 보편화는 단순히 유아기적 거세공포가 아니라 족외혼와 관련해서 문화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야생의 사고와 문화는 프로이드의 생물학적 심리학이 아니라, 언어 계보학적 (루소)으로 즉 심층 언어처럼 의미와 도덕감정 그리고 예술적 차원을 통해 독해되어야한다.
상징의 질서나 집단적인 신화들과 관련하여 무당의 치유기능에서 구전이나 음성문화도 존재한다. 특히 산모의 해산에 관여하는 무당의 노래에서 활력적인 힘은 플라톤적인 형상이나 원형에 상응하기도 한다. 상징의 기능은 효과적이며 정신분석처럼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Structural Anthropology, 34, 46, 189). 이런 측면에서 보면 무속의 제의애서서 드러나는 음악이나 음성언어는 반드시 랑그의 문법에 귀속될 필요가 없다. 샤만은 여전히 주체의 역할을 한다.이러한 제의적인 실천은 부족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사회적 기능을 보여준다.
래비-스트로스: 한계와 비판
구체성의 과학에 의하면, 야생인들은 예를 들어 자연의 세계와 사회 그리고 자아에 대한 실제의 모델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지각된 특수한 것들을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체성으로 질서화한다. 이것은 현대인과는 달리 지각된 특수한 대상들의 생생함을 일반적인 개념의 설명을 위해 희생 시키지 않는다.
감각의 실제들, 예를들어 캥거루와 타조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계절에 따른 밀물과 썰물의 차이나 태양과 달의 움직임이 구별된다. 야생의 사고에서 구조적 모델와 실제의 질서는 유비론적으로 표현된다. 야생의 사고는 세계의 이미지 (imagines mundi)에 따라 지각된 것을 확장시킨다. 이러한 사고는 정신적인 구성을 만들며, 이것을 흉내 내면서 야생의 사고는 세계를 이해한다 (Geertz,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352).
야생의 논리는 만화경 (칼레이도스코프)처럼 거울로 된 통에 형형색색의 유리구슬, 종이조각 등을 넣어 아름다운 무늬를 볼 수 있게한다. 이런 방식에서 다양한 무늬와 패턴들은 산출 되지만 무한하지가 않다. 무늬와 패턴은 칩들 (상아나 뼈로 만든 패) 로 구성되며, 이들의 기능은 칩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칩들은 신화와 마술과 경험적인 학습에서 돌출되는 이미지 (토템 동물, 신성한 색, 바람의 방향, 태양 신 등)이며, 변형은 만화경의 구성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회와 구체적인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표현하고, 세계를 소통시킬 수 있는 상징구조를 생산한다. 구조의 형성에서 칩은 페턴과 무늬에 따라 비정규적으로, 단편적으로 배열되며, 구조는 칩의 작용을 지배하는 내적 법칙이 된다.
상징적인 관계의 세계는 사회학적이며, 개인의 행동은 집단적인 상징체계에 기초된다. 언어는 집단 무의식처럼 개인의 정신이 아니라 사회의 외부에 구조화되어 있으며, 개인의 발화행위와 문화에 토대가 된다. 언어는 규칙과 문법을 통해 사회 체계를 만들어가는 인간사유의 보편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폴 리쾨르에 의하면 언어학은 욕망의 의미론에서 징후나 판타지, 꿈 그리고 무의식적 주제들에 국한될 수 없다. 언어는 자체상 규칙과 상징 그리고 문장론을 포함하지만, 프로이드의 꿈의 텍스트는 무의식의 억압과 왜곡에만 관계한다. 꿈의 퇴행적 그리고 원초적 성격을 원초적 언어와 일치 한다고 본다. 정신증세 환자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의 복합적인 차원에서 의미효과 소통의 지향성에 적용이 불가능하다. 각각의 언어는 독특하며 언어의 방식에 따라 세계를 구성한다. 꿈의 논리는 실재의 언어의 논리와 다르다. 일상의 언어에서 세미나의 보고나 비즈니스를 위한 소통은 징후나 꿈 또는 억압된 욕망을 통해 독해될 수 없다 (Freud and Philosophy, 397).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무시간적이며 본능과 나르시즘과 더불어 모든 문화적인 일들은 과거에 의해 설정된다. 이것은 프로이드의 고고학이지만 상징의 중층결정을 해석을 위해 주체의 해석학적 반성을 피해갈 수 없다. 프로이드의 욕망의 의미론에서 나타나는 징후나 꿈이나 중층결정에서 성적충동이 사물표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욕망과 언어의 관계는 애매하며, 무의식의 상징주의는 엄격한 의미에서 언어학적 현상이 아니다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 168).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구조주의와 해석학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 상호 보충될 필요가 있다. 구조주의 인류학에서 집단 무의식은 프로이드처럼 개인의 내면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외부에 시스템처럼 존재한다. 개인의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성되어 있다면 (라깡), 레비-스토로스에게서 언어는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와 문화의 시스템에서 작동하며 심층구조처럼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문명은 장기지속의 실제이며, 그것은 문화의 영역괴 장소에서 파악된다. 장기지속은 구조들의 다함이 없는 역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장기지속은 역사학과 사회학을 만나게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예를들어 근친혼의 금지는 장기지속의 실례에 속하며 마치 무시간적으로 흐르며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 신화 또한 서서히 발전하먀 장기지속에 상응한다.
이것은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역사와는 다르다.
야생의 문화에서 역사주의나 존재론에 기초한 해석학적 순환은 없다. 오히려 야생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구조 인류학은 이항의 대립에 기초한 사회적 관계나 시스템을 역사와 관련없이 공시적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차이와 다름을 나는 클리포드 기어츠의 문화 해석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