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의 사상적 배경
에코 페미니즘과의 비판적 대화를 위해 나의 사상적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억압받는 여성의 경험적 지식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나는 여성의 경험적 지식에 접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비판적 대화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성의 에코 경험이 문화 사회학적인 영역으로 들어올 때, 나는 문화와 사회적 구성과 계층을 분석하면서 에코 페미니즘과 우회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로 본다.
저자는 공공신학을 사회 생태학의 관점에서 환경 사회학으로 발전시키는 사람이다. 이러한 방향을 위한 철학적 바탕으로 스피노자의 하나님/자연에 대한 코나투스 접근을 매우 중요하게 고려한다. 스피노자는 저자에게 욕망과 총족의 체계 변화에서 환경 사회학을 환경 시민국가의 거버넌스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에코 페미니즘을 나는 코나투스 이론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자연에 대한 직관적 사랑에서 드러나는 영원성의 관점과 코나투스는 모든 양태 존재들의 자기실현을 말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심층 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브라만/아트만의 합일에 기초한 베단타 철학의 일원론으로 보기 어렵다. 심층 생태주의자들이 스피노자에게 입은 영향은 엄청나다.
저자가 보기에 스피노자는 유대적 유일신론의 관점에서 있고 모제스 마이오니데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영원성의 관점은 오히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활동적으로 사랑하고 우주를 덮어버리는 심정윤리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저자가 공공신학과 에코 인간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학제적 소통을 시도하는 환경 사회학과 시스템 생물학에 코나투스적 철학을 제공한다.
그런가하면 스피노자와 더불어 나는 한스 요나스의 철학적 생물학에 영향을 입었다. 한스 요나스는 <생의 현상>에서 유대 기독교적인 창조의 선함에서 시작한다. 인간 현존재뿐 만 아니라 모든 유기체는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염려하고 삶을 보존하려는 가치를 갖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생에 필요한 자유의 몫을 나눈다. 자신의 생안에서 초월의 내적지평을 열망하고 개별적인 유기체는 살아있기 위해 환경의 서식처를 만든다. 나는 한스 요나스가 말하는 자연적인 생의 자유를 세포 생물학의 용어인 오토포이에시스(자기 창조성)로 이해한다. 그리고 일리야 프리고진의 소산구조이론을 통해 비평형상태에서 유기체의 생의 출현을 지속적 창조론으로 발전시킨다.
요나스가 모든 유기체들에게 존재의 범주로 파악하는 것은 근대의 사유를 뒤집는다. 그의 입장은 스피노자에게 공명한다. 요나스는 <스피노자와 유기체이론, 1965>에서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신체에 대한 유기적이며 생물학적인 중요성을 보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홉즈가 모든 존재들을 우주적 기계의 일부로 파악하는 기계론적인 이해와 다르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모든 복잡한 물질적인 전체들을 유기체로 보았고 네트워크의 산물로 파악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에서 나타나는 목적론적 이념은 탈각되고, 스피노자의 유기체이론은 부분과 전체의 상호 의존성이며 관계론적인 소통에 있다.
근대성 안에서 근대성을 해체하는 트랜스 모더니티를 나는 스피노자와 요나스에게서 본다. 더 이상 윤리의 원리는 자아의 자율성이나 공동체의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자연에 의해 객관적으로 할당된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윤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접합되며 존재자들의 동등성에서 파악된다.
사회 자연성과 하나님의 자기제한성
요나스는 저자가 보기에 환경 사회학에서 논의되는 사회자연성(Socionature)에 근접하며 윤리적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사회자연성 개념은 인간의 사회는 환경과 더불어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사회는 자연적이며. 환경 또한 부분적으로 사회적이다. 이러한 변종의 접합개념은 문화로서의 생활세계와 자연의 생의 세계를 이분화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사회자연성은 에피게놈의 생물학으로 이어진다. 생태계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수질의 변화와 날씨 그리고 기후의 온난화 등을 통해 DNA 메텔화 변형이 나타난다. 환경요인으로 인해 오는 메텔화의 변형은 동 식물의 에피게놈의 치유를 위한 기술의 도덕적 차원을 환경 윤리의 책임성으로 부각시킨다.
모든 유기체들은 주관적으로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을 피하고 자연안에 내재하는 선함과 생을 추구하는 가치를 말한다. 선함자체가 가치의 객관적 실재로 설정되며, 생을 통해 존재는 자신에게 긍정을 표현한다. 이러한 긍정의 표현을 나는 코나투스의 활동에 기초해 파악한다.
요나스에게 창조는 선한 것이며 자연의 유기체의 존재들은 죽음을 회파하고 생명을 취하는 가치가 내재한다. 유기체의 존재들의 삶에서 요나스는 자율성과 원초적인 자유의 형식을 본다. 이러한 삶을 파괴하는 기술지배와 남용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으로 들어오며, 윤리는 환경의 차원으로 전개된다.
자연은 기술 지배화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가치의 근원이며, 생활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요나스는 후설의 세계의 수학화 테제를 세계의 기술화로 변형시킨다.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기술시대의 생태학적 윤리를 추구하며, 자연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존재론적인 해명을 한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독특한 자리를 갖는다. 개인의 진정한 실존은 열린 미래를 향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이 있다
요나스의 유대 신학적 접근은 하나님의 자기제한성을 아유슈비츠의 악에 직면해서 반성한다. 그리고 근대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한다. 인류세의 파괴적인 힘에 직면하여 이러한 가술 지배의 악은 인류와 지구의 생을 멸절시켜 버릴 수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요나스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기독교적 만유재신론과는 거리가 있다. 하나님은 악안에 존재하고 악을 방기하거나, 어니면 악이 하나님안에 있어 하나님을 악의 근원으로 보지 않는다.
요나스에게 창조는 해방신학에서 주장하는 기독교 민유 재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신플라톤적인 유출과는 다르다. 성서적 창조는 해방주의자들이 부각시키는 우주적 신비주의나, 심층 생태주의 또는 가이아 여신과는 거리가 있다.
레온나르드 보프는 에른스트 헥켈 (1834-1919)의 생태학의 정의--"살아있는 유기체들과 환경의 상호의존성과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생태학적 홀리즘으로 파악한다. 더 나아가 양자역학을 포함하고 원초적인 에너지의 무한한 대양의 신비로부터 모든 것들이 유출한다고 말한다. 무한한 공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된다. 우주 전체는 하나님의 관계론적 상호작용 즉 페리코레시스에서 유출한다. 그렇다면 우주는 신성한 존재로 고양되며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한다 (Boff, Ecology and Liberation, 11, 41, 50). 이것은 기독교적 아니미즘에 가깝다.
창조와 에코 인간성
나는 요나스의 기술시대의 책임윤리를 공공신학과 생태학을 위해 중요하게 고려한다. 요나스는 쉐키나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인간성에 연관시키며, 하나님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은 세계를 초월하지만 쉐키나를 통해 피조물들의 고난에 참여하며, 창조안에 내재한다. 요나스는 쉐키나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으며, 인간은 세계와 생을 위해 돌보는 청지기로서 중대한 책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 반성에서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과 악의 문제 그리고 하나님의 자연의 생에 개입을 배재하는 데 나는 수긍하지 않는다. 아유슈비츠 앞에서 하나님의 침묵 또는 무력감을 대산해서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 (티쿤 올람)이 강조 된다고 해서,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나님의 주권성과 고난받는 하나님은 성서의 네러티브에서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역사와 자연에서 이스라엘과 피조물들을 여전히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성서는 하나님의 권능을 역사적 상황과 삶의 자리를 도외시한 체 절대적이며 무시간적인 전능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의 개입에서 하나님의 다른 차원의 성품들( 심판, 정의, 긍휼, 아픔, 자기 제한성, 용서, 새롭게 하심 등)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전능과 선하심을 인간은 유비론적으로 알고 표현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완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 남는다. 하나님의 절대권능과 절대선함은 인간의 이해능력과 믿음 안에서 파악되지, 하나님의 자기제한 (카발라의 침춤)의 신비로 파악하기 어럽다.
하나님이 창조에 허락하신 자율성과 생의 리듬과 순환 그리고 종의 소멸등을 하나님의 자기제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립하여 파악할 수 있을 까? 예를들어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절대권능과 절대선함은 의심이 주어진다. 희생자들은 하나님의 재단 앞에서 자신의 희생을 위해 항변을 한다 (계 6장).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시간과 지속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영원성의 관점에서 (부활, 새하늘과 새땅) 답변된다. 하나님의 영원성의 관점에서 인간의 책임성은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성은 악 앞에서 움츠러드는 무력함과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창조는 하나님의 해방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안식은 해방된 자연의 생에 내재성을 의미하며, 피조물과 더불어 이들에게 자유와 창조성을 허락하는 동행의 은혜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동행은 진화의 시간과 지속의 관점에서 종의 소멸에 같이하고 아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소멸하는 피조물들의 종을 향해 영원성의 관점에서 빛을 비추신다.
만일 쉐키나가 하나님의 빛의 성광들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관계의 갭을 매우는 유대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임재하고 이들의 유폐와 고난에 동행하고 참여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성의 관점 즉 하나님이 창조이전에 있던 토라를 연구한다는 초월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초월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토라의 지혜와 연관되며 유배당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드러난다 (Rosenzweig, The Star of Redemption, 410).
남은 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쉐키나의 연합을 위해 두려움과 사랑으로 윤리적인 책임과 토라의 정의를 실현 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을 통해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껴앉는 구원의 과정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토라를 주시고 쉐키나가 남은 자들의 영혼에 섬광처럼 부어졌다면, 예례미아의 새언약이 여기서 성취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게 하기위해 즉 쉐키나와 하나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영광과 예레미아의 새언약의 용서를 (예례 31:31) 인간의 책임성을 통해 스스로 의롭게 하지 않으시는가? 성령의 부어주심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의로움이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을 새롭게 이해하게 한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두려움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들어온다.
성서의 내러티브는 창조를 영원성의 관점에서 해방으로 파악하며, 안식의 내재성은 돌봄으로 나타나며, 인간의 청지기적 위임은 하나님과 피조물들을 위한 에코 인간성의 토대가 된다. 영원성의 관점과 사회 자연성에 대한 공공 신학적 반성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을 자유를 허락하는 동행의 은혜로, 그리고 자유를 책임있게 해방적으로 실현하는 환경윤리를 위한 토대로 부각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에코 페미니즘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본다.
에코 페미니즘과 우주적 영성
나무에 대한 이미지에서 나는 에코 페미니즘의 지향성을 본다. 나무는 에코 페미니즘 운동의 생명력과 힘을 포착한다. 뿌리는 어머니 대지의 땅속 깊이 뻗어 있다. 줄기는 질감, 형태, 크기, 잎, 뿌리, 가지의 완벽한 독창성으로 하늘의 자유를 향해 솟아오른다. 잎은 죽음의 독성 이산화탄소를 생명을 주는 산소로 변환한다. 그러면 잎들은 죽어 퇴비가 되어 토양을 재생한다. 이러한 창조, 양육, 치유 및 재창조의 순환적이고 리드미컬한 과정은 에코 페미니즘의 우주적 영성에 대한 열망을 상징한다 (H. Kyung, Ecology, Feminism and African and Asian Spirituality: Towards a Spirituality of EcoFeminism, in: D. Hallman, Ecotheology, Maryknoll 1994, pp. 175–78)
에코 페미니즘의 나무 이미지에서 가지의 완벽한 독창성으로 하늘의 자유를 향해 솟아오르며, 우주적 영성의 열망이 표현된다. 줄기가 질감, 형테, 크기, 잎, 뿌리, 가지의 완벽한 독창성으로 자유를 향해 솟아 오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코 폐미니즘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나 다양한 토착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영지주의적 순환론적 세계관이 우주적 영성의 열망을 상징한다. 완벽한 독창성으로 하늘의 자유를 솟아오르는 것은 권력/담론의 관계안에 서 있고 어떤 점에서 "전도된 남성주의"가 재현된다. 여성의 경험을 기초로 백인 엘리트나 중산층 여성의 담론이 아시아의 증상층과 하위계급의 경험을 우주적 영성으로 균일화 될 수 있는가?
사회 계층론에서 부와 권력 그리고 교육과 취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신분과 계급의 갈등과 투쟁은 에코 페미니즘의 특권을 구체적 보편주의 또는 상황-상호맥락-보편성의 틀에서 재고하게 한다. 우주적 영성의 큰 담론을 섹슈알리티를 근거로 모든 상황의 구체적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할 것 같지는 않다. 공공성의 진리는 구체적 보편성에서 각각 다른 생활 세계의 다원적인 구조를 인정하면서 추구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원이 실종될 때 숲의 생태학과 유기체와 환경의 네크워크 그리고 리좀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는 실종된다.
우주적 영성을 향한 열망과 완벽한 하늘의 자유의 추구는 나무의 뿌리에 기초한 리좀적인 사유와 생명망의 네트워크의 소통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나무/몸에 대한 집중은 생태계에 들아오는 해로운 요소들에 대한 방어, 그리고 영향분의 상호제공 등을 통해 드러나는 심비오시스의 생의 차원을 파악하지 못한다.
숲은 나무가 상징하지 않는다!
생태계에서 이전에 존제하지 않은 새로운 속성이 개별적인 시스템에서 출현 할 때, 부분들은 "녹아내린" 것이 아니라, 독특한 새로운 특성을 생성하기 위해 통합된다. 계층이 다양한 하위 시스템 수준으로 분해될 때. 하위 시스템은 여전히 상호작용하고 재조직하여 더 높은 수준의 복잡성을 달성할 수 있다.
전체 시스템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변이는 부분의 변이의 합계보다는 덜 하다. 예를 들어, 숲 공동체의 광합성 속도는 개별 잎이나 나무의 속도보다 변동성이 크지 않다. 왜냐하면 한 구성 요소가 느려지면, 다른 구성 요소가 보완하기 위해 빨라질 수 있다. 각 수준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속성과 증가하는 항상성을 고려할 때,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구성 요소를 알 필요는 없다.
생태학의 연구에서 시스템 수준의 연구는 자체적으로 세 가지 계층 구조 즉 시스템, 서브시스템, 그리고 수프라 시스템이다. 각 생물체계 수준은 출현 속성과 감소된 변이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하위 시스템 구성 요소의 합을 가지고 있다. 숲이 단순히 나무들의 집합체 이상이라는 것은 실제로 생태학의 첫 번째 작업 원칙이다 (Odum, The Fundamentals of Ecology, 8).
생태학 연구에서 나무는 숲을 상징하지 않는다! 숲은 다양한 나무들이 중심부들과 연결된 복잡한 시스템이다. 서로 겹치기도 하는 연결망에서 나무들은 피드백과 소통과 적응을 통해 생명계를 유지한다. 숲의 생태계에서 리좀은 곰팡이와의 공생관계 즉 균근의 연결망을 형성한다. 균사체 (mycelium)는 하얀 곰팡이 실로 이루어진 균사의 집단인데 뿌리와 관계를 유지하고, 나무들은 균사체를 통해 이웃의 나무들과 소통한다.
균사는 토양에서 질소나 인 등 영양성분과 수분을 빨아들여 나무 뿌리에 공급한다. 뿌리는 곰팡이 균과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며 이러한 연결망에서 나무들은 화학적인 시그날을 보내면서 직접적인 대화(cross talk)를 한다. 이러한 소통과정을 통해 생태계에 침해들어오는 해로운 요소들 (병원균, 독성물질, 약탈자 등)에 방어력을 형성한다. 숲의 생태학에서 나무가 자유와 생명을 상징하기보다는 오히려 네크워크에 기초한 심비오시스가 생의 의미를 상징한다.
생활 세계의 측면에서 볼 때, 급진적인 것은 뿌리에 천착하고 뿌리로부터 사고하는 것이며, 이것은 관계에 기초된 시스템 사고를 말한다. 급진적인 것은 관계의 총체안에서 뿌리박고 사유하는 것이며, 뿌리가 없이 토양의 생명은 유지될 수가 없다. 리좀의 개념은 균근관계와 나무의 성장교류 그리고 생활세계와 연결되어있는 소통 시스템이며, 심비오시스의 급진성을 지적한다. 이러한 리좀과 심비오시스는 에코 페미니즘에 은닉된 전도된 남성주의를 문제틀한다. 이것은 에코 페미니즘의 우주적 영성을 향한 완벽한 자유를 구체적 보편성의 관점에서 상대화하고 다원화한다.
만일 에코 페미니즘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영성을 통합하고 하나님이 우주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우주는 창조주와 더불어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화의 우주적인 춤을 춘다면, 이것은 지속적 창조의 우주적 전개로 부각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과 더불어 공동 창조자가 된다.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은 공동 창조자로서 우주적 춤을 추는 존재로 고양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인 페리코레시스를 춤으로 개념화하고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자연중심주의나 기독교 아니미즘에 근접한다. 만일 인간으로서 남성이 다른 자연의 존재자들과 더불어 신성하다면 에코 페미니스트이 말하는 가부장적인 지배와 자연파괴의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일 까?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공동 창조자가 되는 것을 무엇을 말하나? 자연이 하나님과 춤을 추면서 공동 창조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공동 창조의 영역에서 신과 자연과 인간이 합일되는 우주적 페리코레시스를 가르치는 아시아의 영성은 무엇인가?
힌두교의 베단타에서 브라만과 아트만의 합일을 말하는가? <찬도기아 우파니샤드 6.8>에서 타트 트밤 아시 (tat tvam asi; 그것이 바로 너다)에는 춤의 메타포가 없다. 아니면 불교의 공과 연기를 의미하는가? 여기에는 창조의 개념을 찾아보기 어렵다. 도교의 음양이론에서도 상호 보충성은 창조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이 하나님을 창조한다는 범신론적 만유재신론을 의미하는가?
공공신학과 사회생태학
에코 정의는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며 생물종의 다양성의 보존은 공공윤리의 중요한 영역에 속한다. 공공신학은 에코 정의를 위해 한경오염과 변질에 대한 사회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요소를 고려한다. 여기에는 1) 인구분포와 증대, 2) 자원에 대한 경제적 생산과 소비, 3) 과학기술의 양가성과 위기: 기술은 부를 증대하지만 동시에 불평등을 야기한다 (위기사회 테제: 울리히 벡), 4) 자본주의 글로벌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초국가적 기업들에서 나타나는 경제와 정치의 연계 (Martin-Schram & Stivers, Christian Envioremental Ethics, 10-16).
에코 페미니늠은 비평형 상태에서 생의 출현을 말하는 소산구조와 열린환경의 복잡성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나무의 생을 구성하는 많은 현상들과 네트워크 시스템은 생태학의 에피게놈의 차원을 열어준다. 날씨와 기후에는 환원 불가능한 예측 불가능성이 있다. 생명체와 그것들을 위협하는 질병의 복잡성과 적응성이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행동에 연결되어있다. 자연의 생은 낭만주의나 아니미즘에서 말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신성함이나 상호 의존성으로 특징되지 않는다. 오히려 날씨와 수질의 온도, 토양의 상태 그리고 기후 온난화를 통해 오는 질병과 종의 사멸이 있다. 생태학을 치유하기위해 히스톤의 변형과 DNA 메텔화 그리고 에피게놈의 리모델링은 사회 생태학에서 치유기술의 역할을 윤리적 책임감으로 연결한다.
생태학을 이해하려면 복잡성 이론, 시스템 생물학, 사회 생태학, 네트워크 이론 등과 같은 새로운 과학들을 통해 복잡한 행동이 어떻게 간단한 구성 요소들의 네트워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지 검토해야한다. 오늘날 생태학은 헥켈의 생태학의 정의를 넘어서서 통합학문으로 발전하며, 리서치 팀이 구성되며 객관적 관찰에 근거한 논리와 통계에 기반한다.
비평형 상에서 고차적인 질서와 새로운 생으로 출현하는 소산구조이론은 생태학에 설정될 수 있고, 세포의 중지-평형-혁신의 지질학적 과정에 연결된다. 여기서 유기체의 변이와 다각화를 용이하게 하는 것은 세포의 코어보존 과정 (크로마틴 리모델링)과 더불어 유기체의 변이를 다각화하도록 촉진해주는 수 많은 연결고리들의 활동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나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로 표현하며, 요나스가 언급한 생의 내재한 가치로 개념화한다.
선한 삶을 향한 열망과 활동의 확대는 에코 정의에 대한 사회학적 반성을 통해 사회자연성을 환경 시민국가로 전개될 수 있다. 성서의 창조와 생태학은 여기에 공명할 수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생활세계의 의미 지평과 문화의 침전도 그리고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 다 사회구성과 계층안에서 부와 권력과 교육과 취업 등에 접근하는 정도에 따라 격차가 달라지고 조건지어진다. 인구증가는 인류세에서 가장 큰 환경 오염의 주범이다. 여성의 경험이라고 이런 환경오염을 피해갈 수 있는가?
인류세에서 날씨와 수질의 변화 토양의 부식, 그리고 기후 온난화와 같은 중층적인 요인들은 동식물의 에피게놈에 결정적인 영향과 질병을 가져온다. 이것은 지구의 생을 그리스의 여신 가이아 이름을 갖다 부친들, 아니면 심층 생태주의에서 말하는 브라만/아트만의 합일이라는 생태적 자아를 강조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아니면 해방신학에서 우주적 신비주의를 강조하거나 기독교 아니미즘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상호연결과 신성함을 통해 반기술적인 태도를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책임하게 방기 되고 만다.
이와는 달리 공공신학은 에코 인간성과 에피제네틱 기술의 치유차원에 주목하고, 생태학을 둘러싼 과학의 담론을 경쟁하는 리서치 프로그램들 (이마 라카토스)에 대한 이해와 해명을 통해 일차적으로 분석한다.
파라다임 변화는 용어 몇 개를 바꾸어서 사용한다고 해서 출현하지 않는다. 파라다임 변화는 생의 멸절의 위기에 앞에서 숙론적인 성찰을 통해 코나투스 정치학으로 이전 되어야한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에서 자연에 대한 종교 문화적 태도는 생태적 실재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인간이란 욕망과 충족의 체계변화에서 살아간다. 아무도 벗어나지 못한다. 에코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