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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사무라이>와 근대성의 신화

by 파레시아 2025. 2. 1.

나는 앞서 동학사상과 농민혁명의 관계를 사회학적으로 검토하고 성리학의 틀에서 재구성했다. 이제 몇 차례에 걸쳐 일본의 근대사를 사회학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일본의 근대성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나는 일본의 어두운 역사와 조선으로부터 받은 사상의 영향을 해명한다. 봉건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을 시작하면서 퇴계의 영향이 중심으로 자리한다.

 

사회학은 역사를 '영향사'로 보기 보다는 가급적 한 시대의 역사적 조건을 재구성하고 사회구성의 틀에서 신화의 전통으로 내려온 역사의 '구라'들을 해체한다. 그리고 유효한 역사를 사실주의적으로 찾아내려고 한다. 역사에서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마차 그 시대를 산 것 처럼 역사를 상품화하고 물신숭배주의로 나간다면, 비판적 사회학자는 사회구성을 통해 역사에 깔려있는 일반구조와 이념과 물질의 서로 엮어있음과 권력의 지배 방식을 문제틀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오늘의 현재사를 다시 쓰게된다. 이것은 해체로서의 역사를 말하며, 내재적 비판과 해방의 기흭을 통해 포스트콜로니얼 역사를 전개해나간다.

 

메이지 유신과 <마지막 사무라이>

 

2003년도 미국에서 톰 크루즈가 주연한 “마지막 사무라이”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1990년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늑대와의 춤”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사무라이” 가 지나치게 일본의 무사문화를 낭만주의화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 영화의 배경은 메이지 유신이 도입되고 사무라이들의 저항을 야기하던 시대를 그린다.

 

정치가 오무라가 미국 에서 알그렌(톰 크루즈역)을 초청하고 군대훈련을 맡기면서 메이지 시대로 순탄하게 진입 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주 가쓰모토의 저항에 부딫치고 결국 포로로 잡힌 알그렌은 산간 부락에 사는 사무라이들의 삶과 문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사무라이에 동조하는 알그렌과 가스모토는 베글리 중령이 이끄는 신식 일본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하면서 가스모토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알그렌은 천황을 알연하고 가스모토의 여동생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여기에 나오는 가스모토는 일본 사무라이의 이이콘으로 불리는 사이고 타카모리 (1828-1877)인데, 1877년 그는 세이난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도피생활 중 할복했다. 사이고는 에도 막부 (쇼군)을 무력으로 사임시켜 메이지 유신을 여는데 공을 세웠다. 그의 조선 침략론이 메이지 정부에서 서구파에 의해 실패해 낙향하지만, 이에 저항하는 사무라이들이 그를 반란의 수장으로 서게했다.

 

사실, 프랑스의 장교 쥘르 브뤼네 (Jules Brunet)가 1866년 일본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막부세력과 신정부를 요구하는 세력간에 일어난 보신 전쟁(1868-9)에 참가 했지만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지막 사무라이”는 프랑스 장교를 미국장교로 둔갑 시키고, 사무라이 계층이 사실은 다양하고 그 다지 영웅적이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사실을 빠트린다.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스스로 쇼군에서 물러나고, 대정봉환이 이루어졌다. 14 살 의 천황 메이지는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되고 일본은 유신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영화와는 달리, 사무라이들의 반란은 서구의 문물로 인해 사라져가는 전통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은 산간지방에 고립된 채 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영주를 호위하면서 도시에 거주했다. 심지어 반란에 가담한 사무라이들은 칼과 함께 조총으로 무장한 경우도 허다했다. 이미 포르투칼을 통해 조총기술이 개발되었고, 조총은 나가시노 전투 (1575)와 임진왜란 (1592-1598) 에서도 사용되었다.

 

에도 막부는 1603년 부터 1868년 사이 봉건시대를 지배했던 쇼군제도였고, 일왕은 권력이 없는 명목상 바지 사장 격이었다. 막번체제로 인해 지방의 영주들 (다이묘)은 해마다 에도에 와서 생활하는 이중정책으로인해 이들의 번은 약화 되었지만, 중앙정부 에도는 상업이 발전했고 100만명 정도의 대도시였다. 평화의 시기가 지속되면서 영주들은 재정문제로 압박을 받으면서 사무라이들을 줄이기 시작하는데, 하급 사무라이들은 상인의 삶으로 전락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1616년 사무라이 미쓰이 다카토시인데 메이지 시대의 미쓰 이 재벌의 선조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사무라이”는 백인군인을 구원자의 모습으로 채색한 사무라이의 미국화로 부르기도한다. 당대의 사무라의 역사와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리지 못한다. 이런 것을 보면 일본도 역사 왜곡에 탁월하지만 미국도 만만치가 않다.

 

왜 인간은 역사를 날조해서 신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만족과 평화스러음을 느끼는 가? 비판적 사회학자는 역사를 단선적으로 나에게 이어 내려오는 영향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역사에 문제틀을 하고 계보학의 관점에서 유효한 역사로 파악하고 현재사를 다시 쓰려고 한다.

 

에도 막부: 난학과 유교

 

에도막부에서 사무라이는 농부, 장인 그리고 상인을 지배했다. 이들은 인구 10% 미만에 속하는 엘리트 신분이었다. 지방 분권적인 봉건제(다이묘)는 에도의 중앙집권 막부체제에 의해 지배 당했다. 1631년 이후 상업 자본이 성장하면서 초닌(상공인)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민계층은 혹심한 조세와 다이묘와 사무라이의 에도 체류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비참한 삶을 살았다. 평화의 시기에 하급 사무라이들 가운데는 농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1637년 4만명에 이르는 농민반란이 시마바라에서 4개월간 일어났다. 당대 카톨릭 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원인이었지만, 기독교인 무사들의 결사저항은 대단했다. 화란은 난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막부는 1636년 화란과 무역을 개방하고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를 세웠다. 난학이라는 서양학문이 형성되고 계몽이념과 자연과학의 전초지가 된다. 그러나 일본은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으로 잡혀온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문화와 예술에 빠질 수 없는 기여를 했다. 또한 조선의 유학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후지와라 세이카 (1561-1619)는 30세의 승려 출신이었지만, 1590년 당시 53세로 조선 통신사로 간 퇴계의 제자 김성일로 부터 신유교를 접했다. 그는 퇴계의 “천명도설”에 깊은 영향을 받고 승려복이 아니라 유복을 입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서 유교와 중국의 역사를 강의했다. 그는 유교를 일본의 신도와 결합하고 이에야스에게 통치이념으로 수용하게 했다. 후지와라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막부체제 초기에 주자학을 관학의 지위로 올려놓았고, 그의 제자들은 퇴계를 주자 이후 최고의 사상가로 존경했다.

 

데지마에서 화란의 동인도 회사의 의사로 일한 독일인 앵글버트 캠퍼(1651-1716)는 회고록을 남긴 적이있다. 화란인들은 1년에 한번 나카사키에서 에도를 방문해서 쇼군에게 유럽의 국제정세를 보고했다. 여행 기간 동안 경험한 상인들은 이미 보통 사무라이들 보다 부유했다. 그는 5대 쇼군 토쿠가와 츠나요시 (1680-1709)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불교와 유교를 배운 학자 출신이고 어머니는 상인 출신의 딸이었다. 그는 사무라이에게 폭력을 금지하고, 상인 계층에 문화적인 개방을 한 문치의 지도자로 말해진다.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영지에 번교로 불리는 유교 학교를 세워 사무라이의 교육을 관장 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 (1628–1701)는 미토 번의 영주였고, 유교사당을 설립하고 명 시대 말기의 유학자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했다. 1657년 미토학원은 신유교의 도덕을 수용하고 일본 의 역사를 막부가 아니라, 천황지배와 신사의 신들에 대한 존경으로 통치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18세기 말부터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일본은 난학을 통해 서양의 의학과 자연과학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사무라이들은 이러한 역사이해에 의해 영향을 받고 유신지사로서 교육을 받았다.

 

사대부처럼 관료와 행정가로 전환되는 사무리아 계층이 모습이 드러난다. 흥미로운 것은 1811년 퇴계의 “주자서절요” 에서 무라지 교쿠스이가 선집해서 10권으로 엮은 “이퇴계 서초”가 출간된 것이다. 토쿠가와 시대의 신유교는 난학과 더불어 지성의 르네상스에 속한다. 이러한 르네상스가 이후 메이지 유신의 시상적 배경이 된다.

 

1840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하고 굴욕적인 조약은 에도막부에게도 충격이었다. 1853년 미국의 코모도르 페리제독이 에도 (도쿄) 만으로 입항하고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문호개방을 요구했다. 결국 무역을 허용하고 미국에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미일 수호 통상조약 (1858)이 체결되었다. 지방영주들 (다이묘)과 고급무사들 사이에서 왕의 허락없이 개항과 조약을 체결한 막부에 대한 불만이 속출했다. 사쓰마 번에서 영국에 패하고, 조슈 번에서 미국에 패하면서 천황중심의 운동이 일어난다 (존황양이론).

 

1868년 메이지 유신은 왕정 복고정책을 통해 정치 권력을 천황(덴노)으로 돌리면서 에도 시대를 마감했다.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신분상승을 위해 메이지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갱신한다는 유신에서 상인계층이 아니라 사무라이 계층이 산업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이것이 서구의 근대와는 달리 일본 산업화의 특수한 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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