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생태학과 스피노자
심층 생태학은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네스가 1972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심층 생태학은 표층 생태학과 구별되며, 후자는 '개혁적' 생태학으로 불리고 있다. 표층 생태학이 선진국 사람들의 건강과 부유함에 초점을 맞춘다면, 심층 생태학은 인류가 자연과 분리될 수 없으며 탈 인간 중심적 입장을 유지한다. 이것은 생태학적 자아 (ecological self)를 부각시키며, 신과 자연의 동일성을 강화한다.
심층 생태학의 원리와 지침은 다음처럼 요약된다.
1 지구의 생에서 인간과 비인간 생명의 복지와 번영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가치는 비인간의 생의 세계가 인간의 목적에 유용한지 여부와는 무관하다.
2 생명체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이러한 가치의 실현에 기여하며,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
3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필요를 충족이 아니라면, 자연의 생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줄일 권리가 없다.
4 인간의 삶과 문화의 번영은 인구의 상당한 감소와 양립할 수 있다. 비인간적 생명의 번영을 위해서는 그러한 감소가 필요하다.
5 현재 인간의 비인간적 생의 세계에 대한 간섭은 과도하며,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정책을 변경해야 한다. 이 정책들은 기본적인 경제, 기술, 이념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상황은 현재와 크게 다를 것이다.
7 이념적 변화는 주로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추구하기보다는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재적 가치가 있는 상황에 머무는 것이다.
8 앞서 언급한 사항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변화를 위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시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후기 자본주의 문명의 인류세에서 나타나는 기후변화와 생태학적 파괴들에 대해 심층 생태학의 지침은 하나의 상식에 속할 수 있다. 특히 스피노자의 철학은 심층 생태주의에서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생명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유기체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각 존재는 자기 실현을 추구한다. 이러한 자기실현은 '에코소피'의 한 형태를 고려한다. 에코소피는 모든 생명체,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생명체가 동일한 위대한 자아 즉 아트만의 표현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자기 실현의 동일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심층 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위대힌 아트만과 같은 생태학적 자아를 영원성의 괸점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무우주적 사랑과 어떻게 다른 지를 스피노자의 유기체적 사고와 신중심적 철학에 기초해 해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성서해석 방법을 통해 유대-기독교적 전통에서 그가 기여한 창조와 자연의 의미를 재구성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심층 생태주의 원리는 정치 경제학과 기술 지배방식을 사회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다른 차원에서 발전시킬 수 있다.
스피노자와 한스 요나스
한스 요나스는 1965년 발표한 논문 <스피노자와 유기체 이론>에서 스피노자를 유기체의 철학자로 부각시켰다. 요나스애 의하면, 개별화 원리 (principium individuationis)는 모든 존재에 적용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개체성 이론에서 정체성은 전체의 정체성으로 출현한다. 이것은 부분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오히려 부분이 계속 변화해도 정체성은 동일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개인은 결합의 형태이기 때문에, 차별화된 질서의 정도에 따라 질적 개인성의 단계가 있다. 전체는 점점 더 포괄적인 개인성 또는 전체의 위계 구조를 형성하며, 가장 포괄적인 것인 자연의 총체로 절정에 이른다 (Hans Jonas, "Spinoza and the Theory of Organism, in Philosophical Essays, 215).
요나스의 해석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가장 유명한 명제 중 하나와 관련된다: “개체를 여러가지 다양한 본성을 가진 개체들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본성을 잃지 않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의 수가 크게 증가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는 쉽게 이렇게 무한대로 나아갈 수 있으며, 전체 자연을 하나의 개체로 구상할 수 있다. 그 개체의 부분들, 즉 모든 유기체들은 개인 전체의 변화 없이도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 (Spinoza, Ethics, part II, lemma 7, scholium).
이 <윤리학>의 구절에서 모든 자연 속의 개체들은 복합 개체의 일부이며, 그 부분들이 다시 여러 부분을 가진 개체들로 구성된다는 유기체적 사고의 뿌리를 추적할 수 있다. 이것은 전체로서의 개체, 또는 전체로서의 유기체, 또는 전체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여러 부분으로 형성된 존재들의 개체화 과정을 전체 자연과 여러 개별 유기체에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요나스에 의하면, 스피노자의 유기체의 개념은 개별 존재의 일반 존재론과 단절 없이 유기적으로 발전한다. 모든 이러한 존재는 무한한 실체의 영원한 전개에서 하나의 단계를 대변하며, 창조적 활동성은 중지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유기체 이론은 코나투스를 통한 몸의 지향성에 기초한다.
스피노자: 몸의 지향성
스피노자에게서 몸은 지향성을 가지며, 코나투스는 존재의 보존을 열망하는 개별자들에게 내재해있는 힘이다 (Ethics, II p6). 이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삶에의 힘이며, 개체의 본질을 의미한다. 이러한 힘의 증강은 감수성과는 다르며, 삶을 향한 몸의 충동과 자극은 스스로 움직이며 결정한다. 개인의 열망하는 코나투스는 자신의 삶을 보존하길 열망한다 (Ethics, III p6).
개인의 몸은 다른 몸들과의 관계 안에 존재한다. 개인의 본질은 개인에게 특별하다.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는 보다 적은 완성이 보다 큰 완성으로 이행한다고 해도 본질의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활동하는 힘이 자연에서 증대하거나 하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Ethics, pt. IV, 서문).
몸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생을 보존하고 활동을 통해 확장한다. 사물의 파괴는 외적인 원인에 의해서 온다. 코나투스 원리에서 본질과 자연은 동의어로 사용되며, 사물들은 속성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Ethics, III p6).
스피노자에 의하면 "개별적인 것은 자신의 힘에 의해 할 수 있는 한, 자기존재 안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기를 열먕한다" (Ethics, III p6). 개별적인 존재자들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힘이 어떤 점에서 결정론적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이 활동하고 존재한다. 개별자들은 힘을 표현한다. 이러한 활동적인 힘의 표현에서 개별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힘은 자신을 파괴하고 변화시키는 힘에 저항한다. 하나님의 힘이 개별자의 본질을 규정한다. 이러한 코나투스가 사물의 실제적인 본질이다(Ethics, IIIp7).
하나님의 힘은 스피노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과 호흡 또는 마음과 지혜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힘이 개별자의 힘을 하락시키거나 파괴하려는 외부의 결정요인들에 저항한다. 이러한 반작용은 단지 삶을 수동적으로 보존하거나 정지 (inertia)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며 활동적인 삶을 생산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능산적 자연이며, 무한한 속성들을 가지며, 존재하는 것들은 삶의 의지처럼 자신을 확장해나가는 경향을 갖는다. 감정이 삶의 확장의 의식의 원인이 된다. 여기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에게서 무신론과 범신론의 결합을 거절하고, 의식에 저항하는 감정과 몸의 철학을 부각시킨다. 스피노자와 니체의 접합이 시도된다 (Deleuze, Spinoza, 17, 21, 129).
여러 개별 존재들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발전에 관여하며, 이는 우리 몸의 일부가 우리의 삶에 관여하는 것과 같다. 유기체는 "독립적"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의 일부로서 진정한 상호 연관성의 의미에서 의존적이다. 유기체의 활동은 전체로서의 실체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 보편적인 움직임 속에서 어떤 개별적인 코나투스는 지배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신적 섭리에 관한 전통과 완전히 단절된다. 우주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구축되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인간은 선택의 여지 없이 우주의 존재에 관여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개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은 역설적으로 특히 개인의 자유 개념과 관련될 때 나타난다. 부분들의 자율성은, 특히 인간의 경우, 전체의 이익과 주장에 통합되어, 전체가 자신의 자기 보존을 추구하게 된다는 사실에 달려 있게 된다. 개인성은 트랜스 개인성으로 나가게되며 총체성의 코나투스는 개인의 코나투스를 실현할 수 있다. 모든 유기체와 개별 존재들이 독특한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되거나 결합하는 것은 미래나 내세에서만 상상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기와 지금 (hic et nunc)에서 사회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확정할 수가 있다.
스피노자의 유기체 이론은 시스템적 사고를 보여주며 개별성들의 존중과 인식의 다원성을 인정한다. 자기 보존과 자기 증가는 스피노자의 두 가지 목표이며, 이것은 공동체 내에서 추구될 때 더 쉽게 달성된다. 이것은 인류와 모든 유기체에 해당된다. 이것은 코나투스에 기초한 스피노자의 해석이며, 성서의 창조의 기사에 공명할 수 있다.
창조와 에코 휴머니즘
스피노자의 인식론--신은 신으로부터 이해된다--은 데카르트의 인식론 "신은 생각하는 나로부터 이해된다"는 인간 중심론과는 정반대에 서 있다. 하나님은 사고와 물체의 연장을 통해 자신의 속성을 자연의 세계에 임재한다. 성서는 이성과 합리적인 이해에 따라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와 진리를 드러낸다.
성서는 성서의 세계로부터 이해된다. 인간의 추악한 물질적인 이해관계나 정치권력 또는 종교 미신적인 생각들을 외삽법적으로 갖다 붙여서는 안된다. 성서는 신의 영원한 진리를 통해 내재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연해석을 통해 성서와 계시의 언어를 파악하려고 한다. 신의 실체가 자연에 코나투스를 통해 내재하지만 다양한 양태들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성서학자로서 히브리어 문법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를 통해 유클리드처럼 명료하게 성서를 이해하려고 했다. 성경에서 구원과 지복은 마음의 진정한 평화에 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성서의 주제로 설정하고 초첨을 맞춘다. 사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의 관계를 해명하면서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바울 (행 17:16-34)의 입장에 동감했다. 만물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자연의 권능은 하나님의 권능 자체이지만, 여전히 자연에는 부패한 것들이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의 동일성은 자신에 대한 완전한 오해로 말했다 (“Theological- Political Treatise,” A Spinoza Reader, 16) n. 9).
더우기 스피노자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입었으며,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로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의 빛 즉 이성을 통해 인간과 소통을 하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들어졌으며, 자연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스피노자의 성서해석에서 문자적 의미가 자연의 빛과 대립이 된다고 해도, 그것이 성서의 역사로부터 오는 원리와 기초에 반대되지 않으면 여전히 유지된다. 그러나 문자적 의미가 성서에서 돌출되는 원리와 대립하지만 이성에 적합하다면,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즉 메타포리칼하개 해석될 수 있다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 A Spinoxa Reader, 15, 43).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를 심층 생태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의 여지가 있다. 심층 생태주의에 의하면, 영원성의 관점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적 사랑은 생태학적인 홀리즘을 말한다. 이것은 자연과의 하나임을 인정하며, 존재자들의 총체성과 하나님/자연과의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상호 연관성은 내적인 관계로 이동하며, 이것은 생태학적인 존재론의 토대가 되며, 자연의 전체는 살아있는 개별성이 된다. 이것은 스피노자를 범신론적 무신론으로 해석한다.
생태주의자들이 유대-기독교의 창조론을 인간 중심주의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유대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은 첫 날의 빛을 통해 시간이 창조되고 생명망이 펼쳐진다. 토후 와 보후 (Tohu wa-bohu,창 1:2, 예례 4:23) 즉 형체가 없고 공허한 상태의 어두움에서 창조는 바벨론의 신화적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빛의 창조를 통해 어두움이 나누어졌다. 낮과 밤을 통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망(web)이 쳐진다. 생명망에서 심비오시스는 네트워크와 복잡성을 통해 촉매과정과 오토포이에시스(유기체의 자기 생산성)에서 지속적 창조로 전개된다. 이것은 양자 물리학에서 빅뱅이후 양자동요 (Quantum fluctuation)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피조된 인간 (창 1:26)은 물의 생물과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과 가축 이후에 온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시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다 (1: 22).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삶에서 코나투스를 복으로 주셨다. 생물 다양성 (biodiversity)과 풍성함이 언급된다. 각기 종류대로 채소와 나무를, 또한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는 히브리어의 min 즉 식물과 동물의 디양한 종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생물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것은 토라에서 금지된다 (레 19:19).
땅의 정복과 피조물들에 대한 다스림과 더불어 하나님은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게도 먹을 거리를 주신다 (1: 30). 인간의 정복과 다스림은 하나님의 생태학적 복을 손상시킬 수 없다. 욥기에서 창조는 욥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욥이 지배할 수도 없다 (욥 39).
창조의 선함에서 나는 한스 요나스의 생태 책임성을 수용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죽음을 피하고 생을 향한 열망과 가치로 드러난다. 선함과 삶을 향한 열망과 가치는 오토포이에시스의 자기 생산성에서 촉매와 공생그리고 새로운 생의 출현이라는 심비오시스의 가치로 나타난다. 인간은 에코 인간성 즉 청지기의 삶으로 불림을 받는다. 성서는 생태학적 인간성과 자연의 삶에 대한 돌봄과 온전성을 보존하는 윤리적 책임성을 부각시킨다. 이것은 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베단타 철학에서 말하는 브라만/아트만의 신비적 합일로 보기 어렵다.
스피노자는 하나님을 자연과 동일시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자연은 생의 권리를 갖는다. 스피노자적인 사유는 노아의 계약에서 (창 9:9-10)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후손들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포함한 계약을 맺었다. 모든 피조물들은 존엄성과 생명의 권리를 갖는다. 노아계약은 기본적인 인권과 미래의 세대들의 인권 더 나아가 자연의 생명권리를 말한다. 에코 인간성은 자연의 생명권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생태학적인 계약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모든 유기체적 생명의 권리를 의미하며, 살아있는 유기체는 자신의 구성요소들과 끊임없는 교환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교환의 과정과 지속성에서 유기체들은 영구성과 정체성을 갖는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로 불렀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자체상 자신의 존재들 안에서 생을 보존하고 지속하는 열망과 힘을 갖는다. 유기체의 본질은 닫힌 시스템으로서 기계의 작동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합된 다수의 지속적인 상태의 연속성에 나타나며, 그 연합의 형태만이 지속되고 부분들은 오고 간다 (Jonas, "Spinoza and the Theory of Organism," 215).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애 기초한 신과 자연의 생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접근은 유대적 유일신론에 근거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성의 관점에 기초한 신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적 사랑은 짐승이나 식물이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스피노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격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그는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으며, 영혼 불멸성을 거절하지 않았다 (A Spinoza Reader, xxviii). 신에 대한 그의 직관적 사랑과 영원성의 관점은 코나투스 (성령의 활동)에 기초하며 여전히 생태적 인간성의 자리를 확보한다.
창조와 최종의 안식
성서의 창조기사는 해방적이며 지속적이며 종말론적인 차원에서도 생태학적 온전함을 특징으로 갖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생의 세계 안에서 안식을 하고, 이들에게 자율성과 창조성을 주신다. 생태학적인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오류와 실패와 종의 멸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안식의 은혜로 임재한다. 독수리는 시체가 있는 곳에 있으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빤다 (욥 39: 30). 자연의 생에서 약육강식의 현실이 있지만, 이것은 생태학의 먹이사슬을 의미하지 일방적인 자연선택과 약육강식 또는 적자생존을 옹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폭력에 의해 생의 닫혀져버린 존재들에게 빛을 비추며 동행한다. 새하늘과 새땅은 창조나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새로움이 선포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종말의 완성과 최종의 안식으로 드러난다. 최종의 안식 (메누하)에서 모든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와 해방이 나타난다.
한스 요나스와 스피노자는 에코 인간성과 책임윤리 또는 무우주적 심정윤리를 창조의 세계에 부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안식과 종말론적인 회복에 주목하지 못했다. 이들은 창조를 하나님믜 해방의 역사로 파악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피조물의 생에 자유와 창조성을 부여하면서 동행하는 차원을 유기체의 활동과 코나투스에서 개념화하지 못했다. 물론 스피노자는 하나님의 영이 예언자들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셨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A Spinoza Reader, 15).
코나투스는 하나님의 영의 활동의 부분으로 파악될 수 있지만, 스피노자는 하나님의 영의 관점에서 코나투스를 충분히 개념화하지 못했다. 더우기 하나님의 영이 예례미야의 새 언약에서 죄의 용서로 나타나는 인격적인 차원과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보편적인 지평이 간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성서해석의 원리 즉성서의 지식은 오직 성서로부터 오며, 문자적 의미와 메타포리컬 의미의 접합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의 성서적 접근은 생태학을 위한 성서해석을 열어준다.
공공 신학은 창조를 해방의 사건으로 파악하며, 생명망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안식과 동행 그리고 지속적 창조를 성서적 생태학으로 부각시킨다. 이것은 인간을 청지기적 책임과 더불어, 걸어다니는 생태 시스템 즉 심비오시스적 존재로 파악한다. 자연의 생의 가치는 창조의 선함에 기초하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성령을 통한 선한 삶을 향한 열망 (코나투스)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피조된 인간의 에코 책임성으로 연결된다. 스피노자에게서 코나투스는 자기보전의 열망과 힘으로 나타나며, 자연지배가 아니라 자기조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선함과 기쁨을 향한 행동의 힘을 증대하는 열망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에게 예언자 호세아 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을 까? --나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도다 (호 4:6).
창세기의 땅의 지배에 과몰입할 경우 그것은 생태학의 파괴로 이어지는 담론을 생산해 낼 것이며 권력관계에 장착된다. 그러나 창세기를 하나님의 안식과 심비오시스의 관점에서 독해한다면, 공공신학은 생태정의를 사회 자연성과 에코 인간성의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할 것이다. 텍스트를 둘러싼 해석의 문제틀과 갈등이 나타나난다. 이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이중 언어적인 소통능력과 더불어 사회 구성적 성격을 갖는다. 공공신학의 해석학은 텍스트에서 말해지지 않는 것(unsaid)을 담론구성과 권력의 계보학에서 재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