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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혁명과 계보학

by 파레시아 2025. 4. 23.

역사의 부메랑은 부담으로 남는다

 

나폴레옹 3세의 실책과 프러시아와의 전쟁의 실패로인해 1871년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독일은 비스마르크 주도아래 통일 국가를 선포했다. 그러나 통일국가는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 융커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에 의한 것이었지, 3월 혁명처럼 이념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의 결합을 통해 공화제 민주정부의 설립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통일 독일제국은 유럽열강들의 경쟁과 동맹에서 결국 1세계대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다른 한편 1871년 3월 파리에서 사회 공화주의들이 봉기가 일어나고 파리꼬뮌의 자치정부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무참히 진압이되고 프랑스는 제 3공화국을 시작했다. 비록 역사가 승자의 것으로 끝난다고 해도 여전히 순전한 희생자로 인한 역사적 부담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희생자들에 대한 정직한 태도는 파리꼬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상품화나 가치폄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조건 지워지고 넘겨받은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간다.” 1851년 12월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 루이 보나빠르트의 쿠데타를 보면서, 마르크스가 삼촌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과 비교하면서 쓴 문장에서 나온다.

 

역사가 되풀이 될 때, 첫 번째 (나폴레옹 황제)는 비극으로 두번째 (루이 보나빠르트)는 소극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이것은 거의 블랙 코미디 수준이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블랙 코미디처럼 반복되는 걸 혐오했지만 계급투쟁으로 세계를 변혁할 수 없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사적 영향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권력의 그믈망을 피해갈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없다.

 

1848년 2월 혁명이후 제 2공화국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보나빠르뜨가 황제가 되기위해 12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곳이 로드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 여기에 장미 꽃이있다. 여기서 춤을 추어라!” 어이없는 12월 쿠데다가 로드스 섬이고 장미 꽃이다. 다른 곳을 볼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의 혁명의 계보학은 삼촌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쿠데타로 시작한다.

 

1789년 프랑스 1차 혁명은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로베스피에르는 기요틴에서 처형 당하고 결국 1799년 11월 나폴레옹의 의회 쿠데타로 황제시대 (1799-1815)가 막을 연다. 그러나 이후 부르봉 왕정시대로 복귀했다 (1815-1830).

 

1830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이 왕으로 추대되지만 금융귀족들이 지배했다 (1830-1848). 그러나 1848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민족국가에대한 열망은 유럽혁명의 열기로 가득찼다. 프랑스는 2월 혁명을 통해 제 2 공화국 (1848-1851)을 설립하고 루이 블랑의 사회경제개혁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루이 보나빠르뜨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만, 결국 쿠데타를 통해 황제로 등극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마르크스는 주어진 자료와 사건들 앞에서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으면서 역사를 분석하고, 대화를 한다. 계급으로 사회를 본다는 것은 정치적 담론, 역사적 영향과 사회구성을 통해 개인과 혁명의 성격을 파악한다. 여기서 혁명은 진보와 자유 또는 해방이 아니라, 반동, 후퇴, 단절, 파열로 드러난다. 혁명은 계급지배와 반동의 시기로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광범위한 계층들의 연대가 존재하며, 노동자 계급으론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다. 1851년 루이 보나빠르트의 위로부터의 혁명의 모델은 비스마르크의 전제통치에서도 드러나지만 그가 도입한 보통선거(1866)는 해방의 도구로 나타나며 합법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정당성이 전면에 부각된다.

 

계급접근과 계보학

 

사회를 계급으로 본다는 것은 역사의 계보학을 통해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가 어떤 계급과 신분에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지를 분석한다. 혁명의 이념은 물질적 이해와 경제적인 영향 그리고 권력관계에서 드러나는 다수의 지배에 따라 민주주의적인 방식에 따라 선택적인 친화력을 갖기도 하지만, 또한 반동과 잔인한 진압으로 역진하기도 한다. 권력집중은 민중들의 억압을 낳지만 이들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제지배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이상주의화하는 것은 마르크스에게 순진한 것으로 드러난다. 혁명의 역사에서 민중은 새롭게 구성되는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영역에서 계층화가 되며 투쟁과 반동 그리고 역사의 장애로 나타난다.

 

이러한 민중과 사회구성에 대한 계보학은 나폴레옹 3세나 또는 비스마르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늘날 중국과 같은 공산당 지배에서도 볼 수 있다. 민족주의와 경제분배가 시민사회의 자율성 보다는 강력한 군주지배가 지지층에 매력이 된다. 그러나 역사에서 권력은 마약과 같이 작용하며, 위기는 관료행정과 구성원들의 집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경제 성장이 멈추는 곳에서 출현한다.

 

혁명의 역사에서 자유의 진보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나 인권이나 또는 민중 집단주의와 독재와는 관련이 없다. 어떤 정치지배와 사회그룹이 열린 존재로 사회적 환경과 효율적인 매개를 통해 공공선에 기초한 거버넌스를 설정하는 가에 달려있다.

 

중산층/계급구성은 다양한 계층안에서 빚어지는 정치 투쟁에서 자리를 갖는다. 인간의 삶을 투쟁과 혁명의 사건으로 내모는 사회구조가 있다. 구조와 사건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시도에서 우리는 여전히 역사 사회학자로서 마르크스의 유연한 사고의 면모를 본다. 그러나 그가 이념형으로 설정한 대부르주아지와 무산자 산업 프로텔라티아의 계급모델은 후기 자본주의에선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중심부에 의해 침투와 착취를 당하는 주변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가 있다. 이제 중산층이 시민사회와 교육 그리고 전문화를 통해 정치권력과 관료행정을 차지한다. 이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성격을 지적하며 중산층이 대다수의 지배로 드러나지만, 여전히 하위계급이 존재하며 해방적 의식의 시민은 이들과 연대한다.

 

오히려 1798년부터 1871년에 이르는 크고 작은 프랑스 혁명의 장구한 세월과 역사의 전개에서 시민사회와 연대운동이 내재적 비판의 원류로 흐른다. 국가의 역할은 마르크스 시대를 지배했던 산업 자본주의와 자유방임 그리고 원자화된 개인주의의 문제를 통제하고 복지와 분배 정책으로 나타난다.

 

혁명의 세계사적 침잠

 

1848년 혁명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유럽에서 러시아까지 반향을 갖는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혁명을 통해 민족들간의 차이와 적대 감정이 점점 사라지고 프로렐타리아트의 출현과 역할에 기대를 걸었다. 민족이 아니라 계급의 연대가 인터내셔널 차원에서 중요해진다.

 

레닌은 1914년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의 단결에 희망을 걸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했다. 설령 1915년 낙후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2월 혁명) 혁명정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하는 과제를 갖는다. 이것은 민주주의 평화를 내걸고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한 식민지 백성의 혁명을 지지한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 레닌의 예견은 빗나갔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독일에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이것은 히틀러 의 파시즘을 향한 길이었다.

 

혁명 후 소비에트는 내전을 통해 오히려 중앙 집권적 관료주의가 지배했고 전시 공산주의 국유화 정책로 인해 국내의 농민 봉기들과 도시 노동자들의 저항은 백군파들의 위협보다 더 큰 것이었다. 결국 레닌의 혁명은 신경제정책으로 국가 자본주의의 길을 열어놓았다. 레닌 사후 스탈린의 등장은 신경제정책의 기득권자들을 처단하고 1차 5개년 경제발전(1928-1932)을 통해 산업화와 집단화 그리고 테러정치로 히틀러와 맞물리게 된다. 이것은 서구 근대성 1이 일으킨 비극이며 여전히 리버럴 세계질서와 세계시장안에서 이어진다.

 

혁명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성공한 혁명인가 아니면 실패한 혁명인가를 판단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 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혁명의 과정과 역사에서 본래적 이념이 어떤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고 누구 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이념이 물질적 이해와 권력관계의 그물망에서 어떤 지배의 정당성이 출현했는지 검토하는데 있다. 혁명은 반복과 차이 그리고 다른 패턴을 통해 오늘의 역사안에 침잠한다.

 

산업혁명의 문제를 48년 유럽혁명과 더불어 읽는 것은 현재사를 쓰기위해 중요하다. 그것은 비판적 민주주의와 시민 민족주의의 접합을 알린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근대적 가치를 교육하고 사회화하는 공유된 마음의 습관이며, 사회 구성원들의 도덕적 연대감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영혼’을 통해 근대성 2를 구성하며, 문화적 유대와 자발적인 시민 결사체를 이루어간다. 이것은 시민사회와 다양한 공론장의 소통문화를 위계질서와 특권층과 관료지배로부터 방어한다.

 

이제 후기 자본주의는 탈식민지 이후 공론장을 이민자의 물결, 다양한 종교들의 공존, 인종문제와 문화적 정의 (섹슈알리티, 젠더)로 특징된다. 사회계층 안에는 이민으로인한 인종 분화와 다문화 가정이 등장한다. 카스트 제도가 서서히 자리 잡는다. 민주주의 ‘영혼’은 새로운 사회장벽을 뚫고 지나가야하는 과제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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