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산업화의 어두운 역사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의회 민주주의, 높은 교육수준, 산업과 기술분야의 발전, 강력한 해군과 군사력을 갖춘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의 일본정치 전문가 앤드류 고돈 교수는 산업화 과정에서 일어 난 노동운동과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어두운 역사에 주목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나타나듯이, 하층계급의 삶은 비참한 것이었다. 특히 실크와 면공장에서 여성들은 저임금으로 착취당했다. 도쿄의 홍등가에서 일을 했던 창녀들은 우리 안에 갇혀 생활을 했다. 천황은 땅을 소유한 농민들에게 조세를 거두워들이고 기술개발과 산업을 부흥시키는 수입원으로 활용했다. 정부는 기간 산업을 민간 자본가들에게 매각하고, 자이바쓰와 같은 금융자본가와 산업 부르즈와지들은 재벌로 부상했다. 이들의 가족들은 메이지 정부의 관료나 지방정부의 지사나 관리로 활동했다.
그러나 1870년대 산업화의 역군들은 정부에 의해 시골과 농촌지역에서 부터 모집된 여성들이었고 광산과 면공장에서 혹독한 노동을 했다. 지방의 하급관리들 조차 딸들을 먼 곳에 떨어진 도시의 면공장으로 보내기도 했다. 1913년 80만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시골로 부터 모집 되었는데,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공장주와 기부장적 메니저들에게 쉽게 길들어지고 임금착취는 심했다. 위생과 영양상태와 주거시설은 열악했고 결핵이 창궐하면서 사망자들이 속출했다. 산업화 시대의 희생자들은 농부와 공장 노동자, 홍등가의 여성들, 광산에서 위험한 일을 하면서 정상적인 임금을 받지못한 노동자들이었다. 세금징수를 위해 메이지 정부가 신분제 (무사, 농민, 장인, 상인)를 철폐했지만, 부라쿠민 (천민)은 여전히 사회의 카스트에서 비참했다.
미국의 나쁜 역할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에 대한 남하정책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조선을 두고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경쟁은, 러시아가 중국에서 일어난 검투사의 반란 (1900)의 진압을 돕기위해 만주에 함대를 급파하면서 경색되었다. 러시아는 진압 후에도 영구히 머물려고 했는데, 일본과 영국에 위협이 되었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동맹관계를 체결하고, 일본은 영국의 중국지배와 영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상호인정했다. 제 3국과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영국과 일본은 동맹국으로 참전한다.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기초로 러시아가 만주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1903년 압록강 하구와 용암포를 점령했다. 1904년 일본은 부동항 여순 항(Port Arthur))에 정박한 러시아 극동 함대와 제물포항의 전함 두척을 공격하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한성부를 점령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대한제국의 외교와 재정에서 일본인과 미국인이 추천되고, 더램 스티븐슨( Durham W. Stevens)이 외교 조언자로 임명되었다 (스티븐슨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조명운에 의해 암살당했다.)
러시아와 전쟁에서 일본이 처음부터 승기를 잡으면서 러시아가 평화협상을 요구하자 미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조약을 중재하고, 이로 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러시아는 1905년에 체결된 평화 조약에 따라 일본의 한국에서 우월한 권리를 인정했다.
루즈벨트와 일본 측 간에 교환된 외교 문서(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조선의 지배권을 교환하는 거래를 했다.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알렌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했다)은 루즈벨트에게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대통령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1905년 이후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승리와 영국과 미국의 지원 덕분에 한국에서 자유로운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이나 다른 많은 영국 식민지에서 멀어져 한국과 만주를 향하는 한, 런던과 워싱턴은 흡족해 했다. 미 국무장관 헌팅턴 윌슨은 일본의 대한제국의 병합을 인정했다. 일본이 자유로운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을 때, 거의 모든 서양인들은 냉담한 외교관계에서 일본의 한국에서의 "근대화 역할"을 지지했다. 그러나 리차드 룻은 "몇몇 선교사들만이 합병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고 썼다 (Cum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149).
지도자들의 암살 행렬
2022년 7월 8일 아베 신조 전 수상이 참의원 선거 유세 연설 중 피살 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외무대신 출신이고,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괴뢰정부의 막후총리였고 A급 전범으로 투옥된 후 다시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다. 19 61년 쿠데타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기시 노부스케를 도쿄에서 만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청년지사들을 모범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토착왜구 또는 사무라이가 여기서 시작된다. 1972년 그의 ‘10월 유신’은 조국의 근대화란 옷을 걸치고 나타난 일제 파시즘 흉내내기였다. 그는 부하에게 피살 당했다.
아베는 사무라이 요시다 쇼인 (1830-1859)을 이데올로기 호출로 소환하는 걸 좋아했다. 쇼인이 주장한 해외팽창론과 체제혁신과 부국 강병론은 젊은 사무라이들에게 조선을 지배하고 공물을 받치게 하는 정한론으로도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 사무라이>에서 나오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최후의 사무라이자 일본의 로망이다. 서양과 일본의 전통을 껴앉고 죽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비록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 거병을 했지만 메이지 정부에서 반란의 수괴로 보지 않는다. 나라의 생존을 위해 서구화의 중요성을 알지만, 일본의 정체성을 지키기위해 순교한 자로 파악된다. 그 역시 정한론을 대변하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오랜 친구 오쿠보 도시미치는 1837년 유럽과 미국 순방에서 돌아온 후 사이고의 정한론에 대립했다.
오쿠보에게 일본의 내정개혁을 통한 선진화가 선결과제였다. 이토 히로부미도 오쿠보를 지지했다. 천황은 오쿠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사무라이들에게 아베의 정신세계가 서 있다. 메이지 150 주년 기념식에서 아베는 유신의 영광과 빛을 찬미하는 전사였지, 메이지 유신이 가져온 어둠의 역사에 관심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마지막 비극으로 알려진 파리꼬뮌 150주년을 맞이하면서 프랑스 시민들이 국가권력의 희생자들의 삶을 복권하는 태도와는 너무도 다르다. 프랑스 대혁명을 세계사적 시민운동으로 이어간 사회 공화주의로 꼬뮌을 보는 이들의 성숙한 태도는 메이지 찬양자인 아베와는 비교할 수 없다.
역사에는 사건의 침천에 깔려있는 문화구조가 있다. 아베는 파시즘 근대성을 정당화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했다. 잘못된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기 보다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채색하고 동아시아에서 다시 부상하길 원했다. 그러나 아베의 정신적 멘토인 메이지 유신의 요시다 쇼인은 29살의 나이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샤카모토 료마도 살해당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도 1878년 사무라이들에게 살해당했다. 메이지 시대의 초대총리 사무라이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젊은 선비이자 정치사상가 안중군에게 심판당했다. 아베는 통일교와의 연루로 인해 67살 피살당했다.
일본과 대한민국: 서로 다른 근대성
일본의 근대성은 난학과 사무라이와 신유교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사도는 여전히 천황제와 국가주의에 사로잡혀있어, 진정한 근대적 가치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에 다 다르지 못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조국의 근대화는 씁쓸한 흉내내기로 남아있고 여전히 토착 사무라이들은 기승을 불인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포스트콜로이얼 근대성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비판적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로 진일보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산의 주권재민과과 경제 정의, 동학사상과 농민혁명, 갑오개혁과 독립협의 그리고 삼일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민주적 공화제로 이어진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대안 근대성을 우리의 현재사에 다시 쓰는 작업을 의미한다.